‘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뭔가를 잘 줍는 사람이 있어요. 남들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을 눈이 보배인 사람은 남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합니다.
어떤 산삼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등산로 곁에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도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보배인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크게 부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보배로운 눈은... 생명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 영적인 차원...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얼굴 중에서... 눈, 코, 귀, 입, 이마가 있으면 100점 만점 가운데 눈의 점수는 50점이라고 합니다. 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여러 가지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저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인가?” 정죄하는 사람이 있고, 토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이 살던 동네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신 이후에 그를 마을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소경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우리 주님이 그냥 지나치실 리가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나 보상도 없이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면 어떤 문제라도... 문제가 해결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이 눈을 뜨고서 어떻게 그의 신앙이 성장해 갔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예수라 하는 사람’(세상적인 눈)
첫째로, 그는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소경이 눈을 떠서 오니까 사람들이 “저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가?” 하면서... 한쪽에서는 “아니다!” 그러고, 한쪽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맞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들의 관심은 ‘네 눈이 어떻게 뜨여졌느냐?’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때 눈 뜬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9:11절입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네... 이 사람이 에수님을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라 하는 사람이..” 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를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사회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처럼 이 눈 뜬 사람도 똑같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이해해서 그 예수를 붙들어 간청하여 눈을 뜬 것이 아닙니다. 눈이 멀어 예수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 나아가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눈을 떴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눈을 떴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눈을 떴으나... 그의 첫 번째 대답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 ‘선지자’(종교적인 눈)
두 번째로, 그는 종교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7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그를 불러 다시 문책합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그랬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두 번째로 고백한 것은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는 그 당시에 유대사회의 영적인 지도자를 말합니다.
처음에 그는 ‘예수라 하는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했다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라 하는 그 사람이 나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인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한 단계 올라갔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그저 왔다갔다 교회 문턱만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위대한 지도자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불렀습니까?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할 때에... “예수님은 종교적인 지도자요 위대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특별한 사람입니다. 우리와 다른 차원의 사람입니다” 하는 그 관점에서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도자나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모든 사람의 죄 값을 청산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소경이 눈을 뜨고 나서.. 그래도 신앙의 모습이 성장한 것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단계 올라가서 종교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많이 열려지고 있는가 하면 31절에서 바리새인들이 계속 문책하며 그를 몰아세우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내가 안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이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 무리 속으로 자기 자신을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눈뜬 자의 변화되어 가는 믿음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예수를 믿으면 어떻습니까? 교회에 처음 나오게 되면... 설교를 들으면서도 뭐가 뭔지를 잘 모릅니다. 말씀의 내용이나 예배의 본질보다는... “목사님 말 잘하더라, 목소리가 좋더라... 성가대 노래 듣기 좋더라...” 세상적인 눈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바뀌어집니다.
옛날에는 예수쟁이들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그러면서 판단하고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이 교회를 뭐라고 하면... "교회를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 교회 안가보고... 모르고 그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그러면서 서서히 교회를 편들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옹호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이 눈뜬 소경이 그래요. “우리가 아나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무리 속에 자기를 슬쩍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27절을 보세요.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여기서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하는 말은 비웃는 말입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눈을 뜨게 했다고 말했는데 왜 자꾸 묻느냐?”는 것입니다. 이만큼 이 사람은 이제... 예수 쪽에 와서 서 있습니다.
3. ‘주’(신앙적인 눈)
셋째로, 그는 예수님을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38절에 보면 그는 드디어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자, 여기 이 사람의 믿음이 더욱 성숙되어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신앙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사람’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이제는 ‘선지자’에서 ‘주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자는... 당연히, 반드시... 이 사람과 같은 믿음 성장의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성장해야만 믿음입니다. 생명이 있는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듯이... 예수로 말미암아 눈을 뜬 자는 이렇게 믿음이 성장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뜬 이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고백은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쫓겨났느냐 하면 34절에 보니까....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이 사람을 좇아냈습니까? 쫓아내었다는 것은 그 사회로부터 완전히 출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22절을 보세요.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그랬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이 사회로부터 내어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났습니다. 자녀들이 학교를 다닐 수도 없고, 직장에 취직할 수도 없습니다. 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지도 못하고 주민등록증도 발급받지 못합니다. 완전히 사람들이나 사회로부터 왕따가 되어 살 수 없습니다.
출교라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유대사회는 하나의 신앙 공동체입니다. 신앙의 국가인데 그곳에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36절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처음에는 소경이라서 주님을 보지 못했고... 눈을 뜨고 와서 지금 그는 주님을 처음 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에 있는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그분을 믿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그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에 주님께서 37절 말씀에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말씀합니다.
내가 바로 그라고 하실 때... 그는 즉시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36절에서 ‘주’라고 하는 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고, 뒤에서 말한 ‘주’는 ‘주인이시여!’ 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을 보세요... 신앙이 아주 급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눈 뜬 자에게는 당연히 이런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세상의 눈에서 종교적인 눈으로... 종교적인 눈에서 신앙적인 눈으로... 점점점... 신앙이 성장해 나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절하는지라’(경배)
넷째로, 그는 예수님을 경배하는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38절을 보세요.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그랬습니다.
여기서 절한다는 의미는 신적인 경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면서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고 있습니다.
눈뜬 자의 믿음이... 단번에 예수님을 경배하는 단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성숙한 믿음은 반드시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제대로 예배하지 않는 것, 믿음이 좋다고 하면서 경배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것... 이것은 믿음의 참된 성장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산본성광의 모든 믿음의 권속들이.... 예수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그 지식, 그 신앙의 연륜...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논쟁이나 하고 남을 비판하고, 바리새인들처럼 고소하고, 바리새인들처럼 정죄하고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는 것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야만 그것이 바른 믿음의 사람이요 그것이 옳게 가고 있는 신앙의 경로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요 모르는게 없었지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분께 경배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은 있고 아는 것은 많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죽은 믿음이요 죽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목회자 ‘Aw. 토저’라는 사람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경배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알면...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눈 먼 자들에게서 눈 뜬 자들로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의 신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눈을 뜬 자는 세상에서 핍박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 핍박을 피하기 위하여 세상과 함께 휩쓸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눈 뜬 자는 반드시 신앙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사람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을 확실히 알았다면 온전히 주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주의 권속들은... 주님을 진실로 경배하는 자리에까지...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 나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