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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路 斷想
(1)
제주로(濟州路)로 가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십대로(十大路)와
더불어 제주로(濟州路)까지 언급했다(大東地志卷二十七程里考)
대로와 동등하게 취급하면서도 왜 대로라 하지 않았을까?
섬길(島路)이기 때문이었을까?
그 까닭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 나는 해남(海南:三南), 동래(東萊:
嶺南), 봉화(奉化), 평해(平海) 등 대로들에 이어 통영대로(統營)에
들기 전에 제주로를 밟았다.
나의 옛길 단상은 그 순서대로 이어감을 미리 밝힌다.
2009년 1월 제3주말의 한라산 백록담 등반이 있었음에도 3월 6일
새벽같이 제주길에 다시 올랐다.
1주간 제주로를 걸은 후 부산을 경유해 통영으로 가서 통영별로를
걷기 위해서 였다.
대동지지의 '정리고' 가 기본 텍스트(text)이므로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다.
여기에는, 아직은 일기 불순한 뭍(陸地)보다 봄 색이 완연한 남단
섬의 화신(花信)과 함께 북상하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었다.
6327톤, 정원975명, 시속20노트의 완도발 제주행 한일카훼리 1호
제주는 국내항공편으로 최장거리가 1시간남짓 걸리며 카훼리(car
ferry)로는 완도~제주간이 최단 시간으로 3시간쯤 소요된다.
그러나, 당시(李朝)엔 바닷길 뿐이었으며 최단 거리인 해남의 이진
(梨津)또는 관두포(館頭浦)에서 34~45시간이나 걸렸단다.
범선이라 바람과 조류에 따라 시간차가 컸기 때문이다.
지금은 공중과 바다로 거미줄처럼 길이 열려 있으나 그 때는 해남
땅 이진과 관두포가 고작이었다. (강진과 영암에서 출항하는 경우
도 있었다지만)
관두포, 이진이 제주 왕래의 나루였음은 분명하나 선후관계를 알
길이 없다.(당시에 병용했을 리 없건만)
다만, 관두포가 고려때부터 제주~중국간 무역항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선(先)관두포 후(後)이진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렇다해도 관두포에서 이진으로 옮긴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작금에는 두 곳 모두 나루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지만.
삼성혈과 오현단
3월 7일 여명(黎明)에 찜질방(이도1동 황금불가마)을 나섰다.
비록 1월의 한~두밤에 불과해도 수년째 단골인데 2009년에는 두
번째일 뿐 아나라 이번에는 여러날 애용하게 될 찜질방이다.
대동지지는 배가 이진을 떠나"조천관과 화북소 사이의 한 지점"에
닻을 내리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到濟州朝天館禾北所之間)
그러므로, 화북진(禾北鎭) 10리길이 우선이다.
동광로를 따라가 동회선(東回線) 일주도로(1132번)를 타면 된다.
동광로는 제주문예회관 앞에서 얕은 고갯길이다.
고개마루 노변에 '가령(嘉嶺)마을 향약(鄕約)' 표지석이 서있다.
'향약'은 이조시대에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시골 마을의 자치 규약인데, 이 표석은 현대판 향약이다.
가령촌은 이조19대 숙종때부터 형성됐는데 선인들의 애향정신을
받들어 마을 향약을 제정했다고 기록했다.
애초(취락을 이루기 전)에는 제주도 3신중 하나인 양을나(梁乙那)
의 양기(梁琪)와 양유침(梁有琛)이 살았던 곳이란다.
가령마을 향약 표석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는 삼성혈(三姓穴)이다.
탐라국(耽羅國) 시조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梁乙那), 부을나
(夫乙那) 등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났다는 곳이다.
삼성혈, 오현단, 제주성지 등이 있어 제주시의 중추가 된다는 이도
1동은 본래 가령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단다.
한데, 가령은 지명으로 보아 예전에는 꽤 높은 고개였지 않았을까.
사라봉 입구 사거리 소공원의 월남참전기념비와 국립제주박물관,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를 지나고 화북천(別刀橋)을 건너 오현중.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의 사립명문학교로 외우(畏友) 김상욱(金尙昱)의 모교다.
그런 이유 보다 교명 오현(五賢)의 내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도1동의 '오현단'(五賢壇)은 이조시대에 제주지방 발전에 크게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한 곳이라는데 이 학교 역시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교명으로 했단다.
월남참전기념비(1), 국립제주박물관(2), 오현중.고등학교(3)
오현이란 충암 김정(冲庵金淨:중종15년-1520년유배), 동계 정온
(桐溪鄭蘊:광해군6년-1614년유배),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숙종
15년-1689년유배) 등과 중종29년(1534년)에 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圭庵宋麟壽), 선조34년(1601년)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
상헌(淸陰金尙憲) 등을 말한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와 삼성혈신화가 한 나라 안에 공존한다?
제주인의 시조가 삼신인이라면 조선의 시조 단군이 제주에서만은
거부 또는 부정되는 것이라 하겠다.
오현은 삼신인의 후손을 위해 공헌한 단군의 후손이 아닌가.
삼성혈과 오현단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한다?
화북진
일부 구간 외에는 거의가 해안을 끼고 달리는 1132번 일주도로는
1996년에 자전거로 답사했으므로 대부분 구면이다.
제주로는 신설 해안로와 중산간로(?)를 밟아야 하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일주도로와 일치한다.
에전엔' 별도'(別刀)라 했다(오현고교 뒤 해변에 별도봉이 있음)는
화북동에서 일주도로를 벗어나 동사무소를 찾아갔다.
화북~조천간의 옛 포구에 관한 도움을 기대했으나 실망적이었다.
옛 제주의 관문이라고 내세우면서도 역사적 고찰보다는 수입원인
관광객 유치 일변도의 지방 행정을 펴기 때문일까.
그래도, 유배자들이 화북포로 상륙했음은 확인한 셈이다.
왜냐하면, 제주 관아(觀德亭)에서 동쪽 5km인 화북포가 도착하는
유배인들을 관아로 인계하기 지근지지(至近之地)였으니까.
또한, 화북포유지(禾北浦遺址) 표석이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 관문이 되었던 포구,...
부임하는 목민관이나 김정희(金正喜),최익현(崔益鉉)등 유배인들
도 이 포구로 들어오는 사연많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니까, 대동지지의 朝天館禾北所'之間'은 "사이의 어느 지점"
이라기 보다 '양쪽'을 다 아우른 말이라 하겠다.
화북포구(1), 화북포유지(2), 해신사(3), 화북진(4), 비석거리(5)
화북포 해안에는 해신사(海神祠)가 있다.
이조23대 순조20년(1820년)에 제주목사 한상묵(韓象默)이 해상을
왕래하는 이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는 사당이다.
이후, 목사가 직접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기도
했으며 지금도 매년 정월 보름과 출항 전에 해신제를 지낸단다.
또한, 연육교통(連陸)의 요충이었으므로 왕명을 받든 사신을 환송,
접대할 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환풍정(喚風亭)을 건립했다.
화북진은 옛 제주9진(조천, 별방, 수산, 서귀, 모슬, 차귀, 명월, 애
월과 함께)중 하나다.
화북수전소(水戰所)는 10수전소 (조천, 어등, 애월, 명월, 열운, 서
귀, 모슬, 한포, 우포 등과 함께)중 대표적 해군기지였다.
바다를 감시하는 망양정(望洋亭), 공사(公私) 선박의 출입을 검문
하는 영송정(迎送亭)이 당연히 뒤따라 건립되었다.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섬은 편할 날이 없었다.
1555년(이조13대 명종10년)에는 화북수전소가 격파되기도 했다.
그래서 화북진성이 축조되었다.
화북에는 옛 통신수단의 하나인 연대(煙臺)도 있다.
제주의 38개 연대중 하나로 별도연대(別刀 또는 禾北)다.
일명 제주의 만리장성이라는 해안선 300여리(약120km) 환해장성
(環海長城)의 일부도 남아있다.
고려 조정은 삼별초군의 제주 상륙을 막기 위해 해안 따라 석성을
축조하게 했다.
당시,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해 진도까지 남하해 용장성을 쌓고 대
몽항쟁을 펼쳤던 삼별초군이 제주로 몰려갈 것을 두려워했던 것.
고려24대 원종때(재위1259~74)의 일이다.
별도연대(1)와 화북환해장성(2. 3)
삼별초군 때문에 쌓았으나 이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8~19
세기에는 이양선(異樣船)에 대비해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했다.
그러나 현재 양호한 존속지역은 화북을 포함해 10개소뿐이란다.
이같은 역사적 유물들에는 뒤따라 등장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
그것은 비석거리다.
치적, 공적, 선정, 선덕 등 이름도 가지가지다.
이 비석들이 제주지방기념물(제30호)이란다.
문화재 갈증이 여간 아닌가 보다.
화북이 자랑하는 8개의 지방기념물을 대충 살폈는데 삼사석은?
제주의 시조 삼신인(三乙那)이 성산읍 온평리(現) 해안에서 벽랑
국(碧浪國)의 세 공주와 혼례를 치른 후 각기 거처를 정하기 위해
한라산 북쪽 기슭 쌀쏜장오리(矢射岳)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그 화살촉이 꽂혔던 돌멩이가 삼사석(三射石또는 矢射石, 화북동
주민들은 쌀쏜다왓)이란다.
삼사석에 얽힌 전설이다.
환해장성 안쪽 너른 초지의 무료해 보이는 말들처럼 성벽을 따라
한가로이 가려다가 삼사석을 확인하기 위해 일주도로로 나갔다.
삼사석비
해안로를 차단한 화력발전소
삼사석지(址)를 끝으로 화북동에서 삼양동(三陽)으로 진입했다.
BC 1C를 전후한 대단위 복합유적지로 밝혀진 선사유적지와 검은
모래 해수욕장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다.
삼양동 환해장성은 남아있는 10곳중 하나다.
제주의 신화, 민요, 무가(巫歌)를 비롯해 제주도내 무형문화재와
민속물 등을 보존하고 있는 사설 민속박물관도 있다.
시간도 아깝거니와 노령인도 유료라기에 되돌아 나왔다.
70년대에 들른 적이 있지만 많이 변한 듯 해서 살펴볼까 했는데.
민속박물관(1), 선사유적지(2), 불탑사 입구(3),
삼양동, 원당봉과 화력발전소(왼쪽 끝4)
불도(佛徒) 수송용 셔틀버스(?)가 삼양해수욕장 입구 오거리까지
부지런히 내왕중이었다.
봉수대가 있던 원당봉 아래 불탑사(佛塔寺)에 특별한 행사가?
나도 덩달아 달리는 버스길(원당로) 따라 불탑사 입구까지 갔다.
불탑사는 고려때에 창건되었으나 이조중기에 폐지됐다는 원당사
(元堂寺) 터에 새로 들어선 사찰이다.
원당봉과 원당사의 이름관계에는 설이 분분하다.
원나라의 당집이 있었다 해서 원당봉이 되었다느니, 원당사 절이
자리한 봉이라는 이유로 원당봉이라 했다느니...
상당기간 원나라에 지배되었기 때문에 앞의 설에 무게를 느낀다.
아무튼, 불탑사가 보물제1187호인 5층석탑 덕에 일천한 역사에도
명찰이 되었나 보다.
하긴, 제주 전도에 국보는 한 점도 없고 6점에 불과한 보물중 하나
라면 그럴만도 하겠다.
맨날 위태위태했던 섬에 국보가 있을 리 있는가.
해안을 따라 조천진까지 가려 했으나 화력발전소가 가로막았다.
제주의 현안중 하나가 전력(電力)이라는데 해안로가 대수겠는가.
해저케이블을 통해서 육지로부터 공급받는 것이 경제성은 높으나
낮은 안정성이 문제란다.
그래서 케이블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생산을 시도하는 듯.
안정적이고 경제적인 공급을 위해서는 풍력, 화력, 태양광열 지열
등 망라해서 강구중이라니까.
공사중인 비포장도로와 농장들을 지그재그하여 신촌으로 갔다.
전국을 망라해서 가장 흔한 마을 이름이 신촌(新村), 새말이다.
특별한 의미가 담기지 않고 글자 뜻대로 새로 생긴 마을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 신촌리 마을의 공무를 처리했다는'신촌향사'(新村鄕
舍) 복원기에 의하면 광해군 원년(1608년)에 건립되었단다.
그렇다면 신촌리의 역사는 최소한 400여년(이조14대선조때)이다.
설촌 당시에도 신촌이었을까?
신촌향사가 제주지방 유형문화재(제8호)라는데 비중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신촌향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