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여름휴가
92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근무하던 회사의 기숙사 동료 두 명과
여름휴가를 맞이하여 지리산행을 계획하였다.
3일간의 짧은 휴가일정인데다가 차량편도 마땅치 않아 우리는 종주대신 칠선계곡을 타고
바로 천왕봉에 오른 후 중산리쪽 하산길에 있는 로터리산장에서 1박후 귀가하기로 했다.
칠선계곡, 짜릿한 계획
칠선계곡은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의 턱밑까지 올라가는 계곡으로서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한국의 3대 계곡의 하나로 꼽힌다.
산행기점인 추성리부터 따져도 천왕봉까지는 무려 14km 정도로서
단일계곡으로는 남한에서 가장 긴 계곡이지 않을까 싶다.
천불동 계곡이 7~8km로 추정되니 칠선계곡의 깊이에 대해서 짐작할만하다.
산장에서 머물기로 했으므로 우리 일행의 배낭은 비교적 가벼웠다.
전날 밤차로 내려와 추성리로 들어온 후 아침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장마가 지나간 칠선계곡은 온통 계곡 물소리로 가득찼다.
출발은 아주 산뜻했다. 날씨도 청명하며, 배낭도 가벼웠으니
달콤한 휴가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는 중산리쪽으로 내려가 나의 고향, 경호강 부근에서
얼큰한 쏘가리 매운탕을 먹을 생각으로 조금은 들떠있기까지 했다.
길을 잃다.
그렇게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정도 지났을까?
등산화끈이 풀어진 나는 끈을 묶고 이참에 담배도 한대 피고 가겠다며
일행을 먼저 올려 보냈다. 그렇게 불과 5분 정도를 쉬고 나는 부지런히 일행을 따라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의 성급한 마음이었다.
별 생각없이 부지런히 길을 걷는데 Y자형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 방향으로
페인팅된 화살표가 보였다.
나는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볼 생각도 않고 당연히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를 올랐을까, 이만하면 일행을 따라잡았을텐데
일행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며, 오르고내리는 다른 등산객들마저 없었다.
순간 의아했지만 발길을 더 재촉했다.
그런데...이런 갑자기 길이 끊기고 그 자리에는 풀이 무성한 무덤만이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낭패였다. 10분 이상을 거의 뛰다시피 올라왔는데 다시 돌아 내려가서
일행을 뒤쫓자니 30분 정도는 뒤쳐질 것 같았다.
단독산행이었다면 나는 그리 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터인데
문제는 앞서간 동료들에게는 처음 와보는 지리산이었던 것이다.
잘못 들어선 길은 되돌아 나와야 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잘못 들어선 길로 돌아 내려가지 않고
완전히 감각에만 의존하여 길을 가로지러 가기로 했다.
천왕봉쪽을 바라보며 왼쪽방향으로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곧 깨달게 되었다.
날카로운 풀잎에 종아리에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났고
잡목은 더이상의 진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솥뚜껑만한 자연산 영지버섯도 발견했으나 나는 그것을 채취할 여유마저 없었다.
이 영지버섯은 두고두고 아까웠다^^
그제서야 나는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들었다.
대충 어림잡으니 현재 방향으로 숲을 헤쳐나간다해도
지도상의 등고선을 보니 급사면 내지는 절벽을 만나게 된다.
나는 미련없이 왔던 방향을 되돌아나갔다.
다행히 아까의 그 무덤을 다시 찾았다.
이제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섰던 그 길로 내려간 후
정상적인 등산로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자니 시간은 1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일행을 어떻게 따라잡나...? 안올라오면 기다리겠지...
아니면 계획대로 로터리 산장에서 1박하면서 만나겠지...
그들이 실종되었다.
그렇게 다시 돌아내려간 후 정말 부지런히 올라갔다.
평소 산행속도가 그리 빠른 편이 아닌 나로서는 날아 올라간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없었다. 가끔 하산하는 등산객들에게
이런이런 인상착의의 두 사내를 보지 못했냐고 물었지만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낭패다! 어디로 갔을까? 혹시 나처럼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
식량과 연료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버너와 코펠은 그들이 가지고 있다.
그들은 먹을 것도 없는데...나는 덜컥 걱정이 되었다.
다시 계곡길을 오른다. 허기진 배를 계곡물로 채우며 오른다.
얼마를 올랐을까? 초콜릿이나 비스켓 따위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어
하산중인 사람들에게 라면 하나를 얻어 끓여 먹을 여유도 없이
생라면으로 헤치우고 천왕봉까지 오른다. 설마 천왕봉에서는 기다리고 있겠지...
천왕봉에도 그들은 없다.
마침내 천왕봉이다. 7시간에 걸쳐 오후 4시쯤에 천왕봉에 도착했지만
그들은 없었다. 나는 혹시 그들도 나처럼 길을 잘못 들어 헤매다
올라올 수 있으므로 기다리기로 했다. 10분, 20분...1시간...그들은 오지 않는다.
로타리 산장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물어도 산장에는 그런 사람이 없단다.
혹시 계곡에 빠진 것은 아닐까? 그건 치명적인데...
할 수 없다.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중산리쪽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무턱대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우선 나는 너무 배가 고팠다.
그들이 로터리 산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라는 희망을 안고
뛰다시피 로터리산장에 도착했다.
산장에도 그들은 없다.
여전히 그들은 산장에도 없었다.
나는 버너를 빌려 라면을 끓인 후 허기진 배를 채웠다.
삐삐(무선호출기)를 꺼냈다. 신호가 터질리 없다.
아마도 요즘은 산장 주변에서 휴대폰이 가능하겠지만
휴대폰도 없는 시절이라 연락할 방법이 없다.
이윽고 해가 진다. 지금쯤이면 산장에 침낭을 퍼놓고
마당에 나가 여유롭게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천왕봉에서 다시 칠선계곡으로 내려가면서 일행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닌지 후회도 된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어둠이 적막을 앞세어 산장 주위를 감싼다.
나는 다시 배낭을 꾸린 후 산장을 나선다.
일단 하산하여 무선호출을 해본 후 이후의 사태에 대처하기로 한다.
그렇게 중산리로 하산한 후 진주행 막차에 몸을 싣고 진주로 나왔다.
터미널 주변의 여관에 든 후 계속해서 일행들에게 무선호출을 해본다.
여전히 연락이 없다. 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여관주인으로부터 전화가 왔으니 받아보란다.
전화를 받자 그들이다! 그들은 살아있었다^^ 그들도 내가 살아있음을 기뻐했다.
나는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들이 들려준 자초지종을 이러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이현상氏)가 신발끈을 묶는 사이 우리는 앞서 올랐고
걸음을 천천히 했음에도 그가 올라오지 않아 중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10분, 20분...1시간이 지났다. 우리는 덜컥 겁이 났다.
우리는 길도 모를 뿐 아니라 따라오지 않는 그가 혹시 계곡에 빠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오면서 만나는 등산객들에게 물었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단다. 걱정이다.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는 입구에 도착하여 구조대에 연락을 했다.
이런이런 사람이 칠선계곡에서 함께 등산하다 실종되었다고.
구조대는 연락을 받고 사건 경위를 자세히 물은 후 기다려보라고 한다.
우리는 어제 머물던 민박집을 다시 찾은 후 점심을 먹고 기다린다.
여전히 소식이 없다. 구조대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냥 실족했으면 계곡을 따라 시신이 떠내려올테니 그것이나 기다리자는 투였다.
우리는 마음은 조급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오후 막차 시간이다. 우리는 일단 귀가하기로 한다.
귀가한 후 무선호출도 해보고 이후의 사태에 대처하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자정 무렵 기숙사로 돌아와 무선호출기를 켜보니 호출이 들어와 있었다.
낯선 번호였다. 전화를 하자 여관집이었고, 마침내 이현상씨와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는 살아 있었다! 이현상씨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기뻐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1박 이상의 산행에서는 항상 짐을 나눌 때는 식량과 취사도구를
1조씩 묶어서 분담했으며, 초행인 사람에게는 사전에 지도를 보여주며 충분히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요즘은 모든 등산로에 사람이 넘쳐나고
대부분의 능선구간이나 대피소에서는 전화통화가 가능하므로
이런 에피소드를 겪을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칠선계곡! 다시 가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현재 휴식년제로 묶여 있다.
첫댓글 올리셨군요!! 여러편 있으시다니 기대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지리산에서 일행과 헤어지고 길도 잘못드는 아찔함이 느껴졌습니다..잘못든 길은 반드시 돌아나와야한다는 교훈을!
야~ 글 재밌게 잘 쓰시네요. 사진도 잘 찍으시구.. 도대체 못하는게 뭔가요? ㅎㅎ.. 다른 재밌는 얘기 또 기대할게요.
이동네는 재주있는 사람들만 있는거 같네요..이러다 쫓겨나능거아녀.....
명규씨!! 울 모임 가입할때 작문 시험 보는 거 몰랐어요?? ㅋㅋ 명규씨는 특채라 안본거예요.
헉~그게 문제입니다. 이것저것 흉내는 내는데 제대로 일가를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_-
벌써 칠년째 휴식년제라 칠선계곡을 동경만 하고 있습니다.내년에도 안풀리면 벌금 각오하고 조용히 다녀올 게획입니다.
저랑같이 가시죠. 저두 기달리구 있는데.. 벌금도 나눠내면 싸구요. ㅎㅎ
태백산맥 이상가는 감동..ㅋ_ㅋ 스릴과 감동과 새로운 교훈 까지...혹시 10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