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영흥(永興)은 함경남도에 있는 지명으로 부족국가시대에 옥저(沃沮)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의 장령진(長嶺鎭)으로 불렀으며, 당문(唐文) 또는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하였다. 920년(고려 태조 3)에 화주(和州)라 하였고, 955년(광종 6)에 처음으로 성보(城堡)를 두었다. 995년(성종 14)에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로 합병, 개칭하였다가 1028년(현종 19)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 본궁(本宮)이 되었고 고종(高宗) 때 원(元)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고 등주(登州)와 통주(通州)를 합쳤으나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복구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화주목(和州牧)이 되었고, 1369년(공민왕 18)에 화령부(和寧府)로 고쳤다. 태조 때에는 영흥부(永興府)를 개칭하여, 진(鎭) 이름을 평주(平州)라 하였다가, 1403년(태종 3)에 군(郡)이 되었고, 이듬해 부(府)로 승격하였다. 1416년(태종 16)에 화주목(和州牧)으로 개칭, 토관(土官)을 두었고 세종조(世宗朝)에 와서 진을 두었다. 1470년(성종 1)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본부(本府)에 옮기고 토관을 두었으며, 1509년(중종 4)에 다시 관찰사영을 함흥으로 옮기고 영흥대도호부(永興大都護府)에 승격되어,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영흥군(永興郡)이 된 이래 오늘에 이르렀다. 1943년 영흥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77년 북한이 금야군으로 개칭하였다.
성씨의 역사
영흥최씨(永興崔氏) 시조 최지미(崔之美)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때 벼슬을 지내고 영흥백(永興伯)에 추증되었다. 그의 손자 최한기(崔閑奇)는 환조(桓祖: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빙부가 되어 영흥백(永興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영흥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묘소는 영흥군 덕흥면 진동리에 있다.
분적종 및 분파
영흥최씨는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성씨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고성군 서면
함경남도 영흥군 복흥면 중면리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영풍리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영흥최씨는 140가구 총 436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