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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역사가는 역사를 그릇되게 바라보는
민중의 눈으로부터 백내장을 제거해주는
안과의사의 노릇을 해야 한다.1)
―젤딘(Theodore Zeldin)
역사학자들은 그 ‘시대’를 잊고
다만 그 ‘결과’만을 바라보고
역사를 평가할 수 있다.2)
―이승연
1. 머리말
귀한 자리에 불러주신 후의(厚誼)에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도 이 자리는 저에게 너무 과분하여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학술회의의 기조 발표라는 것이 본디 덕망과 학문이 높은 분들이 하는 일인데, 나이만 먹었을 뿐 이룬 것도 없는 제가 강호의 동학(同學)들 앞에서 학회의 첫 시간을 장식하는 데 대하여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학회 안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저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서도 겸사(謙辭)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최 측으로 강연 부탁을 받았을 때, 잠시 막막하여 주저하다가, 문득 이 나라의 역사를 다시 쓸 주제는 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잘못 쓴 역사를 바로 잡고 싶다는 제 역사학의 일관된 문제 의식을 이런 자리에서 발표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여 이 자리를 수락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전공이 정치학이기는 하지만 분류사로서의 정치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전기학(傳記學)은 저의 중요한 관심사였던 것이 이 자리에 부름 받게 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조 인물사라는 주제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물사는 한국 역사학의 세 가지 금기(禁忌) 사항으로 되어 있는 지방색이나 문중(門中)이나 종교의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전기학에 대해서 일말의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민중으로부터 그들의 눈을 흐릿하게 가리고 있는 백내장을 제거하는 안과의사의 역할을 하는 것도 역사학도로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가며 제가 이 발표를 수락한 주제넘음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고, 임진왜란 42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껴안고 살아야 했던 한 지식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고뇌와 그를 둘러싼 오랜 논쟁에 대한 저의 부족한 소회(所懷)를 들으시면서, 함께 한 시대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2. 실체적 진실 : 1590년 3월 초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나?
역사학을 공부하다 보면, 영국의 문필가 스코트(Charles P. Scott)의 주장처럼, “역사의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사실은 신성한 것”3)이며,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가의 제일의 책무임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임진왜란의 발발과 관련하여 학봉의 일본 사행(使行)과 복명(復命)의 문제는 당시의 정황을 가감 없이 재구성해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부사(副使) 김성일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590년(庚寅) 4월이었습니다. 일본에 상륙하여 학봉이 읊은 첫 시에 이르기를,
더럽도다. 오랑캐들 풍속은 거칠고
신의(信義)는 본디부터 소홀히 아네.
이웃 나라 사귀는 도(道)는 안중에도 없어
배타고 온 사신 감히 업신여기네.4)
라고 한 것을 보면, 정통 주자학의 학통을 이어 받은 사대부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이 무례하고 천박한 데 대한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대국의 사신으로 자처했던 그로서는 일본의 외교적 결례(缺禮)를 견디기 어려웠고, 입경(入京)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불쾌감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5) “왜에게 전달하는 것은 글씨도 서투름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사자관(寫字官) 이해룡(李海龍)을 데려갈 정도로 세심했던6) 사신으로서는 일본의 그와 같은 응접에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면담이 어려워지자 일본 관헌에게 뇌물을 주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그는 심한 자괴감(自愧感)을 느꼈습니다.7) 일본 측에서는 일행을 달래고자 교토(京都)의 관광을 권유했으나 “왕명을 마치지 못했으니 관광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8)
사신의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히데요시에게 왕명을 겨우 전했고, 왕명을 전달한 지 4일 만에 왜도(倭都)를 떠났고, 왜도를 떠난 지 반 달 만에 답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답서의 말이 공손하지 않아 가득 늘어놓은 말은 으르고 협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각하(閣下)니 방물(方物)이니 입조(入朝)니 하는 말을 쓰기까지 하여 조선을 능멸(凌蔑)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1백 년 만에 모처럼 통신사로 갔다가 얽매어 곤욕을 당한 것이 거의 1년이었는데, 끝내는 나라를 모욕하는 글을 받들고 돌아가 임금에게 보고하게 되었으니 사신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황윤길은 사단(事端)이 생길까 염려하여 끝내 문제를 들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9)
문제는 이들이 귀국하여 복명하는 데에서부터 발생했습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자료와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을 토대로 하여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황윤길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파발 편에 그간의 실정과 정황을 서울에 알리면서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어전(御前)이 아닌 파발 편에 보고한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는지, 또 그런 식의 보고가 당시의 민심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신의 일행이 귀경하여 복명할 때 왕이 그들을 불러 하문하니 황윤길은 지난날의 치계(致啓) 내용과 같이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정사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事宜)에 어긋납니다.”라고 복명하였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있던 학봉으로서는 “서인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흔들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학봉이 대답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10)
그 후 4년의 세월이 흘러 선조는 왜 학봉이 그때 그렇게 말했을까를 이야기하던 끝에 아마도 학봉이 히데요시의 거짓 계략[僞計]에 속아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에 곁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이 아뢰기를, “신은 성일과 잘 알지 못하는 처지이지만, 그때 함께 정원에 있으면서 물어보았더니 김성일도 왜구의 침입을 깊이 걱정하였습니다. 다만 ‘남쪽지방 인심이 먼저 요동하니 내가 비록 장담해서 진정시켜도 오히려 의심을 풀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말은 이를 염려한 것이니 어전에서 아뢴 것은 반드시 잘못 계달(啓達)된 것일 것입니다.”11)라고 하였습니다.
3. 당쟁론의 그늘
이상의 사실은 이른바 경인(庚寅)년의 사신 일행이 귀국을 전후하여 복명한 전후사입니다. 황윤길과 김성일의 진심이 어디에 있었든, 결과적으로 전쟁은 일어났고 병화(兵禍)에 대한 책임이 거론되었을 때 김성일은 조야(朝野)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격은 그의 정적이었던 서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이 있었습니다. 전라도 보성 출신으로서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에게 사숙(私塾)한 그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재야에 있었던 서인의 논객으로서 왜란이 일어나자 호남 의병을 이끌고 싸운 바도 있었습니다. 그는 김성일의 사행에 대하여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격렬하게 비판했던 사림이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서계(書契) 가운데에는 상국(上國)을 무시하는 언사가 너무 많아 받아 쓸 만한 말이 한 구절도 없었는데 학봉은 이로 말미암아 후일에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교묘하게 꾸며낸 것이며, 조정이 김성일을 선사(善使)로 삼아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방비하던 모든 조직과 구조를 모조리 파기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안방준에 이어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다시 학봉을 공격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병조좌랑을 지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의 종사관이었던 그는 “부사 김성일이 한 길로 왜가 쳐들어오지 않으리라고 말하니 조정이 그의 말을 믿고 당장 편한 길을 택하여 한 장수도 뽑지 않고 한 병정도 훈련시키지 않음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게 만들었다.”12)고 주장함으로써 임진왜란의 개전 책임을 김성일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동인의 계열에서도 학봉의 복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곧, 세월이 흘러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나뉘자 남인의 논객13)이었던 경상관찰사 김시양(金時讓)이 임란 책임자로서의 김성일을 문책했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왜적이 모든 국력을 기울여 침략하자 종묘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民生)이 주륙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병화의 참혹함이 옛날부터 임진년과 같은 적은 없었는데 이는 김성일이 요령을 얻지 못한 탓이었다.”고 질책하면서 “이것을 전대(專對)라고 함이 옳겠는가?”14)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경인년 사절의 복명이 서로 다른 것이 꼭 당색 때문이었다고 볼 수 없음이 분명했고 이는 시국을 바라보는 견해의 차이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학봉의 논리나 그를 반대했던 서인의 논리는 마치 당색의 산물인 것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한국사를 업장(業障)처럼 눌러왔습니다.
이러한 당의(黨議)가 왜곡과 확대재생산을 통해 한국사의 지배적 가치로 인식된 것은 한국의 망국과 일본의 조선 침탈의 논리를 당의에서 찾으려는 식민사학의 집요한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식민사학의 원조인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 1870-1953)가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의 학정참여관(學政參與官)으로 1900년에 조선에 들어와 1906년까지 활약한 그는 도쿄(東京)제국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인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 1907)를 씀으로써 조선 당쟁사에 대한 식민지 사학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대만제국대학(臺灣帝國大學) 총장까지 지낼 만큼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었으므로15) 그의 주장은 선악을 떠나 그 시대의 주류 사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시데하라의 논리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는 유사 이래로 사권(私權)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의 오늘의 상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당쟁사에서 찾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16)
한국식민지사학이 정점에 이른 것은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 1854-1922)의 글이 발표되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고전강습과를 졸업하고(1887) 도쿄고등사범(東京高等師範) 교수를 지낸 그는 본디 한학자이자 갑골문자(甲骨文字)의 권위자로 『상대(上代) 한자의 연구』로 191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전공도 아닌 『조선사』(朝鮮史, 1892),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 1901), 『조선통사』(朝鮮通史, 1912)라는 일련의 저술을 통하여 명치(明治)·대정(大正) 연간의 조선사 연구를 주도한 것도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조선통사」는 한국을 통사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일본 서적으로서 당시로서는 한국사를 이해하는 지침서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야시는 『조선통사』의 제11장에서 당쟁을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 기록함으로써 당쟁에 관한 식민지 사학을 주도했습니다.17) 당쟁이 한국사를 서술하면서 15개 장으로 이루어진 교재의 한 개 장(章)을 차지한 데에서부터 당쟁에 대한 그의 과장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 책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곧 황윤길과 김성일의 문제를 당쟁의 논리로 해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발발로부터 조선의 초전 패배의 문제를 김성일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야시의 논리에 따르면, 김성일은 동인이고 황윤길은 서인이어서 각기 그 당을 비호하여 의견이 분분(紛紛)하였고, 그와 같이 해외의 정황을 보고하면서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다만 당론에 따르는 폐단이 극심하였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당시에 유성룡이 김성일을 두둔한 것도 사실과 다르며, 이런 점에서 유성룡도 정직하지 않은 사람(曲筆)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8) 그들의 주장인즉 당쟁은 진실로 국가의 안위나 민생의 평화나 근심[休戚]에 관해서는 걱정한 바 없이 오로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다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19)
조선조 당쟁사에 대하여 가장 비논리적이며 모욕적인 글을 쓴 사람은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 1886-1934)였습니다. 그는 『나가사키(長崎)신문』의 기자로서 1907년에 한국에 들어와 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정한론자(征韓論者)인 흑룡회(黑龍會)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합방 촉진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1911년에 귀국한 그는 『주간아사히(朝日)신문』과 『도쿄아사히(東京朝日)신문』의 기자로 활약하다가 1919년에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3․1운동을 취재했습니다. 이후 그는 서울에 체류하면서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식민사학의 논리를 본격적으로 전개했습니다.20) 호소이 하지메의 논리의 핵심은, 한국인들이 그토록 당쟁에 집착한 것은 인 “조선인의 몸에는 더러운 피[黝血]가 섞여 있기 때문”21)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혐오스럽고 모욕적이어서 입에 담기조차 민망스러운 이 망종(亡種)의 논리는 매우 집요하고도 오랫동안 한국사를 이해하는 일본의 시각(視角)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22년 12월, 일본이 조선의 병합을 합리화할 수 있는 조선사를 쓰기 위해 총독부 훈령 64호로 「조선사편수회규정」(朝鮮史編修委員會規程)을 발표하면서 정무총감(政務總監) 아리요시 주이치(有吉忠一)를 그 위원장에 겸직시키고 중추원(中樞院) 의장 이완용(李完用)의 주도로 한국의 젊은 학자들을 선발하여 편수 위원으로 임명한 것은 한국 사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들에 의해 1938년에 완간된 『조선사』(朝鮮史) 전35권은 식민사학의 원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작업을 수행한 인물은 오다 쇼고(小田省吾)였습니다. 그는 도쿄제대(東京帝大) 출신으로서 경성제대(京城帝大) 예과부 교수와 조선총독부 시학관(視學官)을 역임했으며,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가 창설될 때에는 총독부 사무관의 자격으로 조선사편수회 창립 위원이 되어 식민사학의 정립에 깊이 관여했습니다.22) 그의 주장에 따르면 당쟁이야말로 한국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쟁을 이해하는 것이 곧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당쟁의 논리를 확대하여 임진왜란도 결국 당파 싸움이 빚은 비극이라는 데에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23) 당쟁 때문에 조선조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식민지 사학자들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며 식민사관의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이후 임진왜란의 개전과 패전에 대한 책임을 당쟁에 귀결시키려는 일본 식민지사학은 일본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져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일본군 참모본부의 공식 전사(戰史)인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 1978)에서도 “동서 붕당의 상쟁(相爭)에 따른 김성일의 거짓 보고가 개전과 패전의 중요 원인이었음”을 적시(摘示)하고 있습니다.24)
당쟁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논쟁은 정말로 망국적이었을까? 이에 대한 정치학적 해석은 종래의 그것과 다릅니다. 이미 율곡(栗谷)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의(黨議)란 그 시대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정치적 공론(公論)이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론이 조정에 있을 때 나라가 다스려지고, 공론이 민간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만약 위아래 모두에 공론이 없으면 그 나라가 망했다”고 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른바 동인이란 무리는 연소한 신진을 가리키며, 이른바 서인이란 무리는 선배 구신(舊臣)을 가리키는 것이니, 마땅히 돌보고 보살펴 변하지 말며 결점을 감싸고 장점을 드러내야 할 것이요, 멀리 배척하여 그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25)는 것이었습니다.
당쟁에 대한 저의 평소의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당의가 활발했던 숙종조(肅宗朝)에 민중의 삶은 가장 평화로웠고,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이라는 이름으로 조정에서 당의가 사라진 순조(純祖)·헌종(憲宗)·철종(哲宗)의 시기가 조선왕조의 낙조(落照)의 시기였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당쟁 론이야말로 식민지 사학의 최대 피해자이며 굴곡된 역사였다고 저는 생각하며,26) 오늘의 주제와 관련하여 말씀드린다면, 임진왜란의 초전 실패나 황윤길과 김성일 사이에 벌어졌던 의견의 차이를 당쟁의 논리로 설명하려는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식민사학의 유산이 엄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독(餘毒)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역사학자들
이와 같이 황윤길과 김성일의 의견이 달랐던 사실을 당색(黨色)으로 설명하려는 논리는 이 땅에 광복이 찾아온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는 데 문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입장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근대 사학사(史學史)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황윤길과 김성일의 갈등을 최초로 거론한 학자는 황의돈(黃義敦)이었습니다. 황윤길의 문중 족손(族孫)이었던 그는 일제 시대에 대성학교(大成學校)와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국사를 가르치면서 중등학교 국사교과서를 편찬했고 해방 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한국사의 일세대 학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신편 조선 역사』(1923)에서 “유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 당시에 득세한 동인배(東人輩)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右袒) 군사 시설(武備)을 모두 부수고(盡罷) 조정의 모든 대신들(滿朝)이 마음을 놓아(晏然) 태평한 꿈(昇平夢)에 취하여 들어 누었다(醉臥).”27)고 기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황의돈의 그와 같은 필치에는 존재구속성(存在拘束性, Seinsgebundenheit)과 같은 고충이 담겨 있습니다. 황희(黃喜)의 학맥을 잇는 명문의 후손으로서 황의돈이 황윤길에 대한 숭모(崇慕)의 정을 갖는다는 것이 허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신의 복명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황의돈은 황윤길의 입장을 비호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말처럼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그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정에서의 복명을 기록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유성룡과 이항복의 증언도 함께 다루는 금도(襟度)가 필요했습니다. 역사가가 균형 감각을 잃으면 역사를 굴절시킬 수 있습니다. 역사가 심판의 기능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해석의 중요한 논거가 되는 부분을 누락함으로써 주제가 되는 인물의 정죄(定罪)하거나 “탓의 장(場)”에 머무르는 것은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의 입장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황윤길은 서인이요, 김성일은 동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당쟁이 심한 때이기로서니 그토록 중대한 사안을 당색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을 했을까?라고 그는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학봉의 소견이 잘못된 것이지만, 자신이 보기에 히데요시의 태도가 허장성세와 같이 보였기 때문에 이로써 너무 상하의 인심을 자극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김성일과 동문인 유성룡은 “설령 히데요시가 쳐들어온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여 너무도 인식이 부족한 말을 하였고,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반신반의 하여 무사(無事)를 위주(爲主)로 하던 당시이므로 국방에서도 그다지 긴급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28) 이병도의 논리는 다른 이론들처럼 당쟁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성일과 유성룡에게 개전 책임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학자들의 논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으며, 건국 이후 한국 사학교육계를 지배해온 이른바 두계사학의 비중을 고려할 때 학봉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형성에 크게 작용한 바를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셋째로, 이병도의 저술에 뒤를 이어 1961-1962년 사이에 출간된 진단학회의 『한국사』는 통사로서의 방대함과 필진의 무게로 말미암아 한국 사학계의 주류를 이루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 전집 가운데 임진왜란 편의 필자인 이상백(李相佰)의 논리를 들어보면, 학봉의 복명이 한 편으로는 닥쳐올 위급에 대비할 필요를 역설한 것이요, 또 한 편으로는 인심을 동요시키지 않고자 하는 데 있었다 하더라도 동서의 파쟁이 우심(尤甚)하던 당시에 사실 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당의 사절을 비호한 결과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병도와는 다른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요행을 바라던 당시의 조정은 김성일의 복명에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일루(一縷)의 낙관으로 김성일의 의견에 기울어져 구안(苟安) 무사(無事)를 바라면서 이에 앞서 각 도에 명령하여 방비를 강화케 하던 것도 중지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29) 국방의 장비 강화를 중단하였다는 그의 주장이 어디에 논거를 두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그 후 임진왜란사 연구의 최대 거작이라 할 수 있는 이형석(李炯錫)의 『임진전란사』 세 권이 1974년에 출간되었습니다. 자료와 기술(記述)의 방대함으로 학계를 놀라게 한 이 책에서 필자는 황윤길과 김성일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하야시 다이스케의 논리를 인용하여 임진왜란의 개전과 패전 책임을 당화(黨禍)로 설명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30)
끝으로, 1970년대-1980년대 초에 들어오면서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사』 25권을 발간하는데, 이를 추진한 사람은 위원장 이현종(李鉉淙)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집 중의 임진왜란사를 직접 집필한 그는 임진왜란의 개전 책임을 당쟁과 황윤길-김성일의 당파심에 물음으로써 관찬(官撰) 사학으로서의 임진왜란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겹치는 사화에다가 선조 8년에는 지배층이 동서분당으로 나뉘어져 나라의 운명이 위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크게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오직 명(明)나라에 대한 친선 관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던 위정자들의 좁은 견해는 권력 싸움과 당파 조직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더욱이 16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변동을 살피기 위해 일본에 통신사까지 파견하였으나 그들의 상반된 보고만으로는 정확을 기대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와 같은 위험스러운 보고에도 불구하고 장차 다가올 일본 침략의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31)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저술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던 주류사학자들의 저작이었다는 점에서 그와 다른 논리의 전개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작업이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동인과 김성일의 개전 책임은 고쳐지지 않는 정설처럼 사학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5. 역사소설과 텔레비전 사극
여기에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와 같은 사학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역사소설과 텔레비전 사극이 국민들의 사고를 고착화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 사실들은 소설과 극본의 중요한 자료가 되어 왔습니다. 독자들이 딱딱하고 사변적인 논문이나 학술 서적보다는 쉽고 흥미로운 역사소설을 통하여 역사의 지식을 넓혀 간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현상을 보여주는 예로서, 한국인들이 어떤 매체를 통하여 역사 지식을 얻는가에 관한 통계를 살펴보면, 신문이 38.8%, 텔레비전과 라디오의 사극 및 교양 프로가 33.1.%, 시사 잡지가 9.2%, 역사 소설이 8.3%, 전문 서적이 7%, 역사 강좌가 3.2%로 나타나고 있습니다.32)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국인들의 41.4%가 역사소설이나 텔레비전 사극을 통하여 역사 지식을 얻고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는 전문 서적이나 역사 강좌를 통하여 역사를 아는 것보다 네 배가 더 많습니다.
이럴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이나 사극이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 과연 얼마만큼 진실에 가까운가 하는 문제인데, 그 대답은 결코 긍정적일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역사소설가들은 설화(story)와 역사학(history)의 거리를 너무 멀리 떼어 놓았습니다. 이광수(李光洙)-박종화(朴鍾和)-이은상(李殷相)-최인욱(崔仁旭)으로 이어지는 역사소설가와 신봉승(辛奉承)을 정점으로 하는 사극작가들이 역사 보급에 기여한 공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체적 진실을 좀 더 고민했어야 합니다. 춘추필법(春秋筆法)과 주자학적(朱子學的) 절의(節義)에 익숙해진 한국의 소설 문학은 세상사를 선악(善惡)의 이분법으로 재단함으로써 어떤 역사적 사실에서 누구는 나쁜 사람이고 누구는 의인(義人)이라는 구도의 설정을 선호(選好)했습니다. 예컨대 이광수의 『단종애사』(端宗哀史)를 시발로 하여 전개된 소설 문학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을 바탕에 깔고 선악의 논리로 역사를 재단함으로써 역사의 희생양(犧牲羊)을 배출했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되고 있는 임진왜란과 사신들의 복명에 관한 묘사도 그와 같은 정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박종화는 그의 소설 『임진왜란』(1966)에서 황윤길과 김성일의 복명 장면을 소상하게 묘사하면서, 두 사람이 최후까지 어전에서 다투었던 이유는 황윤길은 서인의 당파요, 김성일은 동인의 당파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김성일은 나라 일을 하러간 사람이 아니라 서인 황윤길을 반대하기 위하여 간 사람으로서 적의 정세를 짐작했으면서도 다만 황윤길의 서인측을 반대하기 위하여 반대를 끝끝내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전 회의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면서 유성룡의 증언을 첨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같은 당파였기에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어리뻥뻥한 일”이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33)
최인욱의 『성웅 이순신』(1971)은 이순신의 성인화 과정을 유념하면서,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 있었는가 하면 김성일과 유성룡과 같은 동인들이 허위 보고를 함으로써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불의의 변을 당하게 되었다.”34)고 설명합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당색으로 몰아가면서 그 앞에는 김성일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는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75)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35) 최근의 작품으로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김훈의 『칼의 노래』(2007)는 조금 시각이 다릅니다. 그도 김성일은 동인이었고, 황윤길은 서인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는 있지만, “당시의 김성일 등의 동인들은 선조의 선병질적(腺病質的 : 신경쇠약증) 성격을 자극해서 국내 정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태를 피해가면서 전란에 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36)고 말함으로써 김성일의 고뇌를 대변하고자 했습니다.
최근의 일련의 사극 작품 가운데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작품은 아마도 윤선주 극본의 KBS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제42회분, 2005. 1. 23. 방영)이었을 것입니다. 이 극본은 임진왜란에서의 김성일의 책임을 묻는 데 가장 준열한 작품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색을 보이며 갈등하는 어전 회의의 모습, 당론에 따라 선조의 표정이 바뀌고 이를 바라보며 일희일비하는 무리들의 표정 변화, 난감한 군신(群臣)들, 시선을 피하는 김성일의 모습, 이러한 상황에 곤혹스러워하는 유성룡의 심리 묘사 등을 통하여 작가는 암묵적으로 개전과 패전의 책임을 김성일에게로 돌리려 했습니다. 이 일자에 방영된 끝 부분에서 김성일은 유성룡과의 대화에서, “막고 싶었네. 병화의 조짐을 유포시켜 민심을 교란하고 우리 동인들을 또다시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저들의 음모를 깨고 싶어. ... 전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내 어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함으로써 당파심이 이 사건의 본질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의 말 가운데, “우리 동인들을 또 다시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는 음모”라 함은 그 앞선 해인 1589에 일어난 정여립(鄭汝立)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 역사학자의 전유물이 아닌 바에야 사극이나 역사 소설에서 역사물을 다루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비난받을 일도 아닙니다. 또 소설과 사극은 그 장르가 가지는 특성상 흥미와 극적(劇的)인 이야기의 전개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정사(正史)만을 대상으로 하고 정사대로 써야만 할 이유도 없습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사극은 사극일 뿐입니다. 따라서 필자의 선호(選好)나 독자의 기호(嗜好) 또는 그 시대나 그 사회의 유행이나 흥미에 따라서 사극과 소설은 정사가 보지 못하거나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부분을 대상으로 삼을 수도 있고 그 전개 과정에서 허구(虛構)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소설적 공간이요, 사극의 무대라 할지라도 독자나 시청자의 흥미에 영합하기 위해 지나치리 만큼 사실(史實)을 곡해하거나 중요도의 우선 순위를 전도(顚倒)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가가 사실에 충실한 것은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37) 어느 면에서 보면 대중 소설은 학술 서적보다 더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 소설이나 사극의 작가도 일말의 책임과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적어도 사극이나 역사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크게 벗어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나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또는 한국문학사에의 홍명희(洪命熹)의 작품, 그리고 현대 작가 중의 최인호(崔仁浩)의 작품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이유가 허구적 재미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어느 역사학자 못지않게 역사에 관해 공부하고 고뇌한 사람들이었으며, 역사학과 문학을 뛰어 넘어 양자를 접목시킨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 대중의 머릿속에 잘못 정형화된(stereo-typed) 인물평이 올바른 평가를 받는 데에는 학술 공간에서는 1세기가 걸렸고, 소설의 공간에서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나마도 빠른 것이고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한 비하(卑下) 속에 구천(九天)에서 신음하는 원혼(冤魂)의 후손은 한국사에 여럿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 “단 한 사람이 가슴에 억울함을 품어도 천지의 기운이 막힌다.”38)는 강일순(姜一淳)의 말을 여러 번 되뇌었습니다.
6. 결론 : 역사에서의 화해와 해원(解寃)
이제까지의 글에서 저는 이 일련의 사건을 되도록 객관적으로 기록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역사학자 트래버-로퍼(Travor-Roper)의 말을 빌리면, “역사가가 역사를 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주제에 대한 연민을 품게 된다.”39)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도 이 주제에 어떤 연민에 빠지지나 않았을까 하는 점을 깊이 유념하면서 이제 저는 위와 같은 실체적 진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저의 소견을 결론으로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조선조 시대의 지식인들, 특히 오늘의 주제가 되고 있는 학봉의 대일 인식에 대한 저의 소견을 정리해보면, 그들이 결코 일본에 대하여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다고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신숙주(申叔舟)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조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무장을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않았고, 만성적인 두려움과 기피심리(xenophobia)를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일정책의 기조는 어루만짐(慰撫)과 수호(修好) 그리고 내정의 정비라는 데에 일관된 합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40) 따라서 적정(敵情)을 관찰하는 데 김성일이 실수했을 것이라는 논리는 사실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황윤길이 본 것을 김성일도 보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문제의 핵심은 학봉이 왜 사실과 다르게 복명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가 유성룡이나 이항복에게 한 말의 진정성을 믿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어전에서, “오늘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섬 오랑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심에 있다.”41)는 의견을 여러 번 피력한 바 있고, “지금은 나라가 피폐하여 백성의 원성이 들판에 가득하여 실로 등에 땀이 흐르는 현실”42)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신들이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곧 왜병이 쳐들어올 듯이 파발을 보내고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민심을 안온(安穩)시키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 과정에서 김성일이 문제를 사실대로 공론화하지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으며, 그런 점에서 보는 이에 따라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바랐던 것은 민심의 안정이었으며, 전쟁과 같은 국가 대사는 알 만한 사람끼리 알아서 처리할 일이지 여럿이 모여 크게 떠들 일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의 본질적 의미를 최종적으로 판단했어야 할 선조(宣祖)의 무능함에 어쩌면 더 큰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대파들과 역사학자들은 그 자리에 이어서 일어났던 유성룡과 이항복의 증언을 누락한 채 어전 회의의 장면만을 부각함으로써 역사 기록의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진심과 동기 그리고 그의 마지막 행적을 고려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막상 왜란이 일어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학봉을 옥에 가두도록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경상감사 김수(金睟)에게 적을 막을 방책을 일러주는 모습을 보여 노리(老吏) 하자용(河自溶)은 “자기 죽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오로지 나라 일만을 근심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충신이다.”라고 말했습니다.43)
그 후 김성일의 진심을 안 선조는 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에게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를 제수하여 왜병을 막는 데 힘쓰도록 당부했습니다. 김성일은 죽산(竹山)과 함양(咸陽) 등에서 격문을 돌리고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홍의 장군 곽재우(郭再祐) 등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키면서 군정(軍政)에 노심초사하였으며, 역질에 걸린 백성들을 돌보다가 전염되어 진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일상 생활에서도 군장을 풀지 않고 지성으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경상도 일대를 보전한 공이 컸으며, 죽을 때까지 사사로운 일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혁(氵奕 )이 함께 병중이었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학봉의 사신 복명 문제를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면서 고민했던 사람은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이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소모관(召募官)이자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훗날 세월이 흘러 영상(領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저는 그의 편지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저의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학봉은 성품이 엄정하였으므로, 다른 나라[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다른 무리(異類)들과 교제하면서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의리로써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나라에 가 있었지만 서로 격조(隔阻)하기가 호(胡)와 월(越) 같았으니, 왜국의 사정을 아는 것이 같은 일행들과는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왜국의 서신을 보고 난 뒤에는 비록 저들이 허세를 부려 위협하는 것이라고 의심하면서도 어찌 염려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동래(東萊)에 도착하여 일행들이 지레 이 사실을 누설하여, 미처 복명하기도 전에 온 나라가 흉흉하여 내변(內變)이 일어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진정시키는 말을 하여 급한 환란을 구제한 것일 뿐이지 그 뜻이 어찌 다른 데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학봉이 왜국에 있을 때 아무런 일이 없는데도 사단을 일으켜 왜인을 격노시켜 화란(禍亂)을 불러왔으므로, 그 죄를 면하고자 하여 병화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데, 이 말은 너무나도 지나칩니다. 만약 왜적들이 반드시 침범해 올 것을 학봉이 알았더라면, 그 당시에는 비록 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끝내 이를 숨겼겠으며, 말하지 않은 죄를 또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인데, 학봉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44)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