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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고신의료원 명예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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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12월25일 새벽.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벨이 울렸다.잠결이었지만 전화기를 들지 않아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병원직원은 새벽녘의 고요를 깨고 선생님의 죽음을 알려왔다.“원장님 장기려박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2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던 터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쪽에서 무언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
렸다.잠시 무엇을 먼저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댔다.박사님의 죽음은 나에게 있어 단순한 죽음 이상의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장기려박사.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환자들의 편에 서있었고 하나님을 극진히 섬긴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막사
이사이상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그를 평생 모실 수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내게 행운과 같은 것이었다.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장박사
를 아버지처럼 따랐고 큰아들을 자청해 평생을 모셨다.그는 어린 시절부터 내 삶에 들어와 있었으며 인생의 참 의미를 가르쳐준 분이
기도 했다.
서둘러 서울갈 채비를 차렸는데 크리스마스인지라 겨우 오후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박사님은 그동안 부산 고신의료원 병실에
서 치료받았다.우리 병원 식구들은 이곳에서 임종하길 간절히 원했다.우리 뿐만 아니고 부산 경남시민들도 그렇게 되길 원했다.왜냐
하면 복음병원과 고신의료원이야말로 장박사의 분신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다.비행기는 하늘 높이 날았다.나는 슬픔에 잠기기보다
는 박사님과의 인연을 기억해내며 그분과 함께 한 시간들을 하나 하나 끄집어냈다.
내가 박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동래중학교 6학년때인 51년이었다.당시는 고등학교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중학교를 6년씩 다녔다.6·25
를 맞아 피란온 그는 우리 교회에 출석했다.이제 막 40이 된 박사님의 인상은 아주 풋풋하고 자애로운 느낌을 풍겼다.
나와 21살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남다른 우정을 나누었다.나는 키가 굉장히 커서 ‘롱거’라는 별명이 있었다. 1m84나 됐으나 1m70이
될까말까 했던 박사님은 나를 아들처럼 자랑스러워했다. 당시 부산제3영도교회에 다녔던 학생 신분이었던 나는 성가대 지휘자로 있었
고 박사님은 대원으로 들어왔다.
물론 처음에는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만 알았을 뿐 그리 큰 인물인 줄은 정말 몰랐다.박사님은 영도교회당을 빌려 진료소를 설치
하고 ‘복음병원’으로 이름을 짓고 환자를 치료했는데 그의 명성을 듣고온 사람들로 늘 교회당은 인산인해였다.겨울 방학을 맞이한
나는 어느 날 박사님을 붙잡고 말했다.
“박사님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박사님을 도와 병원에서 일하고 싶어요”
예상 외로 박사님은 선뜻 허락을 해주셨다.그러나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사실 나 역시 아무 의료지식이 없었기 때
문에 병원에서 하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주일을 제외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여는 진료소에 누구보다 일찍 나가 청소를 하고
진료기기들과 환자의 진료카드 등을 정리했다.하지만 그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2 환자를 진료하는 박사님 옆에 서있을 때면 어느 때는 마치 내가 의사가 된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눈치가 빨랐던 나는 어느새 선생님의 수족과 같은 역할을 했고 어느 곳에 가든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존재가 되었다.그러나 병원은 늘 어려웠다.전시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선생님의 청빈한 생활습관 때문이었다.나는 선생님의 가난을 돕고 싶 었다.무슨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한 끝에 한국민속 그림이 담긴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미군부대로 갔다.카드를 팔아 병원 운영기 금을 만들자는 생각에서였다.함께 간 병원 창설의 공로자였던 전영창선생(작고)은 카드를 사도록 미군들에게 권유를 했고 나는 열심 히 카드를 팔았다.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4천달러나 됐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이었는데 이 돈은 고스란히 병원으로 넘겨져 운영기금으로 사용되었다.박사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 첫번째 사건이었다. “영훈아,넌 의사가 되거라.난 네가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깨 너머로 진료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에게 박사님은 가끔씩 이렇게 말씀했다.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다른 미래가 무럭무럭 자라 나고 있었다.내 꿈은 지극히 평범했다.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도시보다는 시골 학교에 가서 교과목은 물론 성경말씀도 함께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것이 내가 꿈꾸는 직업이었으며 미래였다. 또한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고 잘했던 나로서는 그러한 꿈을 마음껏 펼치기 위해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초등학교 교사가 제격이었으 며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날 흥분시켰다. “영훈아,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거라” 박사님의 집요한 권유는 잠시 갈등에 빠지게 했다.당시 부산은 전국이 한 자리에 모인 듯했다.온통 피란민들로 여기가 부산인지 서울 인지 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그때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이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의 권유를 잠시 접고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에 지원했다.학교 선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가 사범대에 가는 목표이 자 교사가 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했지만 사실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하는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의사와 계속 생활을 하면서도 의사될 생각을 안한 것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어쨌든 교육학과에 입학했으며 사범대 시절에도 틈만 나면 병원으로 가 박사님을 도왔다.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처럼 웬만한 약이름이나 의학용어는 귀동냥으로 알아 들을 수 있게 됐다.선생님은 더 이상 진로문제로 나에게 말씀하지 않았다. 53년 휴전이 되자 학교들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내가 다녔던 사범대도 당연히 복귀를 했는데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학교를 중 도에 그만둘 수도,그렇다고 서울로 함께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집안형편은 학교보다는 돈을 버는 것이 훨씬 나을 정도로 어려웠다.그때 이미 의대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던 형님은 이과대학에 다시 들어가 의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오셨다.두 분이 이미 말을 맞춘 것도 아닐 터인데 선생님과 형님은 다시 의사가 될 것을 나에게 권고하기 시작했다. 3 내가 이제까지 거역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형님의 말이었다.우리 집안의 큰 형님이라는 것도 있지만 이상하게 형님말 에는 무조건 순종했다.형님과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다시 이과대학 편입공부를 시작했다.편입시험 합격발표가 있던 날 참으로 좋아하 셨던 장박사님의 모습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물론 내 기분도 나쁠 리는 없었다.그러나 그렇게 마냥 좋아할 만한 문제는 아니 었다.그저 막연히 선생님과 함께 지나며 봐왔던 의사와 내가 몸소 부닥쳐야 했던 의학공부는 정말로 달랐다.무엇보다 해부학 생화학 등의 과목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하긴 문과에서 이과로 방향 전환하고 부족함없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부터가 교만이었다.아니나 다를까,보기좋게 낙 제를 했다.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내가 다시는 의학공부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으로 자신감을 잃었다는 것이다. 한번의 낙제는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마음을 달래기 위해 매일 성경만 끼고 살았다.의사가 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서울로 올 라가 다시 사대에 다니고 싶었다.역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 제격이다 싶기도 했다.형님은 방황하는 나를 나무라기보다는 위로 를 하며 힘을 주었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다.1년만 죽었다 하고 공부해봐라.넌 할 수 있어” 그 말이 날 다시 책상 앞으로 불러들였지만 사실은 남모르게 다가온 위기감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향에 내려온 서울사대에 같이 다닌 친구들은 어느새 졸업반인데 낙제를 한 나는 이제 겨우 1학년이었던 것이다.현실과 이상은 너무 차이가 났다. 갑자기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무엇이든 결말을 보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나니 그 지겹고 재미없다고 느껴졌던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른 학생들은 이론만 알고 있는 것들을 난 실제 눈으로 확인한 경험들이 많아 더욱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가 있었다.의대에 들어간 후부터 박사님은 본격적으로 나를 인정하고 데리고 다니셨다.크고 작은 수술때마다 견학하도록 자리를 허락해주셨고 병에 대 한 궁금증을 풀어주었다.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사람으로 불리기 시작했다.하긴 지금 생각해도 나만큼 환자 를 많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은 어느 곳에서 일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물론 나는 그런 고민이 필요없었다.말로 약속을 받은 것 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님이 계시는 병원에서 일할 것이라고 믿었고 과목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외과를 선택했다. 드디어 58년 대학을 졸업하고 복음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기 시작했다.이제 본격적인 직업의사가 된 것이다.그로부터 지금까지 30여 동안 난 이병원에서 환자를 보고 수술을 하며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일을 한다.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1년과 본의 아니게 다른 병원 에서 일한 1년 반을 제외하면 평생을 고신의료원과 함께 보냈다. 의사라는 직업은 가끔씩 사람을 외롭게 한다.아마 그것은 죽음을 많이 보는 직업이기 때문인 것 같다.그럴 때마다 성경을 보고 기도 를 하며 힘을 얻는다.내 신앙은 외할머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난 이제껏 살면서 외할머니만큼 신앙이 좋았던 분을 본 적이 없 었던 것 같다. 4 내 신앙의 스승이었던 외할머니는 늘 기도와 성경읽기를 쉬지 않았고 하나님일과 교회일을 언제나 최우선에 두었다.물론 그분의 일상생활도 지극히 신앙적이었다고 기억한다.난 어린 시절 늘 외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교회에 갔다.그때는 어린이 예배가 따로 있지 않았으므로 할머니 옆에 앉아 이해하기 힘든 말을 참고 듣는 것이 내 몫이었다.할머니는 설교시간만 되면 졸음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졸으셨는데 신앙이 좋은 할머니가 예배시간에 존다는 것이 정말 이상했다.하지만 할머니는 “왜 창피해?우리 아버지집에 오니 까 편해서 그렇지”하며 웃으셨다.은연중 할머니에게서 받은 신앙교육은 내가 장성해 교회에 봉사활동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터전이 됐다.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머니의 신앙 역시 탄탄했다.의사 아들을 두명이나 길러냈다고 해서 우리 어머니는 동네에서 꽤나 유명했다 .늘그막에는 호강도 하셨지만 젊은날의 어머니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독립운동을 한다고 항상 쫓겨다니는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 터 어머니는 자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자그마치 6남매를 두었던 어머니는 돌아서면 배고프다는 자식들의 입을 막기 위해 보따리 장사는 물론이고 남자들의 일로 알려진 도 기공장에서도 일을 했다.그러나 우리들은 늘 먹을 것 때문에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교회 장로님댁을 돌면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다 . 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그래도 누구 하나 학교를 중단한 사람은 없었다.아무리 먹고 살기가 힘들어도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었다.조금 살기 힘들다고 모두 학교를 팽개치고 일을 했더라면 지 금 우리의 모습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병원에서의 인턴시절은 정말 바빴다.의사로 치면 햇병아리임에도 불구하고 박사님을 대신해 모든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사실 병원의 설립과 발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누가 뭐래도 박사님이다.그는 훌륭한 의학자이며 교수였고 진료의사였다.무엇보다 박애주의 인류애를 실천했던 분이다.그러나 사업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박사님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이야기를 들으면 가만있지 못하셨다.늘 퍼주기 바빴다.그래서 병원은 무료진료를 원하는 가난한 환자들 이 많았다.선생님은 그들을 치료하고 직원들이 한소리 할까봐 남 모르게 뒷문으로 내보내시곤 했다.그렇다고 모든 환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간 수술에 이미 정평이 난 박사님의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았다.그러나 병원이 평탄하게 운영되기에는 언 제나 자금이 부족했다. 게다가 박사님은 복음병원 외에도 서울대병원 백병원 등을 겸직해 병원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자연히 모든 업무는 내 차지가 되었다. 잔무가 많다보니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어느 날 박사님과 마주 앉아 심정을 토로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요.유학을 갔으면 하는데 허락해주시지요” 그동안 의사로서의 진료보다는 행정일을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한 나는 이 틈에 꼭 유학을 가서 다른 나라의 병원사업이나 의학교육에 대해 알고 싶었고 신기술도 배워보고 싶었다.내가 간전문의가 된 것은 간 수술의 권위자였던 박사님의 영향도 컸지만 미국 유학시절 의 경험들 때문이었다. 5 박사님의 허락을 받아 68년 미국으로 날아갔다.그러나 본격적으로 의학공부를 하겠다던 나의 유학시절은 1년으로 끝이 났다.혼자 일하기가 너무 힘들다는 박사님 때문에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친구들은 1년 있을 바에는 무엇하러 왔느냐고 성화였지만 그렇다고 박 사님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이 들었다.만약 그때 거기서 계속 유학생활을 했다면 의사로서 오히려 더 큰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는 기대 도 해본다.그러나 짧았던 1년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배우게 됐던 것 같다.그중에서도 박사님과 공동으로 발표해 세간의 관 심을 끌었던 개를 이용한 간이식 실험 성공은 하버드 대학에서 쥐를 이용해 간이식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본 것에서 비롯됐다. 바로 70년에 있었던 간이식수술 성공은 동물의 간을 콩팥과 같이 두개로 나누어 반쪽을 떼내도 살수 있다는 데서 시작된 실험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박사님이 내주셨고 나는 실험실에 틀어박혀 지냈다.실험은 성공했고 신문은 ‘세계의학계 획기적인 업적’이라고 우리 를 보도했다. 박시님과 함께 한 아름다운 사건이었다.박사님은 의사보다는 교수로 남길 원하셨다.물론 진료도 열심히 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더 열심이셨던 것 같다.계속해서 서울대학병원이 있는 서울대 인제대 백병원으로 수업을 하러 다니셨기 때문에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병원의 잡다한 일들을 맡았다.그리고 76년 박사님은 현직에서 은퇴하셨다. “닥터 박,병원을 본격적으로 맡아서 해봐.이 병원은 누구보다 닥터 박이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제일 믿고 맡길 수가 있겠어” 은퇴하면서 박사님은 나를 불러 부탁하셨다.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이미 교회와 교단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고 계 셨던 박사님이셨기 때문에 다른 교단의 인물을 병원장으로 한다는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말하자면 합동측과 고신교단의 갈등이 시 작된 것이다.그것은 쉽사리 잠잠해 지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갈등이 증폭되었다.다시 박사님이 날 부르셨다. “잠시 다른 병원에 가 있어라.미안하구나.일이 해결되면 곧 부르마” 다시 또 짐을 꾸렸다.당시 부산진역에 위치한 침례병원에 둥지를 틀었다.한번도 다른 병원에서 일을 해보지 않았던 나는 이 병원을 떠난 것이 이상했다.그러나 늘 그렇듯이 아무소리 없이 떠났다.이것이 병원을 두번째 떠난 사건이었다. 침례병원에서의 생활을 즐거웠다.나는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진료에만 열중할 수 있었고 부산에 이름이 알려진 탓에 환자들이 밀려왔 다.병원에서는 나의 출현으로 환자가 많아지자 서둘러 계약을 하자고 했다.나는 침례병원과는 5년동안의 계약을 맺었다.환자보는 일 이 즐거웠다.기회가 된다면 계약기간이 끝나도 침례병원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속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병원이 어려우니 다시 돌아와 달라는 박사님 부탁으로 나의 외도는 1년반으로 끝이났다.지금 생각해보면 한번쯤 박사님 말을 거역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신기하다.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타고난 순종인이 라고 말하기도 했다. 계약을 파기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박사님이 계신 복음병원에 오니 내 앞에는 앞이 안보이는 경제적 막막함만이 기다리고 있었 다. 6 복음병원에 돌아와보니 내가 떠날 때보다 상황은 더 나빠져 있었다.60병상 밖에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의료장비나 시설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게다가 빚이 많아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내가 잘 있던 침례병원을 그만두고 복음병원으로 돌아온 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말리는 소리가 많았다.“병원이 어려운데 고생하지 말고 그냥 침례병원에 있지” “그 유명한 장박사도 실패했는데 자네가 무슨 수로 병원을 일으키겠나.사서 고생하지 말게” 친구들은 사랑을 담아 나를 걱정하며 말렸다.더구나 교단 갈등으로 인해 병원일을 하나 결정하는 데는 많은 사람을 거쳐야 했다.나는 병원을 일으키고 싶었다.누구의 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지금 생각하면 겁없이 덤벼든 꼴이었다. “하나님,병원을 살려야 합니다.병원의 태동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해온 병원입니다.이제 병원 에 복주시고 저게 힘주셔서 부산에서 제일 가는 병원으로 만들어주소서” 기회만 있으면 기도했다.정말 병원을 부산에서 제일 가는 병원으로 만들어보고 싶었다.선생님 뿐만 아니라 내 청춘 역시 바친 곳이 바로 병원이기 때문이었다.팔을 걷어붙이고 병원일에 몰두했다.환자 돌보는 일과 병원성장을 같이 걱정해야 했기 때문에 늘 피곤했다 .취임한 지 얼마 안돼 병원 증축을 시작했고 4백병상 규모로 확장되면서 77년 종합병원으로 인가받을 수 있었다. 수술환자들도 다시 모여들었다.박사님에게서 보고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수술을 받으려는 환자들이 줄을 섰는데 다행히도 남들이 하기 힘들다는 수술들을 성공해 부산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6개월이 지나자 병원운영이 호전되기 시작하더니 기적적으로 1년만에 경제적으로 회복됐다. 이때 나는 주변의 도움으로 한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병원에 암센터를 개설한 것이다.당시 부산에서 암센터를 만들만한 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는 적중했다.국립원자력병원과 연세대병원에 이어 세번째로 암센터가 만들어지자 모든 사람이 놀랐다.다시 79년에는 4층으로 된 1천50평의 신관을 증축하면서 병상은 다시 7백50개로 늘어났다.누가 봐도 당당한 종합병원 체제를 갖추게 된 것 이다.병원은 정말 힘차게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과감한 투자,사실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다.투자가 적중하리라는 자신감이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병원을 증축하고 여러가지 사업을 펼 때 주변의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하지만 이같은 투자들은 고스란히 병원에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나에게 경영마인드가 있었다는 점이다.하지만 순간 순간 지혜를 주고 날 이끌어주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그것은 바로 의과대학 설립이었다. 아직까지 전문의료 인력의 공급이 부족한 현실에서 지방에서도 질 좋은 의료진료를 받으려면 그만큼 많은 인재를 배출해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반대가 쏟아졌다.그저 병원이나 잘 하면 됐지 무슨 학교냐는 비난의 목소리도 컸다.그러나 내 의견에 동조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특히 박사님이 가장 많은 힘을 실어 주셨다 7 많은 사람들의 우려속에 80년 고신대에 의학과가 증설됐다.나는 그것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다.일단 왜 학교가 필요한지 설명을 하고 동의를 구했다.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오히려 어렵다고 생각했던 인가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나는 이규호 문교부장관을 찾아가 대학설립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그렇다고 무턱대고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부산지역에 의과대학이 필요한 이유를 말했다.그는 장박사님과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병원과 고신교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다.그리고 그 역시 교인이라고 말했다.의외로 이야기가 쉽게 풀리는 것 같았다. 두번째 그를 찾아갔을 때 구체적인 이야기 없이 “기다려 보자”는 간단한 말만 하고 나를 돌려보냈다.느낌이 좋았다.지금도 마찬가 지지만 그 당시 나에게 흔한 말로 ‘빽’이 있을리 없었기 때문에 이장관의 말을 듣는 순간 ‘아 하나님이 우리 편이구나’ 하는 생 각이 들었다.그저 돌아와 학교 인가가 나게 해달라는 기도만 할 뿐이었다.그런데 정말 인가가 나고 81년 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아 무도 믿지 않았던 일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틈만 나면 전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병원에도 첨단의료장비와 연구진료기기를 도입했다.날로 기술이 발달 하는데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고신대 의과대학 설립은 부산지역 의료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자부 한다. 그 이후로도 유난히 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의사로서 병원경영자로서 그리고 행정까지 도맡아 몸이 몇개라도 다 처리할 수 없을 정 도였다.외국의 차관 등을 얻어 각종 건축과 의료장비 도입등을 해낼 수 있었고 다양한 국내외 의학행사들을 유치했다.또한 의학교육 에 필수적이면서도 국내에서는 그 수가 턱없이 모자라는 기초학 분야 등의 저명교수들을 국내외에서 학교로 모아 의학부를 본궤도에 올려놓는데 최선을 다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엇인가를 하자고 마음먹으면 전후 좌우 사정없이 밀어붙이는 내 성격은 때론 꽉 막혔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추진력을 인정받기도 한다.잘은 모르지만 당시 많은 잡음 가운데서도 밀고 나갔던 학교와 병원증축은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발전해온 고신대 복음병원은 95년 지하 2층 지상 15층의 새 병동을 신축하고 총 1천3백70병상을 갖춘 국내에서 세번째 손안에 드는 병원으로 성장했다.지금 병원은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우뚝 서있다.병원을 볼 때마다 장박사님의 병원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시간이 흘러 선생님 곁으로 갔을 때 조금은 떳떳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대부분 8시쯤이면 집에 들어간다.70인 나이임에도 아직도 진료를 하고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타고난 체력을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있다.거기다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 신앙적인 생활도 나는 지탱해주는 힘이다. 사범대학 시절 나는 매일 성경책만 끼고 살았다.거기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세상 그 어떤 책보다 달콤하고 버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 다.난 누구에게나 성경구절을 인용해 이야기했고 성경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러나 연애시절 만났던 믿음이 없던 아내는 세상에서 나 를 가장 재미없는 사람 취급했다. 8 아내와 나의 만남은 참으로 이상했다.왜 이상하다는 표현을 쓰냐면 내가 결혼할 여자를 선택해 가족에게 소개를 시킨 것이 아니라 이미 가족들에게 낙점을 당한 그녀를 나에게 선보였기 때문이다.어느날 형님은 넌지시 나에게 결혼을 종용하기 시작했다.“형님,아직 결혼할 때가 안됐어요.지금 학생이기도 하고.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도 없구요” “여자는 걱정하지 말아라.이미 준비돼 있다” 아내는 육군간호학교 간호과장이었다.병원에 근무하면서 형님을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형님은 미리부터 내 짝으로 점찍어 공작을 펴 왔던 것 같다.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이미 우리어머니에게까지 인사를 마친 상태로 자연스럽게 공인된 며느리였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서울에 있는 아내를 한달에 두번씩 만나는 식의 데이트를 했다.우리 데이트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재미없었 다.워낙 유머감각이 없고 잘 안웃는 나에 비해 그녀는 상당히 로맨틱한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게다가 아내는 영화광이었다.연애시절 하루에도 2편씩 영화를 보자는 그녀를 달래다가 할 수 없이 극장으로 끌려가면 앉자마자 졸기 일쑤였다.그때마다 아내는 나를 핀잔했 고 정말 매력없다며 당장이라고 헤어지자고 말할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아내에게 내가 재미없는 사람으로 찍힌 것은 바로 편지 때문이었다.우리는 헤어져 있는 탓에 편지를 자주 이용하곤 했는데 바로 내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흔히 말하는 연애편지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훈육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듯 공부 를 열심히 해라,교회에 열심히 다녀라,성경을 읽도록 해라 등등 잔소리 같은 내용에다 내가 읽고 맘에 드는 성경구절을 줄줄이 적어 보냈다. 교회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아내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도,좋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그렇게 3년 연애아닌 연애를 한 끝에 우린 결혼했다.물론 아내가 우리 식구 앞에서 교인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고 나서였다.현재 아내는 권사로 열심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 지금도 아내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겐 남들과 같은 신혼시절이 없었다는 점이다.결혼을 하고는 바로 인턴생활에 들어가 정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인턴시절 통통 털어 1주일 정도 집에 들어왔을까.아내는 밖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더 많은 나 때문에 아예 형님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인턴시절이 끝나고도 우리 부부는 생이별을 하며 살았다.그때는 혼자 계신 장박사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박사님을 혼자 놔두고 아내와 함께 있기가 미안해 숙소를 박사님께로 옮겨서 지낸 적이 더 많았다.지금도 아내가 제일 섭섭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번도 출산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점이다.아들만 둘을 낳은 아내는 아이를 낳고 며칠이 지나서야 남편을 얼굴을 보게 되곤 했다.아내는 지금도 무심하고 일밖에 모르는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하곤 하는데 미안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아내를 가장 섭섭하게 했던 일은 78년에 닥친 불행이었다.이 사건은 의사라는 내 직업에 회의가 들기도 한 사건 이다.그건 다름아닌 의과대 합격통지서를 받은 다 장성한 큰아들을 연탄가스로 잃은 것이다.아내와 나는 미친듯이 울며 아들을 살려 내려 발버둥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이 일은 두고두고 의사로서 겸손함을 일깨워준 사건이기도 했다. 9 가끔씩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원장님,골프는 일주일에 몇번이나 치세요” 당연하게 묻는 이 질문에 난 할말이 없다.“아직까지 골프채도 안잡아 보았는데요”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 기 일쑤다.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살면서 특별난 취미나 즐겨했던 일이 그다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평생을 지치지 않고 했던 일이라고는 병든 사람을 진료한 것과 병원을 위해 지낸 것이 전부다.병원에서 나온 자동차가 있지만 웬만한 거리면 걸어다닌다.그것이 나의 유일한 운동방법이고 건강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장이라고 하면 고급차를 몰고 다닐 것으로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내 차를 보고 놀라기도 한다.하지만 난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중요 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또한 이제까지 살면서 부족한 것 없이 살았다고 자부한다.어찌보면 일용한 양식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던 장박사님과 오래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밴 절약정신일지도 모른다. 또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도 한다. “박원장네 식구만 모아도 병원 하나 차릴 수 있는 것 아니오” 형님과 나,그리고 그 자식들을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내과 2명,일반외과 1명,흉부외과 1명,정형외과 1명,소아과 2명,안과 1명,마 취과 1명 등 9명의 의사가 우리 집안에 있다.충분히 병원하나를 개업하고 남을 만한 인력이다.그러나 난 한번도 개업을 생각해본 적 은 없다.‘월급쟁이 의사’를 천직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요즘 시간이 있을 때마다 내 머리 속을 채우는 것은 사람은 들고나는 자리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많은 후배들이 병원에 들어오 면서 난 그들의 영역이 더 넓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그들이 뛰어난 의술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길 원한다.그것은 처음 이 병원이 생긴 목적이며 하나님이 의사들에게 주신 달란트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복음병원 50주년 기념사업에 전심을 기울이고 있다.2003년으로 영도제일교회에 문을 열고 시작됐던 복음병원이 어느덧 반 세기를 맞게 된다.나는 마지막으로 병원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 놓고 싶다. 그동안 신경쓰지 못했던 병원역사를 제대로 정리해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으며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는 장박사님의 기념관도 새롭게 꾸며 놓고 싶다.또한 암센터에 이어 심장센터를 개설할 예정이다.생활환경이 개선되고 고령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심혈관 환자가 증가 될 것에 대한 대비책이다. 그리고 고신의료원을 가장 기독교정신이 흐르는 병원으로 만들고 싶다.그것은 이 병원의 설립자인 장기려박사님의 뜻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나는 평생 박사님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나를 이곳에 있게 해준 사람 역시 박사님이 고 그분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역시 나이기 때문이다. 현재 고신대병원은 양적으로 커져가는 것과 함께 질적으로 꽉 찬 병원이 되려고 온 직원이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다.우리의 이러한 노력은 새 천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나는 기도한다.처음과 끝이 되시는 주님이 이곳에 임하시어 병든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 시며 우리 의사들을 그것의 도구로 사용해달라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