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시와 시비평, 우리 문학을 위해 함께 가자 1. 치열한 시정신의 형성을 위하여 현재 문학적 실행의 측면에서 정수로 여겨져왔던 시의 우위성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평과 소설이 이분체계를 이루고 있는 듯한 현상에 대해 애써 과거를 시의 황금 시절이란 이름을 붙여 신화로 만들 필요 또한 없다. 이런 여파인지 문학 자체보다는 훨씬 더 주변적인 논의들이 비평의 핵심테마로 떠올라왔다. 가령 시와 대중문화, 시와 뉴미디어 등의 새로운 형태의 문학실천에 대한 주목 등은 모두가 심각한 변화의 지표들이다. 문학 염세주의자들은 어둡고 침울한 시선으로 이러한 변화를 바라본다. 혹은 우리들 중에 낙관주의자들은 시의 독자성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을 특히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어떤 입장을 선택하건 간에 시적인 실천에 있어서 거대하고 그리고 분명히 되돌이킬 수 없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분명하다. 특히 매체의 역할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그것이 재구성과 편집이냐 창조적 양태의 변조냐 하는 양각도에서) 우리가 질서있게 파악해온 시라는 범주를 혼란케 하는 것이다. 디지털 복제 기술은 전통적인 시적 실천을 우회하는 길을 허용하고 있기에 간혹 이는 시라는 장르적 개념을 확인해보려는 논의들과 경계 없이 교차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볼 것은 이미 우리의 현대시는 타쟝르 간의 많은 차이들을 용해시켜온 동시에 장르적 개별성을 강화시켜왔다는 점이다. 이런 장르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지난 90년대의 시비평은 자주 시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거나, 90년대 초반 우리 현대시의 ‘거대한 정체’를 건드려야 하는 중요한 논점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정신주의> 논쟁을 통해 제출되었으나 참여필자도 거의 없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 97년 김준오 교수의 ‘인간적인’인 중재로 소멸되었다. 이처럼 선명한 결론 없이 무기력한 ‘다양성’의 합의하에 진행되어온 시와 시비평은, 각기 다른 초점으로 작품론 중심으로 각개전투를 했고, 우리가 모색해보아야 할 시정신의 향방, 시에 대한 공준은 거의 공황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라는 장르의 생태적 조건들에 대한 진단과 결부된 ‘시의 죽음’ 논의로 전개되어야 했다. 그렇게 문학의 죽음을 논의하면서도 상을 주고, 잡지를 꾸리고, 때로는 돈까지 안겨주려 기를 썼던 시대에 어쩌면, 적극적인 시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치열한 시정신의 형성을 위한 노력해오기보다, 문학의 자존의식만을 두둔하기에 급급해왔다는 사실은 한번쯤 반성해야 할 문제이다. 나는 그러한 현상이 시 자체의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담지 못하고, 우리의 시단에 어떤 변화를 유도해왔는지에 대해 몇 가지 논의를 개진해보려 한다. 여기서 나는 시작품보다는 시비평에 가급적 중점을 두어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우리의 시비평이 진정한 시의 독려자로 거듭 태어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머지 않은 80년대만 돌이켜보아도 시인과 비평가는 우정어린 경쟁관계를 유지하면서 한 시대의 문학정신을 치열하게 점검하며 속보했다. 하지만 요즘 우리의 시와 시비평은 어떠한가? 비평가는 자신의 논리에서 좀 벗어나 작품을 세심하게 눈여겨보려는 열정을 상실하고, 그런 평단의 기류를 지켜보며 시인들은 ‘비평무용론’을 들먹이거나 도리어 평론주도적인 기류에 맞춰 영합적인 창작을 하고 있는 분위기는 없는 것인가? 시와 시비평은 생산적인 방식으로도 파괴적인 방식으로도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어쨌든 그 양자는 당대의 시정신을 함께 구축해가는 동반자로서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간과하고 있다. 내가 우리 시대의 시정신을 점검해보기 위해 가장 긴박하게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안은 세 가지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첫째, 시의 죽음논의와 관련된 폭넓은 시현장의 문제, 둘째는 시의 질적 저열화 문제를 ‘새로움의 정체’와 결부시킨 논의이다. 셋째는 비평적 공준과 관련된 시의 아이템화 문제이다. 이 세 개의 문제들은 무언가 잘못된 뿌리에서 뻗어나온 각기 다른 가지들일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지면이 주어지기 전부터 너무나 하고픈 말이 많았다. 이 글은 처음부터 분량을 조정하기 힘들었을 만큼 길었음도 고백해야겠다. 나는 독자들이 이 글을 끝까지 꼭 읽어주길 간절히 기대한다. 사실 이 글에서 제출하는 논점 외에도 제기하고 싶은 논의들이 상당히 많았지만 혹시나 다음 기회가 닿는다면 그 때 언급하고 싶다. 모든 길은 시를 숭배하는 문학의 제국으로 이른다. 2. 시와 ‘따로가는’ 비평, 현장의 문제 우선 오늘날의 시에 대한 가장 가혹한 은유였던 ‘시의 죽음’의 문제부터 다시 논의해보자. 시가 죽었다는 논의의 기원은 1934년 에드문트 윌슨의 ꡔ시는 죽어가는 기술인가?Is Verse a Dying Technique?ꡕ라는 논문이다. 윌슨이 18세기 이후의 서구문학사를 더듬으며 시의 역할이 점점 협소해지는 것을 관찰하며 제시한 논점은 낭만주의의 격렬한 폭발 이후 시가 궁극적으로 ‘서정적 매채’로 스며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과학이 발전시킨 대중매체는 드라마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시의 영역을 탈권했고, 야망있는 작가는 시가 아니라 마침내 산문을 쓰기로 결단한다. 계몽주의 이후의 문학적 추세에 대한 그의 분석은 시의 장소에 대해 회의적인 메시지를 줄줄이 쏟아놓고 있다. 그의 논리는 현대시의 회의론자들에 의해 자주 옹호되거나 때로는 시에 대한 자기점검을 요구하는 텍스트로 중요하게 분석되었다. 개중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비평적 반박은 조셉 엡슈타인의 ꡔ누가 시를 죽였는가ꡕ(1988)라는 비평이다. 우리는 이광호가 동일한 제목으로 우리 90년대 시단에 대해 중요한 점검(ꡔ문학동네ꡕ (1996년 겨울. 특집 <누가 시를 죽였는가―90년대 시의 체위>)을 행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일단 엡슈타인의 이야기부터 하자. 윌슨과 엡슈타인의 중요한 차이는, 윌슨이 시의 문화의 점차적인 몰락을 강조했지만, 엡슈타인은 지난 두 세기의 중요한 모더니스트들, 엘리어트나 스티븐스같이 소멸하는 낭만주의 시대의 시적 성취를 현대시의 작은 시적 실행과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인들이 대학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웅크린 전문가로 존재하는 시대에 그는 시인 자신과 창작지도를 하는 문학기구를 시를 죽여가는 범인으로 기소하고 있다. 그의 논의는 비평과 문학매체에 폭발적인 점화를 했고, 이는 적어도 30명의 비평가가 달라붙은 논쟁으로 번지고, 시인 헨리 테일러는 두 개의 반박문까지 출간했다. 그렇게 맹렬하게 자기중심부터 들여다보자는 엡슈타인의 강조는, 90년대 한국의 시적 현황에 대해 고투어린 진단을 내놓은 이광호의 논조와 상당히 닮아있지만, 그것은 적시에 다른 맥락에서 터뜨려진 고마운 폭탄이었다. 시의 죽음, 모든 현대시에 선언된 그 난폭한 공리는 과연 정확한가? 이론과 현상은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이광호의 <누가 시를 죽였는가―90년대 시의 체위>)는 우리 시와 시비평과 충격과 자극을 주었고, 대단히 심각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광호의 글은 부정의 방식으로 시를 살리기 위한 대단히 열정적인 비평문이었다. 또한 우리 시단의 중요한 문제점들 “오히려 그것은 시가 이러한 위기론의 중심무대에서 논의 되지 못할 만큼 문화적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가 문학의 위기라는 담론의 장에서도 변방에 머 물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시가 현대 문학 장르 안에서의 주도권과 대표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문학 전반의 위기에 대한 논의에서 도 중심으로부터 비껴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지금 우리는 시가 죽기도 전에 시를 먼저 죽이고 있는 것인가? 섣부른 예단과 저주로. 오히려 시를 죽이는 것은 이러한 무책임한 추측과 풍문들인지도 모른다.”//“시장르는 그 탄생에서부터 상품성과 영상매체와의 호환성의 문제에 있어 소설보다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문화산업의 논리에서 보면 시는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좁은 시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사태들이 이 땅의 모든 시를 당장 절멸시키지 는 못할 것이다. 시의 문화적 의미가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되는 지금에도 여전히 수많은 신인 시인들이 탄생하고 있고 헤아릴 수 도 없이 많은 시인들이 시를 쓰고 있다. 그리고 문화산업의 거친 파고 속에서도 여전히 대중과의 단절을 자신의 미학적 자존심의 준거로 삼는 시인들과 해석 공동체가 만들어가는 전문적 문학집단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이 비록 한줌의 문학 혹은 자기들끼 리 서로 어루만져주는 문학이라는 한계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문학집단의 존재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그러면 왜 아직 우리는 시를 읽고 시를 써야 하는가? 어떤 변명과 요청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어떤 저항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시가 가진 언어적 에너지 중의 하나인 역설의 논리에 기댄다면 위기는 위험한 기회이며, 죽음의 기회는 생성의 기회이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상징적 질서에 의해 고도로 관리되는 사회이다. 김수영의 수사법대로 시가 아직 침을 뱉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가 자본주의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교란하는 기호의 반역적 열림을 통해서 가능하다. 경제적 합리성과 언어 구문의 합리적 질서를 뒤흔들면서 시는 사회질서의 내부로부터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조목조목 제출되어 있는 소중한 글이었다. 나는 우리 시비평의 유유부단한 궤적이 이광호가 제출한 문제, 즉 ‘문화적 주변부’로 밀려나는 시의 ‘변방화’ 문제와 절대로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다시 90년대로 거슬러가 볼 필요를 느낀다. 먼저 엡슈타인과 이광호가 함께 제출한 문제들의 중심은 문학기구라는 자기중심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문학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문학전문가라는 타이틀은 물론, 짜투리 글 하나 제대로 실을 수 없는 처지이고, 이는 실상 가장 건드리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에, 이광호의 글은 안타까운 문제제시의 수준에서 무언가 벗어나지 못하고 느낌을 던져줄 수밖에 없고 실제로 보완되어야 할 몇몇 문제점을 회피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광호가 시의 죽음 논의에서 회피하고 있는 문제, 즉 잡지라는 ‘매체’를 비롯한 문학기구가 어떤 시적 암시를 끝없이 던져왔다고 믿는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관찰했던 작은 사건이 우리 시비평의 현장에서 중요한 암시가 있으리라 믿고 돌이켜본다. 2000년 ꡔ문학과 사회ꡕ에서 송찬호를 집중 조명한 박혜경의 <시, 허공 중에 떠 있는 말>에서 ‘산경’에 대한 시에 대한 오독의 문제를 둘러싼 잡음이 일었다. 그 난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한 시인을 선택하여 집중조명해주는 난이었고, 문학적 평가를 가급적 호의덕으로 내려주는 것이 관례인 난이었다. 하지만 그 지면에서 박혜경은, 보통의 비평가라면 시인이 상처받을까봐 엄두도 못낼 솔직한 평을 털어놓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송찬호 시의 모던한 언어와 시적 에너지의 광휘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약간은 의외로 여겨졌을 수도 있을 그의 시적 방향(ꡔ붉은 눈 동백ꡕ)에 대해 약간의 경계와 우려를 표명한 글이었다. 이미 김수영 문학상 수상이라는 기존의 문학적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비평가로서 솔직한 견해를 넌지시 피력한 박혜경의 비평문에는 사실 진실한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을 개진한 과정에서 약간 무리하게 읽혀질 수 있을 텍스트 분석이 있었기에, 시인이 항변할 수 있는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좀더 치열하고 박력있는 시를 열망했던 비평가의 기대와 심혈을 기울여 공들여 쓴 작품에 좀더 세심하고 치밀한 읽기를 고대했던 시인의 시각이다. 그런 열정적인 교류가 함께 할 때 우리 시의 생산적인 에너지가 길러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상 비평가와 창작자의 관점의 차이나 해석상의 갈등은 대단히 해묵은 문제이고 얼마간 그런 갈등은 불가피하다. 비평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떤 부분은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한다. 시라는 텍스트의 세세한 전체가 아니라 그것이 과연 현실적인 맥락에서 어떻게 가치평가될 수 있는지, 전체적인 문학기류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설명되어야 하는지 등을 염두에 두고, 중요한 부분들을 자신의 비평적 논리에 전이시켜 의미지세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한 잡지로부터 ‘시인의 입장에서 비평 읽기’라는 이에 대한 사안을 다루어달라는 원고청탁을 받은 일이 있으나, 양자의 입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던 나로서는 그 원고를 수락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우리의 시를 위해 시와 비평간의 관계가 반드시 중요한 문제로 조명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다. 여기서 다시 곰곰 생각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왜 시비평이 필요하며 시비평이 무엇이냐는 그런 질문이다. 오늘날 적어도 시비평이라는 말은, 시가 가진 독특한 장르적 특이성, 비평이라는 공적 담론의 영역 등에 접근하는 방식이 조금 상이하거나 글쓰기의 경험 등에 있어서의 독특성을 기반한 비평적 선택과 문학적 실천의 범위를 응축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라는 대상의 특이성과 이로부터 결과하는 비평의 특이성, 그리고 일종의 비평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선택적 글쓰기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근자에 그저 원고청탁에 맞춰 ‘주문생산’되는 시비평이 너무나 무난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다. 제도가 한정하고 제한하는 의미와 싸울 수 있는, 보다 높은 문학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치열하고 고투어린 비평문을 찾아보기 힘들고, 잡지나 지면의 관행이나 기구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할 뿐 보다 능동적인 의미를 밀어내는 시비평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본질적으로 시는, 시를 체제나 환경의 언어의 일부로 만들고자 하는 현실에 불복하는 가장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모험이다. 문화적으로 주형화된 의미를 깨뜨리는 강력한 기투이다. 심장 대 심장으로 말하자는 것이다. 그런 힘찬 비젼과 목소리를 건져올리고 사회적으로 의미화하고, 새로운 시정신의 형성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시비평이 오늘날 맥없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가장 반동적인 말로 제도와 합세하여 잔혹하게 언어의 카오스를 거세할 때 시는 대단히 순환적이고 순응적인 특징을 띄게 된다. 이런 시비평의 활력의 상실은 문학의 근본적인 쇄신력을 가장 강력히 저장하고 있는 시의 의미를 주변화시켜가는 매체의 문제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우선 오늘날 매체가 시비평마저 얼마나 주변화시켜왔는지를 검토해보면 문제의 본질이 분명해질 것이다. 오늘날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비평은 서평, 해설, 월평, 재수록, 날개글 등의 다양한 양상으로 실현되며, 표면적으로는 발표공간이 산만하게 확대되어 보이는 현상과는 반대로 중심지면으로부터 퇴각당하는 이상한 상황에 봉착했다. 그리하여 시비평이 온당히 가져야 할 지면은 서평, 월평, 대담, 재수록 등으로 상쇄되거나, 시인론, 작품론, 발제론 등 다양한 차원에서 시를 논의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고 주변화될 것을 강요당했다. 가령 작년에, 이숭원의 시집해설을 문제삼은 최인자의 서평 <그 여자는 거기 없었다>(ꡔ문학세계ꡕ 2003년 봄)는, 아마도 우리의 시비평의 현장을 잘 보여주는 작은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시집의 해설문에 대한 메타비평이 비좁은 지면이 할애된 서평형식으로 등장하는 것을 작년에 처음 본 것이다! 엄청난 지면을 빌려 휘황한 메타비평을 쏟아놓는 저간의 기류에 비하면 얼마나 특이한 일이었던가. 이런 양자의 시비평은 일정 정도 우리 시대의 시비평이 지난 독특한 상황과의 관계 속에서 판단되어야 할, 분명히 우리 시대의 시비평이 놓인 현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 시비평이 이런 사태를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가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영역이 이렇게 주변화, 파편화되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시전문지의 탄생으로 출구가 터뜨려졌다는 점이다. ꡔ시인세계(2002)ꡕ, ꡔ시작(2002)ꡕ, ꡔ시평(2002)ꡕ등의 신생 시전문지의 대량폭발 “시 전문지는 적지 않게 있다. 아마 시라는 장르 자체의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시인들에게 지면을 개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시 전문지의 존립을 가능케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월간(月刊)을 지향하면서 상당수의 잡지들이 원고료를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차라리 격월간 등으로 발행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그 비용으로 원고료 지급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계간 시전문지 『시인세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잡지는 물량 패권주의 대신 원고의 질적 특성을 추구하면서 종합 문예지 못지않은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다.”(박철화 ꡔ대산문화ꡕ 2003년 가을호 <문예지 홍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문예지 창간, 다양한 입장의 공존과 경쟁의 징표>) 은 박철화가 ‘물량패권주의를 버리고, 질적인 다양성의 세계로 분화할 때“에 접어든 현실적 상황을 역설하기도 하지만, 이런 현상 자체가 문단의 ‘공기’로서 여겨지는 주요한 종합문예지들이 얼마나 시에 인색했던가를 매체적 측면에서 반증하는 것은 아닌가? ‘발행비 부담’을 무릅쓰고서도 강행되는 시전문지의 폭발은 이미 있던 우리 시비평의 협소화 문제를 매체라는 통로에서 다시 언급하는 상황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시와 관련된 문제들을 거론하면서, 나는 이런 시문예지의 폭발로 매체의 문제가 사라졌다고 전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나는 시영역의 협소화를 강요하던 오래된,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형태의 권력이 이제 사라졌노라고 가정하지도 않는다. 이와 달리 나는 지난 2-3년간 우리가 목도했던 시전문지의 폭발이 침묵하는 시와 시비평의 성격 변화에 있어서 어떤 심각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먼저 오늘날 시비평의 영역은 대단히 넓어졌지만 동시에 우리의 시비평의 현장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짚어보고 싶다. 일단 수많은 시작품을 제대로 해설, 평가하고 그 현재와 미래를 고심하고 토론해야 할 전문적인 비평가의 수가 손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2002년 4월 20일 통계로,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문인은 6,048명으로 장르별로 보면 시인이 2,637명으로 43.6%를, 수필가가 1,288명으로 21.3%를 차지했다. 이밖에 아동문학가(705명), 소설가(594명), 시조시인(540명), 평론가(134명), 극작가(117명)의 순이다. (이승하, 「2001년도 문학분야 현황분석」 ꡔ문예연감ꡕ 2002. 한국문화예술진흥원) 그 중에 시비평 인구는 대단히 소수로 ‘구역화’되어 있다는 사실 재미있는 것은 약 5년 전쯤 만해도 ‘나는 시비평가야’ 라는 식의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비평가적 정체성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나 또한 시비평에 대한 원고를 쓰긴 했지만 내가 시비평가라고 한정지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나는 시비평가로 존재하며, 그런 방식으로 갈 것이다. 나는 시비평가라는 말을 ‘비평가’라는 말과 분리해 쓰게된 근래의 기류에서 마치 하나의 지역구처럼 떨어져나온 ‘그들’의 뉘앙스를 느낀다. 과는 어울리지 않게, 결렬하게 쏟아지는 시적 요구는 문학기구적 수용을 넘어선다는(출판사에 적체된 시집 수를 생각해보라) 단순한 사실을 주목해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잡지 중심의 문학매체가 창작적 가치보다 해석적 가치를 우선하는 분위기를 형성해온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요사이 늘고 있는 것은 문학 자체가 아니라 문학에 대한 ‘관심’과 해석이다. 잡지가 마치 지식의 진열장처럼 변해버림으로써 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최대의 매너를 갖추었던 비평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90년대 이후 시 속에 일어난 지진이 격렬했기에 작품론 위주의 시비평은 얼마간 당위적이었으며, 현장에서 시비평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평단에서는 평론을 위한 평론, 소설평론 주도적인 경향이 있어 왔고, 마치 시비평을 잡지의 구색맞추기 식으로 배치하거나 문학적 전위대에서 퇴각시키는 발표 기회의 차등, 일종의 시비평의 평가 절하라는 안보이는 암시를 잡지들은 부단히 던져왔다. 물론 우리 평단 전체에 깔린 그런 암시의 많은 영향이 시비평 속으로 스며들었다. 근자에는 시비평을 마치 아무나 쓸 수 있는 단평적 비평문으로 여기거나, 대학원생이 시비평을 분점하거나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거대문예지의 편집진의 구성에서도 시비평가는 극소수임을 역력히 관찰할 수 있고, 그러한 문학적 초점에 따라 기분좋으면 시에 특집기획을 할애하거나 지면을 나눠주지 않았나 우리는 의심해볼 수 있다. 그렇다. 오늘날 시비평은 시가 푸대접받는 것만큼이나 작게 존재한다. 나는 시비평에 작품론이 부재하다는 시비평가들의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 시의 지형도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는 전체에 대한 통찰을 통해 비평의 넓이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지형도 속에서 자기 비평의 위상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비평적 입장이나 주제의식을 개념화하고 이론화하여 좀더 개성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논리를 가지는 일이 요청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형엽 <시 비평의 새로운 지형> ꡔ문학동네ꡕ 2003년 여름호) 라는 오형엽의 지적은 우리의 시비평이 어떤 전환점과 기틀을 마련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진단적인 차원에서 제시해준다. 시적인 특질의 해명은 시라는 장르의 특이성 때문에 너무나 중요하다는 걸 적극 인정하지만, 일단 매체 차원에서 소외되고 있는 시의 현실이 지속되고 있고, 시현장에 대한 성실한 검토조차 없는 다양한 비평적 메시지가 시비평의 변형(단평으로 치환되거나 매체의 뒤안으로 밀려나는)의 양상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면, 작품론만이 시비평의 거의 전영역인 듯한 현재의 기류가 합리화되어서는 안된다. 잡지의 표면만 대충 훑어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마치 문학이 가야할 교훈적인 지침을 제공하듯, 잡지가 탄생시킨 기획들은 단 한편의 시도 제대로 상재하지 않는 오만하고 특권적인 위치에 군림했다. 가령 ꡔ세계의 문학ꡕ 2003년 봄호에 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흘낏 넘겨버리기 쉬운 작은 사실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 종합지가 아니었던가. 잡지가 그렇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호히 더 추가되어야 할 문제는, 오늘날 ‘이론의 감각화’라고도 할 수 있을 잡지의 방향이다. 이미 잡지의 컬트가 된 특집 이슈가 우리의 시에 있어 얼마나 실제적인 역할을 해왔는지는 좀더 심각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로 보인다. 시의 작품론은 객석에 맡기고, 무대는 대개 기획단골의 평론가에게 맡기는 추세이지만, 지식이 백화점식으로 편집 기획된 이론지는 내가 보기에 가장 문학적 품격이 낮은, 그저 지식의 진열장과도 같은 세속적인 문화지일 뿐이다. 여기에서 간과될 수 없는 한 예는 대담이라는 특집 경향이다. 현장의 구도를 읽어내기에 대담만한 좋은 글은 없다. 2000년이 되지마자 봄호부터 대담이 휘황했다. 가령 21세기를 여는 특집 좌담에서 90년대 시에 대해 장정일과 박노해만 이름이나 간단히 언급되었다면(ꡔ문학동네ꡕ는 2000년 봄) 시의 현장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거나 클래식 대담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특정지에 한정된 지적이 아니다.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우리의 풍경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아직 구도화되지 않은 기류를 점검하고 윤곽을 잡으며 들어가자는 가장 시의적인 문제를 가지고 대담은 이루어진다. 어느 잡지나 자주 겹치기 출연하는 대담꾼들의 안배는 ’잘 빚어진 항아리‘의 이미지를 던지지만, 철지난 선례를 들며 끝나는 힘없는 대담, 신인에 대한 점검도 현장진단도 없이 문학의 미래를 기획하는 대담은 이미 상품도 아니다. 대담의 기본적인 덕목은 ‘성실성과 자극’일 것이다. 한 해를 진단하는 대담이라면 그 해에 너무 바빠 시가 돌아가는 기류를 모른다면 적어도 한 해 전의 시현장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순간의 정책이 한 해의 풍작을 망치는 것이다. 이런 현장의 기류를 오래 전부터 지켜오면서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분명히 언급하고 싶었다. 단호히 말하건데, 나는 시집의 해설밖에 참조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자주 글을 썼으며, 오래도록 그런 신간시집들을 읽어내는 작품론의 최전방에 서 있었다. 그리고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선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거대한 쓰라림이다. 오히려 시를 위한 적극적인 옹호를 할 수 있는 비평이 필요하지 않은가. 시라는 글쓰기 공간 안에서 폐쇄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적인 의미들은 사회적, 시대적 의미를 응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의미를 파악하고 매개하기 위해 시비평은 필요수준의 지면을 가질 필요가 있고, 때로는 새로운 방향모색을 위해 적극 기획의 이슈로 제기되어야만 하며, 그것은 우리의 평단이 시비평에 당연히 제시해야 하는 의무이자 곧 매체의 당무이다. 2. 무책임하게 쓰이는, 너무나 낡아버린 새로움이란 말 새로움이란 말은 우리의 평단에서 현재 ‘무정부주의적’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가 현금에 생산되는 시에서 ‘새로움’의 자질을 검출해보려는 행위는 현대문학의 키워드인 현대, 새로움을 ‘실행’적으로 확인해보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탈현대적 기류를 반영하고 있다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말인지, 현장에서의 시기적 문제인지, 그저 심리적 반응에 의지한 수사인지에 대해 우리는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시가 어차피 새로움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대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과연 ‘새로움’은 어디에서 발단된 이념인지 고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 시라는 것이, 일종의 비평적 관점의 표명과 그와 함께 추적될 수 있는 지적 조건을 지닌 역사적인 구성물로서의 쟝르이라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시가 기반하고 있는 아방가르드적 정체성은 반관습적인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지난 여름 ꡔ시작ꡕ(2003년)의 대담에서 최근의 현대시와 관련된 이상한 기미들, 특히 현대시와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음을 논한 바 있다. 이를테면 관습으로부터의 이탈과 정착이라는 시적 양면성의 문제이다. 이탈의 요소는 시의 장르적 의미를 계속적으로 창조하고 또 재창조해나가는 과정과 이제까지 그러한 의미들을 배제해왔던 제도와 전통에 대해 도전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창조와 도전이 촉발되는 순간은 이를테면 ‘다른’ 시를 선언하고 나오면서 수사적 익숙함이 갖는 부정적인 함축을 거절하는 순간이나, 시적 노선을 의식적으로 재무장시키는 순간, 그리고 시운동 등을 주장하는 순간 등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갖는 특징은 전통적인 표현 방식에 대한 전복의 표출로서의 ‘복수의 의미가능성’ “작품은 이념의 단일한 의미 체계망 속으로 환원되지 않고, 역으로 단일한 장르의 이념과 의미에 대해 복수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 복수의 의미의 가능성이야말로 또한 언제나 새로운 작품의 존재 가능성을 허용한다. 그러므로 이념의 단편으로서의 작품은 그 자체 내에 중심을 갖는 하나의 집중된 텍스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장르 전체의 통일적 연관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일적인 것에서 배제되어 있는, 따라서 전체를 넘어서 있는 새로운 연관을 만들어낸다.“김진수 <서정시의 지평과 새로운 모색> ꡔ문학과 사회ꡕ 2001년 겨울호) 을 띤다. 우리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있었던 공격적인 시의 저항적 형태들과 거기서 드러낸 낯선 자기 표현의 형식들을 돌이켜볼 수 있는데, 가령 거기에는 황지우나 이성복이 있었고, 죽음이 시학으로 흔히 지시되는 90년대 시의 만가적 감수성을 지적할 수 있다. 2003년 가을경만 해도, 함성호 성기완과 같은 시인들이 ‘시를 나눠주겠다’는 식의 퍼포먼스를 하는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었다. 현대시 자체가 과거의 시적 관념에 대한 비판적 실행이요 운동으로 발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격한 카니발적인 저항 방식이 지닌 목적은, 낯선 차이의 표명을 통해서 현상을 유지하려 하거나 다양한 배타성을 강제하는 형식들에 맞서고자 하는 강력한 시정신의 형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들 속에는 다시 포함에 대한 주장, 다양성의 수용에 대한 주장, 대안적 존재 방식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 대한 주장, 그럼으로써 시적인 것이라는 미적 영역을 확대시킬 것에 대한 주장이 함께 펼쳐지고 있다. 비록 이탈과 소속이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리킬지라도, 이 두 가지가 시비평이 애용하는 ‘새로움’이란 말과 가지는 관련성은 적지 않다. 이탈하는 움직임 없이는, 자기 방어가 잘 돠어 있는 기존의 엄격하고도 편리한 의미체제 속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탈은 현 상태와 깅고한 편견들을 거울처럼 비춰냄으로써 (놀랄 것 없이 그러한 이탈적 계기들은 격분과 논란을 이끌어 내기 쉽고 사실상 이것이 그들의 이탈이 지닌 목적이다) 이미 정착된 고정관념을 부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비평은 과거의 시적인 정체성을 이반하는 이런 틈을 발견하고 그것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정당성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시가 주장하는 ‘새로움’의 정체일 것이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렇한 새로움을 논의하면서도 지나치게 낡아보이는 온건함이 왜 그리 오래도록 우리 시를 지배하느냐는 물음이다. 현대에 와서 시적 개성을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시정신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자신의 시적 개성을 물화한 대중추수적인 시와 본격시(용어가 불안해서 미안하다)의 분할은 90년대에 분명히 보였다. 우리는 불온한 텍스트를 생산하도록 훈련받아왔다. 전체 의미의 장을 교란시키는 전통에 대한 질문에서 현대시가 시작된다는 사항부터, 혁신적인 쓰기/읽기가 가능하다는 후기구조주의 이론에 이르기까지 알차게 공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움을 지향한다는 표면적인 논리와 현실적 기류는 일치하지 않고, 어디선가 불안한 갈등과 파열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새로움을 옹호하기 위해 우리가 자주 기대었던 텍스트가 김수영이었다는 사실을 환기해보고 싶다. 이는 90년대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잡지를 읽어보면 분명히 확인된다. 김수영은 90년대의 비평적인 요구가 불러낸 시적 정전이었다. (김수영의 30주기를 맞아 ꡔ실천문학ꡕ의 연속기획 <김수영 문학의 재인식>이나 ꡔ세계의 문학ꡕ 여름호 특집 <김수영을 생각한다>등 뿐 아니라 대담이나 비평에서도 빠지기 힘든 메뉴였다) 우리는 늘 불안한 새로운 현상이 밀어닥칠 때마다 변호사를 부르듯 김수영을 불렀다. 그의 시는 철저한 운동으로서의 80년대 시의 기반이 되었고, 독방과 밀실에 체포된 90년대 시인들은 얼마간 김수영이 무엇을 했나 물으면서 시를 써왔다. 종종 지나치게 강조되긴 했어도 우리의 문화적/정치적/지적인 뿌리의 문제를 짚어내는 데 김수영만한 텍스트는 없다. 현실적인 감각, 글쓰기의 혁신, 지적인 논조, 감동력, 치열함, 그의 시가 우리 시에 비춰주는 거울은 크다. 그가 현대시의 특이성을 ‘불온’으로 정의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맹목적인 예술에 대한 신념을 붕괴시키며 현실을 이삭줍기 하듯, 신문지의 언어에서부터 철저히 다시 시작해야 했던 그의 시는 말 그대로 ‘거대한 뿌리’를 건드리기 위함이었다. 그의 유명한 반시적 명제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김수영은 (<實驗的인 文學과 政治的 自由―文藝時評, 「오늘의 韓國文化를 위협하는 것」을 읽고>『朝鮮日報』,68. 2. 27) 이어령의 「오늘의 한국문화를 위협하는 것」(『조선일보』「文藝時評」, 68.2.20)를 비판하는 그의 논전에서 “문학의 前衛性과 정치적 자유의 문제가 얼마나 밀착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것인가 하는 좀더 이해 있는 전제나 규정이 있어야 했을 것”이라고 반발하면서 “다시 말하자면 그는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은 그것이 내향적인 것이 될 때는 ―즉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우에는―기존의 문화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에는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이 된다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철칙을 소홀히 하고 있거나 혹은 일방으로 적용하러 들고 있다”고 하며 불온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자의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라는 졸론에서 본인은 ꡐ모든 전위문학은 불온ꡑ하고, ꡐ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ꡑ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서 ꡐ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ꡑ이라고 명확하게 문화의 본질로서의 불온성을 밝혀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李御寧씨는 이 불온성을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고의적으로 좁혀 규정하면서, 본인의 지론을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전체주의의 동조자 정도의 것으로 몰아버리고 있다.”김수영 (<不穩性에 대한 非科學的인 억측>『朝鮮日報』, 68. 3. 26) 에서 비평적 이슈를 들고나온 김춘식의 중요한 현장진단이 있다. “대중문화의 시대에 선천적 결함을 지닌 장르로서의 자기 인식의 결과가 폐쇄적인 고립이거나 천박한 야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도식임이 분명하다. ‘저주받은 시인’의 이미지를 낭만적인 자기치장과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삼류 시인이 되거나 대중적 감수성의 유령을 뒤쫓아 허우적거리는 상업적 인기주의 시인이 되는 두 갈래의 선택은, 천박한 90년대식 시적 아마추어리즘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이다” 김춘식 ꡔ불온한 정신ꡕ 문학과 지성, 2003. 370쪽 언제나 ‘두 갈래의 선택’을 부추키는 이 ‘지나친 도식’이, 불온한 시가 아니라 불온한 ‘명성’을 찾아다닌 출판사의 전략이나 ‘서정시는 영원하다’라는 식의 기계적인 문학신비주의와 ‘야합’하여 90년대 시를 얼마나 단순화시켜왔는지는 우리가 잘 안다. 그리고 겉으로는 ‘새로움’을 치장하고 나온 ‘삼류시인’을 비호했던 논리가, 현대시의 ‘폐쇄적인 고립’을 지양하기 위해서며 그것이 ‘독자’라는 말로 치장되어있지만 실제로 ‘대중의 유령’을 뒤쫒는‘ 돈의 논리였다는 것도 잘 안다. 여기서 반드시 환기되어야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문학기구가 고급한 문학적 실행으로서의 시라는 관념을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점이다. 명성이 최고로 치솟는 순간 바닥을 치는 상업주의 시, 많이 팔리면 편리한 ‘표준’이 된다는 심각한 방종과 배짱, ‘고의’로 채택되는 ‘야누스적 두 얼굴’은 이미 “꿈의 페달을 밟고” 파란 날개를 단 시집이 바닥으로 추락할 때 읽혀졌었다 우리는 사후적으로나마 이런 현상에 대해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ꡔ꿈의 페달을 밟고ꡕ의 해설문이 떠안지 않을 수 없었던 과대포장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박철화를 비롯한 몇몇 비평가의 중요한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여파는 ‘시적 아마추어리즘’이 그녀의 경우에만 한정된 특수상황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문제는 우리의 시비평이, 한 시인의 시적 수준만을 매도할 것이 아니라, 그녀의 시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면, 어떠한 메커니즘을 통해 시적 파손을 일으켰는지에 등에 대한 점검을 통해 한 훌륭한 시인을 잃지 않도록 공을 들여야 했다고 믿는다. 시적 비젼을 저해하는 요소가 무엇이며 함정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산적인 고민을 했어야 했다.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함으로써 시의 힘은 어떻게 소모되는가? 과연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였나? . 이러한 현상은 현재의 시단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움‘의 의미를 구축해왔는지 하는 내력을 다시 짚어볼 필요를 제기한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은 대거 90년대에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짚어왔던 90년대 시비평은 신세대론으로부터 미학적인 점검의 연대기를 가진다. 대중문화의 모든 뻔뻔스런 표정을 대면하고 그런 물질적 세계에 도전장을 던진 유하의 표정을 ‘키치’라는 이지러진 렌즈로 잡아내는 한편, 망명자의 우수어린 표정을 확연하게 드러낸 장석남, 허수경같은 시인들에 대해 ‘신서정’이란 말을 부여하며 미학적 탐색을 시작했다. 그 두 가지 방향은, 2000년대 현시점에서도 우리 시의 양갈래적 경향을 구축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가령 전자의 계보와 관련지어 김언, 강정, 여정같은 젊은 시인들이 포진하고 있다면, 후자엔 손택수, 김선우, 최동문, 서영처같은 시인들이 포진하고 있다.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초점은 우리 시가 대면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접촉’의 방식으로 도드라졌고, 그것이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점을 가시화시켰다. 이와는 다른 한 켠에서는 근원적인 시적 사유를 전개시키며 ‘내부의 사원으로 사라져’간 송찬호, 함성호, 김형술같은 시인들이 집중적으로 쏟아져나왔다. 박형준, 배용제, 이윤학, 박정대, 이선영, 김기택 등의 시가 반사하는 분위기는 우리의 일상, 체제와 관련된 더 광범위한 실존적 기후이다. 일견 데카당스적 성향으로 도출되어나온 90년대 시의 집단무의식과도 같은 심미화 성향도, 과도하게 대중주의로 치닫는 문학기류에 대한 시적 '주관성‘의 강력한 표현이 아닐까. 나는 여기서 우리의 시단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지 않고 90년대를 건너왔다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다. 우리가 서정시를 논의하는 데 필요한 시적인 주관성을 어디까지 규정할 것인가? 시적인 주관은 시가 체제 안에 놓이면서도 그것과 본질을 달리하는 일면이기도 하다. 만약 서정시의 중요한 규정이 ‘나’라는 주관성이 있는 곳에서의 글쓰기라면, 그 주관성이 아무리 외부적인 조건에 방해받건, 현재적/역사적 장소에서의 자기규정이 확인되지 않고 서정시의 규정이 이루어질 수 없다. 주체에 대한 해석은 변해왔는데 주관성의 미학으로 이해되는 서정시의 규정은 제대로 점검되지 않았고, 이제 시를 문화기호의 일종으로 박제해버리거나 서정시를 그저 ‘시같이 읽히는 것’으로 보는 위험한 발상까지 폭넓게 스며드는 기미도 우리는 포착할 수 있다. 출판사가 발주한 네임벨을 얻어, 존재하는고로 놔 두면 누가 사가도 사간다. 사가는고로 읽히고 읽히는 고로 주문을 받는다면 문학은 돌아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위험의 기류가 흐르지 않는가. 서정시의 주관성에 반한 타자성은 또 무엇으로 설정할 것인가. 오늘날 모두가 들먹거리는 타자성은 모든 존재의 불확실성, 자기근거의 부정적 근거들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타자성이 시라는 장르의 전복적 확장과 재구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나 대중, 테크놀로지, 상업주의 같은 것에 대한 무차별적 순응의 의미로서 가동되고 있지는 않은가? 아방가르드적 현신성의 한 표현인 팝 아트같은 것을 상업주의시를 유연하게 재긍정하는 논리로 오도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보면 ‘신세대’ 논의는 90년대의 문화연구의 대세를 예감케 했던 논의였다. 문학적 현상을 문화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그 드넓고 야심만만한 이론이 우리 시에 흩뿌려놓은 영향은 너무나 넓고 깊다. 특히 이미 신세대론에서 발단된 놀랄만한 문화주의, 독자중심적인 발상은 표준화된 서정시를 생산하고 그것을 더욱 잘 팔려나가게 하는 제도적 발판마저 구축해 놓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시의 주관성의 영역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자기점검의 부재를 초래하고, 시에 있어 언어, 형식, 길이까지 현저하게 단순화시키며 이미 쓰여진 서정적 수사를 다시 쓰거나 변조하는 것에 다름 아닌 시를 ‘새로운 시’라는 포장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는 우리의 현대시와 관련지어 시비평이 무언가 책임을 유기해오지 않았는가 하는 침울한 자기반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문화에 대항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그것을 위해서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기류 속에 우리의 시비평은 확실하게 시가 간단히 문화적 영역으로 논의될 수 있는지, 투항인지 이반인지 반드시 그 문제를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천박한 90년대식 시적 아마추어리즘’이 과연 독자가 없어서 필요한 것이었던가? 한마디로 그건 진실이 아니다. 오늘날 시의 시장은 무한히 넓어지고 있다. 체제에 의해 경영되는 문학프로그램들은 산업적으로 문학인구를 재조직화할 수 있는 좋은 장치다. 셀 수도 없을 문학의 서비스 센터는 또 얼마인가? 즐겁게 시를 공부하자는 창작코스라든지, 직업이 아니라 취미나 일종의 재능을 잉여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시를 공부하는 코스들도 있다. 시가 유령같이 죽었다고 하는 시대에 이것은 명백히 민주적인 창작과 소비의 시대에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교육원이나 백화점이나 신문사에서 이상하게도 문화강좌에서 시창작이 주흐름을 이루고 있는 이상한 현상은 물어볼 필요가 있다. 또 라디오에서 시를 자주 흘려보내는 현상도 물어볼 필요가 있다. 너무나 많은 일을 하고, 너무나 많은 업무에 시달리며 가장 먼 거리에서 문학과 상관없는 이가 시를 써오고, 읽는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워크샵에서 해저 밑의 혁명을 요구하진 않을 것이다. 백화점이나 신문사같은 곳이 경쟁적으로 개설하는 문화교양강좌는 ‘마케팅’이다. 대중의 의식의 두드러진 모서리를 상품으로 생산하듯, 그러한 지식상품의 극단에 현대시가 놓여있기도 하다. 오직 낡은 상품을 무화시키기 위해 다음 상품이 출고되듯이, 그러한 일관된 것들의 차이화가 상품논리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거기서 생산되는 체제적 표준이 현대시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 백화점이나 신문사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서비스 센터를 위해 우리가 시를 생산하는가? 이러한 도식은 현대시의 이념을 악화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기구와 체제의 논리를 복사, 반영하는 것이며 ‘새로움’이란 말과 한참 떨어져있는 것이다. 나는 다음의 지적이 우리의 시비평의 정곡을 찌르는 언급이라 생각한다. “글에서도 질적인 구분이 일어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이 인정되지도 않고 있다. 가령, 인터넷 안의 허섭스레기 같은 발언도 양만 많으면 혹은 과격하기만 하면 언론에서 썩 비중 있게 취급된다. 이 평등주의의 폭력을 이기기 위해서, 적어도 글에 관한 한, 비평이 할 일이 있다. 좋은 작품을 구별해내는 안목과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다음, 좋지 않은 작품들이 양산될 때,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의 비평이 그걸 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문화적으로 대중 중심의 사회로 바뀌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봉변을 당할까 봐 비평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중략) 다만 문학은 이제 현실에 대해서라기보다 문학 그 자신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 저항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대담 중 정과리 발언<공급 과잉 시대의 한국 문학> ꡔ문학과 사회ꡕ2002년 가을호 위에서 그가 지적하고 있는 ‘평등주의의 폭력’ 혹은 그런 ‘환경’을 비판하고 나서는 데 오늘날 시비평은 매우 겁을 먹고 있으며 서정시의 질적인 차등을 지적해내는 데 상당히 인색하다. 뿐만 아니라 ‘봉변을 당할까봐’ 비겁해지고 있다는 진단은 충격적이다. 정과리같은 비중 있는 비평가가 봉변을 당할까 겁을 먹고 있다면 협박당하지 않을 자 누구인가! ‘문학 그 자신에 대해서’ 저항해야 한다는 지적은 이 ‘대중중심의 사회’에서 점점 상투화, 단순화되는 서정시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의 서정시라는 것은 자연발생적 정서가 아니라 일종의 비평적 판단 속에서 수사적으로 구축된 미감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다. 서정의 수사는 수천년 동안 너무나 많이 개발되어왔다.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모든 미적인 가능성이 시도되어온 가장 어려운 글을 쓰는 것이다. 꽃 피고 새가 우는 봄과 같은 것은 시에 있어서는 완전히 추상과 같은 것이다. 이미 상투화된 언어는, 그런 언어적 기억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동되는 현실의 순환 속에 갇힐 수밖에 없기에, 언어적 경험의 자연처럼 놓여있는 이야기를 깨는 낯선 수사는, 그런 낯익은 이야기와 친밀해짐으로써 그런 방식으로 생산되는 미래의 의미를 깨는 것이다. 수사라는 것은 시적 상상력의 중요한 일부로서 평생토록 탐구해야 할 시적 비젼의 구현이자 때로는 시정신의 강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일정 수준의 수사나 스타일을 격파하는 데는 치열한 정신적 교전을 벌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수사를 소비 내지는 사치의 악세사리로 걸친 광경이 얼마나 한심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가! 시비평은 그러한 한계 안에 갇힌 글들이 현상적으로 주도하고 있더라도 문학적으로는 죽었음을 선언하고 좀 더 불온한 것들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너무나 낡아버린 새로움이란 말을 이제 마뜩찮은 텍스트에 붙여주는 것을 거부해야 하지 않나. 비평의 ‘안목과 기준’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만 질적 차등 없이 무차별 확산되는 우리 현대시를 위해 시비평이 점검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 문제이다. 좀더 치열한 논의들을 기대한다. 4. 시비평의 관성과 시의 아이템화 현상 시적인 일관성은 논리적 일관성과 다르다. 김수영의 <폭포>는 시의 목소리가 무엇인가를 가장 강인하게 제시한 작품이다. 폭포는 폭포를 부른다. 그것은 머리를 감싸고 짜내는 말이 아니라, 그 자신이 표준이 되는, 단순하고 힘찬 흐름이다. 우리는 다시 좋은 시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깊이 던져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지어 오늘날 지독히 의미없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시비평에 당연히 전제되어있으리라 믿는 공정성에 대한 기대가 보이지 않는 분위기 속에 쉽게 무너져내린다는 것이고, 둘째는 시의 아이템화 현상과 시비평의 관성화의 문제이다. 우선 첫째 문제와 관련지어 논의하겠다. 문학적 인준에 보이지 않는 이중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여기서 유성호의 지적은 되새겨봄직하다. “유명 시인들의 태작이 나와도 그것을 비판하는 일이 드물게 되고,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가작이 나와도 그것을 식별해주는 기회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시단에서 집중적으로 평가받는 시인들 가운데도 거품이 적지 않은데, 많은 이들은 왜 그들의 평범한 작품이 심각한 호평을 받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도 적지 않은 것이다” 유성호, 「시비평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ꡔ문학인ꡕ 2003년 여름호 위의 발언은 문학적 평가에 있어서 관점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유보적인 문제로 늘 남겨온 이 공준의 문제를, 그냥 ‘다양성’의 차원에서 마구 인정함으로써 오늘날의 시적 난관을 정면으로 넘어설 수 있을까? 무한한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아노미적 논리가 위의 발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조악한 태작과 거품을 마구 흘려보내는 모종의 ‘장치’로 작용한다면, 우리는 제도권 안에서 행해지는 시와 그 외의 아마츄어와의 시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지며, 문학성을 둘러싼 오랜 논쟁조차도 종식시켜버릴 것이다. 현실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평범한 작품이 심각한 호평’을 받는 사례는 있어왔다. 논리적으로는 좋은 시가 될 수는 있으나 우리에게 충격과 감동을 유발시키지 못하는 작품도 너무 많이 읽어왔다. 우회하지 않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리 시단에서 직업이나 학벌 혹은 ‘매체’를 중심으로 특정 시인들이 문학적 인준, 명성, 영향력을 집중적으로 소유하기도 했다는 현상을 외면해선 안된다. 가령 커버스토리에서 빤히 읽히는 서열화문제 등은 오늘날 시비평의 어떤 한계점을 시사한다. 90년대 끝막에서 우리는 분명히 관찰했다. 상의 의미가 너무 두루뭉수리하게 소비되어버리는 현실에 대한 점검은 이미 오래 전에 제기된 문제들이다 근래에 두 가지의 문학적인 의미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사람이 많은 많은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이고, 문학상이 별다른 의미를 밀어올리지 않고 소비되어버리는 현실이다. 문학상은 어떤 문학적 실험이 실험이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라는 일종의 전문가적 승인이다. 그 전체 작품에 대해 맹렬하게 비난하는 어떤 그룹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문화적인 할당제도라면 그것 또한 의미있는 반론을 유발시켜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환기해야 할 것은 문학상 수상으로 표현된 전문가적 승인이 저절로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 시인이 제기한 독창적인 관점에 대한 토론과 어떤 갈등이 표출될 만한 시각에 대하여 우리는 논의해야 하고, 문학상도 그렇게 날카롭고 중요한 시각에 대해 축하하는 것이다. 복잡한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기 위해 때로 비평이 끼어들기도 한다. 우리의 문화에 대한 중요한 발의에 대해, 그 혼자만의 작업과 시각에 대해 우리는 감탄하는 것인데도 그 어렵고 두려운 대결에 대해 어떤 점검이 필요하지 않은가 한다. 대단히 중요한 시적 표명의 기회일 수 있는 그것에 논쟁적이거나 표현의 기회를 주는 일은 유감스럽게도 아주 적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기회이다. 명성과 권위는 문학상이 출판사로서는 장사라고 하더라도, 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시적 표명의 기회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아주 개인적인 예술적 형식에 대해 주어지는 적당한 상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대단히 은밀한 작업을 수행하는 시인에게 어떤 문학을 옹호하는 집단에 의해 주어지는 의미있고 가치로운 포상행위다. 또한 너무나 비자본주의적인 예외를 사랑하기에, 그런 아첨기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자유, 예술적인 표현의 자유를 수행할 권리에 대해 어떤 보호부락을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도 받고 여자도 받고, 젊은 시인도 받을 때가 되서 받고 그런 민주적인 포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학적 원칙과 작품만으로 받는 것이며 일종의 우리 시대의 정전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폭넓은 스펙트럽 속에서 어떤 장점을 취하는 것이며 우리 시대의 문학에 대한 설득력있는 나름대로의 규정행위다. 또한 문학상 수상이라는 것은 비평적으로 대단히 흥미있는 주제를 밀어올린다. 주관적인 시인의 기호가, 인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저 지나갈 조용한 일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장에 매여있는 시대에 그러한 곳에 문학을 위한 해방구가 존재한다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다. 오늘날같이 한 시인이 엄청난 독자를 가지고 엄청난 상을 받고 엄청난 부를 누린 시대는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그 헌신적인 공공의 장이 개인적인 의견에 의해 과도하게 조정되거나. 권력화의 매개가 되거나 상품화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문학에 있어 진짜 특전은 문학상도 아니고 50년 동안 시를 읽어온 이들이 준 명예라는 것 앞에 다시 숙연해져야 한다. 아직도 문학상이 대변해주는 서정시의 제국에서 엄청나게 많은 상을 겹치기로 받는 시인들이나, 어떤 시적인 이슈로 발의될만한 특색도 없이 제도로 굳어버린 문학상(고영직, <추락하는 권위, 춤추는 문학상> ꡔ실천문학ꡕ 98년 봄호)이 암시해주는 바는, 그 자체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새로움’에 대한 시비평의 결론적 표출일 수 있기에 중요한 기미로 포착되어야 한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공준의 공황상태에 빠진 현실을 돌파할 수 있을까? 치열성? 진정성? 어떤 말을 사용하든 좋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김수영의 ‘사기’라는 말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미숙한 것을 탓하지 않는다. 또한 환상시도 좋고 추상시도 좋고 환상적 시론도 좋고 기술시론도 좋다. 몇번이고 말하는 것이지만 기술의 우열이나 경향 여하가 문제가 아니라 詩人의 양심이 문제다. 시의 기술은 양심을 통한 기술인데 작금의 시나 시론에는 양심은 보이지 않고 기술만이 보인다. 아니 그들은 양심이 없는 기술만을 구사하는 시를 주지적이고 현대적인 시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詐欺를 세련된 현대성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김수영 <難解〉의 帳幕―1964年의 詩>『思想界』, 64.12) 김수영은 예술적 ‘사기’라는 과격한 언어로, 당대의 시적 기류를 탄핵하고 있다. 미숙해도 좋고 시적 노선이 어떠해도 좋지만 ‘詩人의 양심’이 없다면 ‘사기’라는 논리는 뭔가? 안보이는 자기점검 장치인 ‘양심’을 잃어버린 시, 다시 말해 치열한 자기점검을 통과하지 못한 시가 아닌가. 김수영은 오늘날의 문학적 현안에 대해 가장 근접한 박력있는 해답을 제시하는 건 아닐까? 이것은 단지 김수영 시대만의 문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문학의 나라가 시작될 때부터 모든 시인들은 그 도전을 받아들여왔고, 문학의 ‘인공성’이 극단화된 현대에도, 그 인공성 자체가 어떤 영혼과 정신의 표현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적어도 문학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면 어떤 ‘진짜’의 기준을 분명히 하면서 가야 한다는 점이다. 기교는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대체적으로 ‘밖’을 인식할 때 도드라진다. ‘양심을 통한 기술’, 그것은 분명히 시를 통해 느껴질 수 있다. 현대의 이론적 기류는 이런 요소를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특히 고려하지 않는다. 김수영이 ‘기교’라는 말을 통해 암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자칫 시에 개입할 수 있는 껍데기의 포즈일 것이다. 요컨대 기술적인 장인성에 기초하는 예술원칙이 지배하는 문화에서 시적인 양심이나 생의 긴박감에서 현대시가 나온다는 것은 일견 모순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시인의 양심 혹은 시정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긴박성이나 긴장력은 실제로 시적 ‘새로움’의 무궁한 근원이다. 또한 그런 긴장력이 존재할 때 강력한 돌파력을 가진 스타일이 창조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사기’의 한 항목으로 시의 아이템화를 기소해보고 싶다. 그것은 논리적 사고와 조응하며 또는 시적 노력의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략적 방법이기도 하다. 시의 아이템화는 대체적으로 논리적 읽기를 유도하지만 이런 시의 컨셉화 현상 혹은 고정된 창작의 플롯이 있다는 것은 괴이한 것이다. 정신의 둔감성을 일부러 가장하고 다른 것은 느끼지 않고, 지우고 걸어가는 것이다. 현대시는 근대의 지적인 기류나 관념, 정신적 배경에서 나오긴 했지만, 결코 사변적인 결정체는 아니다. 또한 시는 그런 지적인 논리로 구축된 사회적 권력에 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완전하게 조화됨으로 인해, 다른 질서가 부자연스런 조화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계와 불화하는 시적 원칙을 가지기 위해서는 대단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나는 이것을 ‘스타일’이란 말로 강조하고 싶은데, 시비평은 때로 논리를 빌어 파악하기 어려운 것을 파악하기 위한 논리적 파열, 논리 속에 자주 포착되지 않는 영혼이나 신비 등의 영역으로 무한히 감각을 확대시킬 수 있는 개방성이 필요하며 시적 분위기나 느낌과 같이 형태가 없는 것에 대한 존중도 필요하다. 아주 작은 소리에 날카로운 직관력을 발휘해야 하는 시적인 생태는 그 작은 것들을 무시하며 보편의 형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논리적 언어와 상당히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이 양자 사이의 공간에 시비평은 무심해질 수 없다. 그래서 때로 시비평에는 지적인 것 외에 그것 이상의 것이 요구되곤 했다. 나는 다음 지적을 우리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시나 소설을 쓸 기회를 제대로 붙잡지 못한 문학도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 공부를 계속한다. 문학 공부를 오래 하다 보니 논리적 탐구력은 향상되었으나 문학적 감수성은 거기에 비례하여 상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중략) 특히 최근의 젊은 세대들의 경우를 보면 톱클래스의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비평가로서의 예리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행한 일이지만 이것은 문학적 감수성의 기반이 마련되기 전에 논리적 분석에 자기 몸을 던져버린 결과이거나 문학적 취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문학을 선택하여 논리적 무장으로 비평에 임한 결과 나타난 현상이다” 이숭원, 「시 비평을 위한 반성」 ꡔ문학인ꡕ 2003년 여름호 이숭원의 글은 이론의 비중이 커지면서 심미도가 떨어지는 시비평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논리적 사변이 다양한 미적 자질을 가진 시를 기만하고 문학적 해독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이다. 사실 비평의 이론화와 지나친 사변화에 대해 그동안 충분한 지적이 있어왔다. 비평에 가상독자라는 것이 있다. 시인은 그런 기대치의 독자로, 논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지식보다 확장된 시야에서 읽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꿈꾸지 않을까. 논리적인 갈등의 지점에서도 논리화시켜야 하는 시비평의 딜레마는 자주 ’직관‘ 혹은 ’심미안‘이라는 말 등으로 문제시되어왔다. 시비평은 논리가 끊겨진 지점에서, 논리와 모순될 수도 있는 혼돈을 논리적 영역으로 불러오는 어려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지성이 멸시할 수 없는 ‘상상력’의 탄생을 정확히 지적하고, 때로는 대학에서 연단받은 미적 수련을 넘어서는 새로운 메시지를 의미화하지 못한다면 그저 이상하게 권위적인 지식기구에서 흘러나온 ‘상투적 대중’일 뿐이다. 6. 결론과 제언-도전적인 시와 시비평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내가 의미했던 바를 보다 분명히 하면서 글을 맺고 싶다. 오늘날 우리의 시는 무엇을 잃어버렸으며 무엇을 찾는다고 해야 할까. 시가 죽었다는 재판도 먹히지 않는 격렬한 생산, 작은 것을 발견하기 위해 거대한 지식을 쌓고, 소심한 생활 귀퉁이에서 가장 심각하게 가장 쓸모없는 노동을 하며. 정말로 이제 시냐 생존이냐? 예술인가 생활인가? 정말로 김수영같은 질문을 해야 하는 시대에 이미 시를 쓰고 논의한다는 것은 일종의 실존적 결단이다. 우리가 정말 문학이란 것을 후세에 남기기 바라는가? 그렇다면 아직도 열정과 ‘정신’이라는 관념은 문학에 있어 분명히 살아있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텍스트를 발견하고 의미를 구성하고 당대의 최고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은 문학의 욕망이자 당무이다. 시이든 소설이든 비평이든 현대문학에 있어서의 영원한 컬트는 혁신이다. 그것을 실험이라 말하든 새로움이라 말하든 그것이 적어도 현대의 문학적 이념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환기해야 하지 않을까. 몇 개의 결론은 단호하게 내려져야 한다. 첫째는 ‘새로움’이란 말을 통해 문학적 공준이 난무하는 현황을 돌파할 수 있는 어떤 기본적인 관점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다양한 비평적 악습을 점검하며 문학을 위한 생산적인 에너지를 길어내도록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 안에서의 실험>을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간의 시비평은 부단히 우리 시의 새로운 정체성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의미있는 초점을 제공했다. 또한 가열한 시적 실험들에 대한 자극과 필요, 동기를 제공하며 새로운 정박 지점을 향해 긴박하게 움직여왔다. 그러한 움직임을 통해 새로 형성된 시적 형태들은 지금도 현대시의 저류로 작용해들어가고 있다. 시비평은 단순히 해석적인 의미지도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비평은, 시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 새로움의 양태들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좀 정직한 말로 새로운 시적 요구를 전달하며 현재의 ‘상투성’을 전복하고 뭔가를 생성할 수 있는 에너지를 보존하는 공간인지 모른다. 정말로 도전적인 시각이 필요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새로운 영토로 움직여갈 때가 되지는 않았는가. 시비평, 오늘날 그것은 너무 작아보인다. 그러나 대단히 소중하다. 시인에게 탄약을 재워주고, 함께 구경을 맞춰주고, 적시에 포탄이 발사되도록 기민하게 움직이자. 그리고 때로는 이론과 관념의 대륙조차 시와 함께 파괴하기 위해 속보하자. 그런 과감한 혼돈까지도 무릅쓸 수 있을 때 시비평이야말로 문학적인 탐색과 도전 정신을 대표할 것이다.
|
첫댓글 한마디로 작금의 장사꾼들과 주체측 시단은 서로 아삼육 짝짜꿍, 똑같은 틀로 찍어낸 붕어빵들만 양산하고 있다는 말쌈? 그리하야 끝내 근친상간의 여파로 나온 언챙이 째보들을 지독한 화장술로 덕지덕지 꾸며주고...뭐 그런 얘기네, @@ 아고,----비평의 정석을 세우자? 안팎으로 잴 잣대는 똑같이 만들어 사용하자, 말이야 좋은 말쌈인데, 그 비평의 정형화된 틀을 깨고 나서야 하는 것도 비평의 몫이고 보면, 뭔가 자신의 꼬리를 먹고 있는 [뱀 그림]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훌쩍, 힘 내쇼, 허혜정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