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부정으로 안받침된 탐구정신
―석화의 근작시에 관하여
리복
시탐구에 모지름을 쓰고 있는 석화에게서 90년대 시는 80년대 시에 비해 예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다르게 흐르고 있다. 그는 빈번히 자기를 부정하면서 부단히 시풍을 개변하고 새로운 탈바꿈을 하고 있는데 40대 시인들의 탐구정신을 체현하고 있다.
《천지》 1997년 8호에 발표된 “석화시 10수”는 제재선택이나 수법선택이나 사상적선택에서 그의 최근 시탐구를 집중적으로 반영하는 시묶음이다. 정서를 쓰던 그는 지성적인 것도 쓰고 있으며 농토를 쓰던 그는 도시도 쓰고 있으며 청각적요소가 짙은 시들이 지금은 시각적요소가 짙은 시로 변화되고 있으며 석화의 시는 심도와 광도면에서 새로 변혁을 가져왔다.
원래 석화가 80년대 상반년에 신문잡지에 발표했고 시집 《꽃의 의미》에 들어간 시들은ㄴ 주로 정서토로가 위였다. 그 시기에 쓴 시 한수를 보자.
나는 나를 위해 구슬픈 장송곡 목메게 부르며
나는 나의 무덤을 판다
나는 나의 흙 묻은 괭이를 던지고
나는 나의 안식처 나의 무덤에 드러눕는다
시커먼 구덩이는 구슬픈 기도 읊조리고
서리찬 기운은 쓰다듬어 안아준다
그러면 내가 무져놓은 흙더미 내 몸을 묻어주고
그러면 무덤은 동그란 언덕이 된다
아. 그러면 심장만이 살아서 싹터 오른다
심장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 찌르며 자란다
그 나무에선 주렁주렁 새 심장들이 가득 열린다
(시 “나의 장례식”, 시집 《꽃의 의미》에서)
보다싶이 구슬픈 장송곡속에 내리 쓴 이 시는 내 몸에서 한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주렁주렁 새 심장들이 열린다는 나 자신에 대한 랑만적이고 전면적이고 광채로운 토로였다. 그런데 여기엔 나 자신에 대한 2분법이 없으며 오직 한가지 정서의 정면토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집에 들어간 시 “나는 나입니다”에선 나는 돌이나 별이 아니라 그보다 많은 것들이 어우러진 통일체이며 하나의 완정한 세계이며 우주라는 정면토로다. 종 랑만적으로 표달되였으며 또 같은 시집에 넣은 “고백”에서는 내가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도 역시 랑만적색채가 풍기는 정면토로이다.
헌데 석화의 근작시묶음 “석화시 10수”에서는 랑만적정서가 자취를 감추고 있으며 나를 써도 나에게 대하여 지성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시 “거울을 닦습니다”를 보기로 하자.
당신 닮은 모습으로
저희를 만드셨다 하셨기에
당신을 보고지고
거울을 닦습니다
호오호 입김불고
빠악빡 소매깃으로 문대며
알른알른 빤들빤들
잘 닦아진 거울 한 장
들고 보고 놓고 봐도
이리보고 저리봐도
당신같은 모습은
어데도 없습니다
아직도 정성이
모자라서일가요
당신대신 나타난
꾀죄죄한 저 모양
거울에 비춰진 볼꼴 없는 저모양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당신일순 없는데
당신과 닯은 모습
저희들이라 하셨기에
당신을 보고지고
그래도 열심히
거울을 닦습니다.
(시 “거울을 닦습니다” 전문)
내가 나를 아무리 보아도 제 모습이 나지 않아 거울을 닦고 닦는 자신에 대하여 고찰의 시다. 고찰하면 할수록 나는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며 가장 사람다운 사람만이 아닌 것이다.
시 “개야”에서는 강남마을 촌골목의 똥개는 나에게서 사람냄새가 난다고 내곁에 앉지 않고 항상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형상으로 사람냄새는 좋은 냄새도 있거니와 나쁜 냄새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아닐수 없으며 이로 하여 석화의 시는 정서토로 위주로부터 인간관계에 대한 지적토로가 위주로 되는 방향으로 전화되고 있는바 이는 정서를 위주로 쓰던 자기의 지난 시들에 대한 부정이 아닐수 없으며 시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아닐수 없다.
시 “컴퓨터시대란다”, “탑에게”와 “작품 58”은 그의 옛 시집에서는 볼수 없던 도시감각을 살리면서 주지시를 쓰고 있다. 주지시란 감정적우세를 중히 여기는 주정주의시와 달리 지성적우세를 중히 여기는 창작태도 혹은 경향으로 쓴 시이다. 시 “컴퓨터시대란다”에서는 키보드를 두드리니 모니터에 설계도가 나타나는데 어떤 프로그램을 설정하면 가정전기화로 일감이 없어진 할머니, 아버지, 엄마들들이 일감을 다시 찾을수 있겠는가고 사색에 잠긴다. 이와 같이 시인은 도시에 나타난 새시대의 문제점들을 제기하고 있으며 새로운 감각을 쓰고 있다.
텔레비 오디오 세탁기 흡진기 랭동기…
하나씩 둘씩 들어올 때마다
그대신 하나씩 둘씩 밀려나간 집식구들
컴퓨터시대란다
어느 프로그램을 설정하면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와 아이들을
하나씩 둘씩 다시 불러낼수 있을가
안방에 컴퓨터를 들여왔다.
(시 “컴퓨터시대란다”에서
보다싶이 시가 추구하는 것은 그 문제에 디한 해답이 아니라 그 문제자체의 제기에 있는바 여기서 우리는 컴퓨터시대에 들어서는 인간들의 양상을 볼수 있다.
시 “탑에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다 같이 땅우에 사는 주제에
왜 자꾸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이냐
버러지들은 버리지만큼의 하늘을
토끼는 그의 모두뜀에 알맞은 하늘을
날개 가진 참새나 제비도
저만큼씩 맞춤한 하늘을 가졌을뿐인데
왜 자꾸만
하늘이 낮다고 또 높다고
삿대질이냐
천 년 전부터 또 후에까지
목제, 석제, 철제…
숲처럼 일어선 탑 일어설 탑
그 끝에 찔리어 멍이 든 하늘
퍼렇게 구져져 있는 저 하늘
찢어질듯 펄럭거릴 저기 저 하늘
(시 “탑에게” 전문)
숲처럼 일어서는 탑들이 각자가 제만큼의 하늘을 갖고 있건만 목제, 석제, 철제로 일어서다보니 하늘이 찢어지고 펄럭거리는 도시기념탑들의 무절제한 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감정적이고 청각적인 것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지성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다.
석화가 자기 시에 대한 부정의 태도는 주시시 “작품 58 -책장”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론어》 공씨네 둘째의 코가
야마구찌 모모에의
봉긋한 앞가슴에 밀착되여있고
포스트모더니즘학설우에 포개져있는
《조선어문법》과《성지식》,《료리만들기》
《세계명인전》의 주인들과 나란히
그랑데와 고리오와 아Q가 버티고 서있어도
목소리와 이발과 칼날 따위 모든것은
자기네들 뚜껑안에서 잠자고 있을뿐
“우리는 개인가 개가 아닌가”라고 지껄이는
얼빤한 잠꼬대 한마디가
다 쓴 전지약의 진물처럼
어느 구석에선가 흘러나오고…
(시 “작품 58 -책장”전문)
여기서 자기의 글 “우리는 개인가”에 대하여 얼빤한 잠꼬대 한마디 같다고 하면서 다 쓴 전지약의 진물처럼 어느 구석에서 흘로나오다고 낮게 평가할 때 우리는 자기 시에 대한 그의 태도를 짐작할수 있다. 그의 자기기의 기왕의 주정주의시풍을 부정했을뿐만아니라 금방 써놓은 주지주의시풍도 부정하기 시작하고 있다.
주정시와 모니니즘의 한 류형- 주시시에 대한 부정은 기필코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작방법을 실험하게 되었다. 하여 석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시 “작품 36 -가감승제와 방정식”을 쓴 것이다. 해체시는 상규적작시법을 전부 파괴하고 새로운 기법으로 쓴 시인데 “가감승제와 방정식”이란 부제를 단 시 “작품 36”은 가법으로 한행, 승법으로 한행, 근의 련속전개로 한행, 제법으로 한행, 감법으로 한행을 펼치였다.
철근+세멘트+타일+…+땅=벽체
벽체×유리×페인트×…×하늘=빌딩
√빌딩 ? 3√빈병 ? 4√소음? …? ⁿ√물=도시
도시÷문패÷전화번호÷…÷공기=사람
사람-사랑-진정-…-달나라=X
(시 “작품 36 -가감승제와 방정식” 전문)
여기서 앞의 제5행은 감법으로 되었지만 X가 들어있음으로 하여 방정식이 된다. 시인은 이 방정식설정에 모를 집중한 것 같다. 사람에게서 사랑과 진정 그리고 과학기술 등을 빼버리면 남는 것은 X라는 것이다. 이 X는 무얼 의미하며 무슨 형상으로 이룩된 것인가? 방정식에 이항시키면 사람=사랑+진정+…+달나라+X가 나오는데 여기서 알수 있는바 인간이란 애정과 도덕과 과학기술 등을 소유한 동무링며 또 X를 소유한 미지로 충만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이란 이 풀기 어려운 문제를 방정식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여기서 X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인간의 특징이며 시장경제에서 사람을 이끌어가는 동력이며 당대문학에서 파고파도 다 파지 못할 이지수라는 것이다. 이 시는 해체시로서의 대표성을 띤 작품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시에서 정서토로로부터 인간방정식으로의 전환을 실현했을뿐 자기 시의 최후의 전환은 실현하지 않았다. 석화는 시를 포스트모더니즘에 락착시키지는 않았으며 그가 추구하는 것은 전반적시적표달이지 어느 한 개 류파의 기교는 아니였다. 하나의 류파속에 몸을 잠그면 잠글수록 시인은 꼭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기 때문이다.
이제 이 시인이 어떠한 시로 자기를 또 부정할 것인가? 그의 새로운 시는 원래의 시와 색채가 완연히 다를 것이며 새로운 차원에서 탐구의 빛을 뿌릴 것이다. 지금 석화의 시는 주정주의와 주지주의 교차점에서 솟아오르고 있는데 이는 그가 청춘기 전기와 후기의 년령의 교차점에서 사색하는 시적사유의 특징인바 단일한 정서토로로부터 전반적인 시적표달로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파헤칠 것이다.
지금 석화시가 다루는 제재와 형식은 다양하다. 석화의 시에는 “률동”, “거울을 닦습니다.”. “그날의 외출”과 같은 주정주의 시도 있거니와 “작품 58”, “개야”, “탑에게”와 같은 주지주의시도 있으며 “작품 26”은 이미지시에 접근하고 있으며 “작품 28”은 상징주의 시에 접근하고 있으며 “컴퓨터시대란다”는 주지주의시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풍격이 엿보이고 있으며 “작품 36”은 해체주의 시로 흐르고 있다. 하여튼 석화시의 장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면서 시대에로의 참여에 동원되고 있다.
시 “개야”에서는 나와 백성들 사이의 소통 못 된 상태에 대한 아픔으로, 시 “작품 36”에서는 새 시대의 인간에게서 현실로의 투입에 가장 유용한 동력은 X라는 것으로, 시 “작품 58”에서는 고금중외의 명작들 속에서 자기의 시구는 잠꼬대밖에 안 된다는 명철한 사고로, 시 “컴퓨터시대란다”에서는 컴퓨터가 들어오니 가정식구들이 밀리우는 현실통감으로, 시 “탑에게”에서는 도시에 숲처럼 일어서는 탑에 대한 우려로 시대의 흐름과 현실의 맥박에 참여하고 있다. 주정주의시에서는 감정토로가 위주이기 때문에 이러한 참여가 미약하지만 주지주의 시에서는 지적인 토로로 하여 이러한 참여가 가능하게 되었다. 하여 석화시는 현실에 참여할수록 자기부정을 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주지주의 시풍을 실험하지 않을수 없었다.
순수한 정서토로로부터 전반적시적표달에로의 전환, 석화시의 이 변화는 우리 문단이 지난날의 봉페상태로부터 개혁개방상태로의 대혁신에 객관적인 원인이 있는 바 석화는 더는 랑만적토로에만 박여있을수 없었으며 따라서 도시시의 제재에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으며 사색에 잠기는 주지주의 시로 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주관적인 원인은 그의 끊임없는 자기부정, 시적부정과 방법론적부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지난 시절에 쓰던 전통수법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전통시의 모병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하지 않을수 없는 문제는 그의 탐구작의 적지 않은 부분이 독자들이 좀 읽기 힘든 것이다. 이는 그의 주정주의시들에선 없던 문제가 주지주의 시들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시 “작품 36 -가감승제와 방정식”은 처음에 읽고나면 어리벙벙한 정도이다. “사람-사랑-진정-…-달나라=X”와 같은 시구들을 시장경제의 물결속에서 맴돌이치는 개척자들이 어찌 그 의미를 씹을 시간이 있단 말인가? 시는 문본의 가치와 예술적기능이 통일되여야 한다. 작품의 문본의 가치가 아무리 크다 해도 대중화한 예술기능이 없다면 그 가치가 무슨 존재적의미가 있는가? 물론 예술적기능이 강한 시는 응당 문본의 가치가 높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가 광범위한 독자를 대상한다면 응당 그 수학적표달을 묘사적표달로 돌려야 할 것이다. 시 “탑에게” 등 시들도 역시 마찬가지 도리로서 그 표달의 방식을 개변해야 할 것이다. 석화는 난해시를 추구하는 시인이 아니지만 시탐구과정에서 때론 시의 도약을 쓸 때 지나치게 짜고 뜨는 현상이 있다. 하여 시의 함축성이 더 짙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파괴될수 있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시는 읽기에 순통해야 하고 읽기에 맛이 나야하며 이 량자는 통일되여야 한다. 그러나 순통할 것만 강조하면 맛을 잘 낼수 없으며 맛을 낼 것만 강조하면 순통하지 못할수 있다. 시 “작품 26”은 읽기는 순통하나 맛이 적으며 시 “탑에게”는 읽기에 맛은 있으나 순통하지 못하다.
석화가 시적인 더 높은 경지에서 자기부정의 정신을 더 발양한다면 이 문제 풀리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석화의 시는 문본가치와 예술적기능의 통일을 위한 자신에 대한 새로운 부정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 부정정신은 기필코 시의 대문을 더 크게 열어제낄 것이다.
《장백산》 1998년 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