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정주(徐廷柱1915-2000)
- 친일시 논란에도 그는 아직 한국 최고· 최대의 시
미당(未堂)서정주 시인은 전북 고창 선운사 밑 질마재에서 탄생하여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 수업을 받고, 줄포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한 후 중앙고보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6세가 되던 1930년 광주학생 주동자로 몰려 투옥,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고창고보에 편입학 하였으나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이내 권고 자퇴하였다. 이후 박한영 선사가 교장으로 있던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수학했으며 이 무렵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1936년)이 당선, 문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같은 해 동인들과『시인부락』을 주도적으로 창간, 1941년 첫시집 <<화사집>> 발간, 1944년에는 <광복의 길>이라는 연극대본으로 감옥에 가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우익 진영의 일원으로 한국문학가 협회 시분과 회장(1949), 동아일보 문화부장,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예술원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서라벌예대, 동국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동양 정신과 불교적 달관으로 우리 겨레의 토착 정서를 밀도 있게 심화 시켜 한때 한국 최고·최대의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미당의 부친(서광한)은 구한말 무장현에서 치른 과거(초시)에 장원했으나 이후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당시 무장 현감께서 그 재주를 아깝게 여겨 미당 부친을(같은 달성 서씨임을 알고 더욱) 오늘날 경기고의 전신이 한성학원에 보내 신식교육을 받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졸업 후 부친은 측량기사가 되어 고창군에서 근무하다 총독부가 토지개혁을 실시하게 되자, 당시 호남의 대지주였던 인촌 김성수 집안에 스카웃되어 토지개혁 일을 돕게 된다. 이런 연고로 미당은 인촌이 설립한 중앙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 그의 부친은 기쁜 마음에 미당을 데리고 상경하여 당대 최고 선망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의 교문으로 데리고 가 “네가 앞으로 다닐 대학이니 잘 보아두라”는 당부와 함께 미당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한다. 그런 자랑스런 중앙고보를 퇴학당하자 크게 상심하였다고 한다.(미당 아우 서정태 옹의 증언).
아버지가 들고 계시던 저녁 밥상 머리에서
나를 보시자 떨구시던 그 밥숟갈
정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던 밥숟갈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 주모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간 내가
해어름에 돌아와 엎드려 절을 하자
저절로 떨어져 내리던 아버지의 밥숟갈
......그래서 나는 또
아버지가 끼니밥도 제대로는 못 먹게 하는
대불효의 자격을 또 하나 더 얻었다
-서정주. 「아버지의 밥숟갈」전문. 1930
이어 고창고보까지 자퇴할 수밖에 없던 미당은 아버지에 대한 불효와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다시 상경하여 마포구 도화동 빈민굴에서 넝마를 주으며 기인 행각을 했다. 그러던 1934년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석전 박한영 선사의 눈에 띄어 중앙불교전문강원(동국대 전신)에서 수학하다 1년 만에 그만 두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김동리, 오장환, 유치환 등과 시전문지『시인부락』을 창간하면서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 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별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드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자화상」전문, 1937
23세 되던 해 식민지 지식인으로 굴욕스럽게 살아가야만 했던 일그러진 자신의 삶을 자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항으로 남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든 상관치 않고 오로지 시인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의 시, 「자화상」을 발표하게 된다. 이 같은 맥락으로「화사」,「문둥이」등 격정적 몸부림과 서러움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시는 차츰 동양적 사유와 불교적 은유로 정신의 깊이를 더해 간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젋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국화 옆에서」전문, 1941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울고, 무서리 내리는 가을밤, 홀로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번민과 인고의 나날들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의 값진 결실을 얻어낼 수 있다는 불교의 인과설을 바탕으로 국민적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시이다. 기승전결의 형식미와 한국적 시어 구사로 기다림과 그리움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하나의 국화꽃이 완성된다는 인생과 자연의 보편적 진리가 한국적 염원의 세계를 차원 높게 심화시켜 주고 있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생략-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 -「해일」 전문
어린 시절의 체험을 이야기시(敍事詩)의 형태에 담아 그의 무속 신앙과 불교의 연기론적 사상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젊은 시절 바다에 나가 빠져죽은 남편을 그리던 나이든 여인이, 바다가 넘쳐 동네를 덮던 날 조용히 밀려들어와 자신의 마당을 채우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그 바닷물을 남편으로 생각하면서 얼굴을 붉힌다는 에로틱하면서도 아리잠직한 애틋함이 배어 있는 시다.
바다에서 죽은 할아버지가 해일이 되어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삶과 죽음, 불연속과 연속,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화합으로 나아가는 불교적 개안의 경지를 엿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태평양전쟁에 특공대로 출전하여 순국하기를 권유하는 친일시를 썼는가 하면, 광복 후엔 반공문학의 전위에 서서 이승만 전기를 집필하고, 군사 정권 특히 신군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여 친일과 반공에 앞장 선 정치 시인으로서 세인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중략-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英美)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서정주,「오장(伍長) 마쓰이송가(頌歌)」에서
1944년 12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미당의 대표적인 친일시이다. ‘자살 특공대’를 숭고한 애국행위로 한껏 찬양하면서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있다. 일제 치하 우리의 시인들은 이육사와 같은 저항, 김현승과 같은 절필, 또 생존을 위해 소극적으로 동조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미당은 자발성에 기초한 내적 논리를 내세워 여러 장르에 걸쳐 상당량의 친일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자신의 과오를 사죄하지 않고 ‘일제가 그렇게 쉽게 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시대적 당위론을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호도하는 업보를 남겨 놓았다.
이런 미당을 그의 제자인 고은은 “세상에 대한 수치가 결여된 체질”이라며 해바라기적인 그의 성향을 비판했다. ‘문학은 인간성에 귀속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그의 지난날의 행적과 문학을 결부시켜 비판하고 이를 정리하고자 함은 한 개인의 문학적 업적을 폄하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격랑 속에서 한 시인이 앞으로 어떻게 현실에 대응하며 올곧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 모두의 반성을 함께 나누어보자는 충정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생전에 자신의 시세계를 스스로 생명파, 또는 인생파로 규정하고 인간 본연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근간으로 그는 유불선의 동양사상과 샤머니즘, 토속적 어휘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여 편의 시가 수록,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 큰 영향을 주면서 한국문학계에 끼친 그의 공적은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또한 우리의 귀중한 한국적 정신의 문화유산기도 하다. 미당의 시 한 편을 더 소개하면서 그를 다시 한 번 더 기억하고자 한다.
내 영원은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가다 가단
후미진 굴헝이 있어
소학교 때 내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이쁜 여선생님의 키만큼한 굴헝이 있어
내려가선 혼자 호젓이 앉아
이마에 솟은 땀도 들이는
물빛
라일락의
빛과 향의 길이로라
내 영원은
-서정주,「내 永遠은」 전문, 1968
첫댓글 하하하하!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파란만장이군요!
물론 어쩔 수 없었겠으나 더 일제에 버팅기지 못하고 친일 했다는 것은 유감이지만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미당의 마음은 지옥이었을 것이네요!
어쨌던 대단한 시인입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해일」 전문을 읽으며 외할머니가 되어 봅니다.
하하하하하! 김동수 교수님!
지금 12월 19일, 보내주신 <온 글 제 13집> 잘 받았습니다.
책이 상당히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틈나는대로 열심히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요! 하하하하하!
회원들이 매주 수요일 오후 전주 금암 도서관에서 모여 문학 공부를 하면서 만든 <온글>이란 동인지입니다.
아! 그랬군요! 대단한 모임입니다. 잘 읽겠습니다. 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