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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가시관을 쓰시고 피범벅이 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십자가 때문에 밀림 속을 들어가는 선교사처럼. 시골 오지 깊은 산골에 들어가 인생이 가지고픈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몇 안 되는 시골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바치다가 죽어가는 일선에서 목회하는 농어촌 오지 목회자들을 산 순교자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세계교회가 예수님의 지체로서 하나가 된 교회공동체입니다. 한국교회는 농촌교회가 못자리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못자리처럼 키우고 가꾸어서 도심으로, 도심으로 끝없이 보내왔습니다. 이제는 늙은이들만 남아서 더 이상 줄 것이 없고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생산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으나 누구 하나 도우려고 하지를 않는 농촌교회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100명이 모이던 교회가 도심으로 다 떠나가고 이제는 30명도 채 안 되는데다가 나이 많으신 분만 남아 마을 전체가 다 믿어도 미자립일 수밖에 없는 농촌교회 목회의 현실은 그야말로 순교적 삶입니다.
도심교회 등 자립하는 많은 교회들이 농촌교회를 돌아봐야 하는 책임적인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그동안 조금씩 선교비를 보내다가 말고 찔끔찔끔하기를 얼마인지 그러다가 이제는 지쳤다고 합니다. 제대로 농촌교회를 책임지고 선교지원 한번 못하고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촌교회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받다가 자립도 못하고 그나마 선교비가 끊어지고 도와주는 이 없어 이제는 제단을 지키다가 병든 몸에 영양실조에 피를 토하고 젊은 나이에 소천 하는 산 순교의 현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농촌교회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농촌 미자립교회는 교회 공동책임입니다. 세상도 구제하면서 예수 핏줄인 형제교회 농촌교회를 외면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공동책임을 묻을 것이 자명합니다. 주님의 충성된 소자의 부르짖음을 외면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해외선교는 책임선교를 하는데 국내 농촌선교는 무책임적인 선교지원 방식으로 소외되고 버려진 교회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농촌교회 선교는 1년 선교가 아니라 10년이고 20년이고 자립할 때까지 선교 지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외선교와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 하늘군대 기도팀이 뜻을 모아 속리산 깊은 산골 용화 지역에 농촌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파송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농촌 미자립교회를 위하여 선교운동 목적으로 산 순교 책자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도심교회들의 뜨거운 참여와 농촌교회 선교 운동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농촌목회가 확장되고 부흥하는 놀라운 역사로 진행되리라 믿습니다.
산 순교 책을 대하면서
산 순교라는 피가 철철 흐르는 뜨거운 헌신들을 모아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농촌교회 부흥운동의 ‘산 순교’ 책을 하늘군대기도회에서 발간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줄 한줄 농촌교회의 애환과 사랑이 진하게 묻어나는 순수한 글들이 마음 깊이 주님의 음성으로 찾아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농촌 미자립교회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팔 걷어붙이고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적은 능력으로 지극히 작은 이들이 모여 우상타파 기도회인 미스바기도 운동과 농촌 미자립교회 부흥운동인 ‘청예제’라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착착 준비되어지고 진행되는 주님의 적전인 계획과 간섭이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놀라운 하나님의 작품으로 결실을 맺게 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산 순교’ 책에서 산 순교의 생애를 자신이 살면서 산 순교의 현장인 농촌 미자립교회 목회 현장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끼는 증인 된 이승희 원장의 깊은 통찰력과 주님의 심장과 주님의 손으로 쓰여 진 성령의 검인 산 순교의 글들을 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농촌교회를 사랑하고 자기가 직접 농촌 오지 깊은 산골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이 현실적이고도 충성 적으로 몸바친 이들이 쓴 글이라는 데서 같이 마음을 맞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농촌교회를 책임져야 할 사명을 부여하는 주님의 명령으로 이 산 순교의 책이 우리 앞에 증인 된 증거로 중하고도 명백한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농촌교회를 사랑하시는 눈물 어린 주님의 부탁입니다. 오늘날 교세가 있다고 하는 교회들이 너무 많은 돈을 허탄한데 쓰면서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소자인 농촌교회 미자립 목자들이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아픈 현실 앞에 외면하는 죄는 주님의 진노를 가져올 것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농촌교회 선교사명을 일깨워주는 책이 바로 산 순교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 차
머리말............................
산 순교 책을 대하면서........................................
1부 산 순교
미스바 기도운동..........................................................10
청예제..................................................................18
농촌·오지교회의 ‘살아있는 순교자들’..................
산 순교1 파송.....................................................
산 순교2 생존.......................................................
산 순교3 소통.....................................................
산 순교4 사명.....................................................
표 적.....................................................
고 르 반......................................................
이 아 신...............................................
2부 하늘군대
하늘군대.....................................................................78
탱크목사 방문기...................................................
이삭을 줍게 하소서................................................
Flowing................................................................
코드명 연합........................................................
농촌 목회자들의 삶..............................................
예수님께 받은 소명과 사명................................
우리의 교회공동체............................................
나의 인생관을 바꿔놓은 한 권의 책...........
양 심..........................................................
승리하는 농촌목회.......................................
한국교회와 바리새인..........................................188
제1부 산 순교
미스바 기도운동
외딴 오지에 우뚝 선 예배당을 보노라면 목가적(牧歌的) 목회의 꿈을 꾸게 된다. 여기저기 집 몇 채로 마을을 이룬 시골 풍경은 평화의 노래 그 자체이다. 그러나 오늘날 농촌 교회는 무거운 적막에 덮여 찬송이 그 찬송이고 기도가 그 기도가 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농촌교회 목자들이 소망의 길도 믿음의 길도 아닌 보이지 않는 부흥의 길을 찾아 애쓰는 눈물 어린 안타까운 사연들을 대하면서 무료의료 봉사하시는 이승희 복음의원 원장 중심으로 농촌교회와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로막고 위협하는 우상숭배와 이슬람 확산을 막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미스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이슬람 확장을 저지시키고 농어촌교회와 미자립 교회를 위해 뜨거운 마음들이 합하여 기도의 불기둥을 이루었다. 2006년 5월5일 저녁 청원군 미원면에 있는 성대기도원에서 청주, 청원, 괴산 등 인근지역 연합으로 모였다. 박병식 목사님 인도로 뜨겁게 기도하고 성령 충만했다. 모인 곳이 사도행전 다락방같이 진동했다. 그 부르짖음이 가는 곳마다 진동시키며 놀라운 은혜,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났다.
제2차 미스바기도회가 청원군 남일면에 소재한 양들교회에서 김왕택 목사님을 강사로 2007년 5월 24일 오전 11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 기도의 불길이 온 교회에 가득하더니 뜨거운 성령의 불길로 진동과 부르짖음이 시간을 넘기며 계속되었다. 그날 금식하며 성령 충만하여 그 지역을 축호전도하기에 이르렀다. 3차 미스바기도회가 성대기도원에서 2008년 5월 12일 저녁 7시에 김동배 목사님의 말씀과 김정미 목사의 인도로 기도제목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충만함과 진동함으로 감격하고 큰 은혜에 놀라 하며 계속 미스바기도회를 가지기로 확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4차 미스바기도회는 청주시에 소재한 신흥성결교회서 2009년 5월 2일 10:30분에 모여 우상숭배를 타파하고 이슬람 확산을 저지시키며 나라를 위해 농촌교회를 위해 힘을 다하여 부르짖을 때 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기뻐하며 하나님이 이 기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에 기도의 힘을 얻어 괴산군 청천면 전도 집회인 청예제를 열게 되었고 연예인 임동진 목사 간증 등 1,200여 명이 모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문화 예수축제의 장을 열고 농촌교회 부흥의 불을 지폈고 제2회 청예제는 괴산군 전체로 확장되어 수천 명이 모여 농촌교회도 전도할 수 있고 부흥할 수 있음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농촌교회와 미자립교회를 위해 미스바기도회와 청예제 및 하늘군대기도회를 이끄시는 이승희 집사님은 괴산군 청천면 오지에 복음의원을 개원하여 농촌교회와 미자립교회 목회자와 그 가족들에게 무료로 진료하시는 산 순교의 삶을 사시는 분이시다. 삼성그룹 산업보건 관리 의사직을 사임
하고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께 재산포기 각서를 써서 하나님께 바치고 깊은 산골 오지에 와서 수많은 농촌교회 목회자들의 어려움을 접하면서 농촌교회와 미자립교회를 위하여 기도운동을 하게 되었다. 엘림 선교관을 건립하여 목회자들의 기도와 쉼터로 사용하게 되었고 금요철야기도를 새벽까지 온전히 드리기와 미스바기도 운동과 청예제와 속리산 깊은 산골 용화 지역에 용화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자를 파송하여 지원하고 하늘군대 목요기도회를 열고 매주 목요철야기도회로 모여 뜨겁게 농촌 미립교회와 이슬람 확산 저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농어촌 의료선교로 보령 산성교회를 방문하여 의료, 이, 미용, 전도팀 등 의료선교를 펼쳤다. 또한, 농촌교회선교를 위해 산 순교 책을 발간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교회 선교의 횃불을 들게 되었다.
한국교회 내 미자립교회는 약 70%, 그 가운데 농어촌교회가 50%를 상회할 것으로 관계자들은 추정한다. 이 같은 수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순탄치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에는 목회자 수급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들도 들어 있음을 감안할 때 실질적인 상황 파악이 급선무다.
몇 년 전 어느 기독교 잡지에서 실시한 한국 농어촌 교회 실태조사에 따르면 농어촌 교회 가운데 90%가량이 장년부 50명 이하의 영세한 소형교회이며 농어촌 교회의 약 40%가량은 교역자의 최저 생활비도 해결 못하고 있어 원조를 받고 1년 헌금 수입이 500만 원도 안 되는 교회가 절반이라는 통계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어촌 교회는 교육, 선교, 구제, 봉사라는 교회의 본래적 사명수행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의 존립문제 자체로 고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촌교회의 근본 문제는 그 마을 전체가 다 전도되어도 미자립일 수밖에 없다는데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어촌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선교지원을 하지 않으면 교회공동체로서 공동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한 지체입니다. 교단이 달라도 예수님의 지체요 이름이 달라도 한 성령님의 주관 아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른 때에 마시게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기서 한 예로 목마를 때에를 원어로는 ἐδιΨησα(에딮세사)동.직.1과.능.1단. 으로 말씀하셨는데 즉 ‘내가 목말라 했다’. 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목마라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목말라 고통 중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소자가 목말라 합니다. 굶주렸고 병들었고 벗은 몸에 또한 물질 감옥에 갇혀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하늘에 울려 퍼지는 농촌교회의 기도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부자 교회와 가난한 교회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몸입니다. 한 지체입니다. 주님의 한몸이 된 교회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눈물 흘리며 아파하는 농촌 오지 교회들, 작은 섬마을 교회들 미자립으로 고통받는 주님의 소자에게 천사의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인 것입니다. 주님께 영원히 인정되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청 예 제
충북 괴산 지역에 복음이 들어온 지 어느덧 100여 년이 됐다. 그러나 대다수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전도가 정체에 이른 상태이다. 이에 초교파적으로 연합해 다시 한 번 괴산에 예수의 바람이 불 수 있도록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축제인 ‘청예제’를 2009년 6월6일 괴산 문화센터에서 열렸다.
청예제는 급속도로 피폐해져 가는 농촌 지역교회에 힘을 불어넣고 각종 이단과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지역민들에게 복음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정래진(55·능촌순복음교회) 목사는 “이단단체와 타종교 등이 적극적 물량공세로 주민들을 사로잡고 있다.”라며 십자가를 부적처럼 생각해 교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밝고 건강한 기독문화를 접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1회 청예제는 괴산군 내 청천면에서 2008년 6월6일 10시에 처음 청천중학교 강당에서 개최됐다. 주민 1,200여 명이 참석했고 191명의 결신자가 있었다. 어린이와 청소년, 노인을 위한 뮤지컬 국악 공연,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찬양, 무용, 연예인 임동진 목사 간증과 전도팀의 전도프로그램으로 진행됐고 푸짐한 선물과 식사대접이 이어졌다. 4500여 명이 거주하는 면 단위에서는 대형 규모였고 성공적이었다.
근처에 화양계곡 등 속리산 깊은 산골 지역에서 열린 청예제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CBS방송에서 임동진 목사를 보내 주었고 서울에서 활동 중인 전도 단 등 청주에서 활동 중인 찬양팀 등 오케스트라 팀 등 여러 방면에서 헌신들이 모여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도우심이 시간 시간 성령 충만한 역사로 수많은 결실자 탄생과 은혜가 넘쳐났다. 풀무원에서 제공하는 선물 등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으며 불교의 텃밭인 지역에서 복음의 길을 열게 되었다.
제2회 청예제는 여기서 힘을 얻어 괴산군 전체로 확대됐고 78개 농촌교회가 가세했다. 괴산군 기독교연합회 부회장 고명성(55) 목사는 "청예제는 자발적으로 일어난 전도 축제"라며 "교회 연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런 축제가 전국 지역 전도축제의 효시가 될 수 있도록 함은 물론이고, 지역 농촌교회 부흥과 목회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을 두고 진행하고 있다. 현재 타 지역의 많은 재능 있는 분들이 자비량으로 헌금하고 후원하고 있다. 복음의원 김정미 원목은 “올해는 괴산군 2만 8000 명을 대상으로 괴산 지역 78여 교회와 협력해 청예제를 개최하였다”라면서 “전도 축제는 세상문화를 기독 문화로 바꾸고, 영혼구원에 초점을 둔 축제”라고 강조했다.
청예제는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뮤지컬을 비롯해 국악단 색소폰 합창 하모니카 워십댄스 공연 등 전도프로그램과 노인들을 위한 돋보기안경, 전자제품, 휴대전화 무료행사 등 풀무원에서 준비한 푸짐한 사랑의 선물과 경품 행사로 진행됐다. 코미디언 문영미 권사도 초청됐고 식사 대접과 4개 전도팀이 투입되어 전도활동과 청예제 이후에는 교회별로 신앙 실천을 위해 헌혈과 장기기증운동, 결식아동 및 독거노인 돌보기 무료증정, 남는 옷 모으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1만 명이 들어가는 괴산군 문화회관에 가득 메웠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성황리에 행사를 마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경품추첨권이 동났고 밀려드는 인원을 다 통제하지 못했다. 순서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로 흥분의 도가니였고 대다수 불교인인 이들에게 예수님을 보여 드리고 느끼게 하는 간증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찬양, 찬 무, 말씀과 연극 등 구원의 길을 여는 전도의 계기가 되었다. 중식제공에도 밀려드는 인원을 통제하지 못해 앞으로는 행사 진행요원들이 조직적으로 훈련되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푸짐한 선물과 경품으로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므로 매년 행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놨고 행사 후 교회마다 전도의 결실을 맺은 사례들이 줄을 이어 농촌교회도 전도할 수 있고 부흥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농촌교회 전도는 그만큼 힘들고 얼마나 어려움인지를 알아야 한다. 전도 분위기를 구성해주는 청예제는 많은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함으로써 예수 믿으면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창피해 교회를 외면했던 많은 이들이 교회로 나올 수 있는 분위기와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청예제를 처음 기획했던 이승희 원장은 농촌 교회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0년 전 서울에서 내려와 병원을 개업한 이후 점차 쇠락하는 농촌 현실을 목격했고 병원 경영도 어려워졌다. 더 심각한 것은 농촌 교회들의 몰락이었다. 대부분 농촌교회들이 미자립교회로 전락했던 것. 이 원장은 "괴산군 교회들의 90%는 출석 교인들이 5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라며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다.
도농선교회 충청지회 바울전도 팀의 목사님들이 복음의원 원장님이신 이승희 집사님을 만나 뵙고 하신 말씀이 이승희 원장님은 안과 전문의로서 서울에서 천호동 공안과 원장과 삼성그룹 이사로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뜨거운 마음과 시골에서 의료선교 등 복음의 뜻을 가지시고 오신 산 순교의 증인으로 보였고 수준 높은 병원의 시설과 전문의로서 경력 등을 고려하면 청주에서도 크게 성공할 수 있지만, 돈과 명예에 결부되면 순수하지 못하고 기름이 끼게 된다며 한사코 좁은 길을 택하신 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청원군 미원면에서 3년간 계시다가 더 낙후된 지금의 청천면으로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이름부터 복음의원으로 자신의 의도를 공개하고 있으며,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보게 되는 것은 카운터 뒤에 크게 쓰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성경구절입니다. (위 사진) 병원 안 분위기도 물리치료실에 와 진료실에는 찬송가가 울려 퍼집니다. 진료 가격이 쌀 뿐 아니라.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에게 무료 진료와 노인 분들에게 원가 5만 원인 관절 프롤로 주사를 무료로 놔 드리면서 교회에 다니실 것을 다짐받는다고 합니다. 간호사 겸 원목이신 김정미 목사님과 함께 일하시고 오후 4시면 병원 문을 닫고 같이 전도하러 다니십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시고 아픈 분들에게는 직접 진료를 해 드리며 복음의 기회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료장비도 고가인 이동식장비가 많다고 합니다. 본인도 복음에 드려졌을 뿐 아니라, 이단만 아니라면 어떤 교회 어떤 사람도 상관없이 복음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십니다. 저희들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하셨으며, 시간이 되면 한 번 방문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들과 기회가 닿는 대로 함께 전도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며 6월에는 태안반도 쪽에서 전도계획이 있는데 가까우니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도 많은 도전을 받았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함께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좁은 길을 선택하여 가시는 병원원장과 목사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천사 같았습니다.
농촌·오지교회의 ‘살아있는 순교자들’
국민일보 | 입력 2009.08.02 17:45
이승희 원장
눈물·인내로 '복음 못자리' 지키는 목회자들에 박수를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농어촌 및 산간 오지에서 사역하는 주의 종들에게 존경과 위로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시골은 서울과는 다릅니다. 의료시설 운영도 쉽지 않습니다. 농어촌 교회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도 아주 괴롭습니다. 복음의 못자리인 농어촌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주의 종들에게 하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한 뒤 순교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농촌에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목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곧 감동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무엇을 먹고 살까. 하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려고 저를 이곳에 보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제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네가 이 시골에서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겠다." 일종의 시험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따르던 제자들이 낙심하여 눈물 흘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파송의 성만찬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습니다. 저는 농어촌 목회자들의 고생과 헌신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기도와 금식으로 농어촌 교회를 지키는 분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낙심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해주시도록…. 눈물로 강단을 적시는 종들을 저는 보았습니다.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종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삶을 '살아 있는 순교'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향교회 목사님들께 정성어린 선교와 뜨거운 기도 그리고 격려의 전화라도 한 번씩 드립시다. "목사님, 고마워요. 고향을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이 한 마디에 크게 위로받을 것입니다.
이승희 괴산복음의원장
산 순교Ⅰ(파송)
이승희 원장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 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라고 표현한 사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산 순교로 농․어촌 및 산간 오지에 들어가신 목회자들과 주의 일꾼들을 위로하며, 부족한 이 글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오지 목회자들을 위한 관심과 기도를 촉구하는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와 의과 대학, 대학원을 서울에서 마쳤고 그곳에서 오래 개업하다가 삼성 그룹에서 보건 관리 의사로 근무한 후 주님의 인도 심으로 목사님들과 상의한 끝에 시골에 개업한 지 어느덧 10년이 흘러버린 필자는 점차 쇠락해가는 농촌에서 시골의 많은 의료기관이 그러하듯이 날마다 피폐해져 가는 의료경영을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더욱 심각한 시골교회의 몰락을 알게 되었고 미자립 교회라는 낙인과 함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너무도 처절하다. 이제는 지쳐버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많은 목회자들을 바라보면서 증인 된 심정으로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적지 않은 교회가 복음전파의 명목과 삶의 해갈을 위해 사회복지와 기타 그와 유사한 국가주도 복지프로그램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몰두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도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동서고금 도시와 농촌을 망라하고 영․혼․육의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위대한 복음의 능력에서 멀어져 더러는 돌떡을 구하는 새로운 우상 숭배의 길을 택했습니다.
진정 하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며 그들은 성전이나 제단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으로 살아가실 것입니다(고전 9:13~14). 또한, 모든 복음 전하는 자들 중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를 믿는 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또 앞으로 닥칠 환난과 기근의 시기에도 오직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감추어진 만나로 승리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농촌과 목회자가 살아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돈으로 확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의 돈을 교회 사업으로 돈세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길만이 목회자와 농촌교회와 우리가 영원히 살 길이 아닌지요.
우리 성도들과 목회자들도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고 아플 때 약도 먹고 치료도 받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이 영이고 교회도 궁극적으로는 영의 문제를 다루는 곳이므로 영을 살리기 위한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교회는 선교가 목적이며 그것은 재림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먼저 하늘나라의 의를 구할 때 사르밧의 기적이 일어나고 가뭄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한 뒤 십자가 이전에 실족하지 않고 순교로 삶을 마감했던 것처럼,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으로 위로 삼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엘리야의 심령을 회복하고 엘리사의 능력으로 농촌 목회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이시기를 바라며 그 길만이 참 살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이라는 다 저물어가는 곳에서 교회와 교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나 보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시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디베랴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쫓았던 예수님께서 어이없이 처참하게 돌아가신 후 낙심하여 디베랴의 황량함 앞에서 눈물조차 흘릴 힘도 없었던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주님은 떡과 생선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파송의 성만찬을 베푸실 그때에 확인하며 각인시켰던 것은 오직 주님에 대한 사랑이었고 그 상으로 순교의 면류관을 그 자리에서 주시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5천 명이나 되는 무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신 선교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들리어진, 부스러기로 가득 찬 영의 열두 바구니의 재연으로 새로운 물고기와 떡으로 생명을 바쳐 내 양을 먹이고, 치고, 감추어진 만나로 내 양을 먹이라고 마지막 파송장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직 디베랴의 황량함뿐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 아멘. 오직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 남은 십자가를 지고 전 지역을 전도하여 온 마을주민들을 교인으로 만든다 할지라도 영원히 미자립일 수밖에 없는 농․어촌 산간지역의 작은 교회와 목회자 분들. 그분들에게 미자립이라는 낙인으로 가슴 아프게 하며 기도도 선교지원도 하지 않는 일부 교회들과 교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레위인을 돌보지 못한 우리들과 한국 교회의 참회를 촉구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열악한 환경과 천대와 멸시 속에서 자녀들 문제로 더욱 왜소해지고 아파하며 수치를 느끼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일 지라도 세상의 방법과 경제 원리로 교회를 유지해가지 않으려고 오직 기도와 금식으로 오늘도 눈물 흘리시는 오지 목회자 분들. 그분들이 끝까지 참고 인내함으로 처음 부임할 때의 주님을 향한 첫사랑과 각오를 회복하고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산 순교의 면류관을 받으실 수 있도록 농․어촌 산간지역의 모든 목회자 분들께 우리 모두 깊은 격려의 박수를 드립시다. 아울러 졸렬한 이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9년 사순절, 엘림(복음의원 선교관)에서
복음의원장 이승희
산 순교Ⅱ(생존)
'오지 목회자 및 미자립 목회자들을 향한 주님의 계획과 비전은 무엇일까?'라는 묵상을 수년째 하던 중 필자는 한 가지 큰 비밀을 깨달았다. 그것은 곧 성전 문을 닫아야 하고 파산 났어야만 했던 대다수의 교회들이 하나님만의 비밀로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도 역시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양육 방법과 인도하심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채무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목회자들을 바라보면서 또 다시 깊은 신음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목회자의 능력의 차이나 주님의 소명 여부가 주된 원인일까, 아니면 그곳을 떠남으로써 주님의 새로운 인도 하심을 받게 되는 것일까. 밤새 번뇌하면서 날을 하얗게 세우고 주님께 기도했던 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가 얻은 결론은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고 그 모든 것이 연합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주님의 은총과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라’. 라는 감사함뿐이었다. 교인의 수와 헌금에 의해서 교회의 생존이 결정되는 일차적인 생존의 관점에서는 교회가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전
적 교회의 틀을 변형시켜가면서까지 살아남아서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종교나 무신론 사업자의 성공적인 사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 오지나 미자립 교회의 모든 목회자들이 기독교적 생존의 메타포로 일차적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동일하게 겪게 되는 현실의 어려움에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히 맞서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베드로의 고백(마16:16)을 다시 각인하고 그러한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보증(고전9:13~14)만을 철저히 믿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주의 종들은 주님께서 특별한 소유로 삼고 까마귀를 날리시며 병의 기름과 밀가루가 동나지 아니하도록 하실 것이며, 감춰진 만나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까지 그들을 보존, 양육, 돌보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곤경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서 생존한 여러 간증 자들의 사례에 힘입어 시골에서 많은 환자를 무료로 돌보는 필자의 병원도 수차례 폐업의 위기 때마다 주님의 얼굴과 손만을 구하기로 작정하고 예배시간을 15분에서 30분, 45분, 60분으로 차츰 늘려서 지금은 하루 여섯 시간 근무하는 병원에서 아침 8시부터 한 시간 동안 직원들과 환자들이 예배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병원이 되었고 오후 4시 일과 후에는 거동불편 자, 장애인의 무료진료와 전도 사업을 하는 병원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운영하시는 병원이 되었다. 오히려 구제와 선교의 지경이 넓어졌고 그것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생물학적인 생의 보존을 택하기에 앞서 부족하나마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서의 바울사상에서 중시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현재의 신분이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새 사람이냐, 거듭나지 못한 옛 사람이냐로 갈라지듯이 모든 복음 전하는 자들도 현재의 사역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는가 하는 깊은 영적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이라면 현재의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일차적인 생의 보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살아남기 이전에 깊은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성령에 의한 성화로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인 기독교적 생존가치 즉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 하심과 보호하심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로 인하여 복음이 확산되고 우리의 삶과 교회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다. 승리합시다! 마라나타!
-참고-
서용원, 마가복음과 생존의 수사학
정신섭, 로마서에 나타난 성화에 관한 연구
2009년 7월 5일 엘림(복음의원선교관)에서 이승희 원장
산 순교Ⅲ(소 통)
요즈음 온 나라가 소통 부재로 어려움에 처했다고 떠들썩합니다. 각계각층으로부터 개개인의 삶에 이르기까지 소통 부재로 인한 각종 구호와 농성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대립과 충돌이 소통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원활한 소통에 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면서 불통의 상징인 바벨탑과 그 회복을 위한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사소통만 된다면 모든 것이 원만해지고 완전해질 수 있을까? 불통의 극치인 자폐와, 신과 인간 사이의 단절이 의사 교환만으로도 간단하게 소통될 수 있다면 헬렌 켈러는 설리반의 희생이 왜 필요했으며 전지전능하시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왜? 피 흘려 죽게 하셨을까? 말라기 이후 세상과 단절하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육신으로 보내신 이유는 이 땅과의 소통을 위함이었고, 그 외아들은 영원한 소통, 궁극적 소통, 하나님과의 화목 즉, 구원을 위한 제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신성이 인성을 이기는 기도를 드린 후 기꺼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은 세상과 단절하신 아버지와의 완전한 소통을 위한 언어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 컴퓨터가 0과 1로 된 언어로만 소통이 가능한 것처럼 아버지와 인류 사이의 소통을 위한 패스워드가 무흠한 제물인 자신의 피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보혈로 완벽한 소통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단 한 번의 완전한 예배였으며, 그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셨나요? 얼마 전, 인사차 풀무원을 방문하였을 때 원경선 선생님께서 선물로 주신「기독자의 삶」이라는 저서에서 이러한 구절을 발견하였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예배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변하는 기도만 드리셨다면 그리스도가 되셨겠는가? 공부 열심히 하겠다고 큰 소리로 구호만 외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소통이 십자가에서 죽이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냄으로써 시작된 것처럼 예수님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의 목숨을 건 기도가 십자가의 피 뿌림으로 이어져 한 방울도 아낌없이 이 저주받은 땅에 뿌려진 뒤에야 성서의 휘장이 찢어졌고 완벽한 소통인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온 열방이 아버지께 예배드리게 되었고, 영‧혼‧육의 완전 치유인 이아신(행4:30~31)이 이 땅에서 일어났으며, 유월절 성만찬의 실제가 이 땅에서 이루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하나님이 없어도 모든 것을 생산하고 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집단적 자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주 예수께 사명 받은 우리들이 과연 어떠한 제물로 집단 자폐된 이 거대한 세상을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주님을 모르거나 영접하지 아니한 자를 하나님과 소통시키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우리를 바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려야 할 삶 속에서의 참 예배의 본으로 강도 만난 이웃을 돌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제물은 데나리온 둘과 기름과 포도주, 부비였지만 모티브는 자비였습니다.
상대방을 유혹하여 짝짓기를 하려는 하등동물의 피부로 분비되는 페로몬이라는 향을 생각하며 이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향이 퍼지지 않고서야 어찌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 향은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우리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성만찬이고 소금과 빛 된 삶일 것입니다. 세상과의 짝짓기. 소통,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 성숙한 자만이 할 수 있고 자녀를 생산할 능력이 있어야지만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의 자녀로 해산하기 위하여 세상과 짝짓기를 합시다! 소통을 합시다! 그래서 사탄이 믿는 자들을 고소할 틈(단6:4)을 얻지 못하도록 합시다. 세상과 짝짓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겸손히 들어야 하며 끝까지 인내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하늘 소리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을 종의 자세로 섬깁시다. 그러면 그들이 자신들을 위하여 아무 대가 없이 헌신하며 희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초대교회 때와 같이 그들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복음의 확산이며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파토스의 근본이신 예수님을 쫓아 오늘도 세상 속으로 지고 가는 자기 십자가가 거룩한 산 제물이며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최고의 소통인 형통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2009년 한 여름 밤 엘림(복음의원 선교관)에서
복음의원장 이승희 올림
산 순교Ⅳ(사명)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수10:12) 어렸을 때부터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세상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우주에서 오는 에네르기, 엘로힘을 얻은 것처럼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감히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는지요. 출애굽의 여정 중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과 역사 하심을 젊어서부터 체험하고, 아말렉과의 싸움의 승리를 귀에 외워 들리게 한 결과 여호수아는 완전한 모세의 후계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늘 군대의 장관으로서 가나안에 당당히 입성하여 여리고를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일평생 체험하는 수많은 경험과 학습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확률적으로 거의 희박했던 일이나 확률적으로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것을 일평생 뇌리에서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전자는 확률이고 후자는 기적입니다. 벼락 맞는 일이나 복권에 당첨되는 일은 기적이 아니라 확률입니다. 지금도 지구 어느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고 복권 당첨자도 매주 발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시33:7)같이 쌓으시며 죽은 생명체를 살리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며 이것을 행한다면 바로 기적이 될 것입니다. 깨진 유리나 병은 에너지를 가하면 감쪽같이 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꺾어진 꽃이 원상복귀 된다거나 죄로 죽은 사람이 부활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며 이것은 확률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본인도 젊은 시절 세상 죄의 쾌락으로 이미 죽었다 함을 받았으나 저를 사랑하는 여러분들 중 특히 어머니와 아내의 기도로 다시 달란트를 돌려받은 죄인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이 어찌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작년 8월 초순 금요철야예배를 거의 마칠 무렵인 새벽 3시쯤 기침과 함께 울컥 치솟는 무엇을 느끼고 급히 화장실로 가서 뱉어보니 다량의 선혈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은 긴급한 상황에서 수넴 여인이 취한 행동을 떠올리며 주님께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기억나게 하신 것은 얼마 전에 읽었던 말기 담도암 환자의 실화였습니다. 더 이상 의학적 조치는 효과가 없었고 돌아가실 날만 손꼽던 환자가 갑자기 양복과 가방을 가져오라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내는 이제는 말기 간성혼수로 착란이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소리 높여 남편을 붙들고 울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남편은 재차 독촉했고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아내는 집으로 가서 양복과 가방을 가져왔습니다. 남편이 부어오른 몸으로 간신히 양복과 구두를 신은 뒤 가방을 들고 병실을 걸어 나서다가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었고 죽음을 앞두고 모든 것을 포기한 체 이사야 53장 5절을 묵상하다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구절에서 그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모든 인류의 병과 죽음을 구원하신 예수님이신데 사탄에게 속아 세상 시간과 의학적 기준으로만 따져서 현재 담도암 말기로 죽어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길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며 요일을 계산해 보니까 어느 구역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인도하려고 믿음으로 걸어나가다가 사도행전의 완전치유인 이아신(행4:30~31)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멘! 필자도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대로 흉내를 내며 고열과 각혈 속에서 본인 처방 하에 항생제와 수액을 맞아가면서 터질듯한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4일 동안 낮에는 근무하며 새벽과 저녁으로 기도원에 들러서 비몽사몽 간에 힘들게 기도하고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원장님 내외분의 사랑기도로 4일 만에 완치되었습니다. 몸은 비록 약해졌지만, 주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과거 직장 부하 직원과 지인 등 네 명을 전도하러 거제도에 다녀오는 것으로 휴가를 대신했습니다. 그 당시에 병원에 갔더라면 일단 입원은 필수이고 피검사, 조직검사, 기관지경검사, 엑스레이, CT 촬영, MRI 및 폐 기능 검사를 했을 것이고 특이소견이 없는 건강한 중년에게 제일 가능했던 병명은 폐암이었습니다.
과거 오랜 흡연경력이 있고 잠복기도 거의 맞아떨어진 나이였고 무증상으로 어느 정도 크게 자란 암세포가 혈관을 건드린 것으로 의심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극한 상황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로 육체적 구원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 하심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남녀평균 수명이 각각 79세와 80세가 넘었지만, 평균수명까지 살아갈 동안 암이 생겨날 확률이 3~4명당 1명꼴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연세도 33세입니다. 최소한 그 이상으로 산 우리들이라면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멕시코 독수리는 나이가 마흔 살 정도가 되면 깃털이 무성해지고 엉겨 붙습니다. 부리는 두껍고 휘어져서 더 이상 사냥하고 싸우기에 부적합해진다고 합니다. 더욱이 발톱도 구부러지고 살이 쪄서 도저히 사냥물을 포획하기에 힘들어서 그냥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때쯤 되면 이 늙은 독수리들은 외부로부터 은폐되어 숨을 수 있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틈에 처박혀서 먼저 부리를 바위에 쪼아대어 선혈이 낭자하게 깨뜨려 버린 후 반죽음이 된 뒤 많은 날을 기다린 끝에 새부리가 나기 시작하면 그 부리로 발톱을 다 쪼아내고 뽑아버려서 서 있기도 힘들게 된답니다. 그러다가 새 발톱이 나면서 층이 지고 무거운 날개 깃털 및 온몸의 깃을 다 뽑아내어 피투성이가 된 뒤 새 깃털이 자라나면 젊었을 때와 같이 완전히 건강해진 위풍당당한 모습의 독수리가 되어 40년을 더 하늘의 강자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동물 세계의 비밀을 깨달은 후 '바로 이제는 내 차례로구나!!!'
바울 사도가 조상의 유전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적 생애와 율법에 대한 열정의 묵시사상에서 옛 세대 안의 새 세대의 현존으로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농어촌 및 오지 일선 교회에서 이제는 지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역자들이 주님의 기적을 체험한 과거와 오늘을 되살려 새 세대의 희망으로 절망과 죽음을 넘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확신으로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를 바라며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박수치며 격려하는 것을 위로 삼아서 끝까지 산 순교의 면류관을 받으실 수 있도록 필자도 큰 박수를 보내며 이글을 마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노라.' (행20:24)
2009년 한여름 복음의원장 이승희
표 적
수많은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고 새로 생겨나면서 몇몇이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할 때, 자립한 교회만 주님이 함께하신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세워주셨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수년째 묵상 중인 필자는 여러 기독 실업인들의 경영 방법과 사업체를 바라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 방법대로 운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는 본인의 승부욕과 독특한 경영 방식으로 사업체가 성공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서 관여하셨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함께하실까 라는 고민 중에 표적이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 먼저 이 글은 단지 한 개인의 신앙고백임을 밝히고 부족하나마 사랑으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옆에 두고도 얼마나 많은 혼란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는 주의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표적을 구하고 그것을 다림 줄 삼아 진로를 결정했는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웠던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일수록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부자와 나사로의 가르침을 통해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사람 앞에 높임을 받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 즉 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마저도 거부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눅 16:31) 그렇다면 예수님의 요나 표적을 믿으면서도 나에게 필요한 새로운 표적을 구하기 위해 주님께 부르짖으며 나아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더 이상 관심과 흥미를 이끌어낼 수 없는 십자가 부활 사건을 뒤로하고 많은 교인들을 자극하여 구름 떼 같이 모일 수 있도록 새로운 표적을 구하고 자랑하며 이적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많이 알고 많은 은혜를 받았기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쫓아 땅 끝까지 가겠다고 헌신, 결단한 후에도 스스로 의롭다 하며 높임을 받고 끊임없는 염려 근심과 재물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방황하는 바로 우리들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표적을 구하지 않고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과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부르짖음, 즉 멜기세덱과 다윗의 위를 잇는 예수를 메시아로 깨닫고 절규하는 메시아적 접근을 원하셨고,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셨던 진정한 기독교의 표적이 아니겠습니까?
빌라도와 유대 백성들은 자신들이 형틀에 못 박은 나사렛 예수님이 어린양과 같이 말없이 죽은 후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후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악하고 음란하므로 표적을 믿을 수 없었고 믿는다 하더라도 새로운 표적을 끊임없이 우상숭배 대상으로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손 중 세례받은 우리들은 이사야 53:5-6을 표적 삼아 많은 어려움 속에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엘리야가 손바닥만 한 구름을 큰 비의 표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강보에 싸여 뉘어 있는 아기를 표적(눅 2:12)이라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세상에서 제일 나약하고 남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고 더욱이 남들이 눕혀주어야 누울 수 있는 “뉘어” 있는 보잘것없는 아기를 메시아로 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 임이라.’ (사 9:6) 아멘!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길에서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시느라고 지체해서가 아니라 회당장의 집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낼 표적으로 보시고 아이가 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처한 모든 어려움과 포기하고 싶은 모든 환경은 주님의 응답이 더디거나 함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달리다굼” 하심으로 드러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표적이라고 굳게 믿으며 모든 참음으로 사도의 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담도암 말기의 목사님께서 이사야 53:5-6을 묵상하시다가 치유되었듯이 본인도 나사렛 예수님을 메시야로 부르짖는 소경 바디매오의 절규를 흉내 내어 큰 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필자의 성경책 중에서 제일 낡고 너덜거리지만, 오랫동안 아끼고 소장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낡고 빛바랜 종이 위에 씌어 있는 글들,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바로 하나님이며 오늘 나에게 이루어주실 아버지의 언약인 것을 굳게 믿으며 오직 말씀만을 표적으로 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9. 09 엘림(복음의원 선교관)에서 복음의원장 이승희 씀.
(043-832-7606,7)
고르반
병원 진료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 지역을 순회하면서 의료전도를 시작한 지 7년이 지났다. 4년 전부터는 문의교회 원로 박홍순 목사님 내외분께서 동참하셨다. 전도를 마치고 늦은 시간 엘림(병원 선교관)에 돌아오신 후 하루 주무시고 그 다음날 아침 8시부터 시작하는 병원 예배를 인도해주시고 돌아가신다. 매주 반복되는 일이라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까 경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나님께서 간호사 겸 원목인 김정미 목사님과 둘이서 다니던 의료 전도에 이 귀한 목사님 내외분을 보내주셔서 활기를 띠게 하셨다. 원로 목사님 내외분을 통하여 저희를 새롭게 하시며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하셔서 주님께 감사드린다.
사모님께서는 관절이 좋지 않아서 저에게 관절, 인대 치료제인 프롤로 주사를 맞고 절룩거리면서도 전도를 거르시는 일이 없어서 의사인 저나 동역 자들로 더욱 옷깃을 여미게 하신다. 원로 목사님께서 74세 되시던 2년 전 어느 날, 시골 마을회관을 방문하며 전도하기에는 악기가 최고일 거라고 말씀하실 때 설마 설마 했는데 색소폰과 아코디언을 적지 않은 돈을 주고 구해오셨다. 그날 밤늦게 전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모님은 관절염으로 절룩거리시고 고령이므로, 또한 원로 목사로 이 나이에 무슨 전도고 더더군다나 소질도 없는 악기가 웬 말이냐 하시면서 그저 내가 목사이므로 말씀만 전하면 되고 그걸로 족하다고 하셨다면 누가 무어라고 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전도하면서 전도현장에서 숨을 거두는 게 소원”이라는 목사님 내외분을 바라볼 때 나에게 고르반(막 7:11)이라는 성경 단어가 떠올랐다. 주님께서 허물어버린 담(엡2:14)을 언제부터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담(겔42:20)으로 다시 쌓아 교회 안에서의 모든 것은 거룩하고 교회 밖의 세상일은 속된 것이므로 교회만 거룩하고 주일날만 성일이라 하며 제도화된 예배,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 구제에만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교리에 사로잡혀 전도와 봉사를 하면서도 식민지의 점령군과 같은 우월함으로 다가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구약의 법궤 신앙이 다시 우리를 율법 아래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있어야지만 여호와께서 함께하시며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들은 우리를 거룩한 곳과 거룩한 일에만 가두어 두려는 사람의 유전을 즐겨 좇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형편없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고 하셨다. 그래서 더 크고 많은 피 흘림이 필요해서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를 십자가의 거룩한 산 제물로 죽이심으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도다. 라는 기독교의 핵심말씀을 이루어 주셨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어김없이 바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을 묵상하면서 고르반으로 가득 찬 나의 신앙생활을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에 드린 헌금이 구제에도 폭넓게 사용되므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많은 걸인들을 외면해버린 고르반,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무능과 게으름을 비난하면서 외면해버려 더욱 큰 곤경에 처해 있는 골육들을 향한 고르반, 같은 공동체 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인들을 바라보면서도 성도들 간의 금전 거래를 금한 목사님의 말씀으로 위로받으면서 기도나 하자고 외면해버린 고르반, 주일 날 바쁜 교회 내 봉사로 자위하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고 등한시 한 고르반, 선교헌금을 출석교회에 적당히 드림으로 주변의 어려운 형제 교회와 목회자들을 목도하면서 무감각했던 고르반이 과연 면죄부인가를 생각하며 베드로나 바울사도가 유대의 바리새적 열정으로 이방인에 대해서 고르반 했더라면 누가 무어라고 트집 잡을 수 있었겠으며 이방인인 우리들은 어디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 구원을 위해서 농어촌, 산촌, 오지로 들어가신 이름도 빛도 없으신 목회자 분들에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많은 고르반을 외쳐대지 않았던가. 뜻을 같이한 인근 지역 목회자들과 병원식구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전도대원들은 그동안 울퉁불퉁한 시골 밤길을 돌아다니느라고 부어오른 관절과 인대에 주사를 맞아가며 오늘에 이르렀다. 낮에 환자들에게 전도하고 찬양으로 하루를 알차게 보냈기 때문에 퇴근 후에는 집으로 바로 가서 쉬어도 교리상으로 문제가 될 게 전혀 없을 거라는 우리 스스로의 고르반을 외쳐 된다면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누워있는 환자들이나 고령의 거동 불편 자들에게 누가 전도하고 무교회 지역의 불쌍한 영혼들에게는 누가 가서 예배를 인도하겠는가? 그 잃어버릴 수 있는 한 구원 한 구원을 위해 농어촌, 산촌, 오지로 들어가시는 목회자 분들, 친구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방금 전에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에게 맞서서, 고르반하지 않으시고 유대로 들어가시는 주님!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바로 구원의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주님! 그 주님의 심정으로 십자가를 메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주님 가신 길로 좇아가시는 주의 종들,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데나리온 둘을 아낌없이 바치며 부비까지 약속하는 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이 찾으시는 이 시대의 참 제사장이요 레위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들을 누가 미자립이라는 오명으로 좌절케 하며 수치스럽게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립교회는 넘어질 일만 남은 교회들인가? 그들을 향했던 각종 각색의 고르반들을 생각하며 나는 큰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와 판단을 뒤로하고 강도 만난 이웃을 돌보는 것이 아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주로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 내세울 것이 없는 권사, 집사들이 주축인 우리 ‘하늘 군대’ 군사들은 제사장과 레위의 에봇을 벗고 주님께서 주신 이, 미용기술, 의료기술, 도배장판, 건축 잡일, 악기연주, 찬양, 율동 등의 달란트를 선교의 앞잡이로 쓰면서 오늘도 강도 만난 이웃을 구하러 두메산골의 어둠 속으로 절룩거리며 들어갑니다.
참고 ‘상자 속에서 나오신 하나님’ 대전 허성도 목사
엘림(복음의원 선교관)에서 복음의원장 이승희 209년 11월 (043-832-7606,7)
이 아 신
본인이 의사이고 특히 부족하나마 병원이름이 복음의원이라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기도만 해야 할 병과 반드시 의사를 찾아가야 할 병의 구분이다. 사실 의사가 되기 이전부터 고민했던 부분이고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의사들, 목회자, 교인 심지어는 불신자들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릴 적부터 신유의 현장을 목격하고 신기해하며 주님을 경외하기도 했지만, 기도로 나았다고 기뻐하시던 분들이 얼마 가지 못해서 재발하거나 심지어 악화되어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목도하면서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대체의학과 한방을 비롯한 병원들의 광고성 기사, 방송 매체의 호도 성 기사, 심지어 기독교계 내의 전인치유, 심령치유, 은사치유, 양봉, 꽈샤, 경락, 투타, 음악, 향기, 기 치료 및 기타 해독 요법 등을 접해보았지만, 나의 갈급한 마음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진료 중에 수많은 불치 난치 환자들에게 희망도 주고 최신 의학으로도 치료도 하고 기도도 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의문과 혼란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도저히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유의 경험을 이따금 겪게 되어 내심 기쁘기도 하고 속으로 우쭐대기도 하며 주님을 경외하던 중에 어떤 병이라도 우리 병원에 오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 같다는 50대 초반의 시골 목사님 처남이라는 분을 만났다. 병명은 반신불수의 뇌혈관 출혈 환자 즉 풍 환자였다. 이 병원 저 병원 다 돌아다녀 보았고 이것저것 좋다는 것은 다 해본 후유증이 큰 불치의 환자였다. 너무 기가 막히고 황당하여 손사래를 쳤지만 먼 길을 찾아온 환자를 그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순간적인 갈등, 고민 끝에 해 드린 것은 이왕 오셨으니 기도나 합시다. 라는 기독의사의 상투적인 말투였다. 그러나 기도나 합시다. 라기보다는 기도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나 라고 말했던 부분을 간절히 회개하고 몸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였다. 그 후 그분은 병이 나았고 저는 감출 수 없는 흥분으로 도리어 적막에 싸였다. 그러고 나서 한 3개월가량 지났을 때, 우연히 적막을 깨는 소식을 접했다. 풍에 걸려 비틀거렸을 때는 날마다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고 울부짖었던 그분이 풍이 나아서 육신이 회복된 뒤에는 그동안 연약해졌던 육신을 튼튼하게 하려고 운동하며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길거리에서 차에 치여 그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나는 상당한 충격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면서 주님께 무릎 꿇고 금식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부르짖었다. 치유에 관한 말씀과 책들을 잡히는 대로 읽고 치유의 현장에도 많이 가보았다. 그때 의사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수종 들고 바울과 동행하면서 치유의 현장을 제일 가까이에서 목도했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헬라인 누가가 사용했던 헬라어 ‘이아신’ 즉 완전 치유라는 그 당시의 의학용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이아신’ 이라 불렀다. 복음의원 선교관 이름을 본인이 출석하는 중부명성교회의 송석홍 담임목사님께서 엘림으로 이름지어주시기 전까지는 ‘이아신’으로 불렀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치유는 일시적, 부분적, 암시적, 상징적, 조건부적 치료가 아닌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완전 치유였다. 그리고 그 치유는 병들었던 육체나 정신만의 치유가 아니라 영적 치유까지 함께 일어나는 전인 치유 즉 완전 치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 4:30,31) 아멘! 그것은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모인 곳이 진동하는 기이한 표적과 기사를 체험하면서 혼적치유(쇄뇌 치유) 즉 삶의 방식이 변하여지고 아울러 영적인 치유가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성령을 충만히 받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이 동시에 또는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본인도 알코올 중독이라는 흉악한 결박에 사로잡혔던 과거에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별의별 방법을 수도 없이 시도하였지만 그때마다 실패하여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한 부적절한 사회생활, 직장생활, 교회생활, 가정생활로 괴로워하며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의사인 내가 나를 조금도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럴수록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다 낭비하여 어둠 속으로 쫓겨나야 할 불쌍한 나를 세상 사람들처럼 손가락질하며 저버리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부모님, 아내, 형제, 매형, 누님 그 외에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지체들, 그들의 탄원으로 탕진한 달란트를 다시 주님으로부터 돌려받고 오늘까지 빚진 자로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도 이단만 아니라면 연합하지 못할 죄인이 없다. 라는 신조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만일 의학적인 방법을 포함한 여러 가지 도움으로 술만 끊었다면 과연 술 끊은 후의 삶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주님께 부르짖으며 괴로워하던 알코올 중독이었던 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풍이 나아서 육적 회복을 기뻐한 뒤 잠시 뒤에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그 환자처럼 되지는 않았을까 라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현대 의학이나 요즈음의 기독교적인 치유의 관점은 영, 혼, 육 그중에서 육적 치유 조금 더 나아가면 혼적 치유까지만 관심을 두고 W.H.O(세계보건기구)나 의사들이 정한 정상 범위 안에 들어가도록 하는 생물학적 치유를 완치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이다. 그 영을 구체화시키고 가시화시키는 것이 육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영의 온전한 치유, 회복을 무시하고는 완전 치유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적인 치유 즉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려 함에는 생명조차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명을 받는 완전 치유 즉 이아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의사들과 사역자들이 말씀의 무지에 갇혀버려서 완치를 선포하고 본의 아니게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찾아온 환자가 낫기를 바라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는 하지만 육적인 회복만을 치유의 기준으로 삼았던 바로 나의 경험이자 나의 회개이기도 하다. 완전 치유에 대한 무지로 인해 많은 사람을 더 큰 혼란과 어려움 속으로 빠뜨린 것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라는 건강의 축복이 단순히 생물학적 정상 범위 내의 삶만 정의한다면 수많은 순교자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이고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김지선 씨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얼굴과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화상 이전의 그 아름다웠던 자태가 지금은 육적으로는 정상의 한계를 벗어났지만, 그 고통 중에서 주님을 만나 온전히 삶이 바뀌고 주님의 전권대사로 완전한 하늘나라의 아름다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로, 예수의 전염병자로 사명을 받은 완전 치유의 대표적 사례가 아니겠는가? 아울러 극단적인 예로 암에 걸렸어도 온전히 주님을 만나서 삶의 방식이 바뀌고 복음 전파자가 됐다면 어차피 죽을 육적 수명이 조금 단축된다 하더라도 완전 치유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 두서없는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기독교적인 치유 사역의 정의와 기준이 말씀에 온전히 근거해서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도만 해야 할 병과 반드시 의사를 찾아가야 할 병의 구분으로 고민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완전 치유인가로 번민하며 찾아오는 병자들의 영, 혼, 육이 주님 쓰시기에 유익하게 하며 어떤 복음 전파자로 세울 것인가 라는 새로운 치유의 기준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으로 생긴 하늘의 질병조차도 생물학적 개념으로만 접근하여 많은 기독의사들이나 치유 사역자들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크게 두려워하고 회개하면서 저를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행 3:8)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길 기도하기로 작정하며 오늘도 부족한 저에게 큰 깨우침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관점에서 본 완전 치유를 소개하고자 한다. 성서상의 치유와 이 시대의 많은 치유 사건 중에서 으뜸 되게 예를 들 수 있는 나면서부터 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배냇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 이 땅에서 은혜 받은 우리 모두가 행할 수 있고 행하여야만 되는 완전 치유의 또 하나의 모델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제사장과 레위의 에봇을 벗고 강도 만난 이웃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돌보는 예수님이었다.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온몸과 정성을 다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쏟아 붓고 데나리온 둘을 아낌없이 바치며 주막으로 데려다 뉘어 놓고 돌아오는 길에 부비까지 약속하는 참사랑의 모습, 아버지의 사랑을 실현하는 아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아기 예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아니겠는가?
그 사마리아인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완전 치유자의 모습으로 우리의 영, 혼, 육의 치유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무 말 없이 피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의 실현자, 치유자가 아니겠는가?
감사합니다. 2009.12월
엘림(복음의원 선교관)에서 복음의원장 이승희(043-832-7606.7)
제2부 하늘군대
하 늘 군 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수년 전부터 기도하던 지역의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복음의원 의료진-전도팀, 이아신 갈릴리선교학교, 두레전도-철야 기도팀, 우암산 산상 기도팀)이 모여서 금년 7월13일 성산기도원에서 “중부지역 목요기도회”로 결성이 되었다. 복음의원을 중심으로 모인 이 모임은 “하늘 군대기도회”라는 힘 있는 이름으로 명명하게 되었는데…….
하늘군대는 에스라1:5에 “하나님께 감동 받은 자들이……. 다 일어났다.”고 말씀하신 것처럼-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주님께 이끌리어 자발적이고 자원하여 마음에 감동을 받아 일어나게 된 순수한 기도팀이다. 하늘군대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였고 일어서게 된 것이다. 하늘군대는 이 마지막 때에 착하고 충성된 주의 종들과 연합하여 군대를 이루며, 선한 목표를 두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바라기에 이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될 것이다.
하늘군대는 매주 목요일 밤을 기도의 밤으로 정했으며, 청천지역에서는 해마다 “청예제”를 열어서 지역복음화와 지역목회자들의 연합을 도모하고 있으며 괴산지역에서는 이번에도 11월 21일에 “어린이 전도”를 하게 되며 지난 10월 27일에는 보령지역에서 집회(의료봉사, 찬무, 이, 미용 전도행사)를 갖기도 했다.
하늘군대에서는 미자립(일선)교회, 개척교회, 농어촌, 산촌교회의 충성된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물심양면으로 힘이 되고자 한다. 지금도 열악한 환경의 목회현장에서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죽도록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되어 우리와 한가지로 기도의 힘을 얻고 목회에 정진하시기를 하늘군대는 기도한다.
그리고 하늘군대 이름 아래는(의료진, 찬무팀, 영상팀, 이 미용팀, 악기연주팀, 교회행정팀, 부흥사, 영어전공자, 간판팀, 사회복지사 등) 신실한 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설로는 (복음병원, 지저스 라이브, 하늘군대 기도의 집)이 있는데……. 이러한 시설은 모든 이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 하늘군대는 주안에서 큰 꿈을 꾸고 있다. 모쪼록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늘군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늘 군대(천군)는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 있는 천사들(눅2:13. 왕상22:19; 대하18:18의 '하늘의 만군'은 문자적으로 '모든 하늘 군대'이다)이나 별들을 가리키는데(사34:4; 40:26) 하늘에 있는 군대는 계시록 4장에 본 네 생물과 그 주변에 있는 눈 곧 영들이다. 이 군대는 계시록 5장11절에 기록되기를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하였고, 시편 68편 17절에는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만만이라고 하였다.
하늘군대 목요철야기회는 찾아가는 기도회로 회원 교회와 어려운 교회에 찾아가서 매주 목요일 21시에 1부 예배와 2부로 친교 시간과 3부로 농촌 미자립교회와 이슬람 확산 저지 등 10여 가지 기도제목을 정하여 12시가 넘도록 뜨겁게 기도하고 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불붙는 역사와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 이애라 찬양팀 등 여러 기관과 원로목사님 등 많은 교역자들이 참여하여 모일 때마다 불붙이는 기도의 불길로 눈물과 땀이 범벅이 되어 부르짖음이 간절하고도 뜨겁게 기도제목마다. 불을 토하는 역사와 그 은혜 됨이 더해가고 적지 않는 위로와 충만한 기쁨으로 모두 기도의 힘을 얻고 성령의 충만하여 모인 곳이 진동되는 역사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늘군대 2009년 송년 모임이 12월 21일 중부명성교회에서 하나님의 동역 자들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모였다. 그동안 청예제와 미스바기도회에 함께한 서울 등 전국에서 유명한 전도 팀들과 농촌교회 사명 자들, 북한을 선교하는 선교사와 도농선교회 관계자, 신학 대학교수 등 하늘군대 관계자들이 모여 1부는 친교와 식사 시간을 갖고 2부로 발표회와 찬양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3부로 선교세미나로 강사에 호서대 부총장을 역임한 서 교수의 현실적인 선교에 대하여 큰 은혜를 끼쳤고 4부로 하늘군대 기도회를 가졌다. 농촌 선교에 사명적인 기도는 뜨거운 마음들이 불꽃이 되어 활활 타오르는 열정으로 부르짖음이 모인 곳을 진동시키며 하늘군대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의 손길이 위로하심과 역사하심으로 2010년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하늘군대의 특징
하늘군대는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
하늘군대는 사랑의 군대다
하늘군대는 주님과 함께하기에 행복하다
하늘군대는 죽이는 군대가 아니라 살리는 군대다
하늘군대는 자발적으로 헌신한다.
하늘군대는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을 받는다.
하늘군대 회장 김현기 목사
탱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 탐방
1) 부곡교회
산청읍에서 하루 숙박을 했다. 산청에서 잠자보기는 45년 만에 처음이다. 45년 전 백운리 먹바위골(산청군 단성면)이라는 골짜기에서 뱀을 잡아먹고, 약초를 캐 먹으면서 2년 반 동안 생활하였던 사람이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소리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어렵다지만 그곳은 1년 내내 가도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었고,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물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고라니 울음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하나님, 무엇 때문에 해발 800m나 되는 이런 골짜기에서 저를 연단시키십니까? 저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병(류마티스 관절염, 우울증)든 몸이고,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 그런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저를 사용해 주십시오.’
맑고 높은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가슴에 안고 밤마다 기도하였던 그 사람이 20년간 농촌생활에서 얻었던 경험을 되살려 「농촌교회살리기운동」에 뛰어든 것은 나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고 짜여진 프로그램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드니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 같이 기쁘기만 하다.
45년 전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잠자리에 드니 모든 것이 하나의 필름같이 신속히 지나가면서 그때의 그 연단이 오늘 나를 있게 한 것으로 여겨졌다.
산청읍에서 부곡교회까지는 25㎞ 국도를 따라 10㎞ 정도 가다가 골짜기로 들어가니 저기가 마지막 골짜기로 여겼는데 다시 골짜기가 나오기를 몇 번, 그러자 멀리서 ‘땡그랑 땡그랑’ 수십 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이 소리는 듣는 사람에 따라 ‘천당, 천당’으로 들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천당 지옥, 천당 지옥’으로 들린다. 이 소리가 안면방해가 된다고 해서 70년대 중반부터 도시에서 먼저 사라지자 농촌에서도 자연히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라도 농촌교회에서 다시 종을 다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해졌다.
그 당시는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에서 새벽마다 듣던 그 종소리가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아 도시에 나와서도 그 종소리 때문에 교회를 찾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탐방 자가 우정 주일을 택한 것은 주일예배 분위기를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부곡교회에서는 교회 창립 50주년과 교회 증축 기념예배를 며칠 전에 드렸다고 했다. 이 교회도 농촌교회가 부흥할 때인 60~70년대에 세워진 교회였지만, 지나오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고 했다. 한때는 교인 수가 7~8명밖에 되지 않아 10㎞ 넘는 이웃 교회와 합치자는 말도 있었지만, 지금은 주일 낮에 60명이 참석하는 교회로 성장했고, 매년 세례 받는 교인이 6~8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농촌교회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교인 대다수가 70대 노인들이지만 개중에는 50대도 몇 가정이 있었고, 60대인 김시남 성도는 서울에서 교직에 있다가 은퇴한 뒤 내외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곳에 귀촌한 지 1년 만에 건강이 좋아져 교회 일에 협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했다. 도시에 있을 때는 교회에 나가는 것이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건강도 좋아져 성경도 자주 보게 된다고 하니 교회 일에도 열심이라고 옆에 있던 집사님의 보충설명도 있었다.
2) 교회 성장은 콤바인, 트랙터를 통해
교회 들어가는 길옆 차고에는 트랙터가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회 성장은 바로 이 트랙터와 콤바인의 힘이라고 허성암(45세, 경남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628번지) 목사는 말했다.
이 교회에 이런 농기계 농사법을 도입한 사람은 이동근(72세, 은퇴) 전임 전도사였다. 이동근 전도사는 경찰공무원으로 오래 재직하였던 분이고, 집사 때 불붙은 신앙으로 전도에 임하다가 부산에 있는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양정중앙교회(문응주 목사)에서 파송하는 전도사로 부임 받아 경남 합천군 대벽면 장단리에 오셨던 분이다.
이때가 1991년 53세 때였다. 이곳은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는 아골 골짜기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는 심정으로 몇 개월 동안 기도하면서 전도를 했지만, 결실이 없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농민들에게 직접 유익을 줄 수 있는 사업이 농기계 무료 봉사라는 응답을 받고 실시하게 되었다. 농기계 구입은 지인과 양정중앙교회에서 도와주어서 2천만 원이 넘는 기계를 구입할 수 있었다.
무상으로 하다 보니 농기계 수리비, 기름 값 등 들어가는 비용이 의외로 많았다. 농기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교회 자체에서 수익성 있는 사업도 병행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소 사육을 시작하여 여기에서 얻어진 이익금으로 중장비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 전도사는 농촌생활을 했거나 도시에서는 개도 한 마리 키워보지 않아 동물과도 거리가 완전히 멀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하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고, 공직생활에서 몸에 배어 있던 추진력을 하나님께서 활용케 하신 것이다.
처음 개척한 장단교회가 3년 만에 교인 수가 50명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5년째는 참석 교인수가 70명이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완전 자립이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 전도사는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교회가 있지 않을까?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산청에 있는 부곡교회를 알게 되었다.
4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부곡교회의 교인 수는 7명이었고, 10㎞가 넘는 이웃 교회와 합쳐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던 교회였다. 이곳에 2001년에 부임해 와서는 교인들을 잘 설득시켜 농협으로부터 3천6백만 원을 대출받아 중고 트랙터 2대와 콤바인 1대를 구입하여 전임지에서 했던 방식대로 하였더니 교인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에는 강한 생명력 있는 말씀과 은혜스러운 말씀이 있어야 하는데, 농기계를 만지고 소 사육에 치중하다 보니 말씀 전하는 데는 언제나 약하다는 것을 느껴왔다. 교인들에게 영양가 있는 양질의 꼴을 먹여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전신학대학 배정훈(현 장신대학교) 교수께 도움을 청했다.
배 목사님이 와서 말씀을 전하고부터 교인 수는 매년 늘어나게 되었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낀 이 전도사는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후임자는 배 교수의 제자였던 허성암(46세, 당시 전도사) 목사가 2004년에 부임하게 되었다.
허 목사가 일하고 있는 부곡교회에 탐방하기 위해서 왔으면 부곡교회에 대해서 쓸 것이지, 왜 전임자의 이야기까지 지루하게 늘어놓느냐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료 농기계 봉사와 수익성 있는 사업을 병행해서 농촌교회를 자립시킨 교역자는 국내에서는 이동근 전도사가 처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세계에서도 처음일지 모른다. 이런 사실은 분명히 알려져야 한다는 뜻에서 쓴 것이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의 일대기가 누군가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탐방 자의 생각이다.
덴마크 부흥의 원동력은 대학 문턱에도 가지 못했던 교사 보조 출신인 크리스틴 골드(Christen Kold)가 시작한 농민학교였다. 교계에서도 목사와 전도사는 차이가 많다. 전도사 하면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러나 이 전도사의 업적이 교계에 많이 알려지면 농촌교회가 부흥하는데 하나의 촉진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3) 허 목사 부임 이후 꽃을 피우다
이 전도사가 부곡교회에 와서 토양에 퇴비를 넣고, 토양을 갈고, 씨앗을 뿌려 식물을 성장케 하였다면 허 목사가 와서는 물과 비료를 주어 그 식물에서 바라고 원하던 꽃을 피우게 한 교역자이다.
허 목사는 고등학교 때 서원한 것이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가 늦게서야 그것을 깨닫고 목사가 되신 분이다. 그 전에는 육군 수송교관으로 10년 넘게 근무하였던 군인 출신이다. 전직자는 경찰 출신이고 보면 두 분 모두 특이한 경력의 수요자들이다.
허 목사는 키 180㎝, 체중이 90㎏이 넘는 다부진 체격을 가진 분이고, 찬송가를 부르거나 말씀 증거에도 체격과 비슷한 박력이 넘치는 목회자이다. 또 허 목사가 트랙터에 앉으면 사람과 기계가 한결같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논에 트랙터가 2번 들어가야 한다. 이른 봄에 들어가서 땅을 한번 갈아엎어야 하고, 두 번째는 물을 넣은 뒤 모심기 좋도록 흙덩어리들을 없애주어야 한다. 트랙터나 경운기가 없었던 시절에는 소에 서리를 붙여 사람이 몇 시간씩 왔다 갔다 하면서 덩어리를 부쉈는데 두 마지기(400평) 논을 서리질 하자면 소도 지치고 사람도 지쳤다. 벼 수확 때는 콤바인이 들어가 벼를 베고, 한쪽에서는 수확한 나락들이 포대기에 담겨져 나온다.
이렇게 되기까지 1,980㎡(600평)당 보통 20만 원씩 받는다. 교회에서 경작하는 경작지는 2~3만 평이다. 이것은 마을 전체의 10%이지만 이것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5천만 원이나 되는 금액이다. 이것을 부곡교회에서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마을을 위해 봉사해 주고 있다.
돈을 받고 직업적으로 일 해주는 사람들은 일하기 편리하고 능률이 오르는 논만을 골라서 일을 해주고, 다락논으로 평수가 적고 돌이 있거나 거리가 멀면 돈을 주려고 해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일을 잘 해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교회가 해주는 논들은 이런 것을 가리지 않고 수고비까지 받지 않고 해주고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에는 쉽게 부탁하지만 두 번째는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서 부탁하기를 어렵게 여긴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교회에 나오게 된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마을 전체가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반대의 소리도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들은 비싼 기계를 사서 수고비를 받고 일 해주는 사람들이다. 교회에서 이런 일을 하므로 수익이 떨어지고 기계가 고장 나면 모두 수리점으로 가던 것을 허 목사님이 직접 수리하다 보니 그들의 수익이 줄어들므로 좋게 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헌신적인 뜻에 점차 이해를 하게 된 수리점 주인도 이제는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교회에서 기계 구입으로 부채가 있었지만, 소 사육의 이익금으로 이 부채를 다 갚았다. 소 한 마리를 사육했을 때 1년에 나오는 수익금은 100만 원 정도이다. 1년에 소 한 마리당 들어가는 사료비가 70~80만 원이 된다. 가임 할 수 있는 암소 10마리를 사육하면 1년에 7~8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새끼 한 마리당 보통 2~3백만 원씩은 한다.
소 사육장에는 소똥 냄새가 많이 나곤 했는데, 지금은 회사에서 합리적으로 배합되고 짚까지 넣어 발효시킨 사료를 먹여서 소똥 냄새도 없기 때문에 소 사육에는 힘든 일도 없다. 소똥도 매일 치우는 것이 아니고 톱밥을 넣어주어 20㎝ 이상 쌓일 때까지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자체에서 발효되므로 꺼내는 즉시 바로 과수원이나 밭에 넣을 수 있는 퇴비가 된다.
부곡교회에서 사육하는 소가 13마리 있었지만, 목사 소는 한 마리도 없었고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이익금은 선교 비용으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소 사육장을 ‘선교 사육장’으로 부르고 있었다.
4) 우리 목사님은 탱크 목사
탐방 자가 찾았을 때는 교회 설립 50주년과 증축에 리모델링한 예배까지 함께 드린 뒤였다. 축하해주기 위해서 각처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참석해 주었고, 이 중에는 탐방 자가 아는 목사님도 있었다.
교회를 증축하면서 리모델링하고 식당까지 만들다 보니 젊은 남자 집사들은 연일 봉사를 해야 했다. 이 중에서도 일을 많이 하였던 이정부 집사는 일하였던 집사들 가운데 몸살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우리보다 배나 일을 더 많이 하신 목사님만 몸살을 앓지 않았다고 했다.
집사들은 일을 마치면 바로 집에 가서 쉬었지만, 목사님은 여기에서 600m나 떨어 진 축사에 가서 사료를 주고 뒤처리까지 다 하므로 목사는 지치지 않는다는 뜻에서 ‘탱크 목사’로 부른다고 했다. 목사님은 남보다 일을 더 할 수 있는 체격이었지만, 체력이 좋다 해서 일을 다 잘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할 때 남보다 능률을 높일 수 있다. 실지 소 사육하는 일도 목사님이 혼자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날 주일 낮 예배 출석 인원은 60명이었고, 지난주 세례받은 사람들의 명단이 주보에 나왔는데 모두 8명이었다. 도시교회도 아니고 오지 시골교회에서 세례자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농촌교회는 은퇴 목사나 체력적으로 약한 목회자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다. 마지막 남은 생애를 농촌을 위해 일하겠다는 그 뜻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목사가 농촌에 들어가면 현상유지도 어렵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고령자들이 한두 명씩 세상을 떠나면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현상유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농촌에 들어가는 목회자는 진취적이고 희생정신이 강하며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도전 정신과 패기 있는 목사가 들어가야 농촌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 빛은 농촌에만 비춰주는 빛이 아니고 도시까지 서서히 흘러나오게 하는 빛이 될 것이다.
허 목사가 이곳에 올 때는 딸 둘을 데리고 왔는데, 열심히 일을 하니 하나님께서 늦둥이로 42세(사모 40세)에 귀한 아들을 주셨다고 했다. 예비 되고 준비되었던 아들이라 해서 예준(4세)이로 이름 지었다. 탐방 자가 보기에도 너무 귀엽고 똑똑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 하나님은 공짜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보너스로 귀한 선물까지 주시는 분이시다.
5) 식당을 개방하여 체력장으로
일주일에 한 번 사용하는 식당을 그대로 놀릴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저녁에 와서 운동도 할 수 있게끔 운동기구 몇 대를 들여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당이 조금 더 컸으면 도서실까지 준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공간이 좁을 것 같이 보였다. 조립식으로 지었기 때문에 확장하는 데는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지역을 위해 끊임없이 봉사정신을 갖고 도전할 때 농촌교회에서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교회가 바로 부곡교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콤바인은 수명이 다 되어 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한 대 구입비가 4천만 원이 넘어 시골교회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해 작년에는 벼 베기 일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에서 콤바인 한 대를 기증해 주어서 올해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영락교회에 대해 모두들 고마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교회지만 이렇게 거금을 들여 도와주는 것은 쉽지 않다.
실지 이런 일은 천 명 정도 모이는 중형 교회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대형 교회가 일부 교회가 할 수 없는 이런 일을 해주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더 크게 빛날 것으로 여겼다.
농촌교회살리기운동 본부 김해용 장로
Tel. 051-864-7272
이삭을 줍게 하소서(룻2:7).
한여름 무더위가 끝나갈 무렵에 이 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노인 장기요양보호 등급을 위한 의사소견서 발급을 위해 할머니께서 병원을 찾으면서부터다. 그 후 우리는 할머니의 요청에 의해 몇 차례 방문 진료를 했고,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할아버지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동행하신 박 목사님의 기도 후 할아버지는 평안한 얼굴이셨고 다음 날 할머니께서 전화로 할아버지의 소천소식을 전해주셨다. 할아버지와의 네 번의 만남을 통해 그 영혼이 아버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맞으시려고 우리와의 만남을 주선하셨다고 믿어진다. 전도목사로서 병원에서 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영혼에게는 다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행13:48)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원을 통해 추수 후 빠진 이삭을 줍는 농부의 사역을 맡기시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전의 병자들에게 의료를 통해 복음을 증거하시며 그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병원과 미자립교회와 농·어촌 교회에게 빠진 이삭을 줍는 사역을 맡기셨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있는 지역이 농촌이기에 농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농촌은 도시와 달리 젊은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목사님 가정이 가장 젊은 층인 곳이 많다. 교회 자립 측면에 초점을 두고 보면 미자립인 곳이 많고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점을 둔다면 농촌교회는 그 지역의 모든 영혼이 구원받도록 주님의 재림 때까지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약 1:27)고 말씀하신다. 농촌은 아버지 하나님을 잃어버린 영적 고아와 신랑 되신 예수님을 잃은 과부처럼 병약한 노인들, 부모의 이혼으로 상실감을 갖고 살아가는 조손 가정의 아이들, 질병으로 건강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다문화 가정들, 교회의 전도영역에서 벗어난 많은 영적 고아들과 과부들이 버려진 이삭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들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고 사기 원하시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룻이 시어머니 봉양을 위해 보아스의 밭에서 열심히 빠진 이삭을 주운 것이 가족의 양식이 되었고 보아스와 룻을 연결해 주었다.
또한, 보아스와의 결혼으로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며 이방 여인으로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마1: 5)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농촌교회들이 룻과 같이 빠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그것이 교회의 양식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끊임없는 신령한 은혜가 공급되어지는 통로가 되며 예수님의 더 많은 가족을 낳는 열매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시 교회는 최전방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의 형제 교회를 위해 중보하며 농촌교회가 중심이 불붙는 것 같은 주님의 심정을 회복하고 빠진 이삭을 줍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중보 기도와 끊이지 않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교회여!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 23). 아멘.
복음의원 원목 김정미 목사
Flowing
언젠가 TV에서 들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 여기저기서 초라한 모습의 사람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생전에 목사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떤 분이라도 집에 와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많은 양의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사랑으로 준비한 밥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하여 마지막 가시는 그분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목사님의 어머니는 작은 밥상을 준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깊이 기도하는 긴 행렬과 하늘나라에서는 해 같이 빛나는 상으로 갚아주셨으리라 믿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환경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단 앞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에게 이제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시돈은 어떤 곳인가? 바로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의 고향 즉 엘리야의 적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과부의 만남을 보라. 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엘리야는 이방 사람일 뿐이며 행색이 초라한 나그네로서 자신에게 떡 한 조각을 요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과부는 통의 가루 한 움큼과 조금의 기름을 가지고 마지막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 했다. 그런데 그 기막힌 떡을 요구하는 엘리야! 어찌 된 일인지 과부는 그 기막힌 떡을 엘리야에게 먼저 내놓는다. 물론 하나님의 기막힌 연출이 있었다. 엘리야의 순종과 과부의 기막힌 떡은 엘리야와 과부와 그녀의 아들이 기근이 끝날 때 까지 먹고 살아남는 그치지 않는 식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죽은 과부의 아들을 부활로 받았으며 영원히 사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왕상17: 8-14).
요즘 우리 경제가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 특히 미자립 교회와 농어촌 교회의 경제적 어려움이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필자에게 염려되는 것은 교회가 경제적 환경에 짓눌려서 우리 곁을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을 홀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극한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영·육의 떡을 지역에 고루 나누는 많은 교회들을 접한다. 이들이 나누는 떡은 엘리야의 순종이요, 과부의 극한 상황에서의 떡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 42) 아멘.
마게도냐 교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던(고후8: 2) 것처럼 우리도 넓은 마음을 구해야 할 것이다. 너무 작다고 생각해 나누기에도 부끄럽지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는 말씀을 믿고 나누기를 계속 행하는 모든 미자립교회와 농·어촌 교회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때에 거두는 역사로,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며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더 많은 것을 flowing(흘려보내기)하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께 무릎 꿇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회들에게 더 큰 위로와 능력을 부어주시리라 믿는다. 할렐루야!
복음의원 원목 김정미 목사
코드명 ‘연합’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잡고~. 88올림픽 때 코리아나가 주제곡으로 불렀던 곡의 가사인데, 지금 기독교에서 필요한 것이 ‘손에 손잡는’ 자세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든다. 복음의원에 원목 겸 간호사로 사역하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세상과 인간을 만들지 않으시고 연합해 만드신 공동작품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 가시는데 인간을 동역자로 부르시고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각 각의 사람들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이루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펼쳐가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방법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하신 하나님께서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및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과 마음에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소에서 쓸 기구를 만들되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순종할 것을 말씀하셨고(출36:1~2), 성막의 역사를 마쳤을 때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였다(출40:33~35). 우리 병원과 지역 교회들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행사와 의료, 이‧미용, 도배‧건축, 하늘군대 기도회, 각종 기도회를 통해 느낀 것은 개개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동역 자들을 붙여주시고, 자신들의 달란트를 서로가 내어놓아 하나님께 연합으로 올려 드렸을 때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세상에 전하신다.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경상북도 화북면 용화 지역에서 석 달 전의 주영광교회 이전 감사예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욜2:18) 아버지의 사랑을 마침내 드러내셨다. 30년 전 교회가 설립되었다가 없어진 그 땅에 하나님께서 서울, 안산, 청주, 청원, 청천, 증평 등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원하는 30여 명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을 불러 모아서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 그 땅을 향한 아버지의 열심이 역사를 이루셨다. 개인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으니(고전12:25b),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운다(엡4:15~16)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금하였다.”고 하는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9: 49~50)고 하신 말씀이 오늘도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하심이라고 믿는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 교파가 다르다고,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방하며 “나는 나, 너는 너”식의 사고를 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함께 손잡고 ‘지체론’을 새롭게 인식하며 하나 되어 나아갈 때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라는 기도를 늘 떠올리며, 함께 하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에 있어 서슴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우리 교주님께서 맡겨주신 회와 목회자들이 따라야 한다. 세상의 영혼들을 향해 주님 주신 지혜와 달란트를 모으며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주님의 십자가에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못 박고 날마다 죽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하자. 연합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우리의 선 경험, 지식, 거역함과 완고함, 자기중심적인 사고 등을 들 수 있는데 거역함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삼상15:22~23)라고 말씀하신다. 이것들을 버리고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트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할 때”(고후10:4~5) 비로소 진정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 됨, 즉 연합의 비밀을 알려준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는 말씀이다. 교회의 크기가 얼마나 크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신가 하는 것을 읽고 행해야 한다. 도시와 큰 교회가 농촌과 작은 교회들을 돌아보지 않은 것을 회개하는 마음과 영적, 인적, 물적 자원을 공급하며, 농촌과 작은 교회는 도시 교회와 큰 교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연합될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물든 세상 심판을 위해 아들 예수님을 다시 이 땅 가운데 보내려고 하시는데 교회가 이것을 놓치고 있다면 잠자는 교회인 것이다.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물량주의로 치우치는 한국교회를 향해 이슬람은 오일 머니와 결혼을 통한 다산, 취업을 무기로 서서히 다가오지만 그들의 숨겨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모스크 건립, 이슬람 학교 설립 등을 통한 국가의 이슬람화를 추진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임을 유럽의 예로 알 수 있다. 이슬람이 교회에 도전하고 있는 이때에 한국 교회는 대처할 힘이 있는가? 이제야 말로 교회들이 정신 차리고 깨어 일어나 교회의 사명을 회복하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인해 성령 충만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연합’할 때이다. 교파 간의 벽, 교회 간의 벽, 이슬람의 벽! 이 모든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연합’하는 일뿐이다. 한국 교회여! 주님 손잡고,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다시 오실 주 앞으로 나아가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할렐루야!
복음의원 원목 김정미 목사
농촌 목회자들과 함께하는 삶
성경에는 기도나 찬양에 대한 예가 많습니다. 감옥에 갇혔어도 찬양하며 기도했던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중에도 항상 찬양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종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시는 모습들을 보면 존경스럽다는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성공하기 위해서 사람에게 기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쉽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생각납니다. 당장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말해버리는 아브라함을, 또 이 추한 모습이 자식인 이삭에게까지도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이는 대목이죠. 비록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자립’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사람들이게 과소평가 될지라도 그 평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평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면서 충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귀하게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식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체험하며 입술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가 내리고 사랑이라는 열매가 있는 소망 있는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시골에 조그마한 병원에 근무하면서 이런 분들과 날마다 찬양하며 함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부족한 나 자신이 너무나 부자인 것 같아 행복합니다. 그리고 제가 일하는 곳을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먼저 병원 현관문에 들어서면 앞 벽면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마 16:16>.’ 라는 말씀과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향이 가득함을 느끼며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찬양소리가 음향장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직접 기타를 튕기면서 라이브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로 찬양합니다. 내원하는 환자들이나 목회자분들과 함께 합니다. 제가 찬양을 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저는 원래 낮에는 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업소에서 라이브 가수로 두 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께서 찬양을 직접 해보라고 권하시더군요, 그래서 찬양 라이브가 시작된 것이지요. 찬양을 하다 보니 환자 또는 내원하는 목회자 분들 모두 받는 은혜가 참으로 크더군요. 지금은 밤업소에서 노래 부르고 연주하는 것을 그만두고 원내에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기쁘게 찬양합니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귀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농촌 목회자들의 은혜로운 삶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하게 됨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힘들게 농촌 목회하시는 분들과 함께 하는 찬양이 위로와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의원 물리치료사 김성환 집사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사명 (요15:16, 마9:9, 행9:15-16)
1970년대에 나의 생각으로는 통일 찬송가 355장을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반복하여 부르고 복음증거의 소명을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감사하면서 정동 MBC방송회관에서 고 김준곤 목사님의 성령의 역사 속에 주님께 부름 받은 귀중함과 복음 증거 자의 사명의 귀중함을 외치는 말씀 속에 CCC 회원과 목회자 모두 예수님께 부름 받은 소명의 귀중함을 성령님의 역사 속에 감동되어 대도시 중. 소도시, 농어촌, 오지마을 어디든지 가오리다의 열정들이 열화와 같이 봄 불과 같이 퍼져 나간 때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농촌교회에 소명을 받은 자로 확신과 귀중함을 성령님을 통해 실제 경험하는 사명자라면 이 얼마나 영광스런 소명이며 현재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환경이 어떠하든지 나는 주님께로 부터 소명된 자다. 부름 받은 자로서 오직 나를 부르신 분을 삶 자체를 매일 항상 감사와 찬양과 성령님의 인도로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위해 생사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자의 확신이 중하고 귀중하다. 예를 들어 하나 생각할 것은 내가 청와대 대통령을 만나기 원해 나 나름대로 정장을 입고 준비를 하고 청와대 경비 안내에게 “나 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니 안내 좀 부탁합니다.” 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이 생길까 두말할 것 없이 거절당하고 쫓겨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으로부터 초청장을 받고 부름 받고 간다면 나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신분이 어떠하든지 그
초청장을 보고 나를 친절하게 안내해 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으려 함이니라.”(요15:16). 긍휼의 사랑으로 오셔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은혜로 그분 앞에 서게 되고 또한 사명을 받은 은혜를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사명자다.
어떤 사명을 주셨음인가? “주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사명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이름과 복음을 위해 자아가 죽으라고 주님은 명령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울 사도는 소명하신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중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14:7-8).
예수님의 삶은 제자들을 직업, 신분, 귀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부르셨고 사명을 주시면서 12 제자와 따르는 모든 백성과 함께 삶을 나누시는 굶주린 백성과 천민과 각색 병든 자와 소외된 자와 세리와 죄인들과 그들의 아픔을 나누며 짊어지시는 삶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6:53-57)
예수님의 생애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니라(마9:35-36).
주님께 농촌교회에 소명을 받고 이 사명을 받은 우리는 주님이 모든 사람과 함께 삶을 나누시며 소외된 자, 병든 자, 굶주리는 자, 사탄에 눌린 자, 세리들과 죄인들의 모든 연약한 것을 친히 긍휼의 사랑으로 담당하여 해결해 주시는 삶을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여 모진 고초와 멸시 천대를 다 담당하시며 해결해 주시는 그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님으로부터 소명 받고 사명을 받은 자라면 나의 사명의 자세와 귀중함을 얼마나 깨닫고 감사하고 있는가? 순교의 각오는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벧전2:21-25).
우리 주님께 농촌교회와 오지에 사명 받은 바로 이 말씀과 같이 주님이 친히 보여주시고 소명 받은 자에게 명령으로 파송한 곳이니 그 지역의 모든 형제와 자매 모든 영혼을 긍휼의 사랑으로 충성된 일꾼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진정 마10:34-39의 말씀과 같이 오직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사명에 목숨을 바치는 순종하는 자 되어 우리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의 모든 종들이 되시기 원합니다.
충청지방회 노현교회 하늘군대 원로목사 박홍순
우리의 교회공동체
김영철목사(샘터교회)
농촌교회 목회자가 겪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고독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숨겨진 고통이 고독이 다고 말할 수 있다. 대화가 잘 안 되는 부부, 부모와 대화가 없는 청소년들. 이들에게 고독의 문제는 사람과 만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고독은 군중 속의 고독이며, 원천적인 고독이다. 농촌 목회는 고독과의 싸움이다. 어떤 우리에 갇힌 것처럼 사방이 고독으로 둘려 쌓여 있다. 현대인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고독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독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 술을 마셔보기도 하고 노름에 빠지기도 하고 게임에 열중해 보기도 하지만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 고독한 것일까?
우린 그리스도인이기에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 해답을 찾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창세기 3장에 사탄(뱀)이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한 에덴동산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의 배필 하와에게 다가와 유혹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하여 유혹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에 회의를 품게 한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을 들은 하와는 거짓된 유혹에 넘어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그 과일을 따 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한다. 우리 인류의 조상이 저지를 첫 범죄이다. 보통 사기, 도둑질, 거짓말, 살인 등을 죄라 생각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죄는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보려는 의지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는 선이란 실생활에 유익한 것이고 악은 실생활에 해로운 것을 의미한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며 무엇이 해로운지를 내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사랑, 신뢰, 믿음의 관계를 깬 것이다. 그 결과 초래된 것이 소통의 단절 문제이고 인간사회에 고독이 시작된 것이다.
7절엔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다. 자신들의 벗은 몸을 본다. 치마를 엮어 몸을 가린다. 수치심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왜 범죄 한 지체(손과 입)는 놓아두고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아래(생식기)를 가렸는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 생기는 수치심이다. 자기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수치심인 것이다. 누구와도 만나기가 싫다. 혼자 있을 때가 편하다. 이 수치심이 소통단절과 고독의 원인이다
죄를 범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8절에선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뒤에 숨었다. 만나는 것이 두렵다. 이 두려움이 소통단절과 고독의 원인이다 9-10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어디 있느냐’ 물어보신다. 아담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다고 대답한다. 숨은 진짜 이유는 벗은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따 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 먹었기 때문이다. 11절에서 하나님이 깨우쳐 알려주신다. 하나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한 과일을 먹었는가 물어 보신다. 아담은 그 이유를 하나님이 자신(아담)을 위해 만들어준 아내 하와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 아내가 어떤 아내인가? 하나님께서 하와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보여 줄 때, 아담은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말하며 기뻐하고 귀중히 여긴 아내다. 그런 아내를 탓한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탓으로 돌린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부부 관계가 깨진 것이다. 이 거짓말과 책임 전가가 소통단절과 고독의 원인이다. 농촌 목회도 환경만 탓하다 보면 거짓이 되고 책임 전가가 된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부터 해결되는 것이다. 즉 문제가 나를 통가할 때 나의 문제로 말미암아 더욱 엉켜버리는 현상이 되는가 하면 그러나 반대로 나를 통가할 때 성령으로 풀리는 농촌 목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다. 마음에 수치심이 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같이 수치스런 내 진짜 모습이 보여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산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꼭꼭 닫는다. 주변에 성을 쌓는다. 외로움이 찾아온다. 고독이다. 예수님이 이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
고독이 인간의 수치심, 두려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 완전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죽음은 수치 그 자체이다. 우리의 수치를 해결하기 위해 완전하신 그분이 수치스런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그분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다시 부활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를 깨끗이 용서받는다.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수치심과 두려움을 해결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관계 회복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이다. 우리를 둘러싼 벽을 허물고 남을 수용하며 자신도 노출 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공동체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내 안에 계시고 나와 같이 계시는 분이다. 요한복음17장 21절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 되길 기대하신다. 예수님은 고독의 벽을 헐고 자유를 누리는 우리의 교회 공동체를 기대하신다.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우리의 교회 공동체를 기대하신다.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닐는지.
나의 인생관을 바꿔놓은 한 권의 책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잘 이끌어준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명을 준 한두 권의 책마저 접하지 못하였다면 필자는 그 사람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필자는 농촌교회 부흥운동을 하게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된 계기는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는 못했어도 다행히 인생관을 바꿔놓을 수 있는 책은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평범한 생활 속에서 접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생각이라고는 추호도 없고 오로지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때였다. 이때는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듯한 무공해 상태에서 읽은 책이다 보니 책의 내용은 심장만 뛰게 한 것이 아니고 뼈의 골수까지 tm며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때 잊을 수 없었던 감격은 47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지워지지 않아 그때의 감정을 수시로 느끼면서 사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1) 새 歷史를 爲 하여
고 류달영(1911~2004) 교수가 1955년도에 출간하였던 「새 歷史를 爲 하여」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썼던 류 교수에게도 인생을 바꿔놓을 만한 책을 접하게 된 것은 그가 30세 때 일본의 사상가요, 종교인이었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가 쓴 「달가스의 산림사업」에 대한 36페이지의 수첩만 한 작은 소책자였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은 류 교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우리나라의 살길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때부터 덴마크는 자신의 애인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 책을 읽은 지 15년 뒤에 류 교수는 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을 주제로 해서 쓴 「새 歷史를 爲 하여」라는 명저를 남겼다. 이 책을 쓸 때는 6․25 동란 중이었고, 대구 피난시절에 종이를 구할 수 없어 휴지를 모아 원고를 썼다고 했다.
60~70대 연배 사람들에게 젊은 시절에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면 몇 명이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덴마크는 1864년 독일과의 전쟁(프로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에 패하면서 덴마크에서 가장 비옥하였던 홀슈타인과 슬레스비히 지방을 패전의 대가로 넘겨주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하루가 다르게 물가는 폭등하면서 결국은 국립은행마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곳곳에 배고파 우는 아이들의 모습과 부상당한 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이곳저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나라의 6․25전쟁 후유증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으로 여긴다.
이때 사상가요, 농촌교회 목사였던 그룬트비(Grundtvig, 1783~1872)가 나와서 덴마크를 향해 외친 것이 있었다.
첫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가 이웃을 사랑하고,
셋째가 흙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2) 크리스텐 콜드와 아모스
이 외침이 헛되지 않아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크리스텐 콜드(Christen Kold)이라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1816년 유틀란트의 서부지방의 가난한 구둣방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가정형편상 상급학교에 진학은 하지 못하고 수년간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부모를 졸라 2년제 초등학교 양성소를 수료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그는 18세 때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신앙의 성숙도는 날로 성장해갔다. 그의 신앙이 더욱 돈독해진 것은 터키와 그리스 지역의 선교사로 파견되는 조수로 2년간 동행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기독교는 사회의 빛도 되어야 하지만 희생할 줄 아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덴마크는 이웃나라와 전쟁이 임박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염원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었지만 배 삯이 없어 부득이 걸어서 2개월 만에 고국에 도착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덴마크는 점점 어려워져 장래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피해의식에 젖어 덴마크에 태어난 것을 후회스럽게 여기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교육이 아니고서는 젊은이들의 혼을 깨우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의 나이 35세 때 농촌의 허술한 농가 한 채를 구입했다.
16세 이상에서 33세까지의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농민학교를 시작한다는 것을 이웃 마을만이 아니고 먼 마을까지 찾아다니면서 직접 홍보도 하고 안내문까지 붙였지만, 개학 전날까지 배우겠다고 등록하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습니까? 합당하다면 10명의 학생이라도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할 줄 아는 덴마크의 참다운 일꾼으로 교육시키겠습니다.’ 하고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였지만, 아침까지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동천에 뜬지도 한참 되어서야 마차 하나에 짐을 가득 싣고 찾아온 13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이후에 2명이 더 추가되어 15명으로 시작한 농민학교가 오늘의 덴마크를 부흥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그 사람의 학벌을 중요시 여기고 유명인의 제자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본인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크리스텐 콜드는 대학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하였고, 책 한 권을 쓴 흔적도 없다. 그런데도 그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덴마크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타오르는 분화구같이 계속 식지 않고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덴마크의 젊은이들 가슴마다 전달된 데 있었다.
그의 생은 55세로 마감되었지만 20년 동안 젊은이들과 함께 동고동락 하면서 그 삶 자체가 곧 교육이었다. 교사는 생소한 단어로 어렵게 가르쳐야 고차원 지식에 유식함이 넘치는 교육자로 인정받기 쉽다. 이것은 오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덴마크에서도 성행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쉽고 평범한 이론으로 가르쳤던 것이 살아 약동하는 산교육이 되어 쉽게 잊지 않는 참교육이 되었던 것이다.
크리스텐 콜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모스와 유사한 인물이었다. 이스라엘도 우리나라와 같이 가문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선지서를 쓰신 분들을 보면 가문을 열거하면서 누구의 손자,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아모스에게는 이것이 없고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 받은 말씀이라(아모스 1:1).”고만 했다.
아모스가 자기 직업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아모스 7:14)” 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목자나 농부는 그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토양까지 척박한 지역의 출생자 아모스는 무명인 중의 무명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셨다.
이 책을 읽는 가운데 나의 피를 뜨겁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사람 만나지 않고, 신문 보지 않고, 라디오 듣지 않는 삼무(三無)생활을 하는 가운데 나의 마음은 너무나 순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3) 약한 자를 들어 쓰시는 하나님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유능한 자를 택하지 않고 왜 이런 자들을 택하실까? 그 명확한 답이 29절에 나와 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 자를 들어 썼을 때 그 사람의 자랑은 하나님 외에는 달리 자랑할 수 없고 평생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저는 무능하고 아무에게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써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한 결과가 농촌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내 자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여긴다.
65년 시골에 들어가서 마을문고를 만들고 토요일마다 교양강좌를 개설하기도 했다. 몇 개월 동안은 잘 되었지만 “예수 믿다가 망해서 들어온 사람에게 배우다가는 우리까지 망한다.”라는 소문 때문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해결시켜 주었고, 글 쓰는 연단까지 시킨 뒤 책을 쓰게끔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시킨 뒤 80세 때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은 필자를 20대 초반에 극단적인 처방으로 훈련시킨 뒤 70세에 주의 일을 하게끔 하셨다.
‘하나님, 70세 된 제가 농촌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모세는 80세에 불러 일을 시켰다. 모세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재목이었지만 너는 지도자는 될 수 없고 단 농촌교회를 부흥시키는 불쏘시개 역할만 하라’라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농촌교회살리기운동본부 김해용 장로
Tel. 051-864-7272
양 심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순응하며 새싹을 내 돋는 풀들과 나무 모든 만물들로 자연의 법칙에 의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아름답게 만물의 영장이 되는 기준과 가치를 양심으로부터 온다. 양심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와 본성적 양심의 씨는 본질을 변하지 않는다. 씨 뿌리는 농부에게도 수확의 계절을 맞이할 수 있고 희망의 계절이 있기에 정성어린 수확할 만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농촌교회 성도들을 대하여 보면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프고 몸살이 나서 예배에 빠진 것이 죄송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한다. 도시교회 성도들은 핑곗거리만 있으면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과는 달리 양심적으로 달라 보인다. 농촌교회 성도들은 성도들 간에 우정과 사랑이 넘친다. 누가 아프면 같이 아파하고 누가 좋은 일이 있으면 같이 잔치를 벌인다. 내 일 너의 일이 따로 없다 다 같이 걱정해 주고 다 같이 도와주고 다 내일처럼 농사일을 꾸려나간다. 누가 교회에 못 나오면 서로서로 찾아가 보고 아프면 약을 사다 주고 아무리 바빠도 교회서 모이라면 빠지는 이 없이 다 모인다. 양심껏 예배드리고 양심껏 기도하고 양심껏 순종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양심은 판단의 모든 기준에서 선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보다 앞선 기준이 되는 것이 양심이다. 하나님의 창조 중의 최고는 양심과 인간의 자유성과 의지를 부여한 것이다. 하나님은
양심의 주체이면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양심을 선물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지으셨고 인간은 하나님을 부모로 부를 수 있다. 보이지 낳는 하늘을 알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그 양심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만큼 마음이 괴롭다. 인간의 타락으로 사탄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마음, 사심이 생기게 되어 있기에 수고로운 역사 노정을 밟아 오신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자유와 생명 그리고 평화로운 삶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의 작용으로 시대적 요청에 의한 변화의 주체다.
개인이나 사회 제반 문제는 인간의 본성에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기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양심대로 살면 죄가 없는 날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 이 시대의 어두움이 가시지 않으면 양심의 나침반에 의하여 횃불을 밝혀야 할 것이다.
까만 밤엔 별은 더 빛나고
사랑 더 깊다.
새들 잠든 가아만 산자락 타고
계곡소리 더 커지는데
땅이야 희미해지고
하늘이야 더 밝아지고
별들은 잠을 안자고 속삭인다.
누가 제일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가.
누가 제일 자유롭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살고 있는가?
김종복 집사 (청주 순복음 교회, 청주 이애라 찬양율동신학원)
승리하는 농촌목회
농촌목회는 노년층 중심인 특수한 구조를 안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농촌 환경에 맞는 목회를 연구하고 힘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목회적구조(Pastorol Structure)가 능동적이며 생산적인 방향으로 짜여져도 순학문적방법(Academic Apprach)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구원 방법만이 목회의 현장이며 인간의 방법과 수단은 인간의 현장만을 만드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에 체험된 증인으로서 하나님이 쓰시는 성령사역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는 사역구조(Ministrial Structure)를 가졌으나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사역 형태인 것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통로로서의 체험사역이며 영적인 순종과 충성의 열정이 필요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목회는 성령님의 작품으로 이루어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하기를 바라시며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많이 모인 곳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농촌교회와 같이 두세 사람 모인 곳에서도 당연히 일어납니다. 농촌 목회가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시게 그 앞에 사모하는 무릎을 꿇고 사모하는 뜨거운 심령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교회가 작아서 문제가 아닙니다. 모이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성령님이 역사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령은 맘속에 죄악의 그늘이 없어야 역사 하십니다. 회개는 성령을 향하고 성령은 회개를 향하여 십자가에 사랑으로 역사 하는 복음의 회전축이 됩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토대 위에서 말씀이 말씀이 되고 목회가 목회가 되는 하나님의 목회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목회는 영적으로 가는 믿음의 문을 열고 변화되는 말씀으로 살아갈 때 이것이 준비될 때 능치 못함이 없는 말씀이 임하고 말씀 중에 병이 떠나가고 회개의 표적이 따르는 것이다. 변화 받는 구원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설교자가 설교 내용을 자기 몸과 영에 적용된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으로 살아있는 말씀이요, 생명을 주는 성령의 증거가 된다. 하나님께는 말씀을 행함으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목회는 말씀이 가는 대로 가는 말씀의 길을 가는 것이다. 말씀으로 죽기도 하고 말씀으로 살기도 하리니 말씀은 성령으로 기록되어 성령으로 선포되고 성령으로 체험 되어지는 성령의 결실인 것이다. 한 영혼이라도 바로 세워야 합니다.
한 심령 한 심령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거듭남의 교회는 영적 성장을 하는 교회다. 목회자는 성도의 수에 연연하지 말고 책망과 권면을 반드시 해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 하는 현장이 교회가 아닌가. 믿음으로 서서 행하면 믿음대로 되어지는 곳이 교회인 것이다.
한 영혼을 위해 금식기도 했는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한 심령을 위해 목숨 걸고 지키고 양육하는 혼신의 힘을 쏟았는가, 작정기도 철야기도를 한 영혼을 위하여 했는가, 24시간 나의 영이 그 성도에게 가서 함께 있었는가 여기에 비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형편없는 성도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시매 온 힘을 다해 그 영혼을 바로 세우면 그 때부터 하나님이 수 없는 영혼들을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한 영혼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계속 연단 또 연단을 받게 되고 바로 세워질 때까지 그 연단은 계속 된다. 세워야 하나님의 목자요, 세워야 사명자요, 사명에 충성하는 자다.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지 않으면 큰 것에 어떻게 충성하겠는가. 누가 이 비밀을 알까. 그러나 많은 성령의 사람들이 이 일에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에 문제가 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았는데 앞서서 육의 욕심을 생각하고 추구하면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 목회는 영적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영적으로 소를 끌듯이 자신을 끌고 가야 한다. 세속은 보기만 해도 만지기만 해도 더러운 타락이다. 오직 예수를 추구하고 예수님의 세계를 열고 예수님의 행복을 맛보며 살아야 한다. 내 삶을 긍정적으로 감사하며 받아 드려야 믿음이요, 지금까지 주신 축복도 과분한 것이다.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얼마나 소멸했는가. 시시때때로 오는 은혜를 소멸치 말아야 한다. 은혜 가운데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가 은혜를 간직한 자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라. 이로 인하여 부흥이 오고 응답과 계시의 복이 온다.
나는 종놈이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할 것이 없다. 바라는 것이 많은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께 어떻게 해 드릴까 순종을 생각하고 충성을 생각하는 자가 종인 것이다. 목회는 멀리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은 자는 주위를 광범위하게 돌아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확신하는 영적인 세계가 목회의 세계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를 힘쓰고 구해야 한다. 목회의 무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헛다리짚는 데서 온다. 말씀을 안다고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나 그 마음을 학문으로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을 통하여 영적 체험과 영적인 교통 속에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영감 되어지는 것이다.
목회는 내가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시는 관계다. 그러므로 순수성이 있어야 하나님이 쓰신다. 세상의 혼탁한 욕심과 교만과 자랑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한다. 맑은 영혼이 되어 영원토록 주님을 사랑하며 모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철저히 회개를 하고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많은 교회나 목회자들이 여기에 걸려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기도만 한다. 목사만큼 죄를 많이 짓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고 고백하는 그 사람이 참 목자요 이 시대의 하나님의 일꾼인 것이다. 목회는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을 연구하고 파고 파면 죄인임을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하다 보면 언젠가는 십자가를 붙잡고 몇 날 몇 달을 눈물로 회개하고 자신의 억만 죄악을 씻고 거듭거듭 나리라. 수 없는 교만의 목을 숙이리라.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 3:18)
대한예수교 장로회 (백석) 성민중앙교회 김동배목사
한국교회와 바리새인
요즘 한국교회 안에는 외식(外飾)하는 자와 이중율법을 강조하는 교리절대주의에 의한 바리새적 규정들과 학식주의, 형식주의 등이 교회 안에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농어촌교회와 미자립 교회일수록 예배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사람을 향하는 현상들을 보면서 외식(外飾)하는 세대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예수님 이상(以上)으로 보았던 바리새인들이 오늘도 율법존중주의로 복음을 가로막고 있다. 기독교는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끊임없는 대립과 도전 속에 세워지고 성장하는 외형과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주관 속에서 보호되고 체험되는 믿음의 진행이 말씀으로 실행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00년 전에도 사두개인의 보수신학(절대 말씀 중심)과 바리새인의 자유신학(절대 이중율법의 행함)이 대립하여 수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신학은 보수적이든 자유적이든 학문화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의 체계를 향하지 않고 인간의 인식능력 간의 학문적 대립만 가져올 뿐이었다. 신학이 고차원적인 학문이 될수록 인간의 지식적 수단과 사고능력 간의 철학 화만 야기되는 것이다.
믿음에는 신학을 모르든 알든 간에 학문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을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며 또한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신학 수천수만의 인간적 학문들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예를 들어보자. 신학에서 구원론의 의인에 대하여 세 분류의 입장을 예를 들어보면 신학의 보편주의(Universalismus)형의 틸리히의 구원론 중에서 의인(義認)을 역동적(力動的),실존적(實存的),
존재론(存在論,dynamisch-existentielle Ontologie)의 기반 위에서 이해했다.
주관주의(subjektivismus)형의 슐라이에르마허의 구원관인 정신과 자연의 세계 포괄적인 상호융합의 진화적 동력(進化的 動力, evolutive dynamik)에 대하여 말하고 여기서 그는 낭만주의의 공리, 정신적인 성장이념(geistige wachstums ideologie)을 수용하고 또한 성장이념이 한편으로는 작용권의 확대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힘들의 상승으로 표시된다고 하였다.
개혁주의(Reformiertes) 구원관 중에서 의인(義認)을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 (articulus stantiset cadentis ecqusine)으로 보고 이는 이중의 의인(義認)이 구원의 결정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이 각자 같은 문제를 가지고 다른 견해차를 보이는 것은 신학이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학문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든 모르든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간섭되고 체험되는 성령의 구원 진행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의 말씀으로 호흡하는 순종의 동행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역사 되어지는 영적 존재의 생명으로의 진행인 것이다.
신학이 복음으로서 구성적 순종사역이 되지 못하고 신학을 위한 학문적 추구와 학문적 대립으로 천변만화로 펼쳐지는 언어적 철학 화와 권위적이고 율법적인 확대가 심각하게 되었고 신학이 높은 학문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교회는 찬바람이 불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바리새인의 이중율법의 강력한 교리구성 및 학문적 추구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바리새인의 이중 율법은 성문법과 구전율법이었다. 성문법은 두루마리 성경을 말하고 구전율법은 할라코트(halachoth:구원의 길)와 게제로트(gezeroth:법령)와 타카노트(takkanoth:조례)등을 말한다. 바리새인들은 구전율법의 내용들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구절들을 자주 인용하였고 성경의 문맥상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필요에 의해 인용하였다. 또한, 구전율법을 수정하고 발전시켜 교리체계화하고 생활 적용하는데 집착되어 철저한 율법주의자 즉, 교리주의자가 되었다.
바리새인의 근본교리는 하나님 아버지는 개인들을 깊이 사랑하시므로 하나님의 이중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셨고 그러므로 이중율법을 마음에 간직하고 학자들의 가르침에 순종한 개개인은 사후에 영혼이 하나님과 함께 살며 또한, 그 영혼이 부활한 몸으로 돌아간다 하였다.
또한 이 세 기본적인 교리를 절대화하여 이 세 가지 교리를 배척하는 자는 죄인으로 간주하였고 내세에 참여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이 교리를 지키면 동일한 시민으로 간주하였고 육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로 구분하였다. 또한, 집단구원이 아니라 개인구원을 가르쳤다. 믿음에 대하여 중요시하였는데 모두 율법과 영생과 부활도 신앙 위에서만 가능하고 신앙 없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또한, 개인의 기도를 장려하고 회당에서 모여 성경을 듣게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할라코트 또는 율법주의적 관습과 법령들에서 전수된 레위기 법전의 의식적인 요구 조항들을 정확히 준수함으로써 정결과 정화에 관하여 완전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장로들의 유전법 등 이중율법을 계속 학문적이고 교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는 토라의 주위에 바리새파 전통의 이중율법 교리 벽을 만들고 엄격히 생활에 적용시키므로 독선적이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도 말씀과 함께 전승되어오는 교리적 전통과 교리적 우월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인 교파 교단을 초월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정치논리와 함께 교리논리에 의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다. 이는 교리를 말씀 아래 둔다면서도 말씀보다 위에 군림시키는 모순이며 통합을 말씀의 큰 틀에 맞추지 않고 교리의 작은 틀에서 맞추려 하기에 맞는 것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토록 교리가 절대적인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며 하는 말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로마 총독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총독이 밖으로 나와 재판하는 희귀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유월절을 깨끗이 지키기 위해 또한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이 총독관저에서 더럽히지 않으려는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이중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이었다.
그들은 교리로 인해 예수님을 죽였다. 죽이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했다. 이 비극이여 말하라! 믿음이 교리로 이루어지는가? 천국을 교리로 가는가? 교리로 축복을 받는가? 교리를 잘 지키면 무엇을 줄 수 있는가?
교리로 교회 울타리가 되어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 준다더니 또한 교리가 말씀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된다더니 이것은 거짓이 되었다. 말씀이 교리의 울타리가 될지언정 교리가 말씀 울타리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된다면 바리새인의 이중율법과 똑같은 행위인 것이다.
기독교의 2,000년 길에서 교리가 교회를 지켜주고 보호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에 안 계셨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잃어 버렸는가? 말씀으로 돌아가자 더니 또 인간학문을 앞세우는가? 한국교회여! 바리새인이 말씀 아닌 구전 즉 장로들의 교리적 전승을 앞세우다가 독사의 새끼들이 되었다. 말씀을 인간의 학문적 질서에 배열시키면 말씀적 교리가 된다. 하겠지만 이는 인간적 적용과 학문적 이해로서 하나님으로서의 자체와 그 자체로서의 역사와 순수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말씀을 손대면 말씀은 변형되고 만다. 말씀은 하나인데 교리는 여러 가지로 만드는 것이 인간이다. 교회를 교리가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켰고 말씀이 지킨 것이다. 어찌 말씀은 버리고 교리가 교회를 지켰다고 거짓말을 하는가? 속지 마라 사람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성령 받았고, 하나님으로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으로 은사를 받았고, 하나님으로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회개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봉사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건강하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하나님으로 말씀이 선포되었고, 하나님으로 예배가 진행되었다. 이는 하나님으로 되는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의 학문적 방법으로 해보려는 타락한 바리새인적인 결과인 것이다.
분명 바리새인들은 타락한 존재들이었다. 영생을 꿈꾸며 희생적 금식기도와 순교적으로 안식일을 지켰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만든 교리로 인해 죽었다. 그 영혼도 죽었다. 신학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켜야 한다. 그 선은 하나님으로 영감 되는 선이 한계이며 그 이상은 인간적인 어떠한 철학적 적용과 이성적 사고인식의 세계를 결코 열지 말아야 한다. 신학은 학문을 위한 학문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그 이상은 사망일 것이다.
그러나 교리와 신학은 존중되어져야 한다. 단 바리새인 화하지 말아야 된다는 단서를 붙이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시되어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신학대학을 먼저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회개와 회심과 거듭남의 성령체험과 성령세례로 증거된 자만이 신학공부를 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인도와 지도 없이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신학을 송두리째 병들게 하는 학문으로서의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앙으로서 신학이 세워져야 한다. 신학으로서 신앙이 세워지면 이는 영혼 없는 몸이며 인간화를 주도하는 주체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화 하는 학문적 신학을 따라 한국교회는 바리새적 신앙의 대중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이제는 성도들 입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야.” “나는 바리새 짓을 많이 해.” 라는 말들을 듣게 된다. 어느 집사님이 금요철야기도 간증 시간에 “나는 철야기도에 가기는 싫은데 구역장이니 구역식구들이 기다리니 안갈 수도 없고 해서 바리새인같이 어쩔 수 없이 철야기도를 했었다.”라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목회자들이 자신에 대해서 율법주의에 빠졌다고 바리새인같이 겉치레가 몸에 배었다고 하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훌륭한 신앙인이다. 이는 자신을 볼 줄 안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냥 예수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바리새적인 것은 하나님이 원치도 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독사의 새끼들일 뿐이다.
한국교회는 언제부터 진실이 사라지고 형식위주의 조직적 교회로 나가게 되었다. 주님의 방법은 성령으로 역사하는 자율이며 순종으로의 봉사, 전도, 봉헌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자율보다는 책임적인 조직화이다. 이는 철저히 인위적이며 그 책임을 분담하는 물질이나 봉사 또한 반 억지가 포함될 수밖에 없고 순종 또한 그렇다. 마지못해 체면 때문에 해야 하는 바리새적인 풍토는 누룩처럼 온 덩어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다른 교회가 수단을 쓰면 이 교회가 더한 수단을 쓰고 목자가 수단을 쓰니 성도가 수단을 부린다.
예수님이 계셨던 2,00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설친다. 교회 안에 중요한 직분일수록 더하다. 사례비의 알력,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마치는 신령한 일들, 돈으로 사고팔 수 없는 것을 바리새인이기에 사고판다. 돈이면 기도해 주고, 돈이면 선거에 표를 던지고, 돈이면 장로도 권사도 안수집사도 서습 없이 세운다. 소위 건축 장로, 봉고차권사들이다. 이는 바리새 병이 아니겠는가? 바리새병적인 징후들이 수만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바리새인의 제도 존중주의(institutionalism)가 철저하게 교회를 얽매고 바리새인의 학문주의는 강력한 교리구축과 말씀주의로 교회에 외식화(外飾化)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말씀을 학문화하면 반드시 부작용을 초래한다. 이는 학문으로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과 성도는 영으로서의 교통이며 학문으로서의 교통은 바리새적이라 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말씀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연구를 많이 했다. 그러나 말씀에 안 맞는다고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예수님께 말씀을 들고 따졌다. 말씀 말씀하며 절대 말씀 중심이라 하던 바리새인들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믿음은 믿음이 아니며 말씀은 말씀 말씀한다 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은 믿음으로 행할 때 말씀이며 믿음으로 체험되었을 때 살아있는 말씀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교인들의 외식(外飾)은 한국교회를 죽이고 있는 독을 가진 누룩이다. 외식하는 기도를 보라. 대표기도를 성령으로 하지 않고 꾸미는 자가 있지 않은가? 기도를 사람 앞에 잘하려는 자는 썩었다. 종이에 써서 기도를 잘하려고 하는 자들도 썩었다. 예수님이 직접 오셨는데도 자기 생각에 안 맞으면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 사람의 계율을 주님 말씀보다 더 중히 여기는 자들이다. 기도응답보다 제직회 결의가 절대적인 자들 당회결의와 결재가 하나님의 결재보다 우선인 자들이 아닌가?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그 결정된 사항이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람들의 생각들인지를 분별치 못한 비참한 결과들을 보라. 교회행정과 헌법이 절대적인 양 거기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이라도 버리는 자들이 한국교회에 가득하다.
교회마다 말씀, 말씀하지만 진정 말씀다운 말씀이 실행되는 하나님의 성품과 양심과 순종과 맡기는 믿음이 하나님과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가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타성에 젖어 바리새인의 옷을 입고 대접만 받으려 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자들, 말씀에 지식만 있고 그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 그렇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로다. 저희는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의 경문을 넓게 하고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에 앉고 회당의 상좌에 앉고 시장에서 문안받고 랍비라 칭함을 좋아하던 자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버젓이 목사요 장로와 직분 자들이다. 아예 장로석을 만들어 놓고 나는 바리새인이라 한다. 높은 자리 강단에 안 앉혀 주었다고 서운해 하고 순서에 자기가 빠졌다고 불참하고 비협조적이며 호통을 치는 자들, 어찌 된 영문인지 자꾸자꾸 예수님과 반대된 일만 한다. 또한, 여러 제도를 만들고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대원로원 베트 딘 학가돌(Beth Din Haggadol)을 세우고 나시(naasi)와 아브 베트딘(abh bethdin)을 두어 이중율법을 제정하고 해석하는 권세적인 추구와 회당제도를 통한 철저한 이중율법 생활화와 마아마돗(maamadot) 24 당직절차를 두어 철저히 의식화하였듯이 오늘도 바리새인들은 믿음의 세계에서 인간 방법 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제도요, 인간의 방법이요, 인간의 대립과 인간에 대한 대응적인 조직 운영인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오늘도 예수님께 자기들의 방법이 옳다고 주장한다. 누가복음 18:9~14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주님은 법적 칭의(forensicjustification)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공로의 교리(a meritorious doctrine)에 의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려고 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하여 죄인을 용납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법적 칭의(a Judicial Justification by God)를 받는 법적인 방면(an acquittal)인 복음을 제시하셨다. 이렇듯이 바리새인은 인간중심에서 믿음추구를 하고 주님은 하나님 방법으로의 긍휼과 구원에 대한 은혜를 말씀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에 의한 죄인의 대속 ransom(λυτρϙν)은 삶뿐만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그리스도가 대신 지셨음을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심(God's visitation of His people)으로 예언되고 선포되는데 (사61:1~3, 눅4:17~19) 바리새인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철저히 이중율법을 더욱 강화하고 세분화하여 교리중심체계를 세웠다.
이 교리에 위배되는 자는 예수님이라도 이단으로 정죄했다. 오늘도 성령의 역사를 교리로서 가로막고 성령님이 역사 해서 병을 치료한 것도 마귀가 역사 했다고 하며 성령님을 훼방한다. 많은 성령의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징계하는 바리새인들의 발악은 철저히 육적이며 제도적이며 학문적이며 집단적이고 인위적인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인간은 전적 타락으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이기에 예수님의 생명 바친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시어 믿을 수도 없는 인간에게 성령을 부으시사 성령으로 회개하게 하시고 봉사하게 하시어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신학은 생명신학인 성령중심과 믿음으로 세우는 실천신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백가지 일을 접어두고 성령 받기 위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눅11:9~13). 성령을 못 받은 자가 제자공부를 백년 만년을 한들 아는 것으로 구원을 받겠는가? 어림없는 짓이다. 성경을 백 독 아니 만 독을 한들 무슨 소용이며 신학을 백년 만년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문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아니면 거짓이요 바리새인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힘쓰고 애써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고 해도 성령 없이 한 것은 의로울 수도 없고 죄 하나 해결 못 하는 죽은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한국교회여! 성령운동을 일으키자. 모든 힘과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 성령 받기를 위해 전혀 기도에 힘쓰던 마가 다락방 운동을 하자. 믿음의 선물은 성령으로 오심을 각인시켜야 한다. 성령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음을 알자. 왜 껍데기 교인만 생산하고 있는가? 성령의 체험이 없는 자가 교리로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가? 누가 방언운동을 막았는가? 성령의 사람들이 막았는가? 학자들이 막았는가? 이제는 학문으로 대립하지 말자. 인간은 인갈일 뿐 하나님이 아닌 이상 천년만년이 가도 싸움은 끝나지 않으리라. 오직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는데 순종하자. 교인마다 성령 받고 방언을 받고 각종 은사로 체험하게 하자. 성령을 체험한 자에게 비로소 말씀의 문이 열리게 됨을 알자. 성령 받은 자에게 제자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제는 거짓으로 성령 받았다고 하지 말자.
이제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백가지 만 가지로 분파되는 교리를 뛰어넘어 그리스도의 전 포괄적 통일(all embracing unity)로 나오자.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기독교가 하나 되는 통일로 나오라. 성령 받은 자라면 오고 성령 받지 못하고 학문으로 믿고 사는 자는 오지도 말라. 모든 교단 교파들이 하나로 모여 교리를 통일 교리로 새로 만들자. 헌법도 통일 찬송가처럼 만들면 되지 않는가. 성경이 문제면 성경도 통일성경을 만들면 된다. 예식서도 예배 모범도 통일시키면 되지 않는가. 신학교는 그대로 존속시켜 전문화하여 세계선교를 크게 이룰 수 있는 기반이 되게 하고 또한 구조조정을 통하여 통일된 운영체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 5만여 교회가 통합되면 그 힘과 재력과 선교추진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가장 힘 있는 선교의 구심체가 될 것이 자명하다.
이 시대에 있어서 바리새인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는 목회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강단의 기도도 예배의 기도도 사람을 인식하고 외식할 수 있는 위치에서 생활하기에 더욱 자신을 십자가에 복종시켜야 한다. 말씀선포에 있어서 설교를 잘하려는 생각은 바리새 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설교는 잘못하고 인기 없어도 좋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선포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 시간 역사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전달하려고 기도하고 순교의 자세로 준비해야 한다. 자칫하면 영웅 심리에 빠지고 사람들의 인기에 잡히면 그 인생은 불행이요, 마귀에게 잡힌 자요, 많은 사람에게 폐해를 입히는 자가 되고 만다.
사람은 마귀의 꾀를 따라서 인본주의적 사색(homocentric thought)과 반계시적 인식법(Anti revelalional epistemology)을 따르게 되므로 인간의 사상과 생활은 혼란과 타락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특징이 율법완전주의를 지향하다가 인간한계에 부딪혀 부정주의(negativism)가 되었다. 이는 적극적 준법생활보다 벌을 면하려고 행위를 아니 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죄악 된 본성으로 정작 하나님께는 잘 보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향해 무장되어야 독사의 새끼라는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면하게 된다. 사람들을 보면 외식하게 된다. 외식은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과 일대일이다. 기도가 그렇고 봉사가 그렇다. 사람보고 봉사하고 구제하면 남는 것은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바리새인의 옷뿐이리라. 이는 저주의 옷이다. 설교도 하나님과 일대일에서 말씀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인 것이다.
사람들은 똑같은 말씀을 가지고 한쪽은 보수주의 신학을 만들고 한쪽은 진보적인 자유주의 신학을 만들어 자기 것이 옳다고 싸우고 있다. 보수주의에서는 ➀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➁ 성서의 객관적 권위와 ➂ 구원의 전적 은혜성과 ➃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 시며 모든 권위의 원천으로 보고 ➄ 적극적 문화관과 ➅ 보통 은혜에 대한 깊은 인식 등으로 본다. 그리고 근본주의에서는 ➀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 ➁ 삼위일체의 교리 ➂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➃ 속죄론 중에 대속설 ➄ 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교리를 주장한다. 이렇게 비슷한 입장에서도 신학체계는 학자마다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자유신학에서는 아주 딴판이다.
이는 신학으로서 믿음이면 파멸이란 뜻이 된다. 신학이 믿음의 울타리 노릇을 한다지만 진정한 교회의 표상과 주관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섭리에 의해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신학주의는 바리새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바리새인이 그렇게 수많은 학자들을 통하여 율법화, 학문화를 추구한 결과가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신학은 절대화시키면 바리새인화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학주의가 되지 말고 신학은 오직 신앙의 체계가 되어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겠는가 한다. 신학은 보수이면 보수로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고 즉 성령의 은사와 표적들에 대하여 초대교회 마감이라는 신학적 판단으로 또는 사두개인들의 극단 보수 자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듯이 말이다. 또한, 진보주의자들은 인본주의적 자유신학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신학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모두 교리적인 인간의 학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100% 반영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의 학문적인 주장과 주장이 대립하는 신본주의를 향한 인본주의적인 방법과 질서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위대한 질서이며 인간의 최고의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믿음과 교회의 질서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와 신학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학문으로서의 방법이 아니라 믿음의 질서여야 하고 이론적인 추구보다는 성령으로서의 신학 즉 성령의 방법이 고찰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신학일 것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백석) 성민중앙교회 김동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