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자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최신작 『세컨드핸드 타임』이 출간되었다. 소비에트 시대의 최종 완결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소련의 붕괴에 주목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20년 동안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상실감,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등의 정신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독일에서 출간된 지 일주일 만에 9,000부가 판매되었으며, 프랑스, 미국 등 35개국에서 출간되어 변화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전체 시스템의 붕괴로 터져버린 인간의 광기와 폭력 한 가운데를 파고드는 저자는 그들의 욕망을 들춰내 공산주의 패러다임의 붕괴, 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인식의 변화, 지식인 문화의 종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변화를 감내해야 했던 ‘작은 인간’들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소련에 대한 향수,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양면적인 향수, 공산주의 체제의 최후를 불러온 것들에 대해 서술한다.
소비에트 문명. 나는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소비에트의 익숙한 얼굴을 서둘러 기록한다. 사람들에게 사회주의가 아닌 사랑, 질투, 유년기, 노년기에 대해 그리고 음악, 춤,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라진 삶의 수천 가지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것이 재앙을 익숙한 틀 속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이야기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인간의 삶에 지치지도 않고 매번 깜짝 놀란다. 인간의 진실은 무한하다. 역사는 감정을 옆에 제쳐두고 사실에만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역...
더보기 소비에트 문명. 나는 소비에트 문명의 흔적을, 소비에트의 익숙한 얼굴을 서둘러 기록한다. 사람들에게 사회주의가 아닌 사랑, 질투, 유년기, 노년기에 대해 그리고 음악, 춤, 헤어스타일에 대해, 사라진 삶의 수천 가지 소소한 일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것이 재앙을 익숙한 틀 속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이야기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깨우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다. 나는 평범한 인간의 삶에 지치지도 않고 매번 깜짝 놀란다. 인간의 진실은 무한하다. 역사는 감정을 옆에 제쳐두고 사실에만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역사 속에 감정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역사학자가 아닌 인문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경이로움을 느낀다. _<어느 가담자의 수기> 중에서, 15p
또 러시아인은 수수께끼의 영혼을 가졌어요. 그래서 모두들 러시아인을 이해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도대체 저 영혼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하죠. 그런데 말이죠, 우리 영혼 속에는 또 다른 영혼이 있어요.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거나 책읽기를 좋아해요. 러시아인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은 독자이자 관객인 셈이에요. 그런데도 우리 러시아인은 근거 없이 자기네 민족을 특별하고 유일하다고 인식하고 있어요. 사실 석유와 가스를 빼면 특별할 것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러한 점들이 한편으로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장애물로 작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한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러시아가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뭔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요. 신이 선택한 민족, 고유한 러시아인의 길을 주장하죠. 우리 주변에는 오블로모프(곤차로프의 대표작으로 허무감에 빠지고 무기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 투성이에요. 모두가 소파에 드러누워 기적을 바라고 있죠. 반면 슈톨츠(박력 있고 실리적인)는 없어요. 민첩한 행동파 슈톨츠는 보이지 않아요. 러시아인은 자기들이 아끼는 자작나무숲과 벚꽃동산을 베어버렸다는 이유로 슈톨츠를 증오해요. 그곳을 밀어낸 뒤 공장을 짓고 돈을 번다는 이유로요. 우리들 사이에서 슈톨츠는 타인이에요. _<길거리에서 나눈 잡담과 부엌에서 나눈 대화> 중에서, 23p
그런데 ‘자유, 자유다!’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상점 진열대에서 치즈와 고기뿐 아니라 소금과 설탕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상점이 텅텅 비었었죠. 무서웠어요. 전쟁 때처럼 모두 쿠폰으로 배급을 받았어요. 그때 우리를 구한 건 할머니였어요. 할머니는 하루 종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쿠폰으로 배급받을 만한 물건을 물색했어요. 베란다에는 세탁세제가 가득 쌓여 있었고, 침실에는 설탕자루와 곡물자루가 겹겹이 쌓여 있었어요. 양말마저 배급 쿠폰으로 나오자, 아버지는 참고 있던 눈물을 흘렸어요. “이게 소련의 말로야”라면서요. 아버지는 끝이라는 걸 느낀 거예요. _<길거리에서 나눈 잡담과 부엌에서 나눈 대화> 중에서, 30p
1990년대에 대해서라면……. 저 같으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끔찍한 시절이었거든요. 머릿속에서 180도 회전이 일어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변화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도 허다했어요. 정신병원이 환자들로 북적거렸죠. 한번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친구를 문병 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스탈린이야! 내가 스탈린이야!”라고, 또 어떤 사람은 “내가 베레조프스키(옐친 대통령 재임 시기에 올리가르흐였던 인물로 미디어 재벌)야! 내가 베레조프스키라고!” 소리치고 있더군요. 그 병동 전체가 스탈린과 베레조프스키로 가득했어요. 거리에선 총소리가 줄곧 들렸어요.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고, 매일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났죠. 뭔가를 더 가져 가려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져야 했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던 거예요. 어떤 사람은 파산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갔어요. 왕좌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요.
-<어떻게 물건이 사상과 말의 가치와 같아졌는지에 대해> 중에서, 36p
닫기 그들의 마지막 속삭임을 기록하고
어떻게 그들이 사라져갔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_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발표되었다. 그 주인공은 역사 속 현장에서 시대를 살아간 작은 인간들의 증언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였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벨로루시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최신작이자, 소비에트 시대의 최종 완결이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핸드 타임』이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 소련의 붕괴에 주목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
더보기 그들의 마지막 속삭임을 기록하고
어떻게 그들이 사라져갔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_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2015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발표되었다. 그 주인공은 역사 속 현장에서 시대를 살아간 작은 인간들의 증언을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하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였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한 벨로루시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최신작이자, 소비에트 시대의 최종 완결이라고 할 수 있는 『세컨드핸드 타임』이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다. 소련의 붕괴에 주목하여 살아남은 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은 알렉시예비치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세컨드핸드 타임』은 독일에서 출간된 지 일주일 만에 9,000부가 판매되었으며, 프랑스, 미국 등 35개국에서 출간되며 변화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2013년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독일출판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 프랑스 에세이 부문 메디치상을 수상, 문학잡지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최신작인 『세컨드핸드 타임』은 1990년대 대중이 감내한 물질적인 변화상만을 다룬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패러다임의 붕괴, 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경멸, 지식인 문화의 종식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련에 대한 향수, 스탈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양면적인 향수, 공산주의 체제의 최후를 불러온 것들에 대해 서술한다.
오직 소비에트인만이 소비에트인을 이해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전체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터져버린 인간의 광기 그리고 폭력의 한가운데로 파고들어 그들의 욕망을 들춰내고 있다. 작가는 거대한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패러다임의 붕괴, 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인식의 변화, 지식인 문화의 종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변화를 감내해야 했던 ‘작은 인간’들에 주목하고 있다.
“사회주의 출신인 우리는 서로를 닮았고, 외부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린 우리만의 언어가 있고, 우리만의 선과 악에 대한 가치관이 있고, 우리만의 영웅과 순교자들이 있다. 우린 죽음과도 특별한 관계로 얽혀 있다.” 고르바초프에 반대해 일으킨‘8월의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3일!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졌다.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세력은 민중이었고,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가온 미래는 KGC 지휘하의 자본주의 국가였다.
『세컨드핸드 타임』은 알렉시예비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심각한 작업이자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다. 소비에트 연방의 몰락을 전후로 다양한 관점을 가진 목격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1990년대를 증언해줄 사람들을 찾아 나선 작가는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공산당 간부부터 반대세력의 부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음역대의 인물을 내세운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평범한 일반인, 장군, 공무원, 은퇴자 등 다양하다. 전쟁의 노병, 브레스트의 수비대원, 기차 아래 몸을 던진 사람, 아흐로메예프의 육군 대장, 자살한 사람, 교사, 시장에서 장사를 해야만 하는 연구원, 소련의 난민들……. 이들은 모두 소비에트 왕국의 파편들이자 희생자, 잔인한 학살자, 참여자이자 증인, 여론 선동가, 거대한 신화의 안에서 살아간 자들이다. 소비에트 시대, 페레스트로이카 등 교체와 변화의 시대를 살아간 그들의 실망과 상실감 그리고 위대한 국가를 위한 사상의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를 통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소비에트 시대의 마지막 증언들
『세컨드핸드 타임』은 ‘어느 가담자의 수기’라는 저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르바초프와 소수의 지식인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났다. 나도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80퍼센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전혀 모르는 채로, 다른 세상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벨로루시의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녀가 3살이던 해 아버지가 죽었고, 그는 마지막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이 책은 소비에트 시대를 살았던, 자유주의를 받아들인 작가와 공산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그녀 아버지에 관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후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이야기하거나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관념들은 감정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사회 변화로 젊은 사람들 중에는 스탈린을 찬양하면서 이전 시대로의 복구를 꾀하기도 했다. 공산주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물질에 휘둘리는 속물근성으로 찌든 나라를 보며 강력한 차르의 시대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이에 저자는 굴욕의 역사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스탈린 시기의 군대, 강제노동수용소, 붉은 군대에서 싸운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참혹한 시대상을 증언한다. “역사가는 감정이 아닌 사실을 봐야 한다.”라고 말하며 혼란과 향수 사이에서 동요하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경험을 들려줌으로써 시대적 각성을 요구한다.
그들은 신중하고, 정의롭고, 어머니처럼 진짜 좋은 조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조국은 오지 않았고, 아름답고 편안한 삶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모욕당했고,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위대한 조국을 부활시키기를 원했다. “우리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을 꿈꿨다.” 시스템이 완전히 변해버린 사회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탈린, 강한 손, 주인, 자신들을 위해 모두 결정할 수 있는 자였다.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영웅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세컨드핸드의 시대, 미래도 현재도 없는, 현재도 미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종말
“1990년대 우리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때의 순진함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은 없다. 우린 그때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고, 공산주의는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그 후 20년이 흘렸다. 그런데 막상 시작된 것은 체호프의 소설 같은 인생, 아무 역사가 없는 인생이었다.
러시아에 첫 번째 맥도날드가 문을 열었다. 그들에게는 갑자기 자유란 것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자유란 ‘위대한 소비 전하’의 등장이었고, 어둠의 왕의 출현이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던, 우리가 그동안 상상했었던 욕구와 본능이라는 어둠의 왕!” 그들은 자유를 몰랐고, 자유가 주어진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문학을 노래하고, 국가를 사랑하고,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돈’이라는 물질을 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굉장히 물질주의적인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소비에트 연방을 잘 아는 사람들과 더 가깝다고 느낀다.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고, 우리는 진짜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공산주의 시대에 거리의 부랑자는 그가 가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창피하지 않았다. 오늘날, 당신들의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보호를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는 대신, 영광스러운 과거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러시아를 초토화시켰고, 스탈린을 복권시킬 수 있도록 대중을 끌어 모으는 권위를 찾아 헤매고 있다. 마음은 준비가 되었다.” 이 책은 3일 동안 사라져버린 제국의 시민들에게 바치는 문학적 묘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서 한 시대 안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 날들의 모든 기억에 대한 기념비이기도 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로루시에 살고 있다. 거기에 그녀의 집이 있고, 그곳에서 그녀가 자랐으며,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녀의 책은 출간되지 못한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벨로루시 작가들 사이에는 그녀가 없다. 러시아에서 그녀는 거의 인정받지 못하지만, 최신작인 『세컨드핸드 타임』은 모스크바의 서점에 등장했다. 이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전 국가정보요원은 ‘인간은 매우 쉽게 짐승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모든 행복한 인간의 문 뒤에는 누군가 망치를 들고 서서 영원히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당신의 옆에는 불행이 도사리고 있으며, 행복은 언제는 부서질 수 있음을, 여기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다. 이것이 그녀가 미국, 폴란드 독일에서 인정받고 있는 이유이며, 그녀의 작품이 번역되고, 출판되고, 상을 받는 이유이다.
『세컨드핸드 타임』은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20년 동안 소비에트 사회의 변화와 사람들의 상실감,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 등의 정신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소비에트 사람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간과 악마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그런데 ‘이게 뭐지, 우리가 어디로 온 거지?’ 우리를 맞이하는 건 낯선 도시, 생경한 도시였어요. 거리 위로 바람에 실려 나부끼는 꼬질꼬질한 포장지, 신문 조각들, 빈 맥주병들이 발에 걸리곤 했어요. 역 광장에도 지하철역에도요. 어딜 봐도 사람들이 회색 줄을 만들고 있었고, 다들 무언가를 팔고 있었어요. 여성 속옷, 침대 시트, 오래된 신발과 아동용 장난감 그리고 담배는 낱개로도 살 수 있었어요. 마치 전쟁영화 속 한 장면 같았어요. 전쟁영화에서나 그런 모습을 봤거든요. 차가운 땅바닥에 찢어진 종이 조각이나 박스가 깔려 있었고, 그 위에 햄, 고기, 생선 등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어떤 곳은 찢어진 비닐봉지로 덮어두었고, 다른 곳에는 그마저도 없었어요. 그런데도 모스크바 사람들은 그걸 사더라고요. 흥정도 하고요. 손뜨개 양말과 냅킨도 있었고, 못을 파는 곳 바로 옆에서 음식과 옷도 팔았어요. 우크라이나 말, 벨라루스 말, 몰도바 말들이 모두 들렸어요. “우린 빈니차(우크라이나 중서부 주)에서 왔어요”, “우리는 브레스트에서 왔어요.” 거지들도 정말 많았어요. 어디서 그 많은 거지가 나타났을까요? 불구들도 많았어요. 정말이지, 영화 속 장면 같았어요. 그 장면을 비교할 만한 대상이 소련 영화밖에 없어서……. 그때 전 마치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_<속삭임, 고함 그리고 환희에 대해> 중에서, 126p
스탈린이 만든 국가는 밑에서는 결코 뚫고 올라올 수 없는 국가였습니다. 그렇게는 결코 관통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위에서부터라면 얘기는 달라지지요. 나약하고 무방비 상태였던 국가였습니다. 소련이 위에서부터 무너지리라고는, 소련이라는 나라를 최고 지도부에서 먼저 배신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부르주아 편에 선 박쥐들! 크렘린을 장악한 총서기장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위에서부터 공격하면 무너뜨리기 쉬운 나라였습니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법도가 오히려 소련에 해가 되었습니다. 역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자면 로마제국을 시저가 스스로 무너뜨렸다든가……. 뭐, 그런 상황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고르바초프는 찌질이가 아니에요. 돌아가는 상황에 놀아난 노리개도 아니고요. CIA 요원이란 말은 정말이지 터무니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공산주의의 무덤을 판 자, 조국의 배신자, 노벨상을 거머쥔 개선장군, 소련을 파산시킨 장본인, 대표적인 60년대 사람들 중 한 명, 최고의 독일인, 선지자, 가롯 유다, 위대한 개혁가, 위대한 배우, 위대한 고르비, 고르바치, 세기의 사람, 헤로스트라투스’ 등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_<고독했던 붉은 원수와 잊힌 3일간의 혁명에 대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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