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수를 놓는다. 가로와 세로가 각각 두 뼘쯤 되는 인도산 얇은 모슬린 위다. 엄지와 인지에 힘을 주어 바늘을 천에 찌른 후 바깥으로 빼낸다. 우측 구멍으로 집어넣은 후 그보다 한 땀 아래 하단으로 빼낸다. 좌측 상단 바깥에서 안으로 통과시키면서 한 바느질이 끝난다.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당신은 지금 목어의 아랫배를 비워 내고 있는 참이다.
당신은 이따금 몸을 흔든다. 낡은 등나무 흔들의자 위다. 강보에 싸인 아이처럼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만든 지 오래 된 흔들의자는 모서리가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난다. 몸의 중심이 뒤로 쏠릴 때마다 찌걱찌걱 마찰음이 들린다. 하지만 당신은 이 낡은 흔들의자를 좋아한다. 당신은 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고 수를 놓는다. 의자는 오래 알던 사람처럼 몸에 딱 맞는다. 서른 두 살이 되는 지금까지 당신은 이보다 더 편안한 의자를 보지 못했다.
손을 멈추고 무릎에 올려진 도안을 들여다본다. 목어의 배를 표현하려면 두 개의 색실이 더 필요하다. 당신은 실상자에서 647번 실을 꺼내어 바늘에 끼운 후 왼쪽 꼬리 부분에서 아가미 쪽으로 수를 놓아 간다. 647번은 비버 그레이다. 비버 그레이는 안개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색깔이다. 목어의 아랫배에 한줌의 안개가 번진다. 아랫배라고 하지만 실상은 비어 있는 공간이다. 완전히 비워 내기 위해 647번 실은 목어의 배 밑 부분과 위쪽 비늘의 경계 사이를 뚫어가고 있다. 아가미 부분에 이르러 실은 3371번 블랙 브라운으로 바뀐다. 블랙 브라운은 검정보다 부드럽다. 몸통과 안개 사이에 초생달 같은 경계선이 그어진다. 당신은 눈을 감고 목어가 뱃속을 비워 토해 내는 맑은 소리를 떠올린다.
고개를 들어 왼편 하늘을 바라본다. 103동 건물 콘크리트 사이로 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해는 103동 옥상에 설치된 환기통에 걸려 있다. 빙빙 돌아가는 환기통 함석날에 의해 해의 아랫부분이 너울거린다. 한 손으로 해가리개를 한 후 지켜본다. 당신이 앉아 있는 104동 702호 베란다는 서남향을 향해 창문이 나 있다. 103, 104, 105동이 ㄷ자 모양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다. 오후 한두 시쯤 103동 건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해는 소망 교회가 있는 맞은편 소나무 숲을 지나 오른 편 105동 건물 속으로 모습을 감추곤 한다. 날이 맑은 날이면 햇빛은 색실이 풀리듯 베란다를 휘감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그에게선 한 통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인도산 얇은 모슬린 위다. 입고 있는 노란 색 누비스커트의 무릎께가 환해진다. 103동에 가려졌던 해가 성큼 단지 광장으로 들어선다. 당신과 등나무 흔들의자는 완전히 햇살 속에 놓인다. 손을 멈추고 당신은 목어가 수놓아지고 있는 모슬린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하는 목어 한 마리가 활처럼 기운 모습으로 누워 있다. 아직 머리 부분이 작업되지 않은 목어는 영락없는 물고기의 모습이다. 금방이라도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어디로든 헤엄쳐 당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것만 같다. 세상의 외진 곳으로 달아나고 싶어했던 그를 떠올린다. 바람 차갑던 어느 거리에 당신이 있다. 서둘러 집을 나섰던 당신은 전철역 사거리에서 손을 비비며 그를 기다렸다. 그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을 늦어 도착했다. 클랙슨이 울리고 운전석 유리문이 내려갔다. 여긴 완전히 한겨울이네. 그는 보름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간다라 미술에 대한 사진 자료를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들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었다. 그는 당신의 모교이기도 했던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옆 좌석에 앉으며 당신은 그의 옆모습을 슬쩍 훔쳐본다. 아침에 면도를 안 했는지 턱 끝이 가뭇했다. 면도를 하지 않은 그의 턱을 그날 처음 보았다. 승용차에 오르며 당신은 보름간의 안부를 물었다. 음식이 안 맞아 고생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하더군. 히터 스위치를 올리며 그가 대꾸했다.
시내를 어렵게 빠져나간 승용차는 올림픽 대로로 들어섰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그런 면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디를 가든, 무슨 음식을 먹든, 내 뜻에 따라 주는 네가 나는 참 편하고 좋아. 처음 모텔에 든 날, 그가 한 말이었다. 한남대교 밑을 지날 무렵 간간이 날리던 눈발이 쌓이기 시작했다. 삼십분 째 차는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피곤한 기색을 당신은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봄베이 공항을 출발했다는 그는 중간 경유지인 간사이에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신은 친구의 결혼식에 갈 약속을 깨고 그를 기다렸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몇 번이나 불을 붙이기 위해 애썼다. 접촉 사고가 났는지 견인차 한 대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갓길로 질주했다. 멈춘 차들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십 분쯤 시간이 흘렀다. 차는 좀전의 사고 지점을 지나가고 있었다. 눈발 속에 어지럽게 널린 유리 파편이 보였다. 갓길 한 쪽에 주인 없는 구두 한 짝이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당신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당신은 문득 묻고 싶어졌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나요? 그러나 당신은 볼우물만 만들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차들이 멈춘 틈을 타 그가 가방을 열고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당신에게 내밀었다. 받아. 별건 아니고. 하다카스라고 모직물이 유명한 동네를 지나는데 마침 시장이 섰더라구. 당신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손으로 직접 짠 거라더군. 뭐라더라, 공기로 직조한 천? 하얀 색 천 하나가 네 등분으로 개켜져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그만큼 가볍고 섬세하다는 뜻이겠지. 당신은 그것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감촉이 매끄러웠다. 천은 한쪽 귀퉁이를 펄럭이며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이곳에 부적을 그려 간직하는 풍습이 전해진다더군. 그가 계속 중얼거렸다. 하다카스를 거쳐 다음으로 들른 곳은 타르사막의 관문인 자이살메르였어. 약간 높은 언덕 위에 고성을 중심으로 황색 사암으로 지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지. 밤이 되었을 때 드라이버의 도움을 받아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나갔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주인공처럼. 그러다가 달을 보았지. 상상해 봐. 사막의 모래를 뚫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달의 모습을. 돌아 나오는 길에 삼바르호에서 소금을 채취하여 도시로 실어 나르는 대상 무리를 만났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군. 대상들처럼 달빛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 말야. 당신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내리고 있는 강물 위로 유람선 한 척이 네온을 번쩍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까칠한 그의 턱이 당신을 향했다. 당신은 그의 눈을 오래도록 외면했다. 그가 덧붙였다. 선희도 눈이 그치고 봄이 되면 서른 하나가 되는군.
칼을 들어 당신은 목어의 아가미 부분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도안에 그려진 목어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하고 있다. 물고기의 몸과 용의 머리가 만나는 아가미부분은 여러 개의 실이 섬세하게 들고난다. 아가미와 목의 경계선은 310번 블랙이다. 310번 실을 좌우로 610번, 928번, 3778번 실이 바둑알이 놓여지듯 한 두 줄, 혹은 몇 칸씩 목어의 아가미 주변을 오르내린다. 3778번 테라 코타가 놓여야 할 자리에 356번 테라 코타를 사용했다. 356번 실은 3778번 실보다 조금 진한 적갈색이다. 그 차이는 아주 미세하여 당신은 두 줄이나 실수를 한 것이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어긋난 실들을 뜯어낸다. 핀셋을 들어 작은 보푸라기까지 전부 뽑아 낸다. 잘못된 바느질은 즉시 뜯어내야 한다. 전체가 완성되었을 때, 잘못 바느질 된 색은 쉽게 눈이 띈다. 당신이 열 살이나 많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처럼 바늘은 곧잘 빗나간다.
해는 소망교회 십자가 위를 지나가고 있다. 작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교회 뒤편은 소나무 숲이다. 언덕 정상엔 송전탑이 위치해 있다. 송전탑에서 늘어진 굵은 전선들은 교회 건물과 그 옆 부설 유치원을 지나 작은 해바라기 밭 하나를 건넌 후 다음 송전탑으로 이어져 있다. 105동에 가려 당신은 그것을 다 볼 수 없다. 십자가 위를 지난 해는 늘어진 전선줄을 구르듯 타넘어 105동 속으로 숨곤 한다. 하루 중에서 햇빛은 지금 당신과 가장 정면이다. 당신은 의자의 방향을 103동쪽으로 바꾼 후 비스듬히 앉는다. 늘어진 당신의 그림자가 거실 쪽으로 실루엣을 드리운다. 당신의 눈길이 그림자의 기운 끝을 따라간다. 한 뼘쯤 열어 놓은 건넌방이 보인다. 쿨럭쿨럭 기침 소리가 들린다.
저만치 아파트 아래서 무엇인가 반짝 빛난다. 당신의 시선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주차선 안에 정차된 차들의 보닛을 따라간다. 검은색과 흰색, 혹은 감청색의 반복이다. 103동 경비실 앞에 이르러 목련 한 송이가 툭 떨어진다. 당신의 시선이 정지한다. 목련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목련을 집어들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한달 전부터 단지 주변을 떠돌고 있는 남자다. 사나흘, 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남자는 당신의 눈에 띄었다.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오후면 남자는 103동을 끼고 단지 중앙으로 걸어온다. 단지 중앙에 있는 놀이터 앞에서 남자는 오랫동안 앉아 있거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다가 해가 105동으로 사라지는 저녁나절이면 슬며시 사라지곤 했다. 남자는 몸을 일으켜 놀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온다. 남자는 그네에 앉기를 좋아한다. 두 개의 그네에 노란 유니폼을 입은 유치원 아이들이 매달려 있다. 당신은 의자를 돌려 놀이터를 내려다본다. 아이들은 봄볕에 나온 병아리들 같다. 남자는 벤치 위에 앉는다. 남자의 눈앞으로 바람을 가르며 그네가 지나간다. 당신의 시선이 그네로 옮겨간다. 그네가 정면으로 지날 때마다 당신과 남자의 시선이 교차한다.
쿨럭쿨럭. 기침 소리가 커진다. 그칠 듯 계속된다. 당신은 보조 탁자 위에 들고 있던 바늘과 모슬린을 내려놓고 방으로 향한다.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 본다. 얘야. 아버지가 몸을 일으킨다. 베게를 들어 아버지의 등에 받친다. 바깥 날씨가 어떠냐? 눈이 좀 그쳐야 할 텐데. 팔에 와 닿는 아버지의 몸은 마른 장작처럼 가볍다. 눈은 오래 전에 그친 걸요. 능곡엔 사과꽃이 가득했지. 너도 알지? 거길 좀 가 보자꾸나. 다시 기침이 이어진다. 꿈을 꾸셨어요? 당신은 아버지의 등을 두드린다. 아버지는 능곡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맘때면 마을로 들어서는 사방 십리길이 온통 사과꽃 천지였던 그 곳. 집은 골짜기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등나무 흔들의자를 동구 쪽으로 내어놓고 사과꽃 향기에 흠뻑 취해 앉아 있곤 했었다.
물 마시고 싶으세요? 뭐, 아직 눈이 온다고? 당신은 물 주전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선다. 이태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아버지는 빠르게 늙어가고 있다. 아버지는 동구 밖을 바라보던 그 모양 그대로 등나무 흔들의자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흰 꽃잎이 눈보라처럼 마당 가득 날리던 오후였다. 마을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그는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아버지를 제가 있는 곳으로 모셔야겠어요. 헤어질 무렵 당신은 그를 향해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희도 어서 좋은 남자 만나야지. 좋은 남자요? 이렇게 제 곁에 있는 걸요. 마을로 꺾어드는 산허리에 이르러 당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승용차에 어슷히 몸을 기댄 채 당신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가세요. 당신은 손을 흔들었다. 사과꽃 사이로 번쩍 치켜든 그의 손이 보였다. 당신은 일주일에 한번씩 능곡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 그를 만난 이후에는 종종 그의 차를 얻어 탔다.
집을 향해 민틋한 골목을 오르며 당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저만치 마당에 한 무더기의 사과꽃이 보였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 근처 과수원에서 접붙이기를 해와 울타리 대용으로 심어 놓은 것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주무세요? 아버지는 대답이 없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문드문 흰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당신은 황급히 핸드폰을 눌렀다.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오 분도 안 돼 그의 차가 되돌아왔다. 그는 아버지를 안아 침착하게 승용차 뒷좌석으로 옮겼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을 노인 몇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골목길에 나와 있었다. 그는 비상등 스위치를 켠 채 빠른 속력으로 병원을 향해 차를 몰았다. 아버지는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입원한 지 육 개월만에 가까스로 당신을 알아보았다. 아버지의 짐을 챙기러 능곡에 내려갔던 날 당신은 흔들의자 앞에 떨어져 있는 때 낀 운동화 한 짝을 보았다.
꽃이 보고 싶으세요? 당신은 묻는다. 아버지는 물을 힘겹게 넘긴 후 다시 눕는다. 뭐, 누가 온다고? 어서 눈이 그쳐야 할 텐데…… 아버지가 중얼거린다. 기침이 나으면 밖으로 나가봐요. 더 좋아지시면 능곡에도 같이 가구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당신은 한참동안 앉아 있는다. 물이 다 떨어졌는지 가습기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낸다. 가습기의 코드를 뽑고 창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낡은 흔들의자 위에 앉았다. 조금씩 몸을 흔든다. 그림자가 베란다 턱을 넘나든다. 의자는 모서리 부분이 하얗게 닳아 있다. 손을 놀리며 프린트 된 도안을 들여다본다. 도안 속의 목어는 입안 가득 여의주를 품고 있다. 동전 크기의 여의주를 표현하려면 총 다섯 가지 색깔의 실이 필요하다. 311번, 312번, 369, 616번, 실을 꺼내어 탁자에 올려놓은 후 감아 놓지 않았던 3078번 실을 찾아 두 가닥으로 나눈다. 번호를 적어 보빈에 감기 시작한다. 목어 한 마리를 완성하기 위해 소요되는 실의 색깔은 총 마흔일곱 가지이다. 처음 십자수를 배웠을 때 당신은 규격화된 자수용 실의 색깔이 오백 개가 넘는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때가지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색은 십여 가지에 불과했다. 자수를 배워 가면서 당신은 오백 개의 색깔로 세상을 전부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에 종종 한계를 느꼈다. 당신의 눈길은 햇살이 지나가고 있는 실상자 위로 향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큰 실상자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짜 준 목합이었다. 상자 속에는 이백 개가 넘는 실들이 보빈에 감겨 칸칸이 들어차 있다.
바늘에 369번 실을 꿴 후 날카로운 끝을 목어의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목어의 입안에 조그마한 우주 하나가 만들어지고 있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딱정벌레의 경단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목어의 아래턱과 입천장 사이에 두 번 세로땀을 넣은 후 616번 실로 바꾼다. 빵빵. 누군가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103동 출입구 앞에 트럭 한 대가 승용차 뒤를 막고 있다. 아이를 안은 젊은 여자가 늙은 경비를 타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네 쪽으로 시선을 던지던 당신의 눈길이 멈칫한다. 그네 위에 낮에 보았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당신이 있는 104동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남자는 석상처럼 굳어 있다. 청바지를 입은 중년의 사내 하나가 허겁지겁 105동을 빠져 나온다. 경비가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 청바지 사내는 급히 트럭을 몰아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그네에 앉은 남자가 일어선다. 사내의 어깨는 축 처져 있다. 단지를 빠져나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105동 콘크리트 벽 사이로 해가 모습을 감춘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인도산 얇은 모슬린 위다. 여의주 모양을 만들어 가던 손이 멈춘다. 허리를 굽혀 무릎에 올려진 도안을 들여다본다. 369번 실이 두 땀이나 다른 자리를 침범했다. 칼을 들어 조심스럽게 뜯어낸다. 자수용 천인 아이다나 이븐위브였다면 이렇게 실수가 잦지 않았을 것이다. 모슬린 은 얇고 구겨지지 않는다. 단 한 번의 잘못된 바늘구멍도 흉터를 남길 정도로 섬세하다. 당신은 목어 도안을 사기위해 수예점에 들렀던 날을 생각한다. 2월, 거리에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 년간 일했던 출판사에 사표를 내고 당신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 거리로 나섰다. 용산에서 남영동을 거쳐 서울역까지 한참을 걸었다. 눈도 비도 되지 못한 진눈깨비들이 거푸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며 녹고 있었다. 서울역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참에 앉아 당신은 오래도록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몇 번이나 매표소 앞을 서성였지만 끝내 표를 사지 못했다. 맞은편 식당에서 우동 한 그릇을 시켰지만 국물만 몇 모금 뜨고 더는 먹지 못했다. 서울역을 빠져나와 남대문 방향으로 걸었다. 남대문을 지나 명동까지 왔을 때 대형 건물 이층에 있는 커다란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다. 힘겹게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날 당신은 고교 졸업 후 처음으로 머리를 귀밑까지 잘랐다.
미용실을 나선 후 급히 택시를 잡았다. 택시는 이십 분을 달려 집 근처 전철역 사거리에 당신을 내려놓았다. 당신은 집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진눈깨비가 그친 사방은 온통 잿빛이었다. 어깨 죽지 한 쪽이 축축했다. 물이 스몄는지 왼쪽 발바닥이 미끄러웠다. 박정숙 산부인과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여자 하나가 비둘기처럼 뒤뚱거리며 현관문을 나서다 힐끗 당신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입술을 꾹 깨물고 현관문을 밀쳤다. 예약날짜를 이틀이나 초과했군요? 꽃무늬가 박힌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말했다. 안될까요? 당신은 습관적으로 머리를 넘겼다. 목덜미가 허전했다. 잠깐만요. 간호사가 어디론가 인터폰을 넣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오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따라 오세요. 다른 간호사가 당신을 수술실로 안내했다. 많이 젖었군요. 누군가 당신의 어깨를 수건으로 훔쳤다. 당신은 다리를 벌린 채 침대에 누웠다. 졸음이 쏟아졌다. 어서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눕고 싶었다. 미용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미장원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위를 놀렸다. 가위는 날카롭게 귀밑을 파고들었다. 어깨를 덮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자, 숨을 깊게 들이마셔요. 간호사의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사각사각. 귓가에 가위소리가 느껴졌다. 당신은 세 시간 후 회복실에서 눈을 떴다. 아랫배에 찢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속이 미식거리고 목이 말랐다. 물을 찾아 슬리퍼를 끈 채 복도로 나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복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괜찮겠어요? 간호사가 달려왔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집을 향해 걸었다. 단지 앞 상가에 이르렀을 때 막 문을 닫으려는 수예점이 보였다. 미친 듯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앞 동에 사시죠? 지나치시는 걸 몇 번 보았죠.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주인 여자가 아는 채를 했다. 길고 뾰족한 바늘처럼 살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여자였다. 자수 처음 아니시죠? 당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오시는 분들은 곧바로 문을 열지 않으시거든요. 대부분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게 문을 열곤 하시는데. 당신은 진열된 액자들을 들여다보았다. 선뜻 고르지 못하자 주인 여자가 도안책을 앞으로 내밀었다. 맘에 드시는 게 없으면 여기서 한번 골라 봐요. 당신은 건성으로 책장을 넘겼다. 다시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디 편찮으세요? 여자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와야겠어요. 유리문을 열던 당신의 눈에 구석에 걸린 액자가 보였다. 여자가 재빨리 액자를 끌러 내렸다. 아, 이건 목어예요. 흰 아이다 위에 붉은 색 목어 한 마리가 입을 딱 벌린 채 당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목어 도안과 마흔일곱 가지 색깔의 실을 사 들고 수예점을 나섰다.
조용히 건넌방 문을 열어 본다. 아버지는 모처럼 편히 잠에 빠져 있다. 어제 저녁까지 계속되던 기침 소리도 밤사이 잠잠했다. 당신은 물주전자를 레인지에 올린 후 청소를 시작한다. 집안 구석구석 빗질을 하고 닦기를 반복한다. 물건들이 제 자리로 정리되고 방과 거실 바닥에 윤기가 흐른다. 물이 끓는지 주전자에서 더운 수증기가 솟는다. 녹차 티백을 찾아 주전자 안에 집어넣고 불을 줄인다. 집안 가득 미세한 녹차 향이 떠다닌다.
청소를 끝낸 후 소파 맞은편에 있는 책장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거꾸로 꽂힌 책을 찾아 바로 꽂고 책들을 높이대로 정리한다. 책 정리가 끝난 후 책장 하단에 붙은 사물함을 열어 본다. 못과 망치, 분재용 모종삽 따위가 제멋대로 뒤섞여 있다. 사물함 구석에서 당신은 무엇인가를 찾아낸다. 아직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과학 독후감 모집에서 상품으로 주고 남은 물건을 얻어 왔던 것이다. 그와 만날 때마다 당신은 핸드백에 카메라를 넣어 다니며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만을 엿보았다. 그는 당신과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교묘하게 피해 갔다. 당신이 조를 때마다 그는 중얼거렸다. 나의 흔적이 세상 어딘가에 남겨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야. 그의 대답에 당신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나는 뭐죠?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러나 볼우물만 만들었을 뿐이다. 결국 그와 한 장의 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당신은 입으로 먼지를 후후 불어 낸다. 녹슨 건전지를 빼낸 후 베란다로 향한다. 베란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몰려 들어온다. 엷은 안개가 아파트 광장을 떠다니고 있다.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카메라 렌즈에 눈을 들이대고 반대편을 향한다. 파인더 중앙에 교회 십자가가 들어온다. 교회 십자가와 파인더 중앙의 십자 표시선과 일치시켜 본다. 십자가가 사라진다. 천천히 아파트 단지 광장으로 카메라의 초점을 옮겨온다. 소방도로임을 알리는 주황색 화살표를 따라 104동 경비실 앞까지 이동시킨다. 화살표가 끝나는 곳에 이르러 당신의 동작이 멈칫한다. 뾰쪽한 화살표 위에 남자가 이쪽을 향한 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이른 시간에 남자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찰칵, 당신은 셔터를 가볍게 눌러 본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흰 색 엷은 모슬린 위다. 꼬리에서 입까지 손의 두 뼘쯤 되는 목어가 누워 있다. 눈 부위에 이르러 손길이 바빠진다. 눈알이 빠진 목어는 잘 조각된 나무토막 같다. 677번 올드 골드로 테두리를 채운 후 천을 바싹 당겨 하얀색 블랑으로 첫 땀을 뜬다. 당신의 손끝은 오랜 작업 끝에 마지막 점안을 하는 장인의 손길처럼 조심스럽다. 당신은 개심사 안양루에 걸려 있던 목어를 기억해 낸다. 지난해 여름 그가 정말로 대학에 사표를 제출했을 때만 해도 당신은 그에게서 어떤 길떠남의 전조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다는 건 정말 지긋지긋해. 당신을 만날 때마다 그는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인도에 다녀온 이후 증세는 날로 심해지는 듯 보였다. 그런 충동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예요. 당신은 그를 위로했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은 누구든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뚜렷한 이유가 있을 필요는 없다. 당신은 그도 그런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의 끝 무렵에 그가 정말로 사라졌을 때에도 당신은 일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가 살던 아파트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처분된 뒤였다. 그의 형제와 부모들조차 그의 부재를 모르고 있었다. 가을 내내 당신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다녔다. 먼저 연락을 취해 온 것은 그였다. 당신은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탄 끝에 그가 머물고 있는 개심사에 도착했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작은 절이었다. 네가 자꾸 마음에 밟혀 가던 길도 돌아서곤 했다. 다 버릴 수 있겠는데 마음 하나 버리지 못하겠구나. 그가 걸치고 있던 붉은 장삼 너머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의 손을 꼭 쥔 채 마당을 걸어 내려왔다. 목어는 안양루 중앙에 매달려 저만치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날 처음으로 목어를 보았다. 춥겠어요. 텅 빈 목어의 뱃속을 바라보며 당신은 가만히 안양루 기둥에 귀를 대 보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눈을 감아 봐. 그러면 목어의 울음소리가 들릴 거야.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은 눈을 감은 채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려가요 우리. 바람이 당신의 머릿결을 어지럽혔다. 웅웅 목어가 울기 시작했다.
초인종 소리가 짧게 한번 이어진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집안의 정적이 무너진다. 당신은 화들짝 놀라 일어선다. 액정 화면엔 아무런 영상도 잡히지 않는다. 몇 달 동안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흔한 외판원조차 오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걸까. 당신이 등을 돌리는 찰나 다시 초인종 소리가 이어진다. 이번엔 두 번이다. 쿨럭쿨럭 동시에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터진다. 액정 위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주 잠깐, 당신은 기시감에 휩싸인다. 어디서 보았더라. 남자의 손이 화면위로 클로즈업되는 동시에 당신이 소리친다. 누구세요? 남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누구시냐닛! 당신은 안전고리를 풀지 않은 채 문을 연다. 비쭉 열린 문틈으로 황급히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몇 달 전부터 단지 주변을 서성이던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키가 작고 왜소한 모습이다. 당신은 소리내어 문을 닫는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얇은 모슬린 위다. 목어의 눈에 마지막 바늘땀을 넣은 후 실을 끊어 낸다. 비로소 천 위에 완전한 모습의 목어가 떠오른다. 천의 양쪽을 팽팽히 당겨 본다. 어디선가 목어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첫서리가 내린 날 그는 벗어 두었던 승복을 걸치고 다시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개심사를 내려온 지 불과 보름 만이었다. 방안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쓰던 물건은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잔뜩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걷고 있다. 남자의 기울어진 그림자가 개나리 덤불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능곡엘 가는게냐?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얼굴이다. 당신은 휠체어를 민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103동 콘크리트 벽 사이로 해가 모습을 보인다. 햇빛은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른 채 105동 경비실 쪽에서부터 점점 이쪽으로 각도를 넓혀 오고 있다. 화단에 심어진 향나무와 사철나무, 느티나무, 측백나무를 따라 휠체어를 밀며 걷는다. 목련나무 아래 이르러 휠체어를 멈춘다. 아버지, 보세요. 목련이에요. 아버지가 중얼거린다. 능곡엘, 능곡엘 가야 하는데. 눈이 그치면 말이야. 바람이 가볍게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다. 휠체어 위로 꽃잎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당신은 버릇처럼 머리를 쓸어 올린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휠체어를 밀며 앞으로 걷는다. 103동 앞을 지나 교회가 있는 광장 맞은편 언덕 아래까지 가 본다. 교회 옆 유치원 건물 안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엇이무엇이 똑같을까. 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아이들의 합창이 터진다. 당신은 천천히 휠체어의 방향을 105동쪽으로 바꾼다. 살이 잔뜩 오른 비둘기 몇 마리가 105동 분리 수거함 주변에 흩어져서 부지런히 부리를 놀리고 있다. 고개를 들어 104동 702호 베란다를 바라본다. 유리 안으로 희미하게 의자의 윤곽선이 드러난다.
놀이터 안으로 휠체어를 밀고 들어간다. 그네 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당신과 아버지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 오셨군요? 남자를 향해 아는 채를 한다. 남자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다. 그네 줄이 앞뒤로 가볍게 흔들린다. 당신은 휠체어의 방향을 남자를 향해 바꾼다.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당신과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본다. 당신은 남자가 앉아 있는 옆 그네에 가 앉는다. 모래 위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란히 생겨난다. 그림자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아버지가 앉아 있다. 아버지는 초점 없는 시선을 단지 한 구석으로 향하고 해바라기 중이다. 누굴 찾고 계신가봐요? 당신이 남자를 향해 묻는다. 깊게 패인 남자의 눈자위가 몇 번 씀벅인다. 아, 아, 아, 아버. 말을 잇기 위해 애를 쓴다.
당신은 휠체어 손잡이에 매달고 왔던 종이 가방을 끌러 온다. 남자의 시선이 당신의 손을 향한다. 당신은 남자에게 가방을 내민다. 남자의 손에 얇은 모슬린 한 장이 쥐어진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펼쳐 본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목어 한 마리가 잡힌다. 가늘게 바람이 스치며 지나간다. 목어가 남자의 손아귀에서 가볍게 펄럭인다. 목어예요. 제게 더는 필요 없어진 물건이죠. 왜, 왜, 이 걸? 남자의 동공이 초첨을 잡기 위해 애쓰며 당신을 향한다. 오래 전부터 이 주변을 떠돌며 서성이는 걸 봤어요. 저는 저기 앉아 목어를 수놓고 있었죠. 봄이 올 때까지 내내 겨울을 견딘 걸요. 당신은 손을 들어 앉아있곤 하던 베란다를 가리킨다. 유리에 반사된 햇빛이 색실이 풀리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남자는 손에 쥐어진 목어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다.
사진 한 장 찍어 주시겠어요?
아버지랑 사진을 찍은 지 꽤 됐거든요. 당신은 목에 걸고 있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벗어 남자의 손에 건넨다. 장소는 아, 저기가 좋겠어요. 당신은 휠체어를 밀며 103동 앞에 있는 목련나무 아래로 향한다.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엉거주춤 뒤를 따른다. 목련나무 아래 이르러 자리를 잡고 휠체어 뒤에 선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끓고 앉아 오래도록 렌즈를 들여다본다. 렌즈 속에 활짝 웃고 있는 당신과 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잡힌다. 남자의 시선이 아버지의 코와 이마를, 목덜미를 세심하게 훑는다. 당신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을 훑고 내려와 남자의 때 낀 운동화 위에 머문다. 찰칵. 남자가 가볍게 셔터를 누른다. 잠시 후 한 장의 사진이 카메라 위로 인화되어 올라온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다.
당신은 수를 놓는다. 봄 풍경이다. 당신은 어제 남자와 헤어진 후 수예점에 들러 그 도안을 골랐다. 수목이 우거진 산등성이에 한 채의 초가집이 보인다. 봄 풍경에는 총 일흔 세 가지의 색실이 사용된다. 당신은 실을 가지런히 보조 탁자에 놓은 후 풀어 바늘에 꿴다. 천 중앙의 십자 표시에 조심스럽게 바늘을 찌른다. 첫 땀은 647번 비버 그레이다. 흰 아이다 한 가운데 봄빛이 번진다. 비버 그레이는 안개를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색깔이다. 수를 놓아가며 당신은 그가 안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당신은 집착이라는 실을 풀어 안개 위에 어긋난 수를 놓아 왔다. 그의 공간에 하나의 존재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당신은 찌른 곳은 허방이었으며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바람 속이었다.
당신은 이따금 몸을 흔든다. 낡은 등나무 흔들의자 위다. 강보에 싸인 아이처럼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만든 지 오래 된 흔들의자는 모서리가 닳아 반질반질 윤이 난다. 몸의 중심이 뒤로 쏠릴 때마다 찌걱찌걱 마찰음이 들린다. 하지만 당신은 이 낡은 등나무 흔들의자를 좋아한다.
( 끝 )
◆소설 당선소감
완숙지 못한 신을 신고 섣불리 길 나서
약 서른 해 전 한 남자는, 경부선과 경전선이 갈라지는 삼랑진역에서 사랑했던 그의 여자에게 마지막 이별 편지를 썼다. 70년대 초라고 해 두자. 비가 내리던 눅눅한 여인숙에서 남자는 밖을 바라보며 종일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리고 결심하듯 편지를 써 내려갔다. 다섯 장쯤에서 마침표를 찍었고 홀연히 지구를 떠났다. 여자는 남자의 편지를 부적처럼 간직하며 아들을 키웠다. 아들이 철이 든 어느 날 장농을 열고 남자가 보냈던 이별 편지와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네 아버지니라.
나이 열아홉, 입영열차에 오르며 나는 세계가 규정된 것이라고 믿었다. 이십 대, 혈기 왕성하던 시절을 보내며 나는 마음 하나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나는 그만 세계가 재미없어져 버렸다. 내가 일으켜 세우고자 했던 불빛 따스한 세계는 몽환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서른 세월의 모든 욕망을 접거나 잃었다. 일찍이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앞으로 내가 진정한 한 사람의 소설가가 될 지는 자신할 수 없다. 무엇이 되겠다고 규정하는 순간 세계는 욕망임을 안다. 내 의식이 내 이름자껍질에 세들어 살아 있는 날까지 다만 나는 쓸 것이다. 달리 다른 길을 알지 못하므로.
완숙치 못한 신발을 신고 섣불리 길을 나섬에 스승들께 꾸중들을 일이 태산같다. 존재 자체가 가르침이셨던 예대의 교수님들, 늘 믿음으로 지켜보아 주신 L선생님과 은비령 식구들, 졸고에 물꼬를 터 주신 심사의원 선생님, 가까이서 힘이 돼 준 벗들, 하길과 글나래, 어머니, 오늘의 시작은 온전히 그분들의 덕이다.
본심에 올라온 8편의 작품 중 다음의 4편은 상당한 성취를 빚어내고 있다. 사생아 출신의 화자가 아이 딸린 홀아비이자 직장 동료인 한 술꾼과 나누는 파란곡절기인〈자갈 위에〉는 큼지막한 사건들의 중첩에서 드러나는 대로 욕심이 사나운 작품이며, 꼭 그만큼 사실감도 떨어지는 흠을 갖고 있다.〈검은 문〉은 사채업자인 형의 이악스러운 처세술에서 놓여나려는 그 동생과 한 채무자의 발버둥을 그리고 있는데, 이복형제 사이의 갈등을 조명한 유년기의 일화에는 피상성이 드리워져 있고, 채무자의 도주를 방조하는 결말에는 도식성이 두드러져서 실경과는 거리가 멀다.〈하니 드롭스 게릴라협회〉는 혓바닥 요리의 재료를 공급하는 회사의 내막을 분석적인 문체로 도해한 실험작이다. 본말전도의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을 구사한 작의에도 불구하고 미각에의 집착이 가지는 어떤 알레고리적 기능이 드러나지 않아서 소설이 반드시 누려야 하는 그 위상의 제고에 등한하다.
〈수(繡)〉는 머리 자른 날 낙태수술까지 치른 한 여성의 일상과 내면 풍경을 여러 소도구로서의 디테일을 최대한으로 동원하여 직조한 작품이다. 비록 사회적으로도, 또한 육체적으로도 너무 옹색해서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낼 망정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자기정체성의 확인을 거듭하므로써 명실상부한 근대인으로서의 지위와 위엄을 쟁취한 페넬로페는 인류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에는 그 등가물로서 오늘의 여성 일반이 곱다시 감당해야 하는 여성성의 양각을 단정한 문체로 점검하고 있다. 이 현란한 디지털 시대에 이런 작풍은 소설의 소임을 올곧게 떨치는 자기비판의 늠름한 선언으로서 손색이 없다. 당선을 축하하며 쉼없는 정진으로 속히 일가를 이루기 바란다.
서점 책꽂이 앞에 서서 읽기 시작했을 때는 끝까지 읽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던 작품이었는데 오늘 꼼꼼하게 읽어보니 촘촘하게 잘 쓴 글이군요. 그런데 이 남자 작가는 수를 잘 놓는 사람인가 봐요. 나도 못놓는 수를... /수를 비롯해서 많은 경험을 해봐야겠구나./글쓰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은 글, 독자가 읽기에는..
첫댓글 참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아름다와서 아끼며 읽었습니다.흥미위주의 소설은 아니지만,문체와 구성이 ,부럽군요.우리도 노력하면 충분히 될 수 있겠지요.^^*
서점 책꽂이 앞에 서서 읽기 시작했을 때는 끝까지 읽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지 않던 작품이었는데 오늘 꼼꼼하게 읽어보니 촘촘하게 잘 쓴 글이군요. 그런데 이 남자 작가는 수를 잘 놓는 사람인가 봐요. 나도 못놓는 수를... /수를 비롯해서 많은 경험을 해봐야겠구나./글쓰는 사람이 읽어보면 좋은 글, 독자가 읽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