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집 <하류>
멀리 보고, 오래 참고, 끝까지 가는 거다
서정춘 시인의 신작시집 <하류>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전래 서정시 전통을 고도로 절제된 형식으로 구축하며 높은 문단적 평가를 받고 있는 원로 시인이다. 시집에는 그 흔한 해설이나 표지 추천사도 없이 짤막한 시 31편 만 단아하게 실려 있다.
옷 벗고
갈아입고
도로 벗고
하르르
먼
여울 물소리
시 <하류> 전문
시집 제목을 <하류>라 붙인 것이 의미심장하다. 높은 골짜기에서 한 방울로 시작하여 낮은 곳을 향해 굽이굽이 내를 이루고 강으로 흘러 이제 드넓은 바다로 나아가기 직전의 하류에 당도한 한 삶의 이력으로 읽힌다. 〈시인의 말〉에 “하류가 좋다/멀리 보고 /오래 참고/끝까지 가는 거다”라는 말로써 연륜 깊은 시인의 시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비 갠 뒤
대밭 속
여기저기
개똥 자리에
죽순이 올라 있다
개똥 먹은 죽순
굳세어라
竹竹
시 <대밭일기> 전문
서정춘 시인은 <竹篇>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죽편1―여행’은 가수 장사익이 작곡하여 노래로 부를 정도로 예술인들의 애송시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竹篇>은 우리들 삶의 굴곡이요 여정이다.
여기서부터,-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시 <竹篇 ․ 1-여행> 전문
서정춘 시인은 그의 대표시집 <竹篇> 서두에서 “아 나의 농사는 참혹하구나/흑!/흑!”이라고 썼다. 등단 28년 만에 다 버리고 35편 만으로 첫 시집을 낸 당시의 허탈한 심정을 실토한 것이다. 그는 이 시집을 내기까지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고 한다. “텅 빈 헛간에서 쭈굴치고 앉아 무쇠칼을 갈았다. 다 갈고 나면 은장도가 되고 수박 향을 풍기며 은어 새끼가 된 것을 회 쳐 먹곤 했다. 여기서 시인으로서 나의 장인정신이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시집 <봄, 파르티잔>에서는 “不是一番 寒徹骨 한 번 추위가 뼛속까지 스미지않고는/爭得梅花 撲鼻香 어찌 진한 매화의 향기를 얻으리. 당나라 고승 황벽의 시다. 이 시를 칸딘스키가 추상화론을 쓰면서 인용한 것이다. 뼈가 시린 고통으로 구상을 거치지않고 추상화를 그린 것에 대한 충고다. 이 또한 내 시 정신의 화두다”라고 강조한다.
보릿고개 시절이었네
어머니가 논밭에서 독새풀을 베어다
된장에 무쳐줬네
두어 번 씹다가
풀내음이 역겨워 뱉어버렸네
“아가, 독초도 백 번 씹으면 약이 되느니”
아버지의 말씀 한 마디가
이 뭣고! 내 필생의 귀걸이로 달랑거렸네
시 <독새풀> 전문
서정춘 시인은 올해 팔순을 맞이했다. 이번 시집은 그래서 나름 팔순 기념시집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시집의 문을 닫는 마지막 시 <기념일>은 “한 여자 모셔와 서울 청계천 판자촌에 세 들어 살면서 나는 모과할 게 너는 능금해라 언약하며 니뇨 나뇨 살아온 지 오늘로 50년 오매 징한 사랑아!”라며, 결혼 5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의 아내에게 헌정되는 시편이다. ‘하류’에 도달한 인생에서 만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시편이다. 닫는 시가 그러하다면 시집을 여는 시는 어떨까.
매화걸음 했었지
살얼음걸음으로
가는 동안 녹아서
피는 꽃 보았지
드문드문 피어서
두근두근 보았지
아껴서 보았지
요로콤만 보았지
시 <매화걸음> 전문
서시격으로 수록된 시집의 첫 시 <매화걸음>은 그 긴 여정을 시작하는 설렘이 듬뿍 담긴 발걸음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보기 드문 노시인의 무구하고 여지없는 사랑시다.
가을걷이 하다 말고 앉아 쉬는데
늦잠자리 한 마리가 인정人情처럼
어깨 위로 날아와 앉았습니다
꼼짝 말고 더 앉아 쉬어보잔 듯
시 <휴 休> 전문
서정춘 시인은 작은 거인이다. 몸집도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그의 시는 짧지만 철검처럼 날카롭기 그지없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다. 몇줄 안되는 짧은 행간에 우주가 숨어 있고, 인간 희로애락의 은유와 사상이 심연처럼 깊다.
그녀가 뒤꽁무니를 쫓아다닌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던 그 꽃 !
시 <첫 꽃> 전문
문인수 시인은 그의 시 <서정춘>에서 “그가 참 웅크리고 운다./말똥냄새 파고드는 것처럼 웅크리고/울다가, 마부 아버지 염해드리는 것처럼/꽁꽁 안아들이는 것처럼/웅크리고 울다가, 잤다. 아침 일곱 시에 깨,/덜 깬 술에 또 술 들어가니까 참말로/해장이 되는구나. 길고 긴,/질긴 끈 같은 간밤 울음이 도로/죄 풀려나온다. 아코디언, 아코디언 같다./웅크린 그의 등짝이 지금/가난만큼 최소한으로 준다.” 라고 썼다.
그만, 세상 속으로 굴러버리고 싶다
시 <반가바위> 전문
한 줄로 그린 시 <반가바위>. 극약같이 독하고 깊으면서도 참으로 은유적, 상징적이지 아니한가.
2014년 <백자예술상> 수상 당시 심사위원장인 허영자 시인(전 한국시인협회장)은 심사평에서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는 천생의 예술가, 천품의 시인이 더러 있다. 서정춘 시인은 흔치않은 천성의 시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이 분의 시에서는 실로 예리한 감각, 민감한 감성, 깊은 통찰력, 전광석화 같은 직관력, 따뜻하고 순수한 심안, 그리고 착한 삶을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허영자 시인은 또 “운율이 시의 한 특성이라고 함은 상식이다. 서정춘 시인의 시에는 그 만의 가락이 있다. 그 가락이 흥이 되고 내용에 걸맞는 옷이 되어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순수서정에의 지향이 서 시인 시의 주된 정신인 점도 요즈음 시류에서는 매우 드물고 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찬양도 비판도 저항도 은유와 상징이라는 정서의 순화를 거치고 무섭게 가려뽑은 시어로 응축시키는 시인의 전인적 투척이 놀랍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워서
많이 울었을 것이다
사랑해서
죽도록 울었을 것이다
시 <매미의 사랑> 전문
서정춘 시인은 1941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편』, 『봄, 파르티잔』, 『귀』, 『물방울은 즐겁다』, 『이슬에 사무치다』와, 시선집 『캘린더 호수』, 등단 50주년 기념집 『서정춘이라는 시인』이 있다. 제3회 박용래문학상, 제1회 순천문학상, 제5회 유심작품상, 제6회 최계락문학상, 제5회 백자예술상을 수상했다.(정리/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