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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 조존성(趙存性)
1554년(명종 9) - 1628년(인조 6) / 壽75歲
조선 후기에, 호조참판, 부총관,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수초(守初), 호는 용호(龍湖) 또는 정곡(鼎谷). 증조는 성종(成宗)의 부마인 조무강(趙無彊)이고, 할아버지는 판서에 추증된 조연손(趙連孫)이며, 아버지는 좌찬성에 추증된 조남(趙擥)이다. 어머니는 이몽규(李夢奎)의 딸이다. 성혼(成渾) ·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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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선생집 제16권 / 행장(行狀)
자헌대부 지돈녕부사 겸 지의금부사 조공 행장(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知義禁府事趙公行狀)
공의 휘는 존성(存性)이요, 자는 수초(守初)이다.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고려 때부터 이미 대족(大族)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그 비조(鼻祖)인 잠(岑)은 관직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그 뒤 대대로 이름난 후손들이 배출되었다.
공의 부친 남(擥)은 족부(族父)인 연손(連孫)의 후사(後嗣)가 되었는데, 연손의 부친인 한천위(漢川尉) 무강(無疆)은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딸 숙혜옹주(肅惠翁主)에게 장가들었다. 그 뒤 공이 귀하게 되자 조부 연손에게 이조 참판이 증직되고 부친 남에게는 이조 판서가 증직되었다.
모친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가정(嘉靖) 갑인년 모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판연히 달랐으므로 판서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가 분명히 우리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다.”하였다. 공은 첫돌이 되기도 전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겨우 철이 들면서부터 자모(子母)와 고과(孤寡)에 대한 말을 들으면 문득 서럽게 울곤 하였다.
12세(1565)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15세 될 무렵에 벌써 재학(才學)이 날로 발전하였으며, 사귀는 사람들 모두가 명인(名人)이었다. 일찍이 우계『牛溪 : 성혼(成渾) 성 선생(成先生)』에게서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이 공을 중히 여겼고, 또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를 종유(從游)하였는데 수암이 역시 극구 칭찬하였다.
계유년(1573)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그런데 그 뒤 글을 열심히 읽은 탓으로 병에 걸려 거의 10년 동안을 신음하다가 경인년(1590/37세)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곧바로 천거를 받고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다. 이듬해에 대교로 승진하였다.
그때 마침 권신(權臣)이 예전의 유감을 풀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류(士類)에게까지 화를 파급시켰는데, 당파를 조성한다는 죄목으로 거의 모두 배척을 받고 축출되는 상황에서 공 역시 이에 걸려 파직되고 말았다.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공은 무슨 일로 관서(關西) 지방에 있었는데,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사잇길을 통해 급히 달려와 보니, 그때는 벌써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떠난 뒤였다. 게다가 태부인(太夫人)이 계신 곳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산골짜기를 두루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소재지를 파악하게 되었다.
당시 경도(京都)가 이미 함락되고 행재(行在)로 가는 길마저 끊어졌으므로 마침내 발길을 돌려 호서(湖西) 지방으로 들어가 태부인을 외숙에게 부탁드린 뒤, 계사년 2월에 바닷길로 행재에 도달하여 상소하여 자신의 상황을 설명드렸다. 이에 선묘(宣廟)가 소대(召對)하여 위로하며 마침내 공의 옛날 관직을 복구시켜 주었다.
그 뒤 봉교(奉敎)로 옮겨졌다가 뒤이어 명을 받들고 호남에 가서 《실록(實錄)》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돌아오기도 전에 승진하여 성균관 전적과 예조 좌랑이 되었고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복명(復命)한 뒤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대적(大賊)이 호남과 영남 지방에 둔치고 있어 길이 통하질 않는데, 남쪽 지방에서 달마다 공물(貢物)을 바치려고 길을 우회하거나 바닷길로 나오는 등 수륙(水陸)으로 수송하는 폐단이 군량 운송보다도 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일체 혁파(革罷)하여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또 군사에 관한 일을 몇 개 조목으로 진달하니, 상이 모두 가납(嘉納)하며 채용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신이 해서(海西)에 도착하여 듣건대, 후궁(後宮)을 수행하는 사람이 백성을 구타하여 죽게까지 했는데도 관리가 감히 이 일을 따지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단 말입니까.”하고, 이와 함께 궁위(宮闈)가 엄숙하지 못한 폐단을 개진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강직하였으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모두 변하였다. 그 뒤 곧바로 체직되어 전적(田籍)이 되었다.
가을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었는데, 이때 군대를 그대로 주둔시켜 줄 것과 화약을 내줄 것을 아울러 주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경사(京師)에 도착한 뒤에 사신이 병에 걸리는 바람에 공 혼자 병부(兵部)에 가서 명쾌하게 설명을 하였는데 그 사기(辭氣)가 강개(慷慨)하기만 하였다.
그러자 상서(尙書) 석성(石星)이 자세를 바로하면서 공의 나이와 관직의 이력을 물어보았는데, 공이 사실대로 모두 대답하니, 석성이 탄식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인물이 있으니, 어찌 적을 격파하지 못할 근심이 있겠는가.”하고, 마침내 사유를 갖추어 복주(覆奏)한 결과 요구 사항 모두가 준허(准許)되었다. 갑오년 봄에 조칙(詔勅)을 받들고 돌아오자 상이 직강(直講)으로 승진시켜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동궁(東宮)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관장하면서 남쪽에 머물러 있을 때 공이 무군사(撫軍司)의 낭관으로 재직하였다. 윤상 두수(尹相斗壽)가 체찰사(體察使)가 되자 공을 종사관으로 청한 다음 기무(機務)를 공에게 위임하였다. 호조 정랑으로 옮겨진 다음 아산창(牙山倉)의 세곡(稅穀)을 감독하였다.
을미년에 천거를 받고 삼도 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이 되었다. 병화(兵火)를 막 겪은 터라 제때에 조운(漕運)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군국(軍國)의 수요가 급하기만 하였는데, 공이 부임하자마자 요령 있게 조도(調度)한 결과 몇 개월이 지나는 사이에 3년 동안 응체되었던 곡식을 모두 다 수송하여 국가의 재정이 조금 여유 있게 되었으므로 상이 갸륵하게 여겼다.
그리고 임기가 만료되었을 때에도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정유년(1597) 가을에 무슨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 그때 마침 중국 조정에서 산동(山東)의 군량미를 대거 발송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에 집결시켰는데, 서관(西關)이 병란을 금방 치른 터라서 힘이 피폐되어 운송을 할 수 없자 군흥(軍興)이 장차 결핍될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상이 수의(繡衣)를 보내 군량 운송을 감독케 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적임자로 공을 추천하자 마침내 공을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에 서용한 뒤 어사(御史)로 임명되었다. 이에 공이 역말을 타고 급히 달려가 있는 힘껏 규찰하고 감독하면서 전후에 걸쳐 40여만 곡(斛)의 군량을 운송하였다.
무술년(1598)에 다른 일로 억울하게 걸려들어 하옥되었다. 상이 그 정상을 살펴 즉시 꺼내 준 뒤 봉상시 첨정을 제수하였는데, 공이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2년의 세월을 집에서 보내었다. 신축년(1601) 여름에 이르러 다시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
이때 청의(淸議)가 조금 신장되자 전조(銓曹)에서 공의 재질을 인정하고 누차 근신(近臣)의 반열과 청직(淸職)에 의망(擬望)하곤 하였는데 제수하는 명령이 끝내 내려오지 않았으므로 논하는 이들이 억울한 일이라고 일컬었다. 내자시 정(內資寺正)으로 옮겨졌다가 강화 부사(江華府史)에 임명되었는데, 1년이 지나는 사이에 경내가 크게 안정되었다.
강화부에서 천초(川椒 : 산초(山椒)가 생산되었는데, 광해가 동궁으로 있으면서 천초를 얻어 승려에게 줄 목적으로 사인(私人)에게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수서『袖書 : 본문 이외의 여백에 추서(追書)한 글』를 가지고 와서 뜻을 전하자 공이 정색하면서 응답하기를,“저군(儲君 세자)이 부처를 섬기는 것은 부당한 일이요, 인신(人臣)은 개인적으로 바치는 의리가 없다. 그런데 그대가 어떻게 수서를 가지고 올 수 있단 말인가.”하니, 그 사람이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갔다.
임인년(1602) 가을에 권귀(權貴)의 뜻을 맞춰 주지 않자, 언관(言官)을 사주하여 탄핵케 한 결과 파직되었는데, 이를 두고 공의(公議)가 떠들썩하였다. 계묘년(1603)에 사예(司藝)와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에 국가에서 대대적으로 토지를 측량할 적에 공을 어사(御史)로 삼아 호남을 안찰하게 하였다.
그런데 호남 몇 군(郡)의 경우, 땅은 척박한데 등급은 높이 책정된 곳이 있어 백성들이 중한 세금으로 고통을 받자, 공이 모두 바로잡아 고쳐 주었다.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뒤에 충주 목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상소하여 도망친 호구(戶口)의 포흠(逋欠) 곡식을 면제해 달라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을사년(1605)에 대부인(大夫人)의 상(喪)을 당했다. 정미년(1607)에 상복을 벗고 나서 서산 군수(瑞山郡守)에 임명되었으며, 기유년(1609)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공이 고을을 다스린 3년 동안 쓸데없는 비용을 감축한 결과 창고가 가득 채워지면서 잉여 곡식이 천으로 헤아려지게 되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어째서 이를 위에 보고하지 않는가?”하니 공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곡식이 남았다고 보고하여 상을 얻는 일을 나는 하지 않는다.”하였다.
장악원 정에 임명되고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광해가 처음 정사를 행할 때에는 엄체된 인사들을 상당히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경술년(1610) 여름에 공이 정언이 되었다. 그런데 광해가 장차 생모(生母)에 대해서 추존(追尊)하는 의식을 거행하려 할 때 공이 비례(非禮)임을 논하다가 뜻을 거슬려 면직되고 말았다. 공이 전후에 걸쳐 언지(言地)에 몸담았던 기간이 겨우 13일에 불과하였는데, 모두 말한 것과 관련하여 그 자리를 떠나갔다.
천거를 받고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제수되면서 통정대부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동래는 왜인(倭人)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로서 영남의 조부(租賦) 가운데 7할을 그곳에 수송하여 그들의 접대 비용으로 충당하였는데, 마음이 청렴하면서 밝다고 일컬어지는 관리가 아닌 다음에는 모두 적절하지 못하게 출납하는 폐단을 빚어내곤 하였다.
그런데 공은 그야말로 관찰사와 상의를 하여 그동안의 폐단을 일체 개혁하였으므로 원근에서 편하게 되었다고 일컬었으며, 왜인을 접대할 때에도 위엄과 신의를 분명히 하였으므로 오랑캐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신해년(1611)에 병으로 체직된 뒤 오래도록 산반(散班)에 몸담았다.
수상(首相)인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공의 재질을 인정하고는 매번 변방의 관찰사를 시키려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막히는 바람에 끝내 등용하지를 못하였다. 임자년(1612)에 광해가, 예전에 감무(監撫)할 때 공이 수고했던 것을 녹훈(錄勳)하면서 사선대부로 품계를 올리고, 동지사(冬至使)의 상사(上使)로 임명하여 경사(京師)에 다녀오게 하였다.
계축년(1613)에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공이 여러 이름 있는 공경(公卿)들과 함께 옥에 갇혔는데, 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어 용호(龍湖) 가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공이 근교(近郊)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마침내 호서(湖西)의 옛 시골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신유년(1621)에 용서받고 조정에 돌아와 호군(護軍)에 서용되었다. 임술년에 감군(監軍) 양지원(梁之垣)이 조칙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오자, 공에게 명하여 정주(定州)에 가서 영위(迎慰)하게 하였다. 호조에서 조운(漕運)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공이 예전에 해운판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공을 세웠던 것을 기억하고는, 조정에 건의하여 판관을 임시로 혁파하게 한 다음, 공을 해운사(海運使)로 삼았다.
계해년(1623) 3월에 금상(今上)이 즉위하였다. 공이 현재의 직책을 벗어 버린 뒤 입조(入朝)케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뒤이어 형조 참판에 임명했다가 호조로 전임시킨 뒤 소환하였다. 이어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역적을 국문(鞫問)할 때의 공을 인정받아 가의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겨울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제수되었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다시 동지돈녕부사의 임명을 받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였다.
갑자년(1624) 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장차 남쪽으로 피신하려 하면서 공에게 호조 참판을 제수하고 검찰사(檢察使)로 삼았다.
공이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공산(公山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적이 평정된 뒤에 도성에 돌아와 자헌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국조(國朝)에서 기로소(耆老所)를 설치하여, 나이 70이 되고 정경(正卿)의 직질(職秩)을 역임한 문관(文官)들을 그곳에 있게 하였는데, 그 예우가 대단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나이 70이 되었으므로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강원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언자(言者)들이 노성(老成)한 기구(耆舊)를 방백에 임명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그곳에 부임하여, 폐해를 제거하고 백성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한편 출척(黜陟)을 행할 때 사사로움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을 이유로 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소장을 세 번째 올리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병인년(1626)에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노적(奴賊)이 쳐들어오자 상이 장차 강도(江都)로 행행(幸行)하려 하면서 왕세자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이때 공을 분 호조 판서로 삼아 양호(兩湖)의 군량 조달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당시 공이 이미 병들어 쇠약해진 상태였으나 스스로 힘을 내어 달려가서 부족함이 없이 군량이 이어지게 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공이 세자를 배행(陪行)하여 복명(復命)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이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가인(家人)이 약을 바쳐 올릴 때면 공이 번번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 75년 동안이나 살았는데 억지로 약을 먹어가면서 조금 더 살려고 한다면 달인(達人)이 못 된다 할 것이다.”하곤 하였는데,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신지(神志)가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가 무진년(1628) 6월 모일에 이르러 그만 숨을 거두었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상이 철조(輟朝)하고 관원을 보내 예법대로 조문과 제사를 행하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보통보다 더 내렸다. 이해 모월 모일에 모지(某地)에다 안장(安葬)하였다. 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마음가짐이 충실하고 꾸미는 일을 하지 않았다.
평소 정중한 자세를 견지한 채 말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집안에는 늘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공은 효성과 우애심이 독실하였다. 자신이 일찍 부친을 여의어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대부인을 모시면서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다하였고, 상례나 제례 모두 반드시 예법에 의거하여 행하였다. 누님 한 분이 일찍 죽자 매형을 깍듯이 대우하면서 그 후부(後婦) 소생의 자식들도 조카처럼 돌보아 주었으며 노비를 나누어 주기까지 하였다.
또 종족(宗族)에 대해서도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생활이 곤란하거나 위급한 상황을 당한 친족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서 구해 주곤 하였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붕우간에 특별한 사유가 발생할 때에는 의리상 관계를 단절할 수도 있지만, 종족의 경우는 비록 선하지 못한 자라 할지라도 애달프게 여겨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자손들을 가르칠 때에는 내행(內行)을 닦아 단속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리고는 늘 경계시키기를, “사람이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면 임금을 사랑할 줄 안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은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 바쳐야 하는 이치와 같다.”하였다.
또 사람들과 교제함에 있어서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감괴(甘壞)하는 경우가 없었으며, 남의 드러나지 않은 잘못을 말하는 법이 없었고 예전의 감정을 가슴속에 품지 않았다. 그리고 벼슬길에 오른 30여 년 동안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성실한 태도로 공무를 수행하였고, 몇 번이나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있었어도 끝내 자신의 소신을 바꾼 적이 없었다.
부인 이씨(李氏)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증직되었다. 슬하에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모(某)는 일찍 죽었고, 다음 창원(昌遠)은 현감이며, 다음 계원(啓遠)은 문과 출신으로 좌랑이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선군자(先君子)께서는 신묘년에 공과 함께 사화(士禍)를 당하셨었다.
그런데 공이 작고하자 지금 총재(冢宰 이조 판서)로 있는 김공(金公)이 실로 가장(家狀)을 근거하여 태상(太常 봉상시)의 시호(諡號)를 청했었는데, 거기에 기록된 공의 이력(履歷)과 언행(言行)이야말로 상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좌랑군(佐郞君)의 요청에 따라 이를 근거로 하여 별도로 이상과 같이 찬정(撰定)하는 바이다. <끝>
[註解]
[주01] 감괴(甘壞) :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 군자는 담담한 태도로 교제를 이
루고 소인은 단 것으로 사귐을 깨뜨린다.[君子之接如水 小人之接如醴 君子淡以成 小人甘以壞]”라 하였다. <끝>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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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資憲大夫。知敦寧府事兼知義禁府事趙公行狀。
公諱存性。字守初。漢陽之趙。自高麗已稱大族。鼻祖岑。官判中樞院事。其後世有聞人。公之考曰攬。爲族父連孫後。連孫之父曰漢川尉無疆。尙成宗大王女肅惠翁主。公旣貴。贈祖連孫吏曹參判,考攬吏曹判書。妣慶州李氏。以嘉靖甲寅某月日。生公。公生而嶷然異凡兒。判書公喜曰。此兒必興吾門。未晬而孤。纔有知。語及子母孤寡。輒悲泣。十二歲。入學。甫成童。才學日就。所與交皆名人。嘗受業於牛溪成先生。先生重之。又從朴守菴枝華游。守菴亦亟稱之。中癸酉司馬。因劬書得疾沈綿者。近十稔。庚寅。擢文科。卽薦入藝文館爲檢閱。明年。陞待敎。會柄臣修舊郤。媒禍士類。目以鉤黨。斥逐殆盡。公亦坐罷。壬辰。倭寇猝至。公以事在關西。聞變由徑路馳歸。則大駕已西狩。失太夫人所在。徧求諸山谷而得之。時京都已陷。行在路絶。遂轉入湖西。託太夫人於舅氏。癸巳二月。浮海達行在。上疏自陳。宣廟召對慰諭。遂復舊官。轉奉敎。尋承命閱視實錄於湖南。未還。陞成均館典籍,禮曹佐郞。拜司諫院正言。復命于永柔行宮。入對啓曰。大賊屯據湖嶺。道路不通。而南方月進貢獻。迂路涉海。水陸轉輸之弊。甚於運餉。宜一切罷之。以紓民力。又陳軍務數條。上皆嘉納採用焉。公又言臣到海西。聞有後宮從人。敺傷民至死者。官吏不敢問。此何時也。而有是事乎。因及宮闈不嚴。言甚剴切。左右爲之變色。尋遞爲典籍。秋差賀至書狀官。兼奏請留兵及發賜硝黃。旣至京師。使臣有疾。公獨詣兵部。敷對明切。辭氣慷慨。尙書石星爲之動容問公年紀歷官。具以對。歎曰。爾國有人。何憂不破賊。遂具覆。悉准所請。甲午春。奉勑還。上命陞敍直講。東宮南駐全慶。公爲撫軍司郞。尹相斗壽爲體察使。請公爲從事。委以機務。遷戶曹正郞。監稅于牙山倉。乙未。用薦爲三道海運判官。兵荒之餘。漕運不以時至。軍國匱急。公至調度有方。居數月。悉輸三載逋滯。國用粗裕。上嘉之。秩滿。特命因任。丁酉秋。以事罷。會天朝大發山東餉米到我境。西關新中兵。力敝不能輸輓。軍興將乏。上欲遣繡衣督之。大臣有薦公可任者。遂敍授通禮院贊儀爲御史。公乘傳疾馳。殫心糾督。前後運致四十餘萬斛。戊戌。橫坐他事下獄。上察其狀。卽出之。除奉常寺僉正。不拜。自是家食者二載。辛丑夏。復拜直講。時淸議稍張。銓曹知公才諝。屢擬邇列淸選。而除命終不及。論者稱詘。遷內資寺正。拜江華府使。居一年。境內大安。府地產川椒。光海在東宮。欲得以施僧。以書抵私人。其人袖書來致意。公正色應曰。儲君不宜奉佛。人臣義無私獻。子何得袖書來。其人赧然而去。壬寅秋。失權貴意。嗾言官殫罷。公議爲之譁然。癸卯。除司藝司成。甲辰。國家大算民田。以公爲御史按湖南。湖中數郡。有地瘠而占等高者。民病其稅重。公悉釐正之。除楊州牧使。辭不赴。俄拜忠州。上疏請免逃戶逋欠。上從之。乙巳。遭大夫人憂。丁未服闋。拜瑞山郡守。己酉遞歸。公在郡三歲。縮節繁費。倉庾盈溢。羨穀以千計。或曰。何不以聞。公笑曰。報穀得賞。吾不爲也。拜掌樂院正。兼春秋館編修官。光海初政。頗甄拔淹滯。庚戌夏。公爲正言。光海將追尊所生。公論其非禮。忤旨免。公前後在言地。僅十三日。皆以言去。以薦授東萊府使。陞通政階。萊爲接倭綰轂地。嶺南租賦十輸其七。用充其餼牽。吏非以廉明稱者。出納皆失其宜。公乃謀於觀察使。悉矯革舊弊。遠近稱便。其待倭也。威信著明。夷人悅服。辛亥。以病遞。久在散班。首相李公德馨器公之才。每欲試之藩閫。尼於時。竟不能用。壬子。光海錄監撫時舊勞。進階嘉善。以賀至上使朝京師。癸丑獄起。公與諸名公卿同逮繫。出獄猶被黜。屛居龍湖之上。未幾。有廢母之議。公不欲處近郊。遂歸湖西舊莊。辛酉宥還。敍護軍。壬戌。監軍梁之垣奉勑來。命公迎慰于定州。度支憂漕運不繼。謂公曾任運判有效。建請權革判官。以公爲海運使。癸亥三月。今上卽阼。公乞解職入朝。不許。尋拜刑曹參判。轉戶曹。召還。兼同知義禁府事。鞫逆有勞。陞嘉義。冬除開城府留守。不拜。改同知敦寧府事兼副摠管。甲子春。李适反。上將南狩。授公戶曹參判爲檢察使。扈駕至公山。賊平還都。陞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國朝設耆老所。以處文官之年七十秩正卿者。禮數優異。至是公以年至與焉。拜江原道觀察使。言者以爲老成耆舊。不宜任驅馳。上不允。公遂之任。蠲弊裕民。黜陟不以私撓。以疾乞免。章三上。乃許。丙寅。拜知敦寧府事。明年。奴賊入寇。上將幸江都。王世子分朝南下。以公爲分戶曹判書。管兩湖運餉。時公已有羸疾。自力馳赴。饋餫無乏。賊退。公陪世子復命。自是疾益甚。家人進藥。公輒却之曰。人生七十五。強進瞑眩。冀須臾活。非達人也。病革。神志不亂。戊辰六月某日卒。訃聞。上輟朝。遣官弔祭如禮。賜賻有加。是歲某月日。葬于某地。公天資重厚。器度弘偉。立心忠實。不事矯飾。平居簡嚴寡言。閨門之內肅如也。性篤於孝友。自以早孤不逮養。爲終身痛。事大夫人。愛敬備至。喪祭必以禮。一姊早沒。待姊壻甚謹。撫其後婦子如甥焉。分臧獲以與之。敦睦宗族。賑乏周急如不及。嘗曰。朋友有大故。義可絶也。宗族之不善者。怜而敎之可也。敎子孫。以修飭內行爲先。常戒之曰。人知愛親。則知愛君。盡忠於君。猶盡孝於親也。與人交。至老無甘壞。不道隱惡。不念舊怨。釋褐三十餘年。歷內外官。勤於奉公。雖屢經跲疐。終不改其度也。娶李氏。贈貞夫人。有三男子。長某早夭。次昌遠。縣監。次啓遠。文科佐郞。維竊念先君子與公同被辛卯士禍。而公之沒也。今冢宰金公實据家狀。以請太常之諡。其記公履歷言行。可謂其詳矣。故維因佐郞君之請。別爲撰定如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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