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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동두천시(東豆川市) 소요산(逍遙山, 587m)을 가다.
글 쓴 이 都 庵 高 枓 永
6월28일, 장마기라고는 하나 날씨가 좋아 그런 다행이 없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다가오는 산천의 숲들은 푸르다 못해 검푸르게 보이도다! “세월(歲月)은 유수(流水) 같다." 드니... 기축년(己丑年)도 반을 넘기고 있으니... 이제, 남은 시간들 보다는 되돌아 볼 시간이 더 많아 졌도다!
선산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반(朝飯)을 드시고는 제2중부고속도를 줄곧 내달아 의정부에 다달으니 시계는 벌써 10시를 지나있고, 다시 3번국도를 타고 양주(楊州)와 동두천(東豆川)을 거쳐 소요산 출발기점에 이르니... 11시를 조금 넘어 있다.
지루하고도 머~언 길을 달려와 오늘은 준비운동도 없이 출발하신다. 47명 전원이 일렬로 걸어 오르니... 때이른 여름 더위도 아랑곳 없이 행군이 정연하다.
최대장은 귀가시간을 단축 한다며 서둘러 선두로 나서고, 중간은 정국진부대장이, 후미는 황부회장님과 필자가 맡아 오르니 진행이 순조롭다. 도로는 녹음(綠陰)으로 덮여서 짙은 숲 그늘을 드리우고, 개울가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10여 분을 걸어 일주문에 당도하니, 다포식 팔작지붕에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멋을 풍기며 “소요산자재암(逍遙山自在庵)”이라는 현판(懸板)이 걸려 있다. 글씨는 전서체(篆書體)로 근세의 명필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다.
얼마를 더 걸어 속리교(俗離橋)에 이르니... 왼쪽 벼랑에는 요석폭포(瑤石瀑布:선녀폭포)가 흐르고, 물줄기는 가늘어 바람에 휘~날리는 긴~머리 소녀의 머리카락 같으다! 그 옆으로 옛날에 있었다던 요석궁(瑤石宮)을 짓는지...? 공사중에 있고, 우측 원효대(元曉臺:좌선대) 아래는 천연동굴(天然洞窟)이 반달모습으로 있으나 접근 금지다.
속리교를 건너 속세의 번뇌와 근심 걱정들을 다 놓아 버리니... 마음은 한결 가벼웁도다! 갈림길에서 의상대(義湘臺) 방향으로 오르니, 경사가 가파르고 바닥 돌들이 험해서 진행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오늘 등산에는 낯선분들이 이 외로 많아서 한결 새로운 분위기다. 황부회장님의 고교시절 동기생들이 11명이나 함께 동참 하셔서, 옛 정은 넘쳐나고 분위기는 화기애애(和氣靄靄)하다!
모두들 서울에 거주 하시며, 몇 몇 분들은 대구에 거주하신적도 있었다 하며, 서로들 반색을 하시는데... 개중(個中)에는 필자의 고향인 달성군 유가면(瑜伽面)까지 다녀 가신 분도 있었다.
모두가 이순(耳順)을 넘기시고, 고희(古稀)를 향해 달리는 분들이라... 유~머의 솜씨도 뛰어나시다! 사람은 젊어서도 아름답지만, 늙어지면 더욱 아름다워 지는가 보다! 적어도 외적인 미(美)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말이다!
날씨는 후덥지근 하고 바람은 고요하여 산 오르기가 쉽지 않으며, 얼굴에는 구슬땀이 흐르고 등에는 짊어진 배낭 사이로 축 축이 땀이 배어 나오시니... 모두들 고행(苦行)을 자초하는 수행자(修行者)와 다를 바 없슴니다 그려!
시켜서는 못할 일이나, 스스로 하는 고행은 즐거운 것이라! 오르다 쉬고, 쉬다 오르면서... 구슬님은 도와달라면서 가져 온 오이를 나눠들 주신다. 그 옆으로 조여사님, 서부장님, 황부회장님과 그 동기생들... 꼬치까리(산구호) 서부장님은 그저 좋아서 싱~글 벙~글~ 대자연의 향기와 님들의 아름다움에 취하셨나 봅니다!
다시 20여 분을 더 오르니 최대장님, 홍총무(부회장 겸임)님, 별이님, 고장석님, 김광남님, 최영수님, 박태옥님 등이 함께 쉬면서... 이번에는 금와보살님이 준비한 오이를 골 고루 나눠 주시니 산(山) 인심이 훈 훈 합니다 그려!
얼마동안을 쉬고 있으니... 모처럼만에 참석하신 이외술 회원님이 힘겹게 오르시고, 그 뒤를 이어 이태만 부회장님과 천가희님이 연이어 오르신다. 등산(登山)은 시작한지 1시간 정도가 가장 힘들며, 어느정도 산기운(山氣運)에 적응되고 나면 한결 수월 해 집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쌓인 피로(疲勞)와 노폐물(老廢物)을 확 날려 버리면 몸은 한결 가벼워 집니다 그려!
능선에 오르니 선착한 많은 회원님들이 휴식을 취하며 이정표를 배경으로 사진촬영에 분주하시다. 우측으로는 공주봉(公主峰) 0.2Km 라 적혀 있고, 왼쪽으로는 의상봉(義湘峰 0.9Km)가는 길이다.
당시 원효스님(617~685)을 찾아 들었던 요석공주님과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상기 하면서, 일정상 가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의상봉으로 향합니다.
6월의 녹음(綠陰)은 절정(絶頂)으로 우거져서 하늘을 덮어 있고, 저만큼 우측 금동리(琴洞里) 일대의 들판에는 산업체 공장건물로 위장된 군부대가 여러곳에 보인다. 마치 물류(物流)의 창고처럼 반 듯 반듯하게... 인기척은 보이지 않는다.
의상대(587m,소요산정상)에 이르니 뾰족 뾰족바위들이 공룡의 등뼈처럼 날카롭다. 정상에는 자그마한 오석(烏石)의 표지석(標識石)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에 모두들 분주하시다. 디카맨 정국진님, 별이님, 김해진님, 황부회장님, 구윤서님 등이 앞 다투어 촬영에 열중이고, 게다가 폰 카메라 까지 동원 되시니... 필자의 필림 카메라는 이제 설자리가 없도다! 그래도 몇 몇 분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잠시 주위를 조망(眺望) 합니다.
멀리 동남쪽으로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추가령구조곡(楸哥嶺構造谷) 부근에서 서북방향으로 출발한 한북정맥이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죽엽산을 거쳐 구~불 구~불 서울 근교를 달리다가, 다시 강화도(江華島) 부근의 오두산(鰲頭山)에서 한강 하류에 그맥을 떨구고 있슴니다.
이곳 소요산(逍遙山, 587m)은 한북정맥상의 천보산 부근에서 북동쪽으로 해룡산(661m), 왕방산(736m), 국사봉(754m)을 거쳐 다시 서북쪽의 한 지류(枝流)에 있으며... 하늘봉, 개미산을 거쳐 성재에서 신천(新川)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왕방지맥(王方支脈)이라 한다.
또한 북으로는 임진강(臨津江)이 지척에서 서해 바다로 도도히 흘러 내리고,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松嶽山) 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하나... 흐린 날씨로 시계(視界)가 멀지 않아 아쉬웁도다!
천하(天下)는 넓고 넓은데... 사방(四方)은 녹색의 물결이요!
땅에는 경계(境界)가 없건마는... 38선(線)이 왠 말인고!
작열하는 유월의 태양 볕으로 녹여 버릴수는 없는것인가!
밀려오는 인파에 더는 머무를수가 없어 아쉬운 발걸음으로 나한대(羅漢臺)로 향합니다. 얼마간을 안부(安部)로 내려가다 다시 여러개의 철계단을 올라 나한대에 이르니 시계는 13시를 넘어 있고, 모두들 시장타 하셔 적당한 곳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시장끼를 달래시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어디 있을꼬~~!
식후 나한대(羅漢臺 571m)에 오르니 안내판은 바닥으로 떨어져서 땅을 더 사랑하고, 사방은 숲에 가려 조망이 쉽지 않다. 세워둔 이정표를 잘 관리해야 하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상백운대(上白雲臺)로 향합니다.
20여 분을 걸어 내렸을까...? 이외술 회원님, 조여사님, 구슬님 등 7~8명은 안부에서 선녀폭포 쪽으로 하산 하시고, 나머지 님들은 상백운대로 나아갑니다.
칼바위능선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등산(登山)은 조심스럽도다! 군데 군데 아람드리 소나무가 기이(奇異)한 바위들과 어우러지니... 모두들 탄성(歎聲)을 지르면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으시다!
조심 조심 진행 하면서 칼바위능선을 지나 10여 분을 더 나아가니 “상백운대(上白雲臺,559m)”라는 푯말이 서 있어 대(臺)위에 올라보니, 서북쪽(자재암 부근)의 전망이 뛰어나고 출발기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다.
다시 삼거리를 지나 중백운대(中白雲臺,510m), 하백운대(下白雲臺,440m)에 이르니 출발기점에서 지나 온 의상대, 나한대 등 심지어는 등산하지 못한 공주봉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소요산(逍遙山)의 진면목(眞面目)을 이 곳에서야 다 뵐수 있슴니다 그려!
하백운대(下白雲臺)에 선착(先着)하신 취산(翠山.?)님은 출발 때 “상백운대”에서 중식을 한다는 산대장의 말에... 실행한 님들이 아무도 없어 혼자서 점심을 드셨다 하시니... 송구한 마음 금할길 없슴니다!
하백운대 벼랑 끝에는 천년의 노송(老松)들이 일품이라! 별이님, 박태옥 회원님, 김진여심보살님, 김광남님, 이은종님 등 여러분들에게 소요산 전체를 배경으로 촬영을 해 드리고는 서둘러 하산길로 접어듭니다.
자재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철계단이 많아 각자 무릎에 조심할 것을 구호로 전달하며 진행합니다.
40여 분을 걸어내려 자재암(自在庵)에 이르니 예나 지금이나 도량(道場)은 여여(如如)한데...찾아드는 탐방객(探訪客)은 이외로 많으시다.
사방은 짙은 숲과 암벽으로 둘러 싸여 겨우 하늘만 보일뿐 속세(俗世)와는 완전히 단절됀 곳이로다!
안내판에 선덕여왕 14년(645)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조선조 고종9년(1827) 원공(元空), 제암(濟庵) 두 스님이 중건하여 영원사(靈源寺)라 부르다가 순종3년(1909) 제암, 성파(性波) 두 화상이 재건하여 자재암(自在庵)이라 불렀다 한다.
형세(形勢)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금닭이 알을 품고있는 형상)이며, 나한전(羅漢殿) 우측으로는 20여 미터의 청량폭포(淸凉瀑布,원효폭포)가 흘러내려 장관이나, 물줄기가 가늘어 아쉬움을 더해 주신다.
오늘날 나한전이 모셔져 있는 굴법당(窟法堂)은 그 옛날 원효스님께서 수도 하셨던 곳이며, 굴에서는 천연석간수(天然石間水)가 흘러 약수로 유명했다는데... 지금은 법당 앞쪽으로 옮겨 놓아 약수터 앞에는 길게 줄을 서 있다.
오늘날이야 교통이 편리하니까 그렇다 치고, 1,300여 년전에 이곳에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었던 원효스님께서 과연 무엇을 보고자 하셨던가...?
원효스님께서 하루는 신라 장안(長安) 거리를 다니면서...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 준다면)”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아 보겠는데)”
라고 크게 외치고 다녔다.
이에 태종 무열왕이 듣고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것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있으면 그 보다 이로움이 없으리라” 하고 신하를 보내 요석공주(瑤石公主)의 궁(宮)에 들게 하였다. 그 뒤에 아들을 얻으니, 그가 곧 설총(薛聰)이다.
이후, 원효는 파계(破戒) 하였다고 속복(俗服)으로 갈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운수행각(雲水行脚)으로 고행하던 차에, 이곳 소요산으로 들어 수도하시니... 요석공주도 이곳으로 찾아들어 수도했다고 전해 온다.
오늘날에 공주봉(公主峰), 요석폭포, 요석궁터, 원효폭포, 원효대(좌선대) 등의 지명이 남아 있어 아름다운 전설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이상은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에 있으며, 1997년 미조(彌照) 김중태(金重泰)가 지은 “원효결서(元曉訣書)”에 의하면... 이 모두가 우리 한민족의 미래와 인류의 운명과 후천세계를 이끌어 갈 천손족 “해도금묘진인(海島金卯眞人)”의 비밀을 동해의 수구(水口)인 문무대왕암 석실(石室)에 봉안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해, 스스로 파계해서 당시 서라벌 장안의 이목(耳目)을 가리기 위해 꾸민 권사(權辭)라는 것이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경주시청 기획실장이었던 한달조(韓達祚)가 문무대왕암의 뚜껑을 비밀리에 열어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석관 벽에 5장의 오석판(烏石板)이 있었는데 그 中 한 장을 꺼내 촬영해서 나온 것이 지금의 467자로 됀 “원효결서(元曉訣書)”이다.
한 장은 청와대에 보고하고(16자는 지움), 또 한 장은 윤태첨(尹泰瞻:역학자)이라는 친구분에게 전해져, 윤노인이 오랜세월 연구 하였으나 그 해답을 풀지 못하고, 그후 1980년 중반에 미조 김중태 선생에게 전해져 십 수년간 연구(硏究) 기도(祈禱) 끝에 1997년 “상,하 2권” 의 책으로 세상에 발표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문무대왕암의 모습은 백두산 천지(天池)와 흡사하고, 도끼 자루가 빠진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의 따님인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효스님은 무열왕의 사위요, 또 그의 아들 법민(30대 문무왕)의 매형이요, 스승이시다. 이런 인맥 속에서 신인(神人)이신 스님의 “원효결서”를 삼국통일의 주역이신 문무대왕에게 전하시니...
신의 문장을 받은 31대 신문왕(神文王)으로부터 146년이 걸려 42대 흥덕왕 2년(827)에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있던 “원효결서(해도금묘장)”을 문무대왕암((경주 양북면 봉길리)에 봉안 되었다.
본문에 “십구정미 시유세파(十九丁未 始有世播)”(60년*19정미=1140년), 827년으로부터 정확히 1140년이 지난 1967년 정미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이 어찌 놀랄 일이 아니며... “고각분토 삼팔중분(孤角分土 三八中分)”(한반도가 38선으로 나누어 진다.)는 예견이며, “경자신축 남어난박(庚子辛丑 南於亂朴)”[1960년,1961년 양해에 남쪽에 박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킨다.(5.16혁명)]라는 대목에 이르면 기절초풍 할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원효결서 말미에 선천세계(先天世界)는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자전과 공전을 통해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만, 후천세계(後天世界)는 지구의 축이 남북 일직선으로 서게 되어 사계절의 변화도 없는 온화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며...
또한 중국의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감숙성, 신강유오이자치구, 청해성, 내몽고자치구를 비롯하여 쏘련의 바이칼호 부근까지...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포함한 거대한 새로운 대륙이 생겨나 우리의 천손족(天孫族)인 한민족[(桓,韓.汗)民族]이 인류세계를 주도 해 갈것이라 하시니...
다가올 “후천세계”에 대한 우리의 준비가 간절히 요망(要望)된다 하겠슴니다.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일이라! 하루 빨리 문무대왕암(文武大王巖)에 남아 있는 나머지 넉장의 “해도금묘장(海島金卯章)”의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세심교(洗心橋)를 건너 원효대(元曉臺,좌선대)에 오르니... 억겁(億劫)의 침묵(沈黙)이 이몸을 감싸고 돕니다!
한민족(桓民族)의 장래와 인류의 앞날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파계(破戒) 하셔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칭하시고
동해의 수구(水口)에서 1,300여 년을 벙어리가 되시니
海島金卯眞人으로 다시 태어나셔 한민족을 이끌어 주소서!
단기 4342년(서기2009년) 6월28일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逍遙山 587m)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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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휴... 우리 고학영 회장님멋쟁이 .. 아니 지리학 박사님이라 해야겠네요 어쩌면 그렇게 많은 지식을 머리에 넣고 다니시는지.생생하게 더듬어 주셔서 고맙고 수고 많았습니다...저는 같이 가다가도 뒤돌아 보면 늘 혼자일 때가 많드라고요.. 누 가 되지 않게 앞으로는 조심을 하리다
취산님의 격려에 감사 드리며, 산행에 동참한 모든님들이 편하고 유익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슴니다.
제가 할 말들을 취산님 꼐서 먼저 오셔서 다 하셨네요.. 회장님,참말로 대단하십니다..우리 회장님
부끄럽습니다. 졸문을 읽으시느라 애쓰셨으며... 구슬님이나, 취산님께서 남산 까페를 빛내주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슴다. 영원한 남산맨이 돼 주세요!
고회장님의 산행기는 산행기가 아니라 논문같은 아름다운 글이라. 그저 감탄할 뿐 입니다 ,저혼자 읽기 아까워 퍼 갑니다. 복 받으십시요.
김선생님의 남산 사랑과 협조에 감사드리며, 부족한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슴니다. 앞으로 더 좋은글 올리도록 노력 하겠으며,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