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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파병부대 기행문 (2013. 7. 18 ~ 7. 28)
2013년 7월 18일
공항 트랩을 나서는 순간 푹 찌는 듯한 열기가 얼굴에 확 닿는다. 가마솥 더위 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우리의 삼복더위와는 사뭇 차원이 다르다.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20분 남짓 걸리는 곳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하~, 9시간의 비행으로 열사의 나라 중동으로 왔구나 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의 일곱 토후국 가운데 하나다. 때로는 그곳의 중심 도시를 일컫기도 하며 최대 도시이다. 버즈 칼리파라는 높이 810m, 160층인 세계 최대 최고 층 건물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세계지도 모양으로 인공 섬을 만드는 더 월드, 야자 잎 모양의 인공 섬을 4개 만드는 팜 아일랜드, 맨해튼보다도 큰 워터프런트 섬, 수중호텔 하이드로 폴리스, 버즈 칼리파를 능가하는 또 다른 초고층 빌딩 알 부르즈 등 발전을 향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건축물들 중 부르즈 할리파 대한민국의 삼성건설 지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직후 빈약한 기반 위에 부동산 개발 위주의 개발과 성장은 주춤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현재 두바이의 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과의 시차가 5시간 늦으므로 저녁 8시, 한국은 새벽 1시쯤 됐겠다.
샤워를 하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뜨거운 물만 나온다, 아무리 석유가 흔한 나라지만 이렇게 기름을 펑펑 써도 되나 싶다. 아뿔싸! 그러나 그게 아니다 건물 옥상에 물탱크가 섭씨40도의 열을 받으니 탱크 속 물은 계속 데워져서 40도가 넘는 물이 나오는 거란다.
거러니 찬물 꼭지만 틀었는데도 계속해서 뜨거운 물만 나온다, 아이고 뜨거버라 ~~ 하하. ‘주지스님 방 옆에 있는 풀장은 아마 열탕이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다. 스님께 수영이나 하시자 고 시도해 봐야겠다.
내일은 우리가 방문 하고자 하는 아크부대로 부터 안내원이 올 때까지 잠시 시내투어를 하기로 했다.
다음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버즈 칼리프 빌딩, 세계최대 규모의 두바이 쇼핑몰……
도시가 계획적으로 잘 짜여 있다. 스카이라인, 편의성, 접근 성 그리고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함을 두루 갖춘 시설 등. 멋진 식당……
그러나 아쉽게도 라마단 기간이라 음식은커녕 우리는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무슬림들은 이 기간에는 아침부터 해가지는 저녁까지 침도 삼키지 않는다니 이들의 금욕적인 신앙적 행위는 대단하다.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다. 외국 관광객에게도 자신들의 종교적인 규범을 강요하다니, 그러고 보면 한국불교는 대단히 개방적이고, 현실 수용적이며 합리성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었든 것 같다.
사상적으로는, 통일신라시기에는 원효 의상 등이 나타나 불교사상의 원융회통(圓融會通) 등 통불교를 표방하여 토착 신앙과의 줄기찬 대립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토착 신앙과의 융화를 통하여, 국민 단합적인 호국적인 불교가 발전했다. 이는 통일 이전의 신라불교의 특징이라 할 토착 신앙과의 대립을 극복한 것에서 한국 불교적인 토대가 형성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황폐해진 민심수습 차원의 사찰건립간에 민초들의 영원을 담은 삼성각(칠성, 나한, 산왕)등의 민간신앙이 절 집안에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한국불교는 시대를 거듭하면서 눈밝은 납자들의 덕분으로 정법안장 (正法眼藏) 이 현재에도 오롯이 실재하는 것은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아크부대 방문, 가는 길의 끝도 없는 사막, 가로수는 대추야자의 천국이다. 대추야자(date palm), 우리가 알고 있는 야자나무 열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코코넛 열매가 열리는 야자나무와 열매가 대추와 비슷하게 생긴 대추야자다, 이곳 두바이에 있는 야자나무는 대다수가 대추야자다.
열매는 우리나라 대추와 모양과 맛이 비슷한데, 그 맛이 우리나라 대추를 꿀에 담아 놓은 맛이랄까 대단히 달다. 먹고 나면 입이 다린다. 씹었을 때 입 속에서 느껴지는 껍질의 질감도 우리 대추와 매우 흡사하다.
이 나라는 사막에 이런 야자나무를 기르기 위해 많은 정성과 돈을 쏟아 붓고 있다. 사막이라서 물이 없기 때문에 파이프라인을 통하여 이들 나무를 키우기 위해 수분을 공급하고 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언뜻 도저히 남는 장사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관광인프라를 구축하여 이 삭막한 사막에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는 거다.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고속도로 중앙 분리대에 심어져 있는 대추야자가 사막을 두 시간 반을 달려도 끝없는 대추야자~~. 두바이 시내에서 우리의 목적지 알 알아이 까지는 거의 직선도로다 좌회전, 우회전이 필요 없는 끝없는 곧은 도로다.
드디어 10만 마일을 날아와서 우리일행은 아트부대에 도착했다. 아 참 이번 파병장병 위문에 함께한 분들을 소개하면, 홍법사 주지 우리의 심산스님, 국방부 군종실장 대령 김응 법사님, 국방부 군종신부 중령 현광섭 신부님, 홍법사 신도 정운식님 그리고 저 홍법사 국제부 회장 최길차 이렇게 다섯 명이다.
처음 이번 여행의 구성원이 참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이러한 구성으로 원만하게 장도와 긴 일정을 수행해야 할지 그야말로 수행하는 자세로 임하겠노라 하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에 작은 벽들을 허물고 이번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자 하는 데 묵계적 통일을 이루었다. 물론 간간히 종교적 견해의 차이는 있었지만……
심산스님의 군복 입은 모습은 낯설기도 했지만 참 잘 어울린다. 계급은 중령이다. 군대로 따지자면 대대장 급이다. 충성!
아크부대가 위치한 지역은 두바이 답지 않은 해발 400고지 가량의 산악지형을 끼고 있었다. 물론 산이래야 우리의 산야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 티브이에서 본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형, 나무는 없고 삭막한 돌 무더기와 황야로 이루어져있다. 꼭 석산 개발지처럼 보였다. 그래도 산이라고 산 정상에는 이 도시국가의 왕의 별장이 있단다.
아크부대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정오쯤 됐다. 바닥이 온통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어 그 열기가 대단했다. 바깥 기온은 섭씨 45도 정도 였는데 지열은 50도를 넘는 것 같다. 아! 이런 곳에서 우리의 젊은 청춘들이 조국의 영광과 국위 선양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국가경제를 위해서 임무를 다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벅차 올랐다. 금새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진정 조국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반문해본다. 이 젊은 청춘들은 어떤 심정으로 자원 하여 이곳까지 온것일까? 참고로 사병들이 이곳에 파병 지원 하려면 그 경쟁률이 7대1을 넘는 다니 모두가 엄선된 병사들이다.
잠시 기념촬영과 부대소개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었다. 내가 군을 제대하고 오랜만에 군 병영에 와서 그런지 아크부대에서 우리 일행이 방문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 기울인 정성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 부대에서는 우리와 기념 촬영하는 자리에도 방문자의 명패를 붙여놓았고, 프레젠테이션 룸, 식당의 자리에도 어김없이 명패가 놓여져 있었다.
병사들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 넓은 식당에서 전 소속 병사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참으로 우리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물김치가 이채롭다.
종교적 위문이었기 때문에 불교, 천주교, 개신교 이렇게 나뉘어 행사를 가졌다. 불교 병사가 꽤 많은데 다소 놀라웠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첫 번째 행사가 시작 됐다. 목탁소리에 맞춰 삼귀의,, 청법가를 봉송하고 심산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처음 이 부대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의 척 인상은 다소 긴장되어 보이고 뭔가 환경에 덜 적응하여 외부인(?)에 대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님의 법문의 요지는 ‘수처작주(隨處作住)’ 즉, 어디에 있더라도 그 곳에서 스스로가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이 내용은 임제스님의 임제록(臨濟錄)에 나와있는 내용으로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住 立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자는 것이다, 어떠한 때라도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그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자세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결국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하고 나를 잊는다. ‘망아무아(忘我無我)’라고 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소와 일체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법문이 끝나고 나니 병사들의 모습이 사뭇 달라져 보인다. 법문을 다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주지스님의 전법의 위력일까? 다소 긴장 해있던 모습들 도 점차 부드러워지고, 편안해 보인다. 심산스님께서는 병사들에게 일일이 염주를 손에 하나씩 끼워 주시고 파병 중 애로사항은 없는 지 등 개별적으로 신행상담도 하시고, 그리고 신행활동에 보탬이 되도록 홍법사 신도들의 정성이 담긴 성금 전달식도 가졌다.
돌아오는 길에 사막의 모래는 더욱 황량해 보이기도 하고 따뜻해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두바이에서 마지막 밤을 콜라한잔과 함께 뜨겁게(?) 보내고, 내일은 드디어 남수단으로 간다. 잠은 충분히 자두자.
남수단에 입국하려면 현재는 유엔으로부터 발급된 비자가 필요하다. 우리 일행은 한달 전에 미리 비자를 받아놨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는데, 현 신부님의 비자에 영문철자가 잘못되어 남수단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지가 걱정이었다.
두비이 공항의 출입국 담당공무원의 업무처리 속도는 느려터지기로 전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로칼(두바이 자국민)들은 업무에 관계없이 정부에서 생활에 지장 없도록 자금을 지원해주므로 우리나라 같이 개인의 경쟁력이 중시되지 않는다. 참으로 행복한 백성들이다.
현실이 이러니 출입국 심사에 잘못(?) 걸리면 결과가 참으로 복잡하다. 다행히도 신부님은 출국 심사관 중 가장 괜찮게 보이는 심사관을 선택하여 우리는 무사히 남수단행 두바이 여객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남수단은 지난 1956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 50여 년간 내전으로 고통 받다가 지난 2011년 7월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국가 명은 "남수단 공화국"(The Republic of South Sudan)이다.
오랜 내전으로 황폐화 된 국토에서 국민들은 가난과 질병에 고통 받고 있어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도는 주바이다. 북쪽으로는 수단, 동쪽으로는 에티오피아, 남쪽으로는 케냐, 우간다, 콩고 민주 공화국, 서쪽으로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독립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수단과의 분쟁은 독립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분쟁은 가속되어 2012년 4월 전투기를 동원하여 남수단에 미사일 폭격을 하는 등 전면적 직전까지 치달았으나 비밀협상을 통해 남수단이 북수단에 위치한 송유관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전의 가능성과 남수단내 부족간의 갈등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2013년 3월 국제평화지원단에서 UN 남수단 임무단(UNMISS)의 일원으로 남수단의 재건지원과 의료지원 등 안정화 작전 수행으로 이들을 돕기 위해 남수단 재건지원 임무를 수행할 '한빛부대' 를 파병했다.
4시간여 비행 후 남수단 수도 주바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현지시간으로 오후 2시경이었다. 비행기에서 본 남 수단은 비로소 푸른 초원을 만나서 그런지 한국의 산야와 매우 흡사해 보였다. 물론 한국과 같은 산은 없고 푸른 초원이 계속 펼쳐져 있었다.
남수단의 기후는 건기와 우기로 나뉘어 지는데, 우기인 6월~11월에 비가 집중적으로 내린다. 지금이 우기이므로 낮 기온은 높은 습도와 섭씨34도 정도로 우리나라 여름과 아주 비슷하다.
주바국제공항은 말이 국제공항이지 모습은 흡사 옛날 우리나라의 시골 버스정류장과 비슷하다. 50평 남짓한 비좁고 낡은 단층건물에서 출입국 심사, 수화물검색 및 수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행기가 도착하는 시간이면 그야말로 이곳은 단 대목에 자갈치시장과 같은 북새통을 이룬다. 비행기로부터 이 건물까지 수화물운반은 트랙터에 나무로 만든 화물칸을 연결하여 수화물을 운반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 왔다. 그러니 짐이 제대로 안전하게 여행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용감하게(?) 우리의 짐들을 잘 챙겼다.
남수단에서 외국인들은 PKO(평화유지군) UN 남수단 임무단(UNMISS)과 동행 없이는 매우 위험하다. 아마 허락 되지 않을 것 같다. 우리를 마중 나온 한빛부대 연락장교가 우리일행 에게 UN에서 발행한 개인의 사진이 들어있는 출입증을 나누어 주었다.
UN 헬기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주바 시내는 약간의 긴장감이 흐른다. 길거리에서 사진도 못 찍게 한단다. 그래도 몰래 한 장을 찍었다(주바국제공항을 배경으로). 참고로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진을 만장 정도 찍을 계획을 했다.
UN 헬기를 타고 북쪽으로 약 1시간 가량을 가야 우리의 임무 수행지 한빛부대에 다다른다. 헬기는 약 20명을 태울 수 있는 크기 였는데 우리 일행과 미군 등 다국적군 병사와 원주민 등이 동행했다. 물론 무릎 앞에는 짐들로 가득했다.
군용헬기는 그 엄청난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 나간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고 덥고 습한데 귀마개를 착용해야 하니 고행길이다. 심산스님은 긴 소매의 장삼을 입고 귀마개 라니, 얼마나 더우시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참을 만 하다.
헬기에 타기 전에 동행할 원주민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는 데 어디 가시냐고 물었더니 집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보르 지역에 있는데, 업무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란다. 아마도 영어를 잘 구사하고 옷차림으로 봐서 인텔리 인 것처럼 보였다.
헬기에서 내려다본 남수단은 아주 평화스러운 밀림이다. 높이가 거의 일정한 평야지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사이로 아프리카의 젖줄 백 나일강이 뱀처럼 흐른다. 더문더문 대 여섯 채의 움막집들이 보이고 그 중앙에 원형으로 된 넓은 마당이 보인 다. 그리고 소인지 염소인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런 평화스러운 곳이 50년 동안이나 내전의 상처를 겪었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수단의 독립은 20세기 내내 식민지배와 내전을 겪은 수단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프리카 토착 원주민이 살고 있던 수단에 아랍인들이 대거 이주를 해오며 시작된 수단의 불운한 역사는 이슬람계 아랍인들이 수단 전체 인구의 75%를 형성하며 수단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본격화됐다.
이슬람 아랍계 정권이 남부지역 아프리카 계 주민들을 차별·탄압하면서 남·북 양측은 약 50년간 200만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의 난민을 양산한 두 차례의 내전을 치렀다.
지금은 북수단은 이슬람계 아랍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남수단은 다수의 아프리카 토착 원주민들로 구성되어있다. 남수단은 거의 모든 사회 인프라가 내전으로 파괴됐으며, 국민 대부분이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최 빈곤 국가다.
그 모습이 분단 당시 1950년대의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여 가슴이 시리다. 내전은 그 결과가 참으로 비참하다.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국민의 도덕성, 정체성의 파괴, 더 나아가 민족성까지 무참히 파괴된다. 그 회복의 가능성도 도저히 예견되어 지지 않는다.
내전이 6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의 남과 북의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UN헬기는 점점 더 밀림의 오지로 잠입을 하더니, 드디어 백 나일강을 끼고 좀 넓은 마을 들이 산재해있는 시골의 읍 지역에 육중한 엉덩이로 주저앉았다. 보르 비행장, 이곳은 UN이 관리하는 헬기 전용 비행장이다.
보르지역은 남수단 수도인 ‘주바’에서 북동쪽으로 175㎞ 지점에 위치해 있다. 대한민국 PKO(평화유지군)가 주둔해 있는 곳이다. 남수단은 10개 주로 나뉘어 지는데 중북동 지역에 종글레이주가 있으며 이곳에 보르 시(市)가 있다.
종글레이주 동쪽에는 소말리아와 접경하고 있다. 이 지역은 독립한 이래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상태로 많은 주민이 무장하고 있으며, 도로사정이 열악해 정부에서는 제대로 된 치안강화 활동을 펼칠 수 없는 실정이다.
종족분쟁과 목초지를 둘러싼 영역 다툼으로 부족간의 충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며, 어제도 가축인 소를 강탈하기 위한 부족간 유혈충돌로 두 명이 숨지고 많은 부상자 들이 한빛부대 의무진에서 총탄 제거 수술의 받았다고 한다.
특히 이 지역 부족들은 가축으로 소를 방목하여 기르고 있는데, 소가 중요한 부족의 재산수단이다. 예를 들어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예물로 신부 집에 소 20마리를 줘야 여자를 데려올 수 있다 하니, 이 정도로 가축으로서의 소가 중요한 재산이다. 에구! 돈이 뭔지……
우리 일행은 따뜻한 영접을 받으며 보르의 한빛부대를 방문했다. 부대모습은, 여기는 그야말로 야전막사다. 바닥을 흙으로 고르고 그 위에 블록을 깔고 그리고 그 위에 텐트를 친 야전용 막사, 그런데 이 지역이 지대도 낮고 지반이 약해 바닥 다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흙을 구해왔을까?
이곳의 가장 열악한 부분은 도시 인프라 구축의 최우선인 도로가 제대로 만들어져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작전의 시작은 먼저 도로가 구축되어야 하지만 이곳의 도로는 진흙 그 자체다. 우리가 생각하는 도로의 모습들 즉, 시멘트나 아스팔트 이런 것은 눈 씻고 볼래야 볼 수가 없다.
대다수 지역이 습지 이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는 우기 때는 차량을 이동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우리가 이동한 주바에서 이곳 보르까지 헬기로 1시간 걸리지만, 한빛부대에서 식량 등 물자를 실어 날라 오려면 3일 이나 걸린 단다. 그야말로 진흙 길 투성이 이며 길 중간 중간이 늪지란 애기다. 그리고 무기를 가지고 있는 밀림 속의 부족들도 경계해야 하니 어려운 점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올해 초에 이곳에 한빛부대를 창설하고 지금까지 정말로 고난의 날들을 보내면서, 이 험난한 오지에서 도로 정비를 한빛부대가 도 맡아서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생각하니 힘찬 박수를 쳐줘야겠다.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만큼이나 이루어 냈다니,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위문하러 왔는데 오히려 정신적 위문을 받고 있다
.
연병장 옆 웅덩이 근처에는 이 지역에 서식한 ‘피기버드’라는 새가 있는데 이름 과 같이 살찐 학처럼 생겼고, 그 모습이 괴기 스럽다. 이 녀석 들은 십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지내는데 밤이 되면 육중한 몸을 날아 망고나무 위에서 잠을 잔다.
크지 않은 규모의 부대지만 지휘관의 배려로, 법당, 성당, 교회의 소형 막사가 각각 마련되어 있는 것은 큰 다행이다.
법회를 알리는 목탁소리와 함께 저녁예불이 시작되자 막사를 가득 채운 병사들의 모습이 아주 진지하다. 심산스님의 법문이 진행되는 내내 그들이 이곳 먼 이국에서 겪었을 법한 수많은 번뇌의 흔적들이 그대로 묻어나고, 그것은 마음 한구석 엉어리로 남았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눈물로 혹은 작은 흔들림으로 용해되고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흐른다.
스님께서도 나도 다시 느끼는 가슴 먹먹함을 못내 뒤로 하고, 그들이 평소 병영생활에서 느꼈을 종교적 갈증을 즉문즉설을 통하여 시원하게 풀어주는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홍일점으로 참석한 취사반장 권지현 하사(여군)의 선한 눈망울이 이들의 현재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심산스님과 체력 단련장에서 병사들과 탁구시합을 했는데 스님 탁구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마치 소림사 탁구를 보는 것 같다. 우리 팀이 2대 빵으로 졌다.
두 개의 모기장이 쳐져 있는 막사에 정운식 선생과 잠을 자게 됐다. 정선생은 피곤해서 이미 잠들어 있다. 나도 금방 바로 잠들 것 같다. 코고는 소리에 정선생이 깨지는 않을 지.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기계음처럼 삐웅 삐웅 우는 놈은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밤새 울고 있다.
다음날 보르지역 탐방 계획이 있었다. 면사무소 크기의 보르시청과 백 나일강 등 시내를 둘러보고 고아원을 방문했다.
남수단엔 서로 다른 부족 어를 쓰는 다양한 부족들이 있는데 올해 1월 가축을 빼앗기 위해 일어난 부족 간 싸움은 173명의 고아들을 남겼다.
그 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있는데, 콧구멍만한 교실에 20명씩 아이들이 공부를 하고 잇다. 섭씨 35도의 날씨에 나무로 만든 벽과 양철지붕 아래 교실은 그야 말로 찜통이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우르르 달려들어 찍은 사진은 꼭 보고 싶어한다.
하루에 한두 끼 정도의 식사를 한다고 한다. 가슴이 또 시리다. 스님께서 고아원 원장을 통하여 후원금을 전달하셨고, 그는 우리나라도 유사한 시련을 거치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 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들고 있는 그 아이들의 눈을 통하여 남수단의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부대로 돌아오니 권지현 하사의 정성이 담긴 점심식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을 배려하여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다시마 된장국, 맛있는 나물 등 그야말로 사찰음식이 한 상 이다. 덕분에 한빛부대 부대원 들은 파병 나온 이후 최고의 식사를 했단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고아원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권하사의 불자로서의 스님에 대한 정성이 또한 가슴에 박힌다.
남수단을 떠나는 날은 정국이 불안해져 주바시내에 무장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어렵게 인천행 직항 노선이 기다리는 케냐 행 비행기에 탑승 할 수 있었다.
나이로비는 지금 겨울이다. 해발 약 2천 미터이고, 기온은 섭씨18~23도로써 활동하기에 딱 좋다. 그런데 도시의 환경오염이 문제다. 특히 디젤자동차의 매연은 심각하다. 한때 유엔환경계획 본부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있었다는 것이 무색하다.
그러나 도시를 벗어나면 사바나 기후 특유의 초원과 다양한 초식 동물이 서식한다. 기린과 같이 키 큰 동물들은 나무 윗부분의 잎을 먹고 얼룩말, 누 등이 그 아래의 잎을 먹고, 제일 아래쪽의 잎은 가젤이 먹는, 먹이를 두고 싸우지 않고 공존하는 방식을 쓴다.
따라서 이들이 먹이를 찾아 같은 경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이동하여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니 공존의 질서는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지혜롭지않은가?
열흘간의 임무를 알차게 마치고 오늘은 귀향이다. 다시 한번 스님의 체력에 감탄하며 연유를 여쭈어 보니 웃으시며 내공 이시란다. 나도 외공 보다 내공을 기르는데 투자해 보기로 한다. 13시간 가량 예상되는 우리의 비행기는 중앙아시아의 파미르고원을 지나고 있었다.
1300년 전 혜초스님은 약관의 나이에 바다를 통하여 인도를 건너가 부처님의 8대성 지를 순례하는 구도의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동쪽으로 이곳 파미르 고원을 지나서 계림으로 향했다. 여기서 혜초스님의 법을 구하는 여행길 ‘왕오천축국전’이 탄생한다. 여기에 그의 오언시 한편을 소개한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 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일남은 베트남의 옛이름 이다.)
이번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가벼운 마음이다. 그러나 많은 숙제도 함께 가지고 간다. 조국을 위해 푸른 청춘을 불사르는 젊은 그들에게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생수를 건네줄 그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하다. 제2의 심산스님이 그기에 또 필요한 이유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영어로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은 내가외국생활을 오래해서가 아니라, 매월 국제부 행사를 하면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런 대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 확신한다.
미래의 불법포교를 위해 국제부 주니어 회원수를 점차적으로 늘리는 계획을 세워야 되겠다. 끝으로 제가 이 뜻 깊은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모든 홍법사 불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3년 8월 국제부 회장 최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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