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관계1)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농부와 포도나무 가지, 의원과 병자, 주인과 종, 아버지와 아들, 목자와 양, 사는 자와 살려 주는 자 등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영원한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여러 표현 중에 특별히 본고에서는 ‘신랑과 신부’라는 ‘결혼 은유’2)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성경에서 신랑과 신부라는 관계맺음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이르기까지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에 본고는 성경에 나타난 결혼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곧 신랑과 신부로서의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조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반에 계시된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인간의 관계에 대한 예표와 실상을 살펴보겠다. 후반부에서는 이를 토대로 그리스도의 신부된 인간이 갖는 의미와 신부로서 준비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즉,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인간의 관계를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기록된 순서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연구로서, 우선 결혼의 히브리어 의미를 살펴본다. 둘째는 구약에 나타난 결혼관계를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과 하와의 관계와 구약전반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살펴볼 것이다. 셋째는 구약에 이어 신약에 나타난 결혼관계를 복음서에 기록된 혼인잔치와 서신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통해서 연구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인간이 갖는 의미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어떻게 준비되어야 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2. 결혼의 원어적 의미
성경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과 가정생활이라는 모형3)을 통한 은유적 표현4)으로 묘사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결혼이라는 모티브로 이스라엘 전 역사를 통해 드러난다. 곧 애굽으로부터의 구원과 시내산에서의 언약 체결, 가나안 땅 정착과 멸망과 회복 등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이 결혼 은유로 묘사된 것이다. 이러한 결혼 은유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구약에 나타난 대부분의 은유가 신약에서 실상으로 설명되듯이 결혼 은유 또한 신약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연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연구로서 구약에 나타난 결혼 용어의 원어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한국어에도 ‘장가가다,’ ‘시집가다,’ ‘신접 살림을 차리다,’ ‘화촉을 밝히다,’ ‘성혼하다,’ ‘국수를 먹다’ 등 다양한 표현이 ‘결혼하다’는 뜻을 지닌다. 히브리어에도 ‘라카흐’(), ‘바알’(), ‘나사’(), ‘아샤브’(), ‘아라스’(), ‘하야 르이샤’() 등 여러 표현이 결혼 용어로 사용된다.
먼저 ‘라카흐’에 대해 살펴보면, 이 동사의 일차적인 사전 의미는 ‘취하다’(to take)이다. 사람들이 보통 무엇인가를 자기의 소유로 삼기 위하여 취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어휘가 결혼 개념으로 사용될 때에는 주어인 남자가 여자를 목적어로 취하여 여성을 자기의 소유로 표현하거나 주어인 남자와 목적어인 여자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라(출 6:7)
여기서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일을 남자가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결혼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아래 애굽에서 ‘취하여 삼은 민족’이다.
‘바알’은 본래 ‘주인’(owner), ‘소유자’(possessor)라는 뜻이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남편’으로 번역되어 실렸다. 결혼 용어로서 동사 ‘바알’의 용례를 살펴보면 결혼이란 남편이 그가 취한 여자의 주인이 되는 것이며, 여자는 그를 취한 남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결혼을 통해서 남편은 아내의 주(master)요, 다스리는 자(ruler)요, 소유자(owner)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본질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히브리어 동사 ‘바알’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렘 31:32)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을 절대 주로 섬겨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와 율례를 벗어나 불순종함으로 그 계약이 파기되어 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남편으로 번역된 ‘바알’이라는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대표급 우상이라 할 만한 ‘바알신’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바알신을 숭배하는 음행을 하다가 성민(聖民)에서 버려지게 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재결합하실 때에는 결혼 전문용어인 남편 ‘바알’ 대신 다른 동의어인 남편 ‘이쉬’()를 쓰게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이스라엘이 ‘내 남편’이라고 부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 두 어휘 중에서 ‘바알’이라는 말은 쓰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로 ‘내 바알신이여’라고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호 2:16)
‘나사’의 사전적 의미는 ‘데려가다’(to take away), 혹은 ‘가져가다’(to carry away)이다. 때로는 ‘데려오다’(to bring)는 뜻도 있다(왕하 14:20). 그러나 이 어휘가 결혼과 관련하여 쓰일 때는 ‘라카흐’와 그 의미가 같다.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거기 거한 지 십 년 즈음에(룻 1:4)
이와 같은 어휘의 용례를 통하여 볼 때, 결혼이란 여자를 데려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이란 아내 될 사람을 그의 아비 집에서 자기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서 남자는 자신이 직접 가서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데려오거나(출 2:1) 아니면 사람을 보내 대신 데려오게 하기도 한다(출 24:1, 삿 14:3, 삼상 25:25-39, 삼하 11:27).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데려오는 사건을 성경은 ‘라카흐’ 용어를 사용하여 결혼 개념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5)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4)
여자를 데려다가 거주지를 마련해 주는 것을 결혼으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오랜 이스라엘의 풍습이다. 이삭은 그 아내 리브가를 하란 땅에서 데려다가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다’(창 24:67).
‘아샤브’가 ‘결혼하다,’ ‘정착시키다’는 뜻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속에서 쓰여질 때 대개의 경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삼상 12:8) 혹은 성읍이나(왕하 17:24, 26, 겔 36:33; 54:3, 대하 8:2) 집에 (호 11:11; 12:10, 레 23:43) 데려와 그곳에 정착시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6)
이 밖에도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에서는 ‘약혼하다’라는 뜻의 ‘아라스’()를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결혼 선언, 결혼 공식으로 사용되어 왔던 ‘하야 르이샤’(-의 아내가 되다)를 호세아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호세아 2:237)에서 ‘너는 내 백성이라 …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할 때 이는 분명 결혼 공식, ‘그녀는 내 아내이며 나는 그녀의 남편이다’()와 일치하는 것이며, 호세아 2:28)의 이혼 공식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의 부정형이다.9)
결혼 용어는 아니지만 ‘야다’()는 ‘알다’(to know)로 번역되어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와 지식을 목적어로 취할 수 있다. 이 어휘는 일반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안다는 말 이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 특별히 부부 간에 사용될 때에는 성적 관계를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을 낳았을 때에 ‘동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부부 간의 인격적이고 은밀하며 친밀한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된 용어인 것이다. 이런 용어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암 3:2)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호 13:4)
호세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그의 백성들에게 권한다(6:3). 이러한 용례를 살펴볼 때, ‘야다’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 구약의 결혼 은유 이해
3.1. 아담의 신부 ‘하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최초의 결혼식은 ‘아담의 결혼식’으로 창세기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장은 결혼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신접살림’을 준비하는 활동으로서의 창조 기사로 이해될 수 있다.10) 3장은 아담의 가정에 닥친 위기에 관한 이야기며, 4장은 그 가정에 임한 비극을 다룬다. 그러면 단순히 아담11)이라는 한 남자의 가정 탄생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라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 어떤 역할을 지닌 것일까? 아담이 그의 신부 ‘하와’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라는 최초의 은유가 된 이유를 알아보자.
아담의 신부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맡기신 ‘에덴동산’에서 전혀 새롭게 태어났다.12) 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동산이라 할 만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어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신부로 탄생하게 된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예수의 동산이라 할만한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피로써 ‘교회’가 탄생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13)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셨다. 그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주기로 작정하신다(창 2:18). 그러나 하나님은 이상하게도 그 일을 바로 시작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성경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힘든 일을 아담에게 시키신다. 곧 에덴 안에 있던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먼저 아담에게 맞선을 보게 하신 것이다.14) 바로 아담을 잠들게 하신 후 배필을 만드실 수도 있는데 중간에 이런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담의 수준을 먼저 시험하고 싶으셨다.15) 아담이 자기의 돕는 배필을 어느 수준으로 택할 것인지를 보려 하심이다. 그러나 아담은 기특하게도 자신 앞에 지나가는 동물들을 이름만 지어주었을 뿐 취하지는 않았다. 똑같이 흙으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아담은 생령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아담의 이름 짓는 역사가 끝나자 하나님은 바로 아담을 잠재우시고 아담과 동등한 수준의 배우자를 만들어 주신다.
아담에게 먼저 짐승들을 선보이신 것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인류의 격차를 보여주시는 것과 같다. 인류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아담 앞에 선 짐승들과의 격차와 같은 것이다.16) 예수는 짐승의 집에서 태어나셨고, 태어나자마자 짐승의 식탁(말구유)에 누이셨다. 당신의 신부를 얻기 위해 이 세상에 독생하신 그리스도가 처음 본 것은 인류가 아닌 짐승의 집이요 짐승의 식탁이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여 당신의 신부로 맞이하고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인류는 아담 앞에 먼저 선보인 짐승과도 같은 수준의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자이신 예수 앞에 이렇게 형편없이 낮고 낮은 인류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동등한 수준의 배우자가 되게 하기 위해 어떤 고난을 감내하셔야 했는가? 짐승과도 같은 수준인 인류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수준을 끌어올리기까지 그리스도는 고난과 피의 죽음을 아낌없이 지불하신 것이다.
창세기 2:21부터는 아담이 신부를 얻는 본격적인 서술이 시작된다.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것이다. 아담이 그의 신부를 얻는 장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이 주관하신 사건이다. 이 장면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닮아 있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기 전 감람산에서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아버지에게 구하시기를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39-44)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다. 오직 아버지의 원함대로 가신 것이다. 그곳에서 그분은 아담이 깊이 잠든 것처럼 그분도 깊이 죽음으로 잠드셨다. 그리고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가 취해진 것처럼 그분의 옆구리도 찔리셨다.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3-34)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빗대가 빠져 나온 것처럼,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도 그분의 피와 물이 다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아담의 여자가 탄생하여 아담의 눈앞에 서게 된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33)는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직 죄를 짓기 전 아담은 확실히 영감이 충만했다. 갈빗대를 취하신 하나님이 살로 대신 채우실 때 깊이 잠들었던 아담이 그 일을 알리 없었을텐데도 자기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보며 그 여인의 출생 근원이 자신임을 알아차리고 최고의 영감 있는 고백을 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제 한 몸을 이루게 된다(창 2:24). 원래 한 몸이었던 아담과 여자(하와)는 결혼을 통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한 몸을 이루어 함께하게 된다.17) 인류도 십자가의 보혈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18) 신약성경에서 제공하는 교회론의 기초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이다(엡 1:23, 골 1:18).
아담의 가정을 통해 신랑과 신부로서의 그리스도와 인간의 관계가 단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모형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19)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특별히 하나님이 하와에게 하신 말씀은 신약교회의 사명과 역할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조명해 주고 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아담의 신부인 하와에게 잉태와 해산의 수고와 남편만을 사모하는 정절의 책임이 주어졌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도 잉태와 해산의 수고인 영혼 구령20)과 세속화 되지 않는 교회로서의 정절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3.2. 여호와의 신부 ‘이스라엘’
아담의 결혼 이야기로 시작한 성경은 개인에서 공동체인 민족의 결혼식 이야기로 넘어간다.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결혼 이야기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성민(聖民)이 된 사건은 마치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여자의 부모로부터 허락을 받아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려는 것과 같은 개념을 갖는다.21)
3.2.1.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결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결혼 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들과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하여 취하신 가시적인 조치가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불러 중재자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애굽에서 탈출시킨 사건이다. 출애굽은 분명 이스라엘을 세계 온 민족 중에 구별하여 택하신 첫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결혼 공식에 비한다면 출애굽은 결혼식이기보다는 정혼 또는 약혼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혼과 약혼이 다른 가장 큰 이유는 법적 효력을 갖는 언약과 계약에 있다. 출애굽은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불러내어 데려오듯 애굽으로 가셔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사건으로 약혼에 해당하고, 시내산에서 모세로 더불어 언약하신 사건은 비로소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법적 효력을 갖는 결혼에 해당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사건으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렘 31:31-33).22) 또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해 출애굽기 24:7에는 모세가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라고 기록되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관계, 언약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된 것이다. 곧 출애굽이라는 약혼을 거쳐, 시내산에 이르러 결혼의 성립, 계약과 언약의 관계로 완성된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각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계약을 맺는 가운데 두 계약 당사자 모두에게 피를 뿌렸다는 점이다. 이 피는 모든 말씀에 대하여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의 피’다(출 24:8). 언약의 피로 시내산에서 탄생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교회는 어떠한가? 갈보리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탄생되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언약의 피’라고 증거한다(마 26:28). 아담의 산이라 할 만한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피(갈빗대)로 신부인 하와를 얻고, 모세의 산이라 할 만한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뿌려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을 얻었다. 예수의 산이라 할 만한 갈보리산 골고다에서 예수의 피로 신부인 교회를 얻은 것이다.
3.2.2.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동거
일반적인 결혼생활의 모습은 결혼식을 올린 후 신랑이 신부를 자기가 마련한 장막으로 이끌어 신방을 차리고 그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남편은 아내에게 의식주를 공급하고, 아내는 남편의 상속자를 낳는 일을 기본으로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결혼생활 곧 동거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입을 모아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은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라고 찬양한다. 출애굽기 29:45-46에서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신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언약식을 치른 이유는 그들을 성결한 처소에 들여 그들과 함께 거하려는 곧 그들과 함께 동거하려는 목적에서다. 이러한 의도에서 성막은 여호와께서 그의 계약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함께 거한다는 상징이요 또한 실재였다(레 26:11-12).23) 이스라엘도 성막에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24) 생활하였다(출 40:34-38).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하여 주셨다. 레위기 26:3-13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여 남편으로서 기본적으로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약속으로 열거한 대목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는 마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의식주를 공급하며 그를 보호하는 원리와 같다.25) 교회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있으며(엡 1:23), 교회의 지체인 성도는 성령이 영원히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고전 3:16).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서 어떤 생활이 요구되었을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의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이스라엘을 성별(聖別)함에 있다. 이스라엘은 종교, 도덕,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의 모든 분야에서 그들의 이웃 나라들과 구별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이웃 나라 사람과 통혼하고 이방신을 섬기며 이방 풍습을 따라 산다면 신부가 신랑이 있음에도 간음과 음란을 행하는 것과 같은 정죄를 받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의 성민(聖民)’이며 ‘자기 기업의 백성’(신 14:2)이라 하셨다. ‘성’(聖)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도쉬’()의 동사형 ‘카다쉬’()는 본래 ‘따로 떼어놓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거룩’이라고 번역하는 ‘카도쉬’라는 말은 제의적인 ‘성결’이라는 뜻보다 ‘구별’ 혹은 ‘성별’이라는 의미가 더 선행된다고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구별하신 것을 구별되게 지키는 것이 곧 ‘성결’이다.
3.2.3.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이혼
율법에는 이혼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레위기에는 이혼한 여인을 다루는 규례가 적혀 있고(레 21:7, 14; 22:13), 신명기 24:1에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이혼규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율법은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을 발견했을 때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렘 3:8).26)
이혼의 결과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피로써 언약식을 올린 다음에는 성결한 처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의 행음함으로 이혼에 이르렀을 때는 결혼했을 때와 반대로 성결한 처소에서 쫓겨나 원래의 처소로 돌아가거나, 그보다 더 못한 처소로 내어 쫓겨났다.27) 호세아 9:1-3에서는 행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이스라엘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이전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28) 신약에 와서도 이혼증서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교회나 성도가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고 성령과 함께 하였던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 타락할 경우 다시는 새롭게 할 길이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히 6:5-6; 10:29).
3.2.4.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재혼
이사야 54:4-8과 62:4-5, 호세아 2:14-23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재결합을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사야 54:4-8에는 이스라엘을 과거의 수치와 치욕으로부터 하나님이 부끄러움을 잊고 긍휼로서 용서하고 회복시켜 다시 받아들일 것을 말씀하신다. 이때 하나님은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남편’으로도 소개하고 계신다.
이사야 62:4-5에서도 이미 황무지처럼 버려진 성읍을 다시 그의 거처로 삼으시겠다는 것을 말씀하실 때에 여호와께서 자신을 남편, 신랑으로 묘사하고 이스라엘을 아내와 신부로 묘사함으로써 재결합을 선포하고 계신다.
호세아 2:14-23은 좀 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바알을 섬겨 여호와를 잊어버린 이스라엘을 영영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다시 언약을 맺으실 때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컬으리라’ 하시고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겠다’ 말씀하신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결혼 은유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함께 발전했다. 이스라엘의 형성, 번창, 패망, 회복이라는 역사의 큰 주제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선택, 여호와와 이스라엘과의 계약, 여호와가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하심, 우상숭배를 범한 이스라엘을 여호와가 버리심, 자비와 긍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심이라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들과 일맥상통한다. 이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흐름은 사람들의 배우자 선택, 결혼, 동거, 이혼, 재혼 등의 결혼 은유로 묘사되고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신약의 결혼 은유 이해
구약에서의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 은유로 묘사한 것은 신약에 와서도 연속된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4.1.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교회’
요한은 예수의 첫 이적을 가나 혼인잔치에서 기록하고 있다(요 2:1-10). 왜 하필 예수께서 결혼 잔치집에서 메시아로서의 첫 표적을 보이셨을까? 이는 예수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앞으로 맺을 제자들 또는 교회와의 관계성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수 있다.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가 예수께 포도주가 없다고 알린다. 예수는 하인들에게 돌 항아리에 물을 갖다 채우라 하시고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심으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첫 번째 이적을 행하셨다. 하인들은 예수께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신 말씀을 따라 포도주를 잔에 담아 날랐다. 포도주를 맛 본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말했다. 연회장이 신랑을 부른 이유는혼인집에서 포도주를 대접할 의무가 ‘신랑’에게 있기 때문이다.
혼인집에서 있었던 이적을 자세히 기록한 요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요한복음에서 ‘혼인잔치’를 기술한 저자 요한은 그의 마지막 저서인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묘사한다(계 19:6-9).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다’(요 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공중에서 신랑이신 예수와 신부인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이 벌일 혼인잔치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29) 이로써 요한은 혼인잔치에서 포도주를 준비하여 대접할 의무가 신랑에게 있음을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신랑 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30)
공관복음서에 예수께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마 9:15, 눅 5:34)고 하신 말씀을 통해 예수 자신이 신랑이며, 신랑을 빼앗겨 금식할 대상은 예수와 함께 있는 무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결혼 은유는 또한 공관복음에 기록된 혼인잔치 비유(마 22:1-14)와 열 처녀 비유(마 25:1-13)에서도 나타난다.
마태복음 22:1-14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으로 묘사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 비유에 묘사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인 메시아 왕국 시대에 있을 친교와 사귐의 축제를 의미하며, 혼인잔치 참여를 거부하는 자들(마 22:3-6)은 여호와의 신부였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리고 후반부에 나오는 사거리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방인을 가리킨다.31) 여기에서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초청받은 이방인이라도 혼인잔치에 참여할 예복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에 관한 비유 중 하나인 열 처녀에 관한 비유에서도(마 25:1-13) 오랫동안 밤이 도록 기다렸던 신랑을 예수로, 신랑이 신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신부의 집으로 오는 때를 기다리는 열 처녀는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로 묘사하고 있다.32)
바울서신에서도 예수와 성도를 신랑과 신부로 묘사하는 본문이 있다. 고린도후서 11:2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소개하는 중매인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성도(또는 교회)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 정결한 처녀로 세워지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침례 요한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신랑의 친구라고 한 것과 같은 입장이다(요 3:22-30).33)
에베소서 5:21-33에서 바울은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와 교회의 관계로 비교하여 기술하고 있다.34) 바울은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1-32)고 말함으로써, 에덴에서 아담이 하와와 결혼하여 한 몸을 이룬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를 결혼 은유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여기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예수와 교회의 관계에 비교하여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복종할 것을 당부한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과 같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권위를 두어 복종하듯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몸을 찢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같이 남편은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하라고 바울은 권한다. 마지막으로 몸의 지체가 나뉠 수 없음같이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신약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연장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35)
4.2. 신부된 교회의 의미와 준비36)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은 성도는 자녀, 양, 가지, 집, 밭, 토기 등 여러 호칭을 갖는다. 이 가운데 성도가 얻는 제일 영광스러운 호칭이 바로 ‘자녀’와 ‘신부’일 것이다. 이는 천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므로 가장 부러워할 만한 호칭이다. 사람은 잠시 육체를 입어 수많은 제약을 받는 반면 천사는 사람보다 자유롭지만 그들을 위해서는 중보자나 거듭남에 관한 어떠한 약속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신부로 탄생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 이후로 신부가 신랑과 함께 모든 영화와 기쁨을 나누듯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영화와 기쁨을 나눈다. 또한 성도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는 말씀처럼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라 할 만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건이 벌어졌다. 그 범죄 후,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신 대목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신분이 이 세상에서 마귀와 대적해서 승리해야 할 ‘원수’됨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신부된 교회가 겪어야 할 고난의 양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37)
요한계시록 14:1-5에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아 그의 신부가 될 사람은 구속함을 입은 십사만 사천으로서 네 가지 특징을 갖는다고 말씀한다. 첫째, 그들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 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자들, 곧 세상의 온갖 음행과 간음을 피함으로써 처녀들처럼 정결함을 지킨 자들이다. 셋째, 그들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이며, 넷째로 그들은 사람들 중에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자들(롬 1:25)과는 달리 그 입에 거짓이 없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었던 까닭에 하나님께 바쳐지기에 합당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일반적으로 가정생활에 제일 중요한 책임 중 하나가 간음과 음행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반드시 심판하시리라 경고하셨다(막 10:11-12, 히 13:4). 신부의 책임은 자기 몸을 지키며 정절과 지조로 신랑께 바칠 거룩한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신부는 마귀가 세상에 던져 놓은 각종 유혹을 피하고 깨어 승리해야 한다(벧전 5:8).
5. 나가는 글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관계 중 ‘신랑과 신부’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이를 구약에서는 아담과 하와, 여호와와 이스라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로 살펴보았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얻기까지의 과정은 아담이 하와를 얻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리고 여호와의 신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정절과 지조와 인내함과 계약에 관한 성실함이다. 신부가 이러한 요구를 잘 지켰을 때 신랑의 사랑과 보호가 뒤따랐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성령과 함께하신 것처럼, 그의 신부된 교회의 공생애도 성령과 함께 진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라면 성령의 활동이 왕성히 나타나야한다. 성령의 은사가 거룩한 질서 속에 불일 듯 일어나고, 성령의 열매가 성도의 심령마다 무성하게 열려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내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남편이시다. 바울이 제언한 것처럼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에 복종하고 운영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야 한다. 교회의 구성원이 사람들이라 하여 사람의 요구와 뜻과 욕심에 휩쓸려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교회는 세상에 잠시 머물러 있다 해도 세상의 눈치를 보거나 세속화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여호와의 신부인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세속과 세파에 휩쓸려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여 버린 바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가 과거의 교훈을 무시하고 영적 간음과 음행을 범한다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로부터 버림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리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