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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역대 4대 미녀
1)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서시(西施)는 춘추시대의 월나라 미녀인데 미인계에 의해 오나라왕 부차에 보내집니다.
당시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월동주', '와신상담'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고사성어를 만들어낸 앙숙지간이였습니다. 서시는 얼굴이 얼마나 예뻤던지 그녀가 오나라로 보내지기 위해 궁궐로 들어올 때, 그녀를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서시를 태운 수레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궁전의 수비병은 그녀를 보고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미인계의 계락을 꾸민 월나라의 책사 범여는 서시를 구경하는데 돈을 내도록하였는데, 그 돈이 얼마나 많이 쌓였든지 그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서시는 월나라로 보내졌고 월나라왕 부차는 첫 눈에 서시에 반해버렸습니다.
부차는 그녀가 하고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게 했고, 특히 그녀는 뱃놀이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운하 공사를 벌여 오나라의 국력을 낭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서시는 어릴 적부터 가슴알이병이 있었는데 가슴이 아플 때마다 얼굴을 몹시 찡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시의 찡그린 모습은 오히려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움으로 나타냈고, 부차는 서시의 찡그린 얼굴에 넋이 나갈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궁전 밖으로 소문이 나자 어떤 못생긴 추녀가 자기도 예쁨을 받으려고 항시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인근 사람들은 그 추녀의 찡그린 모습이 보기 싫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일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린다는 빈축(嚬蹙)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합니다.
아무튼 오나라 왕 부차는 서시에 넋을 빼앗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의 세월을 보냈으며, 결국은 월나라의 구천에게 패망하여 자결하게 됩니다. 서시는 중국의 4대 미녀 중에 당나라 양귀비와 함께 2대 미녀로 손꼽히며, 서시를 주제로 한 연극과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항조우에서 40분에 그의 기념관이 있음.
*서시봉심(西施捧心)-무턱대고 남의 흉내를 내다가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옴
*범려
범려는 춘추 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책사로 3천의 군사로 당시의 대국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월나라가 패업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이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상업에 전념한 그는 상인의 원조로 꼽히기도 한다.
범려의 자는 소백(少伯)으로 초나라 완읍(宛邑)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월나라 대부 문종의 천거로 구천을 모시게 되었다. 정치, 군사, 경제, 천문, 지리 등의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구천의 중심 참모가 되었다.
기원전 494년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월나라의 국력은 오나라에 미치지 못했다. 범려는 구천에게 신중을 기하라고 간언했으나 구천은 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했다. 부초(夫椒)에서 오나라 군사와 대치한 구천은 오나라에 대패하여 5천의 군사와 함께 회계산으로 퇴각했으나 곧 포위되었다. 범려는 구천에게 문종을 사신으로 보내 오나라에 화의를 청할 것을 조언했고, 오왕 부차는 구천이 인질이 되는 것을 조건으로 화평에 동의했다. 오나라 상국(相國, 재상)이던 오자서는 화평을 극렬히 반대했으나 구천은 태재 백비에게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치고, 부차에게 수많은 미녀를 진상해 화의를 얻어 냈다.
기원전 493년 범려는 인질이 되어 오나라에 들어가는 구천을 따라갔다. 오나라에서 그들은 부차의 수레를 호위하는 등 노예처럼 일하고, 석실에 갇혀 생활했다. 부차가 범려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회유했지만 범려는 구천을 저버리지 않았다. 3년째 되는 해 범려는 구천에게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부차는 당시 수개월 동안 병석에 있었는데, 구천에게 부차의 병이 중병이 아니니 그를 찾아가 변을 맛본 후 곧 쾌차할 것이라고 이르게 한 것이다. 그 후 병석에서 일어난 부차는 구천의 행동에 감동하여 석실 감금을 풀어 주었다. 범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태재 백비로 하여금 구천을 옹호하게 하고, 부차의 환심을 사는 데 전력을 다했다. 얼마 후 부차는 오자서의 반대에도 구천과 범려의 월나라 귀국을 허락했다.
기원전 490년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끝까지 자신을 보필한 범려를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범려는 이를 사양하고 대신 문종을 추천했고, 이후 재상 문종과 함께 구천을 보좌하여 월나라의 부국강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인재 등용에 있어 남녀 구분을 두지 않았는데, 일례로 칼을 잘 쓰는 월녀(越女)와 초나라 출신의 활 제조 기술자 진음(陳音)을 등용했다. 그리고 농업과 길쌈을 장려하여 구천이 몸소 경작을 하고, 왕후가 직접 길쌈을 하는 등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게 했다.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상류층에게 고기 소비를 줄이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도록 하는 등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게 했다. 또한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남자아이를 출산하면 술 두 병과 개 한 마리를 상으로 내리고, 여자아이를 출산하면 술 두 병과 돼지를 상으로 내리는 등의 정책을 폈다.
외교 정책으로는 제나라·초나라와는 친교를 맺고, 진(晉)나라는 상국으로 모셨으며, 오나라에게는 무조건 무릎을 꿇어 안심시키고 태재 백비에게 계속 뇌물을 주어 오나라 왕 부차와 상국 오자서를 이간질했다. 이에 더해 전설적인 미녀 서시(西施)를 보내 부차가 향락에 빠지도록 하는 공작을 폈다. ‘섶 위에 누워 자고 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라는 의미의 고사 ‘와신상담(臥薪嘗膽)’은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돌아가며 서로의 치욕을 되새긴 데서 유래했다. 오왕 부차는 앞서 월나라를 습격할 때 입은 부상으로 아버지 합려가 죽은 후 섶 위에서 잠을 자며(臥薪, 와신) 복수를 다짐했고, 구천은 부차에게 받은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쓸개를 맛보며(嘗膽, 상담) 고통을 되새겼다
결국 기원전 473년 부차가 자결함으로써 오나라는 멸망했다. 오나라를 평정한 구천은 북진하여 서주(徐州)에서 제나라, 진나라와 회합을 갖고 패주가 되었으며, 범려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구천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범려는 “공(公)이 많으면 화(禍)가 뒤따라온다.”라며 구천의 만류를 뿌리치고 월나라를 떠났다. 그는 재산을 정리하여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제나라로 떠났다. 이때 범려는 문종에게 “나는 새를 잡으면 활은 곳간에 처박히고,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오.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새처럼 뾰족하니 고난은 함께하여도 즐거움은 함께 나눌 수 없는 사람이오. 이러할진대 어찌 구천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오?”라며 ‘토사구팽(兎死拘烹)’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 문종은 구천이 내린 검을 받고 자결했다.
2)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60년간 왕소군은 진정 흉노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서
한나라와 흉노는 전쟁이 없었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왕소군을 그리며 쓴 소군원이란 오언절귀 3편에 춘래불사춘이 나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오랑캐 땅에는 꽃도 피지 않으니
춘채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자연의 대와(自然衣 帶 緩)-옷의 띠가 절로 느슨해 지는 건
비시위요신(非是爲療身)-허리를 가꾸려 한 게 아니라네(고향이 그리워 )
3)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 사이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초선이란 뜻은-담비와 매미
4)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양귀비는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며,
현종의 혼을 빼고 자신의 친척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혼란시킴으로써 왕을 망하게 한다.
양귀비는 당 현종(685∼762)의 후궁이다.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인데 후에 귀비가 되어 양귀비라 한다.
양옥환은 원래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18번째 아들인 수왕 미모라는 왕자의 비였다. 수왕 미모는 왕의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왕자였다. 양옥환은 17세에 수왕에게 시집가 6년간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현종은 무헤비가 죽고 무척 외로워하고 있었다.
이에 환관 고력사가 미녀를 수소문하던 중 양옥환을 발견하고 현종의 술자리에 불러냈다.
이때 양옥환은 음악 애호가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선보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종은 끝내 양옥환을 차지하고 양옥환을 도가에 입문시켰다.
도가에 입문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옥환의 태진이라는 도가의 호를 딴 태진궁을 짓고 양옥환을 그곳에 살게 하였으며,
그곳은 현종과 양옥환의 사랑의 장소가 되었다. 이후 양옥환은 27세 때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는데, 당시 황후의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양귀비가 실질적인 황후였다.
성군이었던 현종은 양귀비를 맞은 후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고,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고 백성들의 삶도 몰락해갔다.
그러나 현종은 오직 양귀비에 빠져 양귀비를 위해 궁을 짓고 양귀비와의 사랑에만 관심이 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얼마나 예뻐했든지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하였다.
현종은 양귀비가 즐겨 먹는 여주를 2천리 밖에서 매일 가져오게 하는 등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것를 누리게 해주었다. 뿐만아니라 양귀비의 친인척을 관직에 대거 등용시켰다.
그리고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가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는데, 양국충은 절대적 부패권력이 되었으며 결국 '안사의 난'이 일어나게 하는 빌미가 된다.양귀비는 안록산과 매우 가까웠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을 정도였다. 그래서 일설에는 양귀비와 안록산이 부적절한 관계였다고도 한다.
어째튼 양귀비는 안록산을 총애하여 현종으로 하여금 안록산을 높은 지위에 등용케 하였다.
그러자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이 변방에서 난을 일으켜 장안까지 쳐들어오게 되니. '안사의 난'이다.
현종과 양귀비는 결국 피난길을 떠났는데 100여 리쯤 갔을 때, 성난 군중들과 호위병사들이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처벌하길 원했다. 이에 현종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음으로써 양귀비의 죽음을 택했다.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는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양귀비는 목매 자결하고 현종은 시체를 수습해 인근에 장사지냈다.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이후 현종은 아들 숙종에게 황위를 물려주어 안사의 난을 진압하게 하고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며 지냈다고 한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화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을 살다가 78세의 나이에 죽게 된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너무 아름다워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녀를 일본으로 도피시켰는데, 그곳에서 30여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 항시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으며, 언제나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끈한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