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계 김장생의(沙溪 金長生) 경학사상(經學思想)
―『경서변의(經書辨疑)』를 중심(中心)으로―
오석원(성균관대학교 유학과 조교수)
Ⅰ. 서론(서론)
경학(經學)은 유교(儒敎)의 근본정신이 담겨있는 경서(經書)에 대한 해석학이다.
이것은 곧, 오경(五經)을 비롯하여 십삼경(十三經)에 이르는 여러 경전(經典)과 송대(宋代) 이후 중요시된 사서(四書)를 포괄하는 광의의 경전학(經典學)이다.
이러한 경전의 해석은 좁게는 문자의 이동(異同)을 바로잡고 교감(校勘), 자의(字義)의 변동과 진위(眞僞) 등을 고증하는 훈고학(訓詁學)적 성격을 지니나,
넓게는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유교의 근본 정신을 규명하고, 다른 사상과도 비교하는 철학적 성격을 동시에 담고 있다.
만일 훈고학에만 치중하게 되면 학설의 전체적 내용을 간과(看過)하기 쉽고, 또한 철학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면 근거의 미약으로 그 학설이 불확실하게 된다는 점에서 어느 편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점에서 문자의 고증과 함께 철학적 해명으로서의 성리학(性理學)도 경학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덕목들은 그 내용이 함축적이기 때문에 개념정의에 있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문자의 고증문제와 함께 어느 개념을 중요시하고, 어느 경전을 중요시하며, 어떠한 방법으로 인식하고 체득하느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입장이 제기된다.
그러므로 경전에 대한 재해석은 개인과 시대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경학사상의 연구는 개인의 학문적 특성과 함께 그 시대의 사상사적 흐름을 조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대(漢代)의 훈고학(訓詁學), 송대(宋代)의 성리학(性理學), 청대(淸代)의 고증학(考證學)도 경전에 대하여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가한 것으로 중국 경학의 역사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철학과 경학이 일치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위와 같은 점에서 중국철학사의 대부분은 경학연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1936~1584)의 정통을 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학문은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이 그 중심을 이룬다.
사계(沙溪)가 생존하였던 당시는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정묘호란(1627),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 이괄(李适)의 난(亂: 1624) 등의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정치적・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궁핍이 극심하였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사계(沙溪)는 이욕(利慾)추구로 치닫는 가치관의 동요와 국가 사회의 질서와 기강의 해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예학(禮學)에 관심을 기울였다.『
상례비요(喪禮備要)』(1582),『가례집람(家禮輯覽)』(1599), 『의례문해(儀禮問解)』,『전례문답(典禮問答)』의 저술도 사계(沙溪)의 이러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와 고금(古今)의 의례(儀禮)를 참고하여 정밀한 분석과 고증을 통하여 예(禮)의 본질을 규명하고, 당시 상황의 시속(時俗)을 참고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실용적이고 주체적인 예(禮)를 모색하여 올바른 규범과 정통성의 확립으로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개인의 행위 규범과 사회질서로서의 제도가 현실에 구체화된 것이 예(禮)라 한다면 그것의 실천원리를 이론적으로 밝혀주는 것일 사계에 있어서 그의 경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계(沙溪)에 대한 기존 연구와 평가가 예학(禮學)에 치중되어 왔음을 볼 때 그의 사상적 특징을 이해하기 위하여 경학사상에 대한 연구가 더욱 요청된다.
『경서변의(經書辨疑)』는 사계의 경학사상과 아울러 그의 성리학적 특징을 고찰해 볼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사계(沙溪)의 『경서변의(經書辨疑)』를 중심으로 사계(沙溪)가 경전을 문헌적으로 어떻게 고증하고 있으며, 퇴계(退溪)와 육곡(栗谷)의 뒤를 이어 어떠한 독자적 견해를 갖고 있는가 구명(究明)해 보는 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다. 훈고학적 측면과 사상적 측면을 대별하여 그의 경학사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Ⅱ. 『경서변의(經書辨疑)』의 체제
『경서변의(經書辨疑)』는 만년인 71세(1618) 때에 저술된 것으로, 경전에 대하여 깊이 궁구하면서 몸소 실천하고 체득한 내용을 위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 저서 속에는 그의 완숙기의 사상이 온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저서를 통하여 그의 경학사상과 유학 본연의 학행일치(學行一致)를 일관되게 실천한 그의 철학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경서변의(經書辨疑)』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사계(沙溪)는 자서(自序)에서 말하기를
경전을 읽다보니, 해득되지 않는 바가 많고, 여러 선생의 학설에 있어서도, 때로는 의심나는 바가 있어 억지로 좇을 수가 없어서 그 때마다 적어놓고 공부하는 자료로 삼았다.
고 하였다. 즉 저술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도움이 되고 자한 것으로 끝까지 각고한 그의 면학정신을 알 수 있다.
간행(刊行)에 대해서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발문에 의하면 본래 8권이었던 것을 1666년에 7권으로 초간(初刊)하였음을 알 수 있고, 1922년 간행시에는 6권으로 되었으며, 1978년 영인된 『사계(沙溪)・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에는 권11에서 권16까지 되어 있다. 권수의 변동이 있으나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경서변의(經書辨疑)』의 체제와 편성은 『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서전(書傳)』,『주역(周易)』,『예기(禮記)』 등의 순서로 되어 있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시경(詩經)〉과 〈춘추(春秋)〉는 제외되어 있다.
각 항목의 구성은 경서의 본문과 주자(朱子)의 주(註) 및 소주(小註) 등에 대하여 의문점있는 조목을 맨 위에 제시하고 한 칸 아래에 주제와 관계되는 제가(諸家)의 학설과 여러 문헌의 근거를 인용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각 경서의 구체적 체제는 다음과 같다.
『소학(小學)』은 내외편(內外篇) 총 386장 가운데 53장에 대하여 논변(論辨)하고 있다.
『원본 소학집주(原本 小學集註)』 속에는 『소학집주총론(小學集註總論)』으로 되어 있는데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는 〈독법(讀法)〉으로 기재되어서 6조목으로 변의(辨疑)되어 있고, 제사(題辭)(1), 서제(書題)(2), 내편(內篇)의 입교(立교)(6), 명륜(明倫)(21), 경신(敬身)(6), 계고(稽古)(2), 외편(外篇)의 가언(嘉言)(11), 선행(善行)(15) 등 모두 70조목이다.
정경세(鄭經世)의 설(說)이 10회로 가장 많이 인용되었고, 율곡(栗谷), 퇴계(退溪), 장유(張維)의 설(說)과 중국의 오씨(吳氏), 진씨(陳氏), 유씨(劉氏), 여씨(呂氏) 등이 2회이상 인영되었다.
대부분 경문(經文)의 본지(本旨)와 자의(字義) 그리고 제가(諸家)의 주(註)에 대하여 여러 문헌과 전적을 근거로 하여 문학의 이동(異同)과 의미, 본문(本文)과 본문주(本文註)의 내용과 의미를 조목을 따라 해석하였다.
문자의 고증은 『설문(說文)』,『이아(爾雅)』,『운회(韻會)』 등의 책을 주로 인용하였다.
『대학(大學)』은 경(經)1장과 전(傳)10장 가운데 주자(朱子)의 서문(序文)(6), 경문(經文)(12), 전문(傳文)(41)의 59조목과 『대학혹문(大學或問)』 14조목을 합하여 총 73조목을 변의(辨疑)하였다. 특히 경문(經文)의 「재명명덕(在明明德)」의 소주(小註)와 「격물물격(格物物格)」 그리고 전(傳)6장의 「성의(誠意)」와 전(傳)8장의 「오타(傲惰)」의 소주(小註) 등에 대하여 자세히 논변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그의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율곡(栗谷)(15회), 정경세(鄭經世)(8회), 장유(張維)(6회), 옥계노씨(玉溪盧氏)(17회), 운봉호씨(雲峯胡氏)(5회) 등의 설(說)의 주로 인용하였다.
『논어(論語)』는 총20편(篇), 521장(章) 가운데 세가(世家)(1), 독법(讀法)(1), 학이(學而)(5), 위정(爲政)(5), 팔일(八佾)(2), 이인(里仁)(1), 공야장(公冶長)(1), 옹야(雍也)(2), 태백(泰伯)(1), 자한(子罕)(1), 향당(鄕黨)(1), 안연(顔淵)(2), 자로(子路)(2), 헌문(憲問)(1), 계씨(季氏)(1), 양화(陽貨)(3), 미자(微子)(2), 자장(子張)(2), 요왈(堯曰)(2) 등 총 36조목을 변의(辨疑)하였다. 경문(經文)의 문자(文字)에 대한 자훈(字訓), 정오(訂誤)에 대한 고증, 경문(經文)의 본지(本旨), 주자(朱子)와 제주(諸註)에 대한 해석에 관한 것이 중심을 이루며, 주로 퇴계(退溪)(5회) 율곡(栗谷)(2회), 정경세(鄭經世)(4회) 등의 설(說)을 많이 인용하였다.
『맹자(孟子)』는 7편(篇) 261장(章) 가운데 양혜왕장구상(梁惠王章句上)(5), 하(下)(2), 공손축상(公孫丑上)(10), 하(下)(1), 등문공상(縢文公上)(9), 하(下)(4), 이루상(離婁上)(3), 하(下)(2), 만장상(萬章上)(3), 하(下)(1), 고자상(告子上)(4), 하(下)(5), 진심상(盡心上)(2), 하(下)(2) 등 총 38장 53조목을 변의(辨疑)하였다.
경문(經文)과 주(註)에 대하여 퇴계(退溪)(5회), 율곡(栗谷)(6회), 정경세(鄭經世)(3회), 장유(張維)(2회) 등의 설(說)을 인용하여 논하고 있다.
『중용(中庸)』은 총 33장(章) 가운데 독법(讀法)(2), 서(序)(3), 1장(章)(10), 2장(章)(2), 4장(章)(1), 12장(章)(6), 13장(章)(2), 14장(章)(1), 16장(章)(2), 19장(章)(4), 20장(章)(5), 25장(章)(1), 26장(章)(4), 27장(章)(1), 32장(章)(1), 33장(章)(1) 등 전체 17개의 장(章) 46조목과 혹문(或問) 59조목을 합쳐 총 105조목을 변의(辨疑)하고 있다.
특히 제1장(章)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계신공구(戒愼恐懼)」,「신독(愼獨)」,「군자지도(君子之道), 비이은(費而隱)」등에서는 철학적 내용에 대하여 많은 비중을 두어 논변하고 있다. 또한 〈혹문(或問)〉에서는 소목지소(昭穆之昭)와 도궁(都宮)에 대하여 종묘도(宗廟圖)를 비롯한 26개의 도표를 제시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퇴계(退溪)(21), 율곡(栗谷)(11), 정경세(鄭經世)(6), 장유(張維)(5), 쌍봉요씨(雙峯饒氏)(13), 신안진씨(新安陳氏)(9) 등을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쌍봉요씨(雙峯饒氏)의 이분설(二分說)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서전(書傳)』은 총58편(篇) 가운데 37편(篇) 107조목을 변의(辨疑)하였다.
대부분 경문(經文)과 소주(小註)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우공(禹貢)편의 지리(地理)에 대한 고증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신흠(申欽)(11), 퇴계(退溪)(4), 임숙영(任叔英)(3) 등의 설(說)을 많이 인용하였다.
『주역(周易)』은 64괘(卦)와 십익(十翼) 가운데 49괘(卦) 114조목과, 서(序)(2), 상하편의(上下篇義)(1), 도설(圖說)(1), 오찬술지(五贊述旨)(1), 강령(綱領)(1), 계사전(繫辭傳)(9), 설괘전(說卦傳)(5) 등 총128조목을 변의(辨擬)하였다.
주자(朱자)의 〈본의(本義)〉와 정자(程子)의 〈전(傳)〉을 고르게 인용하여 해석하였으며, 최읍(崔읍)(5), 퇴계(退溪)(4) 등의 설(說)을 많이 인용하였다.
『예기(禮記)』는 총48편(篇) 가운데 26편 228목을 변의(辨疑)하였다. 예(禮)에 관한 내용은 『의례문해(疑禮問解)』등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여기에서는 다만 자훈(字訓)과 문자의 정오(訂誤)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며, 특히 〈단궁(檀弓)〉 상(上)편 「련련의(練練衣)」 주(註)인 소상(小祥)의 상복에 대하여 많은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고례(古禮)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밝혔다.
또한 〈상대기(喪大記)〉편에 「위처구월지상(爲妻九月之喪)」에 대해서는 퇴계(退溪)의 설(說)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대부분 경전 본문의 해석과 고증문제를 안(按)으로 처리하였으며 퇴계(退溪)(4회)의 설(說)을 자주 인용하였다.
이상(以上)으로 볼 때, 훈고학적 고증은 『소학(小學)』과 『예기(禮記)』 등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철학적(哲學的) 내용은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서 많이 취급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의 『경서변의(經書辨疑)』에 나타나는 경학사상의 특징은 소학(小學)을 중심으로 한 여러 경전에서 그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속에서 나타난 사계(沙溪)의 이기론(理氣論), 심성론(心性論), 인식론(認識論), 수양론(修論) 등의 철학적 특징을 알아보기로 한다.
Ⅲ.『경서변의(經書辨疑)』에 나타난 철학적 성격
사계(沙溪) 경학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성리학적 이론 구조는 『경서변의(經書辨疑)』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조에 담겨져 있다.
여기서는 그의 실천 윤리사상의 이론적 기반에 초점을 맞추어 살피고자 한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發)하게 하는 소이연(所以然)이 이(理)」라는 이기(理氣)의 개념과 「이(理)와 기(氣)는 일물(一物)이라는 할 수도 없고, 이물(二物)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으므로 일(一)이면서 이(二)이고, 이(二)이면서 일(一)이다」라는 「이기지묘(理氣之妙)」로서의 상호 관계성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동정(動정)문제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등은 대체로 율곡(栗谷)의 설(說)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훈율무간(훈율無間)으로서의 이기(理氣)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대학(大學)〉에 나타난다.
『대학(大學)』 수장(首章) 「재명명덕(在明明德)」 소주(小註)에 북계진씨(北溪陳氏)가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남에 천지(天地)의 이(理)를 얻고 또 천지(天地)의 기(氣)를 얻었으니 이(理)와 기(氣)가 합하여 허령(虛靈)하다.
라고 한 데 대하여 사계(沙溪)는 두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인데 만약 진씨(陳氏)의 설(說)과 같다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이(理)와 기(氣)가 서로 합(合)해있지 않다가, 처음 태어나는 순간에 합(合)해진 것이니, 이(理)와 기(氣)의 불상리(不相離)라는 원리상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만물도 이러한 원리는 마찬가지인데 인간만 지적해서 허령(虛靈)하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만물이 천지의 이(理)와 기(氣)를 얻은 것은 다 같으나 다만 출생후 이(理)가 기(氣)에 가리어지고 덮여진 때문에 차이가 있을 뿐인데 다만 이(理)와 기(氣)를 얻은 것만으로 허령(虛靈)하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계(沙溪)가 지씨(陳氏)의 설(說)에 나타난 이(理)와 기(氣)관계에서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한 것이며, 동시에 이(理)와 기(氣)는 본래부터 떨어질 수 없는 혼융무간(渾融無間)의 존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理)와 기(氣)의 체용일원적(體用一源的) 입장을 주장하고 있는 사계(沙溪)로서는 쌍봉요씨(雙峯饒氏)나 운봉호씨(雲峯胡氏)의 설(說)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지나치게 분석적이며 이분법적(二分法的)이라는 율곡(栗谷)의 비판을 수용하고 있다.
심성설(心性說)에 있어서도 사계(沙溪)의 기본입장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한 설명에서 논리상 심(心)을 구별하여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으로 나누지만 결국 하난의 심(心)의 작용일 뿐이라고 하여 대체로 율곡(栗谷)의 설(說)을 따라 칠정(七情)이 형기(形氣)에서 발(發)하면 인심(人心)이 되고, 의리(義理)에서 발(發)하면 도심(道心)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 있어 율곡(栗谷)이 「인심(人心)에서 발(發)하여 도심(道心)이 되고 도심(道心)에서 발(發)하여 인심(人心)이 될 수 있다」
는 인심도심종시설(人心道心終始說)에 대하여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인심(人心)에서 발(發)하여 도심(道心)이 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도심(道心)에서 발(發)하여 인심(人心)이 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였다.
만약 도심(道心)이 전환하여 인심(人心)이 된다면 곧 이것은 인욕(人慾)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하나의 심(心)으로 파악하는 율곡(栗谷)의 논리구조와 같은 입장이면서도 도심(道心)을 강조하여 인욕(人慾) 인한 자기 상실을 막고자 하는 강한 가치의식이 담겨져 있다.
인식론(認識論)에 있어서도 사계(沙溪)의 특징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유학에서 인식론 문제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서 볼 수 있는데 나의 지식을 끝까지 미루어나가는 것이 치지(致知)이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나가는 것이 격물(格物)이다.
그리하여 나의 지(知)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이 지지(知至)이며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이 물격(物格)이다.
율곡(栗谷)은 물격(物格)과 지지(知至)는 물리(物理)와 오심(吾心)의 입장에 따라 이름이 다를 뿐, 인식이 궁극처(窮極處)에 이른 경지는 하나라고 하였다.
사계(沙溪)는 이러한 율곡설(栗谷說)을 존중하면서도 사물의 이치가 본래 나의 마음에 갖추어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인식능력의 선험성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사물의 이치와 인간에게 본유(本有)한 내심(內心)의 이치가 본래부터 같다는 입장에서 다만 사람들이 궁구하지 않기 때문에 가리어질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이 인식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가 결정한다는 것이다.
곧 인식의 주체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 있다는 의미로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 사계(沙溪) 인식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수양론(修養論)에 있어서도 사계(沙溪)는 가치실현을 위하여 먼저 마음이 발하는 바를 성실(誠實)하게 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意志)를 중요시하고 있다.
마음이 조용하고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은 성(性)이요, 마음이 느끼어 통(通)하는 것은 정(情)이요,
마음이 느끼는 바에 따라 실마리를 찾아 생각하고 운용(運用)하는 것이 의(意)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을 선(善)하게 하려는 자유로운 의지로서 《대학(大學)》의 성의(誠意)를 강조한 것이다.
성의(誠意)에서 의(意)가 선악(善惡)을 말한 것이 아니고 호악(好惡)를 말한 것으로 사계(沙溪)는 이해하여 선악(善惡)이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불급(過不及)이 있으면 악(惡)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마땅히 기뻐할 때 기뻐하면 선(善)이요,
마땅히 기뻐하지 않아야 할 때 기뻐하면 악(惡)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善)을 실현하기 위하여는 이 존심양성(存心養性)의 구체적 내용이 계신공구(戒愼 恐懼)와 신독(愼獨)이라 할 수 있다.
사계(沙溪)는 특히 이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 대해서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중용(中庸)』의「막현호은(莫見乎隱)」장(章)의 주(註)에서 호계수(胡季隨)가 계구(戒懼)는 희로(喜怒)가 미발시(未發時)에 함양(涵養)하는 것으로 정(정)에 속하고, 신독(愼獨)은 이발시(已發時)에 성찰(省察)하는 것으로 동(動)에 속한다고 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계구(戒懼)는 정(靜)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동정(動靜)을 겸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朱子)도 초년(初年)에 호씨(胡氏)의 설(說)을 수용하였고, 율곡(栗谷)도 찬성하여, 후대에는 대부분 동정(動정)으로 나누어보고 있다.
주자(朱子)의 만년설이라 할 수 있는 중용주(中庸註)에 나타난 「상존경외(常存敬畏)」를 보면 마땅히 동정(動정)이 포함된 내용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계구(戒懼)와 신독(愼獨) 어느 때든지 적극적인 수양(修養)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실천적 수양방법을 강조한 사계사상(沙溪思想)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Ⅳ. 사계 경학사상(沙溪 經學思想)의 특징
앞에서 살펴본 것 같이, 실천윤리를 지향하는 사계(사계)의 철학적 이론 기반은 일생 동안 그의 삶을 통해 구현되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는
학문의 근본은 경(敬)을 주로 해야 한다. 남이 안보는 데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 공부가 제일이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은 일생동안 각고 면려한 경전연구의 태도와 그 결정으로 나타난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계(沙溪)는,
학문의 도는 성인의 말을 토론하여 그 의리의 치밀함을 탐구하여, 몸에 체득하여, 사실에서 경험하고, 무사시(無事時)에는 마음이 혼연(渾然)히 성성(惺惺)하게 깨어 있어 마음이 산수(山水)와 같고, 유사시(有事時)에는 공사(公私) 의리를 분별 성찰하여 사심(私心)을 극복하고 선(善)을 확립하여야 한다.
라고 하였다. 즉 성현의 말을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의리를 탐구하여 경험적으로 체득하고 사실에 증험한 확실한 지식으로 행위의 근본으로 삼았다.
위와 같은 것을 실천하기 위한 경전공부의 순서를 사계(沙溪)는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으로 본근(本根)을 북돋고 문로(門路)를 연뒤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차례로 공부하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특히 사계(沙溪)가 『소학(小學)』과 예(禮)에 대해서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올바른 예(禮)의 실천을 위한 『소학(小學)』공부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사계(沙溪)는 『소학(小學)』을 매우 중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아 실천하였다.
『소학(小學)』은 주자(朱子)가 문인 유자징(門人 劉子澄)에게 명(命)하여 1187년에 편찬한 책이다.
소년들의 초학(初學) 교재로서 일상생활(日常生活) 가운데 윤리 실천을 강조한 수신서(修身書)이다.
고문(古文)의 선현(先賢)과 여러 문헌속에서 입신(立身), 명륜(明倫), 경신(敬身)에 관한 글을 뽑아, 이론과 실제를 내편과 외편으로 분류하여 체계화 시킨 글이다.
주자(朱子)는 직접 〈소학서제(小學書題)〉와 〈소학제시(小學提示)〉를 책머리에 만들어 놓았으며 이 『소학(小學)』에 수신(修身)의 대법(大法)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소학(小學)』은 일상생활(日常生活)에서의 구체적 행동규범을 밝힌 것이요, 『대학(大學)』은 이러한 행위의 원리를 궁구(窮究)하는 것이라고 하여 『소학(小學)』과 『대학(大學)』과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다.
『소학(小學)』은 송대(宋代)이후 수양서(修養書)로서 중요시하였으며 특히 원대(元代)의 허형(許衡)은 『소학(小學)』을 신명처럼 믿고 부모(父母)처럼 존경하였다.
조선에서도 『소학(小學)』은 여말 성리학이 수입된 뒤로 도학파에서 매우 중요시 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자처하였으며, 조광조(趙光祖)는 『소학(小學)』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풍속(風俗)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김안국(金安國)는 『소학(小學)』을 간행(刊行)하였으며, 율곡(栗谷)은 『소학(小學)』과 사서(四書)를 합쳐 오서(五書)라 불렀으며 『소학제가집주(小學諸家集註)』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사계(沙溪)는 『소학(小學)』이 인윤일용(人倫日用)에 절실한 것이며 강령(綱領)이 가장 좋으므로 학문을 하는데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고 군왕(君王)에게 까지 권고하였으며,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가례(家禮), 소학(小學)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항상 강조하고 실천하였다.
또한 여러 문헌과 제설(諸說)을 종합 비판하고, 엄밀한 고증을 통하여 독창적 견해를 밝혔는데 그의 만년 저작인 『경서변의(經書辨疑)』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사계(沙溪)의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과 집중적인 연구의 성과는 1694년 발간된 『소학집주(小學集註)』에 〈소학집주교정(小學集註校訂)〉으로 그의 학설이 16개 조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소학집주총론(小學集註總論)』에서 허씨(許氏)의「소학대의기략(小學大義其略)」의 아래에 붙은 왈자(曰字)가 구본(舊本)에는 없다.
2)〈입교(立敎)〉 2장의 「택어제모여가자(擇於諸母與可者)」에서 가(可)는 열녀전(烈女傳)에 아(阿)로 되어 있으니 곧 아보(阿保; 乳母)이다.
3)〈입교(立校)〉 3장의 「교이우수(敎以右手)」의 우수(右手)를 주(註)에서는 「취기편(取其便)」으로 해석 하였는데, 이는 오씨본주(吳氏本註)에 의거하면 「취기강(取其强)」으로 해야한다.
4)〈명륜(明倫)「명부자유친(明父子有親)」 1장의 「개패용취(皆佩容臭)」에서 용취(容臭)는『시경(詩經)』 대아(大雅)의 공유편(公劉篇)의 「봉용력(琫容力)」주(註)를 참고할 때 향주머니로 해석함이 옳다.
5)<륜(明倫)> 명부부지별(明夫婦之別)」 3장의 「집지이상견(執摯以上見)」 주(註)에「수부모지친(雖父母之親)」이라고 하였는데, 「부모지친(父母之親)」이 아니라 「부자지친(父子之親)」이라고 해야 한다.
6)<신(敬身)> 명위의지칙(明威儀之則)」 6장의「무순왕(毋循枉)」주(註)에「시이과의(是二過矣)」라고 하였는데, 이(二; 두 번이라는 뜻)는 마땅히 이(貳; 거듭한다는 뜻)로 하여야 한다.
7)<언(嘉言)>광명륜(廣明倫)」 5장의 「병와어상(病臥於床), 위지용의(委之庸醫), 비지불자불효(比之不慈不孝)」에 대하여 제가(諸家)의 주(註)는 병들어 침상에 누운 것이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이자수어(李子粹語)』에는 병와(病臥) 위에 신자(身字)가 있으며, 『예기(禮記)』의 주자주(朱子註)에도 아래로 후세(後世)를 전하지 못하므로 불자(不慈)로, 위로는 선조(先祖)를 받들지 못하므로 불효(不孝)에 비교된다고 하였으므로 마땅히 자식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8)〈가언(嘉言)〉 9장의 「영진이일미(令進二溢米)」의 주(註)에 「일(溢), 이십사분승지일야(二十四分升之一也)」라고 하였는데, 다른 주(註)에 일(溢)을 쌀 1되 이 외에 또 1/24이 있다고 하여, 한 되의 1/24이라는 『소학(小學)』의 주(註)와 다르다.
아마도 『소학(小學)』의 주(註)가 맞는 것 같으나 너무 적어서 의심스럽다.
장유(張維)가 한대(漢代)의 8승(升)은 지금의 2승(升)에 해당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코 옳지 않다.
9)〈가언(嘉言)〉 18장의 「유안례(劉安禮)」 주(註)에 유(劉)의 자(字)가 입지(立之)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명(名)이다.
10)〈가언(嘉言)〉 19장의 「불비기대부(不非其大夫)」 주(註)에 주씨왈(朱氏曰)이라고 하였는데 주씨(朱氏)가 아니라 주자(朱子)이다.
11)<언(嘉言)>업하풍속(鄴下風俗)」의 주(註)에 「조청알인어외(造請謁人於外)」라고 하였는데 청(請)아래에 마땅히 위자(謂字)가 있어야 한다.
12)〈선행(善行)〉「보입교(보立敎)」 7장의「람전여씨(藍田呂氏)」 주(註)에「형제사인 장대중(兄弟四人長大中)」이라고 하였는데 『언행록(言行錄)』을 살펴보면 대중(大中)은 마땅히 대충(大忠)이라고 해야한다.(대충(大忠)의 자(字)는 진백(晋伯)이다)
13)〈선행(善行)〉 「실명륜(實明倫)」 12장의 「급암(汲黯), 경제시(景帝時)」 주(註)에 「태자출견(太子出見)」이라고 하였는데, 견(見)은 마땅히 칙(則)으로 해야 한다.
14)〈선행(善行)〉 21장의 「기기의조(冀其意阻)」에서 저(阻; 막히다)는 타본(他本)에는 저(沮; 저지하다)로 하였으니 마땅히 살펴 보아야 한다.
15)〈선행(善行)〉 35장의 「중군측유(中裙廁牏)」에서 주(註)에는 측유(廁牏)는 몸에 가까운 적은 적삼(小衫))이라고 하였는데 『운회(韻會)』를 살펴보면 투는 뒷간의 인분(人糞)을 받는 변기를 말한다. 그러므로 아랫 문장과 연결해 볼 때 대개 속옷(中裙))을 빨고(浣), 뒷간을 씻어내는(걸) 것이므로 주(註)의 설명이 잘못되었다.
16)〈선행(善行)〉 42장의 「생상하서무휴기(生祥下瑞無休期)」에서 휴(休)는 다른 책에시(時)로 되어 있는데, 한유(韓愈)의 문집(文集)을 살펴보면 시(時)가 옳다.
(진선(陳選)의『소학집주(小學集註)』에는 무휴기(無休期)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하는 『소학(小學)』에는 무시기(無時期)로 되어 있음).
이상에서 볼 때 대부분 문자의 이동(異同)을 확정한 교감(校勘)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경전 이해에 있어서 실증적으로 사실을 파악하려는 객관적인 태도는 『경서변의(經書辨疑)』의〈논어(論語)〉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논어(論語)』자로편(子路篇)의「남인유언(南人有言)」주(註)의「수천역(雖賤役), 우불가이무상(尤不可以無裳)」에 대하여 우(尤)는 문세로 보아 맞지 않으며 마땅히 우자(우자)로 고쳐야 함을 『시(詩)』․『서(書)』․『역학계몽(易學啓蒙)』등 여러자료를 인용하여 고증하고 있다.
이것은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군왕(君王)에게 질정(叱正)을 구하기도 하였으니, 사계(沙溪)의 확신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예(禮)문제에 이르러서 더욱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계(沙溪)는 또한 경전에 대하여 선현의 설(說)을 그대로 묵수하는 태도가 아니라 비판을 통해 주체적 입장에서 경문(經文)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경서변의(經書辨疑)』의 서문(序文)에 보면
어떤이가 묻기를 선정(先正)의 가르침을 후학으로서 존신(尊信)해야 하거늘 감히 논의 하는 것은 불가(不可)하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기를 의리를 강론함은 천하의 공공(公共)한 일이요, 선현도 또한 허락한 것이다.
대개 『중용(中庸)』․『대학(大學)』의 『혹문(或問)』에서도 볼 수가 있으니 어찌 감히 이것으로 선정(先正)보다 많은 것을 구제하겠는가?
다만 제공(諸公)과 더불어 토론하여 그 시비(是非)를 바르게 할 뿐이니 무엇이 해롭겠는가?
라고 하였다. 사계(沙溪)의 이러한 생각은 또한 『소학(小學)』 가언편(嘉言篇)의 정이천 사물잠(程伊川 四勿箴)에 대하여, 스승인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1534~1599)이 주자(朱子)의 설(說)을 인용하여 「습여성성(習與性成)」의 성(性)이 본연지성(本然之性)임을 설명하였는데 사계(沙溪)는 이를 주자(朱子)의 본지(本旨)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비판 수용하고 있다.
『소학(小學)』 경신편(敬身篇)의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에 대하여도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 구용(九容)을 이(理)라고 주장한 설과, 율곡(栗谷)이 구용(九容)은 이(理)가 아니고 발동(發動)한 것 곧 기(氣)라고 주장한 설을 열거하여, 마땅히 활간(活看)하여 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위와 같은 예는 사계(沙溪)가 비록 스승의 설이라도 묵수하지 않는 주체적인 학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계(沙溪)의 학문 태도에는, 학문을 강론함에 있어 비록 문인이나 후생(後生)의 설(說)이라도 장점이 있으면 수용하는 개방정신(開放精神)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경서변의(經書辨疑)』에 인용된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장유(張維; 1587-1638), 정엽(鄭曄; 1563-1625), 신흠(申欽; 1566-1628), 임숙영(任叔英; 1576-1623), 등 많은 학자들이 대부분 문인이거나 연하(年下)의 인물들이다.
특히 정경세(鄭經世)와는 학문적 입장을 달리 하면서도
예학(예학)이 퇴계(퇴계)보다 나으며 금일(금일)에 있어, 더불어 학문을 논할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다.
라고 칭하였으며, 그의 학설을 가장 많이 인용하여 시비(是非)를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개방적이고 객관적인 학문 태도로서 경학을 주체적으로 해석하여 이해하고 심신에 체득하여 몸소 실천한 점은 사계(沙溪) 경학사상이 지니는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유(張維)는 사계(沙溪)에 대해서 말하기를
세상에 글 읽는 이가 많지만 능히 의문점을 아는 자는 드물다.
아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서도 능히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한 연후에 의심이 있고, 의심이 있어서 문변(問辯)이 있는 것이다.
문변(問辯)하여 자득(自得)함이 있은 연후에 행동(行動)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논어(論語)』의 ‘절문근사(切問近思)’의 뜻이니, 사계(沙溪)는 이같은 태도를 지녔다.
라고 평하였던 것이다.
Ⅴ. 결론 (結論)
『경서변의(經書辨疑)』에 나타난 사계(沙溪)의 경학사상은 경전의 자구(字句)에 대한 훈고학적 해석을 제외하면 대부분 주자(朱子)의 주(註)에 관한 제설(諸說)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주자(朱子)의 본지(本旨)에 접근하고자 하는 이러한 노력은 비록 제설(諸說)에 대한 논변(論辯)을 통해 그의 사상을 담고 있지만 주자학(朱子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퇴계(退溪)와 율곡(栗谷)에 의하여 주자학(朱子學)이 이론적으로 분석되고 실천적으로 이행되면서 주체적인 한국유학이 정립되는 시대상황을 간과해서는 안될 줄 믿는다.
사계(沙溪)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체용일원적(體用一源的) 논리를 기반으로 이(理)와 기(氣)가 본래부터 떨어질 수 없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있어서도 하나의 심(心)으로서 파악하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도심(道心)을 중요시하여 인욕(人欲)에 떨어지는 자기 상실을 경계하고 있다.
또한 인식론에서 인식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두어 실천 주체를 확립하고, 수양론(修養論)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지속적인 인격의 함양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계(沙溪)의 철학적 성격은 예학(禮學)으로 이어지는 이론적 기반이며 실천윤리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계(沙溪)의 경학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소학을 중시하여 평생의 준칙으로 삼아 실천한 점이다.
2)경전이해에서 실증적이고 고증적인 객관적 학문정신이다.
3)선현의 설을 그대로 묵수하는 것이 아닌 주체적 학문 태도이다.
4)문인이 후생의 설이라도 장점이 있으면 수용하는 개방정신이다.
사계(沙溪)가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제기하고 있는 여러 논변들은 정경세(鄭經世)가 「김사계경서의문변론(金沙溪經書疑問辨論)」을 지어 재론하였고 한원진(韓元震; 1682-1751)이 지은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에서도 그 내용을 인용하여 자세히 변론하고 있다.
특히 사계(沙溪)의 주자주(朱子註)에 대한 견해는 제자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영향을 주어 주자(朱子)의 초만설(初晩說)을 구별하여 논증하는 작업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로 이어졌고, 계속해서 한원진(韓元震)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를 편찬하여 치밀하게 고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계(사계)의 『경서변의(經書辨疑)』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