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7세기의 동아시아의 인형극 尹 光 鳳*
Ⅰ. 서 문 한국을 축으로 한 중국과 일본 등 세나라의 관계는 지금까지 부침을 거듭한 끈끈한 관계에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들 중 역사가 가장 오랜 나라인 중국은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고 가는 중심 국가였다. 일찌기 중국은 광활한 대지에 수많은 인구를 이끌며 세계인들과 교류하여 그 영향을 수수했다. 특히 唐代엔 각국의 문화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는 정책에 의해 문화적 교류를 꾀했는데, 멀리 이태리를 비롯해 인도 등 서역은 물론 가까운 한국과 일본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 이때 한국은 고구려와 三韓이 중국과 교류하여, 악무의 경우 고구려는 거의 같은 수준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백제 음악이 중국에 전입되어 國伎로 되었고, 이것은 다시 일본에도 영향을 주어 궁정 음악으로 정착되기도 했다. 隋唐 양대에 이르러서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이른바 九部樂 十部樂의 하나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한국과 일찍부터 교통이 있어온 일본도 漢․魏六朝로부터 관계를 맺어 中國의 樂伎가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唐代엔 13次나 遣唐使를 보냈는데, 이때 일정수의 音聲長과 音聲生을 포함할 정도였다.1) 이렇듯 삼국은 일찍부터 불편한 교통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2) 그러나 세월이 바뀌면서 이 세나라는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해 각기 수수된 문화들을 그들식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랜동안 중국에 대해 朝貢으로 일관한 한국은, 문화 전수국으로서의 긍지만을 일관하여 일본에 대해선 항시 문화가 낮은 나라로 폄하시했고, 중국은 대국으로서 그동안 축적된 문화에 자만을 했다. 이러는 사이 일본은 어느듯 서양의 발전에 눈을 돌리고, 먼저 개화를 시도해 두 나라를 뛰어넘어 결국 문화의 선진을 이룩했다. 언제나 문화전달자로서의 자긍심만 갖고 있다간, 중국이나 한국이 더 쳐질 수밖에 없다. 문화의 국경이 없어진 현실에서 그것은 더욱 그렇다. 따라서 이러한 때일 수록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곰곰히 되뇌일 필요가 있다. 실상 전통연희의 경우, 그 전승과 보존은 일본이 두 나라를 앞서고 있음을 현장을 가보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일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디선가 열리는 일본의 마쯔리를 보게 되면, 外侵으로 피폐되었던 우리의 과거 조국과, 거창한 구호로 일관했던 위정자들의 허풍이 새삼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반면 사상적으로 외골된 정책으로 둔화되긴 했어도 옛부터 이어온 수많은 전통연희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중국의 경우도, 같은 민족인 대만과 더불어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이들 나라는 이를 전승하는 그룹이 비록 낮은 계급에 있었어도 자긍심을 잃지 않게 했다. 우리의 경우도 믈론 장악원을 두어 예인 그륩을 관리하긴 했어도, 빈번한 외침과 엄한 유교 통치의 홀대로 제대로 힘을 키우지 못했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점에 유의하여 세 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변화를 가져왔던 16.17세기에 있어 이들 나라에서 유행했던 전통연희인 인형극에 주목을 하고자 한다. 인형극은 삼국이 모두 가장 천대받은 천민들의 생계수단의 하나로 전수된 연희이다. 16,17세기는 이 세나라에 있어 역사 전환기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중국에선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로 넘어가는 시기이며,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실사구시의 학문이 발흥한 때이고, 일본은 1543년에 도래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서양에 눈을 뜨기 시작, 이것이 계기가 되어 長崎를 중심으로 무역과 함께 총포와 천주교가 들어와 한국과 특히 중국의 문화만을 최고로 여겼던 사고로부터 탈피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인형극도 바로 이러한 시기에 세 나라에서 이어졌는데, 먼저 중국의 경우를 보고 한국과 일본을 살피고자 한다. Ⅱ. 중국의 경우
중국은 일찌기 노예시대라 할 수 있는 周代부터 순장제도가 있었다. 이것은 산사람을 죽은이와 같이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점차 너무 끔찍하게 여겨져 土木偶로 이를 대치하게 되었다. 진시황 무덤 속의 土俑은 대표적 예이다. <<孟子 梁惠王>> 朱憙注를 보면, 옛날의 葬이란 풀을 묶어 사람을 만들어 보위하는 것으로 芻靈이라 했다. 이것은 물론 인형의 모습이다. <<史記>> <맹상군전>에 보면, 土偶人과 木偶人이 서로 얘기하는 故事가 있다. 먼저 蘇大가 이르기를 ‘비가 오면 너는 패할 것이다’ 하니, 土偶人이 ‘나는 흙에서 났기 때문에 부서지면 다시 흙이 된다’ 라 하여 일찍부터 인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열자에 나오는 偃師의 고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중국의 경우는 아주 일찍부터 인형극이 발전해 왔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특히 인형극은 宋元 시대에 와서 발전을 더 보았는데, 城市에 집중되었다가 점차 鄕村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일종의 道具戱로서 많은 농촌사람들의 일이 되었다. 송대엔 도시의 괴뢰희보다는 간편한 차림의 농촌예인들이 등에 도구를 짊어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택해 소형연출을 했다. 이러한 형식의 괴뢰희는 전국 각지로 퍼져 동남 연해에서 특히 발달했다. 중국 개화의 선진 기지라 할 수 있는 泉州提線괴뢰희는 어느 지역보다 일찍 발달했다. 공연 내용은 대체로 梨園戱를 모방한 것이었으며, 뒤에 鄕劇曲調로 改唱했다. 말은 본지방의 말을 사용했다.2) 향촌의 경우 인형극은 그 지역의 地神 제사날에 연출을 많이 했다. 이 당시 전통 괴뢰희 레파토르가 무려 300여 종류에 달했다. 그 내용은 주로 靈怪, 鐵騎, 公案, 歷代君臣將相의 고사가 많고, 그 예로 孫悟空三調芭蕉扇, 芙蓉仙子, 花子進城, 追車 등이 대표적이다.3) 그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세간에 인기가 있어, 당시 儒學者 朱熹 등에 의해 핍박을 받긴 했지만 사람들 마음에 깊이 새겨진 목우희를 막진 못했다. 주인이 이민족으로 바뀐 元시대에도 목우희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 시인들의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 문인인 圓至의 觀傀儡 詩가 있다. 錦襠叢裏鬪腰肢 비단잠방이속에 허우적이는 팔다리 記得京城此夕時 경성의 오늘밤을 기억하지 一曲太平錢罷舞 한곡조 태평곡에 춤도 끝나고 六街人唱看燈詞 거리의 사람들은 간등사를 노래하네4)
긴소매가 달린 옷을 입힌 인형의 모습과 이를 보고 오늘밤을 기억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한편의 시를 낳았다. 鬪腰肢는 바로 긴 소매를 걸친 인형의 모습이다. 위의 京城은 당시 長安城을 말하는데, 資治通鑑 唐紀에 의하면, 장안성 중에 좌우로 六街가 있었다.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는데 위의 인형극은 바로 이러한 장소에서 한 것이다. 한곡조 태평곡에 춤도 끝나고 나서 거리의 사람들이 합창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그렸다. 16,7세기는 중국역사에서 明 淸에 해당된다. 명청에 이르러서 목우희는 각지로 퍼져 번창했다. 특히 명나라 중엽 이후 동남연해의 城市 경제적 부흥과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더욱 발전했다. 이것은 시장번영과 연희발달의 함수관계를 말해주는 것인데, 명나라 万歷(1573-1620)년간은 중국희극의 번영기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사미반이라고 하는 生(男役)旦(女性役)北(힘이 강한 男役)雜(그외 道化)의 네 역할이 컸다. 이 당시 예부상서 李九我는 목우희를 좋아해서, 무대 막앞에 붙일 對聯을 써서 木偶藝人들에게 줄 정도였다. 頃刻驅馳千里外 古今事業一宵中이 그것이다. 짧은 순간에 말타고 천리를 달리듯 목우 공연 속에 담긴 내용이 고금에 있었던 일들을 한 밤중에 다 보여주고 있다는 함축성이 풍부한 對聯이다. 이로 보아 이 당시만 해도 중국 인형극은 줄거리가 풍부했던 것같다. 이러한 상황은 옛날에 유학자들에 의해 천시 받았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고무적이다. 당시 이름이 있던 것으로 복건의 괴뢰희가 있다. 이 괴뢰희는 廣東 일대에 까지 퍼졌는데, 일찌기 北宋때부터 일어나 점차 福建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梅綠이라는 지방에선 원소절․중양절․중추 및 각종 神會를 맞이할 때마다 채붕을 치고 등을 켜 영신연희를 벌렸으며, 이 공연은 밤을 꼬박세우고 아침까지 했다. 물론 이 가운데는 목우희가 들어 있다. 이를 보기 위해 遠近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연행은 보통 일주일을 계속했다. 이 공연은 바다 위에 배를 뛰우고 그 위에 무대를 꾸며 연행하는 것인데,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이면 어디나 행해지는 것으로, 주로 복건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연행을 하는 것이다.5) 복건은 환태평양 문화의 중심지로서 우리나라 제주도와 오끼나와로 연결되는 문화전파지이다. 따라서 이곳을 통해 이웃나라의 문화를 수수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목우희는 종합예술로서, 극중에 공통적이고 계통적인 가락인 聲腔을 잘 발달시켰다. 당시 목우예인들은 각종 예술의 중요한 요소를 잘 배합해서 목우희를 재능있고 생명 있는 예술로 만들었다. 이같은 것을 잘 수행하여 자신들만의 통일체를 이룬 것이 提線木偶, 布袋木偶뿐 등의 복건 목우희이다. 이는 그 유파가 대단히 많아서 전 성 각개 읍에 퍼져 있는데, 閩東 閩北 閩南 閩西 蒲仙은 대표적이며, 이 중에서도 민남 민서 양파가 가장 번성했다.
지금까지 전수되고 있는 泉州의 제선목우희는 민남계 일파이다. 음악 또한 독특한 풍격을 이루는데 曲牌가 풍부하고 聲腔이 높아 속칭 傀儡腔이라 한다. 반주는 小嗩납이 主樂이고 南鼓와 鎭鑼 등의 古樂器가 있다. 또한 布袋木偶는 掌中木偶라고도 하는데 조정자가 손을 밑으로부터 위로 구부려 목우의 옷속에 넣고 食指로 머리를 조정하고, 그외 손가락으로 좌우 어깨를 조정한다. 동작이 신속하고 활발하다. 이 목우희도 나중에 남북파로 갈리는데 남파가 지금도 유명한 泉州목우희이다. 내용은 주로 神話나 故事가 주를 이루며, 북파는 武戱가 주를 이루고 神怪와 鳥獸의 동작을 확대했다. 이 시기의 고정된 레파토르로 落籠簿 42 권 각본은 장편으로 상연했다. 그런데 이를 공연했다 하면 7일밤을 계속했다. 또한 廣東의 잠강지구의 단인목우희는 일종의 說唱木偶로서 작은 杖頭木偶를 사용한다. 唱腔이 비교적 단조롭고 四句曲調로서 극히 변화가 적다. 明代의 화가이며 문학가인 唐伯虎는 남방의 목우희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紙做衣裳線做筋 종이로 의상을 짓고 줄로 근육을 만들어 悲歡離合假成眞 비환이합의 인생살이 참같이 보여주네 分明是个花光鬼 이것은 분명 밤도깨비 놀음이야 却在人前人弄人 문득 사람앞에서 사람이 사람을 조롱하니.6) 인형이 입는 옷을 종이로 만들어 줄을 매고 희비를 연출하는 인형극의 모습이다. 인형이 입을 의상을 헝겊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종이로 만들었음을 증명하는 좋은 시구이다. 괴뢰시의 내용이 대체로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인생의 슬픔과 즐거움을 진짜같이 보여주니 이것은 밤도깨비 놀이같다는 시인의 감정을 잘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어떤 내용인지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복건사람 叶繼熙가 福州목우희를 보고 괴뢰시를 읊었다. 鼓拍頻催夜漏長 북치는 소리 긴밤을 재촉하고 賞心樂事喜逢場 즐거운 광대 연기 마음 흐뭇해 隨人擧動多牽挂 사람따라 움직이니 근심도 많아 過眼興亡漫感傷 언뜻 스치는 흥망에 마음은 상해라 面目固知非本相 몰골은 본상이 아님을 알겠으니 綺羅底事竟新妝 화려한 것을 더욱 새롭게 꾸며 矮人不省當筵事 난장인 잔치자리임을 살피지 않고 枉把郞當笑郭郞 허리굽혀 헐렁옷 부여잡고 곽랑을 비웃네7)
福州는 물론 提線木偶戱의 고장 福建쪽을 말한다. 이곳은 남방으로 지금까지도 인형극으로 유명한 곳이다. 首聯은 마치 한국인형극의 인형조종자와 산받이와의 대사를 연상시킨다. 賞心은 賞心悅目의 준말로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며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또한 逢場은 逢場作戱의 준 말로 광대가 적당한 장소를 찾게 되면 곧 무대를 펼쳐 연기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무언가 걱정거리가 많은 것같아 마음이 우울하다. 그래서 언뜻 보이는 꼭두극 내용속에 개재되어 있는 흥망성쇄에 마음이 상했다. 경․미연에선 꼭두의 모습이 진짜가 아님을 알지만, 늘 새롭게 내용을 꾸미는 그 모습이 대견해 죽겠다는 것이다. 한편 북방쪽에도 목우희가 대단히 발전했다. 특히 陝西合陽목우희는 이름이 있는데 속칭 合陽線腔戱 라고도 한다. 명나라 말기에 국운이 쇠할 쯤 뜻있는 이들이 목우희 극본에 민족사상과 반항정신을 넣어 제반 음악과 唱腔 服裝 렴譜 등등을 개조하여 혁신을 했다. 전통극목으로 3,4백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엔 청춘남녀들의 혼인문제를 다룬 <西廂> <百宝箱> <囊哉裝箱> 과 <謫仙樓> <鴛鴦樓>가 유명하다. 이외에도 고사성이 풍부한 내용을 지닌 목우희가 많았었는데 수괴뢰희가 유명하다. 청대에 들어서는 목우희와 희극전체가 비슷하게 되었다. 목우희와 皮影戱는 그 연행모습이 깜직해서 궁내의 황후와 황제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그래서 궁내에서 연출된 목우희는 大台宮戱라 했다. 이때 모습을 보게 되면, 목우는 길이가 세 자 정도이며, 무대 주위를 두른 포장은 남색이고, 높이가 사람 이마까지 닿는다. 그 위에 희장을 설치하고 붉은 난간이 수려했다. 인형 하나에 한 사람이 들고 희롱을 하는데 그 동작이 진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후방은 書畵 병풍으로 둘렀는데 안으로는 악단 자리가 배열되고, 염창과 희장의 정신이 잘 화합했다. 이때 목우희는 杖頭木偶戱로서 궁희라고 했다. <天咫偶聞>에 이르기를 명대궁중엔 過錦戱가 있었는데, 木人을 물위에 띄우고 그 곁에서 사람이 대신 가사를 짓는데 이것이 宮戱의 濫觴이 아닌가 한다고 했다. 대태궁희는 경극연창을 이용했는데 반주장면과 경극이 완전히 서로 같다. 그런데 이러한 궁희를 달관 귀인권속들이 볼 수가 없어 일시적으로 경사 상층저택에서 연행을 벌려 보곤 했다. 이러한 특수한 토양 속에서 목우희는 정치와 전아를 다 했던 것이다. 목우희와 宮廷 官場의 관계는 문인학사들로 하여금 목우를 시의 대상으로 삼게 했다.8) 특히 목우희로써 比興을 삼았다. 대학자 兪樾在 시에
眷屬由來是强名 권속은 원래 원등이었는데 偶同逆旅便關情 우연히 여인숙을 만나 정을 주었지 如今散了提休戱 이제 꼭두희가 끝났거든 莫更鋪排傀儡棚 다시는 꼭두무대 꾸미지 마라9) 가 있다. 위 내용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强名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그를 주제로 한 꼭두극임은 확인할 수 있다. 强名은 袁登의 호로서 明나라때 山水畵와 글씨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인형극의 내용은 다양한 인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정판교가 官에서 행한 괴뢰희를 보고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 笑爾胸中無一物 우습구나 너는 가슴속에 아무것도 없으니 本來朽木制爲身 본래는 썩은나무로 육신을 만들었지 衣冠也學詩文輩 의관은 詩文을 배우는 무리들 面貌能惊市井人 그 모습 능히 시정인을 놀랠만하네 得意哪知當局丑 득의하더라도 네가 어찌 당국 축을 알겠으며 傍觀莫認戱場眞 스치는듯 보아서는 연희장의 참맛 모르리 縱敎四体能勞動 비록 네다리를 능히 움직이게 할지라도 不籍提撕不屈伸 깨우침도 실리지 않고 굴신도 없네10) 이것은 관에서 행하는 괴뢰희이기에 우선 관객들이 고관대작이나 시인 묵객들인 하이레벨이다. 따라서 이들이 바라보는 눈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기 보다 비판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공연이란 일단 보러 갔으면 거기에 흠뻑 취해 봐야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른바 오늘같이 배우지 못한 당시 시정인들에겐 비판의 눈보다는 공연하는 내용이 현실에 와 닿으면 감명을 받아 눈물을 쏟는다던가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위 장면에서는 처음에 인형의 모습을 그렸고, 그 다음에 구경꾼의 모습과 이들의 감상 태도와 그 느낌을 울거냈다. 明나라 이후 淸나라로 바뀌어서도 북경은 그대로 경성이었는데, 淸代의 통치자가 태평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정초에서 보름까지 유리창에 상품교역시장과 각종연희를 위한 무대를 설치했다. 종교절일엔 절에 희장을 설치해 공연을 벌리기도 했다.
명대에 나타난 목우희는 이렇듯 사방으로 전파되어 청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廣東에 목우희가 발전했는데 연행자들은 半農半藝人들이었다. 당시 북경성의 민간목우희는 거리에서 연출되었는데 크게 두가지 종류가 있다. 要苟利子와 大苟利子가 그것이다. 苟利子란 猴兒力子 또는 虎檑子의 이름으로 傀儡 두자의 轉音이다. <연경세시기>에 의하면 요괴뢰자는 扁担戱라고 한다. 청대의 목우희는 소문이 빨리 퍼져서 전국으로 퍼지고 동남아 남양군도 멀리 일본까지 퍼지게 되었다. 제선목우희의 경우 지금도 복건성 도암연안에 있는 泉州에서 유명한데, 만력년간에 고정된 레파토르가 <락농부가> 2본이 청대에 추가되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지금은 官主導形과 民主導形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표를 구입하여 보는 많은 관객들의 예술화 요구에 따라 새로운 창작물을 중심으로 하며, 후자는 祭儀장소인 옥외에 만든 무대에서 제사에 관계되는 사람 이웃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한다. 民이 주도하는 提線목우희의 戱神인 相公爺가 큰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엔 상공야가 請神, 다음엔 娛神 마지막엔 상공야가 送紳을 한다. 청신은 무대 악기 도구를 술로 청하는 상징적 움직임으로 가무를 하는데 얘기가 없다. 그 다음 오신의 과정에서 정식 연희가 벌어진다.11) 이렇듯 16,7세기의 중국에서 행해진 꼭두극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 전파 경로가 확실치 않아 구체적인 확증을 잡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다음은 같은 시기의 한국의 경우를 보자. Ⅲ. 한국의 경우 전언한 바와 같이 명청대는 한국의 경우 조선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16,17세기는 곧 초중반기에 해당된다. 1488년에 조선을 다녀간 동월은 그가 본 당시의 연행예술에 대해 소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른바 산대잡희의 내용이 그것이다. 이것은 광화문 밖에 광화문 크기만한 무대를 설치하고 가무백희를 베푸는 것이다. 15세기 말에 행해진 이 행사는 16세기로의 길목으로서 16세기에 행해진 전통연희를 엿보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이나 중국처럼 절이나 신사에서 거행되는 기록은 별로 없고 주로 거리굿이나 궁중에서 베푸는 공연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를 보고 기록하는 이는 주로 양반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나 기록을 해도 거기엔 보이지 않는 빈정됨이 스며있다.
15세기 초엔 소위 安胎使가 지나가기만 해도 산대희로 영접을 하다보니, 이들이 지나치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는 가면무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15세기의 조선 인구는 약 200만이었으며 이 중에서 공천노비가 20여만이었다. 200만 중에 양반이라는 것이 몇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이 노비 외에도 노비 신분이나 다름없는 직업인들로 이른바 백정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지방에 돌아다니며 민속극놀이에 종사하는 광대나 무당 창기 그리고 도살업을 주로 피혁 유기 제조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라의 행사가 있을 때면 징집의 대상이 되었다. 하도 빈번한다보니 1453년엔 황주 인민들이 이에 반대하여 산대와 채붕을 설치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했다. 이로 볼 때 우리의 연희는 아주 일찍부터 정례화된 연희로 이어졌음을 알겠다. 그런데 당시 공식행사를 위한 연주 담당은 장악원이 관리했다. 장악원에 예속된 음악인들은 직분과 계급에 따라 악공, 악생, 관현맹인, 전악 등으로 불려졌는데 국가기관에 예속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나례의식이 있으면 의례히 동원되는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일대의 재인들은 이보다 훨씬 자유스러워 여기저기 불려다녔다. 이들 중엔 자기 일을 가진 자들도 있지만 유랑인들이 꽤 된다. 15세기에 성현(1439-1504)이 본 괴뢰잡희도 바로 이들이 벌린 놀이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시기엔 이미 茶亭을 만들고 거기에 짐승의 모양을 만들어 진열하였다. 본 시에도 나타난 바와같이 가무백희와 함께 한 종목으로 상연되었다. 이것은 <觀儺戱>라는 제목에서도 보듯이 인형극이 나희 일종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짧은 칠언으로 축약이 된 한시로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다. 성종 12년(1481)臘月 기록에 식량을 휴대하고 상경한 나례우인들을 다수 서울에 머므르게 하기 어려우니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대목이 있다. 이에 대해 왕은 나례는 祖宗朝부터 행해오던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바꿀 수 없다. 우인들은 대체로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걸량으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이틀 정도의 거리에서 온 자들이니, 이미 상경한 이상 그대로 머믈다 가게 하라는 대목이 보인다. 성현이 본 나희는 바로 이들이 보여준 것일 것이다. 최근까지 전승되는 것으로 보아 가면무와는 달리 인형극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에 주로 행해졌다. 16세기 연희 발달은 향응을 즐겼던 연산군(1495-1506)의 간접적 영향도 간과할 수가 없다. 그는 신성한 장소를 연희장으로 변격시켰으며 처용희를 좋아해 직접 추었을 정도이다. 어쨋든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나타난 박승임(1517-1586)의 괴뢰붕은 성현의 괴뢰희이후 그 존재 여부가 희미했던 사실을 확인시켜준다.12)
機關種種電驚忙 여러장치 그 움직임 놀랍고 빨라 造化居然失主張 조화옹도 우두커니 할말을 잊은듯 城下閼支猜婀야 성밑의 알씨가 성위의 미인을 시기하니 筵前鮑老笑琅璫 공연장의 포로도 옥부딪는 소리에 미소짓네 媚如山鬼揶揄態 교태 산귀신이 야유하는 모습 捷似林鼯欻閃狂 민첩함은 다람쥐같이 날래라 棚上一場撩亂夢 무대위 한마당 어지러운 꿈 東風吹散竟茫茫 봄바람에 흩어지니 끝내 아득 성현의 연희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한나라 高祖가 平城에 있을 때 冒屯에게 포위를 당했던 고사를 인용하되 좀더 구체성을 띄었다. 즉 포위를 당했을 때 그 성 한쪽에 冒屯의 妻인 閼氏가 있었다. 병사가 점점 강하게 삼면을 둘러싸 양식도 끊어지게 되자, 한고조 신하인 陣平이 閼氏가 妬忌가 심한 것을 알고 木偶人(여기선 그 중에서도 예쁜 여자, 그래서 우리는 꼭두각시라고 한다))을 만들어 城중에서도 가장 낮게 쌓은 곳을 택해 목우의 장치를 움직여 춤을 추게 하니(運機關舞於陴間) 이를 성 밑에서 본 알씨가 진짜 사람인 줄 알고 혹시 자기 남편이 저 예쁜 여자를 데려다 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시켜 퇴군을 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뒤에 악가에서 이를 번안하여 연희로 꾸몄는데, 가무를 하는 사람 중에 郭郞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대머리였는데 우스개 소리를 잘 하는 배우였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곽랑이라 했다. 머리가 대머리니까 郭禿이라고도 한 것이다. 그는 무대를 이끄는 주체가 되어 머리 벗은 벌거숭이 주인공이 된 것이다.13) 성현의 시에서는 단순히 이 故事만 인용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구체적으로 진행 장면을 묘사해 이 인형극이 당시 거의 정착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먼저 首聯은 완성된 인형의 모습과 그 움직임에 대한 묘사이다. 機關種種은 인형의 형태를 말한다. 참고로 오늘날 박첨지 인형의 제작과정을 보면, 통나무를 인형 크기에 따라 1m부터 30cm 크기로 잘라서 인형을 만든다. 통나무를 자른 다음 3부분으로 나누는데 먼저 1/3을 머리가 되게 만들고, 중간부분은 목과 어깨를 만들고 아래부분은 손잡이가 된다. 팔을 적당히 만들고 위에 구멍을 뚫어서 움직이게 붙인다. 턱과 귀를 붙인다. 턱은 입에서 떼어내면 머리구멍이 나있는데 고무줄을 그곳으로 달아맨다. 그리고 머리털 눈썹 수염을 달고 흰광목으로 장삼을 만들어 입힌다. 여기서는 물론 고사의 주인공인 閼씨와 성 위의 미인을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含聯은 두 여자의 몸짓을 보고 포로가 웃는 모습이다. 산귀신같은 교태의 여주인공은 바로 성위의 미인이요, 결국은 이들이 벌리는 극의 내용이 일장춘몽과 같다는 결론이다.
이로 보아 이때까지도 우리 인형극계는 우리 고유의 극내용을 갖지 못하고 송나라때 보여주었던 연희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16세기의 시인인 羅湜이 묘사한 傀儡賦에서도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괴뢰희의 유래를 상기한 바 段安節이 지은 악부잡록(880년대,僖宗末年)에 실려있는 괴뢰자를 근거로 언급했다. 저자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반 꼭두극을 묘사해 사뭇 진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단절된 것으로 여겼던 16세기 조선의 연희 상황을 보충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나식도 처음엔 꼭두극의 원류를 고사에서 찾은듯 꼭두극이 처음 태어난 곳이 평성(始假生於平城)이라 했다. 그래서 꼭두극이 한고조를 구했고, 또한 南唐때엔 욕심많은 관리를 기롱하느라 왕랑의 미움도 샀다고 했다. 이렇듯 꼭두극의 기여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연희가 벌어지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當春風之麗景 結綵棚於通衢 紛士女之如雲 競爭先而歡娛 積錢財兮如陵 置樽酒兮如湖14) 이것은 본격적인 인형극이 벌어지기 전에 거리에서 관객을 불러 모으는 장면으로, 18세기 가면극을 상황을 묘사한 강이천의 시의 첫장면을 상기시킨다. ‘푸른 차일 소나무 사이로 쳐져 있고/그 아래선 풍악을 울리는데 /불고 켜고 두드리며 온갖소리 / 바다가 다하고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 이 그것이다. 여기선 꽁꽁 얼었던 겨울을 지내고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을 택해 저자에 나온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화사한 봄, 붐비는 거리 그 위에 설치된 무대, 구름같이 모여든 구경꾼들이 다투워 즐거워하는 모습, 극이 재미 있어 돈을 아끼지 않고 던지는 모습 등등이 그것이다. 본 시의 특징은 이렇듯 지금까지 궁중에서 공식으로 사람을 모아놓고 벌리는 공연의 묘사와는 달리,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저자의 넓은 거리를 택해, 사람들이 느긋하게 볼수 있도록 무대를 설치하고, 구름같이 모여드는 남녀들이 이를 보고 즐거워 하는 모습과, 그 주위에서 술 파는 모습을 조화시켜 묘사한 데에 있다. 이로서 당시 연희 주변의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앞서 보았던 궁중 목우희와는 다른 내용의 인형극을 보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천인들의 기록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던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이렇듯 시로만 남긴 우리의 처지를 볼 때 마다 이나마도 참 다행이구나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奄一人之投棚 劃奇聲之一呼 俄機關之自闢 儵郭郞之飜然 頭童髡而面頳 袖猿長而蹁躚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문득 한 사람이 무대로 튀어나와 기성을 지르더니, 장치가 저절로 풀리고 郭郞이 등장한다. 여기서 장치란 자칫 오늘날의 기계같은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인형의 조립된 각 부분의 움직임을 생각해야 된다. 따라서 일인이란 물론 곽랑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까까머리에 얼굴이 불구죽죽하고 소매는 원숭이 팔을 닮은 것같이 길어서 너울너울 한다. 이것은 목각 인형에 옷을 입혔기 때문에 소매가 축 늘어지게 마련이라 자연히 나올 수 있는 묘사이다. 이것은 상기 원나라 문인인 원지의 시에서 보는 錦襠叢里鬪腰肢 와 상통한다. 이 장면에 대해 또한 강이천의 묘사를 보면, 사람모습 가는다란 손가락만큼/ 나무로 새겨 채색을 하였구나/ 얼굴을 바꾸어 번갈아 나오니/ 어리둥절 셀 수가 없더라/ 문득 한놈이 튀어나오는데 낯짝이 안반같은 놈 / 큰소리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데 /머리를 흔들며 눈을 굴려 /오른쪽을 바라보다 다시 왼쪽을 바라보고/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홀연 사라지니/노기를 띄어 흉악한 놈/휘장이 휙 걷히더니 / 춤추는 소매자락 어지러히 돌아가누나 라 하여 안반같은 놈이 갑자기 나와 소리를 휙 지르던가 춤추는 소매자락 어지러히 돌아가는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이로 보아 소리 지르는 까까머리의 곽랑은 오늘날 홍동지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역시 이에 대해선 무리가 많다. 어쨋든 이러한 모습은 다음을 보면 더 선명해진다. 纔半露而還沒 更挺身而復現 繽往來之欻翕 怳東西之相眩 몸을 반쯤 노출시켰다 다시 나타내는 그 모습이 꼭두 무대의 장면을 실감케 하는데, 이쪽 저쪽에서 얼굴을 번갈아 나타내는 것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이는 꼭두극이 지니는 장면전환의 빈번함을 묘사한 것으로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았음을 시사한다. 이윽고 여러 무리들이 나와 재주를 과시한다(俄群徒之競從 各呈才而效能). 旗를 숙이고 활시위를 멕이다가 싸움이나 악을 쓰기도 하니 ‘或低旗而彎弓 鬨叫突而超騰’ 팔을 걷어부치며 서로 물어뜯고 가격 흥정하는 或掉臂而相吃 爭市價之少多’ 시정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것은 본 꼭두각시의 내용이 종래의 중국고사를 중심으로 연행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현실에서 소재를 구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피부에 와 닫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서양인형극의 묘미는 그 야유와 서민적인 친근감에 있다. 양식에 반하는 것은 용서없이 질타하고 조롱하며 신랄한 야유를 던진다. 이것은 동양 삼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위의 내용에서도 그렇고 다음의 내용에서도 그것은 확인된다.
婦或見棄於夫 擲嬌兒而相酬 貧屈訟於理順 仰貪吏而相咻 吏懷金於富人 欣搖頭而重諾 에미가 지아비에게 버림받기도 하고 어린아이를 내버리고 서로 수작을 하는가 하면 가난뱅이가 소송에 지는 것은 당연한 순리이고 욕심많은 관리에게 굽신거리기도 한다. 이 모두가 시정의 모습이다. 이러한 장면을 보고 이것이 오늘날 홍동지 놀이와 유사한 것같은 착각은 성급한 논리이다. 다만 인형극 발전 과정에서 홍동지놀이로 이양되는 하나의 과정은 될 수 있을지언정 어디를 보아도 오늘의 홍동지놀이는 아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인형극을 보지 않으면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위의 경우도 작자의 내용 이해도가 불확실하다. 단편적인 부분의 묘사로 어떤 테마를 갖고 했는가는 짧은 시의 형태로는 좀 무리가 있다. 이것은 어쩌면 연희시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의 표현은 더욱 엉성하기 짝이 없다. 영고성쇠에 희비를 연출하는가 하면 득실에 근심과 즐거움을 나타내고 서로 만나 웃고 노래하기도 하고 이별에 눈물을 짜기도 하는 (或喜怒於榮枯 或憂樂於得失 或歌笑於相逢 或泣涕於送別) 일상사들이 그다지 낯설지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다루지 않은채 표정 연기만 보고 묘사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쨋든 이러한 천반기교들의 다양한 변화를 종일 하다가 갑자기 끝내고 나면 그렇듯 허전할 수가 없다는것이다. ‘粉千奇與萬變 羌盡日而靡休 忽一場之已闌 竟歸空以悠悠’의 묘사가 그것이다. 이렇듯 16,7세기의 한국인형극은 그 내용이 애매모호하다. 게다가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공연되었는가도 확실하지가 않다. 그러나 내용이 애매하다해도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郭郞劇(한고조와 관련된)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한국형 인형극의 내용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이는 16,7세기의 커다란 변화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나중에 홍동지를 연출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홍동지극의 출현은 언제부터일까. 아직도 이에 대해선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홍동지의 모습에 대한 전형은 이미 당나라 현종의 시에서도 보이며 또한 이와 유사한 인형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일본 古要神社의 인형극에서 보인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일본의 경우를 본다. Ⅳ. 일본의 경우
동아시아중 가장 늦게 국가의 탄생을 본 일본은 일찌기 한국과 중국의 문화를 잘 받아들여 중흥을 꾀했다. 특히 한반도에서 몰려간 이른바 도래인집단에 의해 형성된 문화 현상은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그들이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최초의 번영기인 奈良시대를 거쳐 平安시대에 이르러서는 받아들인 문화를 통해 자국식의 글자인 假名(가나)를 만들고, 그것으로 그네들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뒤 室町시대에 중국과 국교가 이뤄진 이후 1404년부터는 日明무역이 시작되었다. 足利義滿에 의해 시작된 이것은 조공문제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6대장군 義敎에 의해 재개되었다. 이른바 에도시대의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15세기 후반기 이래 거의 100년간에 걸친 전란이 끝나고, 1573년에 織田信長에 의해 足利 幕部가 멸망했다, 1590년엔 풍신수길에 의해 전국이 통일, 그뒤 德川家治에 의해 文藝中興期로 들어간다. 그리고 조선에서 강제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들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는 크게 발달했으며, 약탈해간 많은 서적은 주자학을 비롯한 학문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상의 기술만을 보면, 마치 우리가 전적으로 일본에 문화를 전수한 것같이 느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생각 이상으로 훌륭한 문화를 가꾸며 지내온 일본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인형극만해도 그렇다. 최근까지 일본의 인형극이라면 으례히 봉건사회때 이루어진 文樂(삼인의 심부름꾼이 조종하는 人形淨琉璃)을 상기하는 것이 통례이다. 文樂은 인형조종자가 자기 키만큼 큰 인형을 들고 조종하는 것으로, 이를 옆에서 돕는자가 둘이나 셋이 필요하다. 따로 대사를 외는 唱者와 함께 이에 맞춰 얼굴을 그대로 들어내놓고 조종하는 주조종자 외, 까만 옷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돕는 그들을 볼 때, 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이런 모습은 물론 歌舞伎와 能에서도 보이는 것이지만, 직접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왠지 신경을 쓰이게 해 적어도 필자에겐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는다. 무대의 흐름을 빨리 하게 하는 관점은 있을 지 몰라도 무대 주인공들보다 큰 몸짓으로 조종하는 그 모습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과 우리의 경우를 생각하면 확실히 이질적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文樂의 종사자는 물론 대개의 일본인들이 文樂 외의 것은 저속하고 어린아이 속임으로 취급하여 천시하였다. 따라서 이것은 다분히 서민적인 오락용이라기보다는 귀족급의 오락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역시 서민적인 인형극이다.
현재 일본에서 행하고 있는 인형극의 인형으로서 에비스가끼와 에비스마와시라는 것이 있다. 정월에 걸립을 하며 축원을 하는 인형과 オノ男, 靑農또는 細男이라고 하는 인형, 그리고 정월에 축원 뿐 아니라 전통인형극이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연기를 보여주는 三番叟의 인형이 그것이다. 에비스(夷)는 풍어를 가져오는 정령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도 高知같은 곳에서는 고래(鯨)와 관계가 있어 흥미를 준다. 고래가 일본 열도해안을 따라 흐르는 물결을 타고 올 때 고기떼들이 쫓겨 몰려 오는데, 이것이 일본인 어부들에게 풍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비스는 고래의 인격화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한편 에비스는 다시 전이되어 농부들에게 풍작을 가져다 주는 神(えびすかき)으로서도 각광을 받는다. 성격적으로 선명치 못한점이 있긴 하지만 현재에도 神樂이 거행될 때 에비스가 나오면 가장 신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에비스를 대표하는 신이 蛭子大神(戎,夷,惠比壽,惠比壽大神)인데, 이를 섬기는 攝津國西宮神社는 전국 蛭子社 戎社 惠比須社의 총본궁으로서 西宮의 에벳상으로 친하다. 세쯔(攝津)는 大阪 北西와 兵庫縣 남동쪽에 있는 있다. 중세 이후는 海上安全의 守護神, 또는 福德圓滿, 商賣繁盛의 신으로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 신사가 서궁신사에 속해 그 명망을 알고 전국에서 에비가끼 에비마와시하는 괴뢰사들이 섬긴 百太夫社이다. 이 百太夫社가 알려진 것은 平安말기에 이뤄진 <伊呂波字類抄>가 처음이다. 현재는 西宮신사의 末社지만 원래는 서궁신사 境外 北方産所地였던 것을 天保年間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이 産所村이 괴뢰자의 부락이었다.15) 그런데 西宮浦口쪽에 道君坊이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히루꼬(咥子)대신을 위해 인형을 만들어 춤을 추게 했다. 이것이 서궁의 에비스가끼의 시작이다. 그 뒤 도군방이 병으로 죽었는데 바다가 거칠어져 조업이 되질 않아 백태부라고 하는 이가 도군방의 인형을 만들어서 신앞에 춤을 추게 했더니 파도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시 황제에게 초청을 받아 인형춤을 추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諸國이 신앞에서 예를 올릴 때 인형춤을 받치게 되었다. 따라서 결국 백태부가 괴뢰사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도군보우(ドウクンボウ)라는 말은 인형을 ‘デクノボウ’ ‘デクンボウ’ ‘テクルボウ’ 라는 것과 같은 말로서 도군방을 인격화한 말이다.16)
이 백태부가 죽은 곳이 지금의 淡路 三原이다. 뒤에 이 모습을 안치했는데 세살짜리 모습이었다.이처럼 얘기들은 하고 있지만, 이것은 결국 田村圓澄에 의하면 우리 한국과 관련이 있다는데 흥미를 준다. 田村圓澄은 일본불교의 원류 특히 고대 한일불교 교류에 대한 연구의 권위자이다. 그는 八幡神을 한국에서 옮겨간 신으로 본다. 지금까지도 八幡神이 応神天皇이라는 근거는 없다. 어쨋든 宇佐八幡의 특징은 불교와의 습합, 중앙지향성, 탁선으로 규정짓는다. 託宣이란 신이 사람에게 빙의하가나 꿈속에 나타나서 신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경위는 이렇다. 宇佐託宣集 에 의하면, 대신비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는 宇佐八幡을 나타나게 한 공로자이다. 宇佐 小倉山 기슭에 8개의 머리를 가진 鍛冶(カジ대장장이)라는 노인(オキナ)이 있었다. 그 모습이 기괴해서 이를 본 사람은 열이면 아홉이 죽었다. 대신비의가 소창산 기슭에 갔더니 금매(金鷹)가 있었다. 거기서 빌었더니 금비둘기로 변했다. 이것이 신의 행위임을 알고 그는 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 삼년동안 곡식을 끊고 간청을 했더니, 세살박이의 동자가 대나무 잎에 앉아 탁선을 하는 것이었다. 즉, 辛國의 城에 8개의 깃발(幡)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자신은 일본의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辛國(가라구니)이란 한국을 말하는 것이며 城은 당시 마을의 뜻이 있다. 이는 곧 宇佐 근처에 한국인들이 부락을 이뤄 사는 곳을 이름이다.17)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전통인형극이 거행된 것이다. 스즈까찌요노(鈴鹿千代乃)는 九州志賀海神社를 근거지로 安曇, 厚美등의 이름을 받아 전국 해변과 깊숙한 산속까지 그 신앙을 전파한 海人族(아마베)은 바로 半島로부터 온 渡來人이라 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신앙과 예능이 핵이 되어서 잡다한 신앙이 도입되면서 팔번신앙과 결속되어 山陽道를 넘었다. 섭진서궁신사에 예속되어 이것을 제 2의 거점으로 한 일단은 뒤에 夷가끼,夷마와시로 불려졌고 근세 초두에는 人形淨瑠리를 낳게 했다.18) 이에 비해 細男과 三番叟(種播)는 다르다. 折口에 의하면, 세남은 靑農(반농업적 성격)이라고도 쓴다. 鈴鹿千代乃는 그 성격은 人長이라고 하는 성격에 대한 것으로 人長이 신의 성격을 지녔다면, 細男이 精靈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이 주인공(シテ)으로서 정령은 상대역(ワキ)으로서 연기를 한다. 또한 삼번수는 翁의 シテ에 대해 상대역을 한다.19) 일본이 연극으로서 인형극을 형성한 시기는 室町期이다. 그러나 괴뢰자기에 의하면, 平安時代에 벌써 ‘舞木人鬪桃梗能生人之態’라 하여 인형극이 행해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인형극 이전의 일본의 인형 발생은 어느 나라와도 마찬가지로 생활 주변에서 문화적 욕구에 의해 발생했다. 따라서 일상에서 구하기 쉬운 재료를 사용하여 응용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가지로 인형을 만든다던가, 高知의 西畑인형의 발생은 달걀껍질을 손에 끼고 춤을 추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원초적 형태를 지금까지 보여주는 동북의 おしら人形이라던가, 옛날 杖頭傀儡라 불리는 棒人形의 자손인 九州의 古要人形, 각지에서 벌레 쫓는 實盛人形이랑 그외 ひんご人形은 모두 봉두인형의 전형들이다. 이러한 것이 淨유리와 연결돼 연극적 형태를 이루는 과정에서 그 연기의 표출이 창조적 탐구로 이뤄진 것이 佐渡의 のろま 또는 說敎人形이다.
大江匡房(1091-1111)의 傀儡子記에 의하면, 일본의 인형극은 서역으로부터 중국을 통해 조선의 白丁族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최근에 인형극 발달사를 쓴 川尻泰司는 일부를 인정하면서도, 꾸꾸츠라고 불리는 婦女가 職業的 賣笑婦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 卑下시킨 것으로 분노를 하고 있다.20)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학들의 논고는 아직도 설득력이 있다. 일찌기 <遊女의 역사>를 쓴 瀧川政次郞에 의하면,21) 中山太郞과 柳田國男의 遊女는 본래 일본의 上代에 巫로서 노래를 겸했던 창과 연결시킨 것에 대해 반박을 했다. 그는 遊女의 元祖가 韓國이라고 피력하면서, 반도에서 도래한 조선의 漂迫民 즉 白丁이라는 것이다. 그는 괴뢰자의 예능인 인형조종자와 일인 수모(相撲)가 대륙반도를 기원으로 인형으로 발달된 세남무가 반도경로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들고 일본 괴뢰자족이 조선의 백정족으로부터 왔음을 입증하려고 노력하겠다고 했다. 喜田貞吉의 설을 포함해 이러한 설은 일본의 괴뢰자가 조선으로부터 온 외래민족이다 라는 것이다. 이 외래민족설은 표박적 생활 형태랑 주술적 예능 그외 유사한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를 전한 사람들은 귀화인, 전쟁포로 그외 외래인이 포함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지금까지도 인형극이 가장 많이 행해지는 곳은 關東,東海 山陰 山陽 九州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이른바 도래인들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다.(그러나 이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가 柳川國男이다.)따라서 고대사회에 있어서 귀화인의 동향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했다.22) 이로 볼 때 일본 인형극의 원류는 옛적의 한국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리의 증거 자료가 불확실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兵田靑俊은 이에 더 나가서 平安時代에 쓰여진 인형이 古表八幡의 傀儡子라는 것을 예로 들어 덧붙여 서술했다.23) 괴뢰자가 양식을 구하기 위해 원시인들처럼 수렵을 하고 천막생활을 하며, 한편으로는 弄劍의 기술과 木人을 춤추게 한 것은 그들 생활 자체가 표박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둘은 江戶 中期 以後, 방랑으로부터 탈피하게 되는데, 이전의 무용지물이 아니라 특히 社寺의 祭禮에 모이는 군중들을 정비하고, 路店․見世物․香具師 浮浪遊藝子의 숙박 일체를 관리하기도 한다. 특히 平安․鎌倉 시대에는 여기에 宇佐八幡宮의 散所(부락이라는 특수지역을 비롯해 지역적으로 표현한 것)가 있어, 여기에 살던 傀儡子가 8월15일에 거행되는 宇佐八幡의 放生會에 예능을 헌납하게 되고, 해상에 나가서 인형으로 細男舞를 추기도 했다.
한편 森本義彰24)에 의하면, 중세사회에는 傀儡師와 放下僧이 똑같이 표박계급으로서 曲舞, 千秋萬歲, 혹은 大和지방에서 七道의 香이라고 칭하는 猿樂, アルキ白拍子 アルキ御子 金タタキ, 鉢タタキ アルキ橫行 猿飼 와 같이 걸립을 해 歌舞遊藝을 하며 입에 풀칠을 했다. 이와같은 무리는 최하층이어서 특수한 집단생활을 하며 聲門師 혹은 散所法師라 하는 여러가지 명칭을 들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볼 때 이들은 특수한 존재로서 權門 혹은 社寺에 속해서 雜色法師가 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기 한국의 社寺에 속한 중의 무리와 거의 같은 맥을 잇고 있어 흥미를 준다. 어쨋든 散所의 뜻은 산처의 잡색이고, 산처의 수신이고, 산처의 법사인 것을 시사한다. 이와같이 散所가 흥행권을 갖고 遊藝를 행하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또한 傀儡子와 白拍子들이 散所에 寄食하며 사원이나 신사에서 거행되는 祭禮 法要에서 흥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징을 치며 염불을 외는 모습. 이것이 점차 거리로 나가 걸립으로 변해 踊念佛이 된다. 그런데 이 散所가 신사나 절의 장원내에 算所 産所 라는 명칭을 지닌 부락을 형성해 산다거나 산간벽지에 숨어사는데 신사의 경우 거의 八幡系神社라는 것이 주목된다. 兵田靑俊이 말한 古要八幡이 그것이다.25) 그런데 이곳에서 거행되는 인형극이 八幡神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幕末부터 明治期까지의 전통인형극 이를테면 八王子의 車人形, 동북의 猿倉人形, 津輕人形, 山辺人形이라던가 高知의 西畑人形 등은 예외로 하고, 봉건기에 있었던 직업적 인형극은 전적으로 八幡神과 관계가 있다는데 흥미를 더 해준다.26) 그렇다면 그동안 많은 이들이 주목했던 고요신사의 인형극이 무엇인지 보기로 하자.27) Ⅴ. 팔번신과 인형극
고요신사의 인형극은 八幡神과 관계가 있다. 八幡神은 지금도 그 정체가 불명한 신으로서 전국에 4만여개의 신사에서 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그들의 수호신이다. 일반적으로 팔번신은 應神天皇으로 알고 있다. 이는 平安 후기(1094~1107)에 쓰여진 <扶桑略記>에 欽明天皇의 어대에 팔번신이 나타나는 얘기에서 근거하는 것같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전언한 바와 같이 田村圓澄에 의해 근거없음을 증명한 바 있다.28) 어쨋든 현재 팔번신은 鍛冶의 신과 물의 신으로서 추앙을 받고 있지만 시대에 따라 그 역할이 다름은 주지하는 바이다. 팔번신을 모시는 총본사는 大分縣의 宇佐八幡宮이다. 이 우사팔번궁은 중세이후 伊勢신궁과 더불어 이대종묘의 하나로 조야의 신앙을 받고 있는 큰 신사였다. 따라서 이 우사궁과 관계되는 작은 신사가 여기 저기 많은데 특히 豊前國 중에 많았다. 그 중의 하나인 古表神社는 인형들이 우사궁의 大祭인 放生會때 옛 그대로 세남무를 봉헌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생회는 1307년에 거행되어 1420년까지 이어졌다가 끊어졌는데, 1617년(元和3년) 平安시절을 맞이해 다시 거행되어 17세기에 계속 이어졌음을 渡辺重春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29) (팔번고표신사의괴뢰자) 그에 의하면, 옛적에 大隅薩摩隼人이 항복할 때 전장에서 기악을 올린 적이 있는데 지금 또한 그러한 것이 전해진다고 했다. 8월13일 神轝및 괴뢰자를 배에 실어 和間바다 위에 이르러 細男伎樂을 올렸다고 한다. 세남무는 宇佐宮 緣起로서, 황후가 장차 이국을 정벌할 때 백발노인이 와서 이르기를,‘ 磯鹿島에 安曇礒良子가 있는데 마땅히 그를 불러 海神에게 干珠滿珠를 빌리시오, 만일 이 보물을 얻으면 삼한이 스스로 복종할 것이다.’ 했다. 그리고 노인은 이 아이가 細男舞(또는 男良舞)를 좋아한다고 하니 누가 이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노인은 공봉인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케하고 노인이 스스로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의량이 홀연 武人의 모습으로 깨끗한 옷과 踏皮脛巾을 쓰고 머리에 북을 걸고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구갑을 타고 바다로 나가니, 황후가 곧 누이 풍흐로 하여금 宜良과 더불어 해신궁에 이르러 두 보물을 얻어 바다에 던지니 삼한이 항복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細男舞는 조선(三韓)과 관련이 있음에 흥미를 더해준다. 더구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형극은 細男舞 神相撲이라고 하는데 보통 인형극과는 다른 씨름으로 된 인형무이다. 이것은 어떤 줄거리를 갖고 그에 의해 대화를 나누는것이 아니라 단순히 씨름판에서 벌리는 씨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씨름은 일본 고대의 의례적 행사였다.
7세기(飛鳥時代)에서 8세기(奈良時代)경은 조선과 중국의 영향이 지대한 때이다. 이때 관료들은 중앙에 귀족계급을 형성하고 그 세력을 모아 사원이랑 신사 등과 함께 장원을 경영하여 영주화했다. 이 의례적 相撲(씨름)은 고대 궁정에서도 잘 거행되었음이 평안시대의 문헌이라고 하는 信西古樂図에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이 후대에 상상으로 그린 부분이 있어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어쨋든 이를 이끈 구룹은 호적이 없는 부랑아로서, 이들은 당시 유력자 귀족의 집에서 祝福의藝能을 보여주고, 대체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택하여 큰 절문 앞에서 연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때 예능은 물론 인형극뿐 아니라 곡예․마술․노래․무용 등이 함께 곁들여 한국 유랑예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 宇野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꼭두각시놀음에는 노래랑 춤 곡예가 세트로 되어 있어 사용하는 인형도 古要, 古表인형이랑 또한 옛 전통을 지니고 있는 甲府市의 祭礼에서 연행되는 天津司舞랑 次城縣의 彌勒人形과 대단히 비슷한 점을 들고 있어 주목된다”고 했다.30) 또한 17세기(江戶時代前期) 인형극 중에 노로마(머리가 납작하고 얼굴은 청홍색인 바보스럽고 징그러운 꼭두각시) 또는 소로마라고 하는 道花人形이 있다. 이 두개의 인형은 본래는 한 조였던 것같다. 이로 보아 17세기에 민간인형극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명 神相撲라고 불려지는 세남무의 차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식년제의 축사- 神神의 渡御- 道囃子- 仕官이 殿앞에서 인사를 하고 군주들을 향해 세남무의 사유서를 읽는다.- 세남무-女神騎牛의 御神像 諸神御舞의 순서 1. 東; 天神中主大神 西; 大國主大神 2. 東; 伊邪那岐大神 西; 伊邪那美大神 3. 東; 大綿津見大神 西; 罔象女大神 4. 東; 廣田大神 西; 龍田大神 5. 東; 八衢姬大神 西; 豊後比賣大神 6. 東; 稚日女大神 西; 美奴賣大神 7. 東; 爾保都姬大神 西; 石坂姬大神 8. 東; 句句신大神 西; 六名持大神 9. 東; 金山彦大神 西; 宮簣媛神 10.東; 高良大神 西; 玉手大神
위 신의 춤모습이란 지금 일본에서 거행되는 수모 그대로서, 매번 등장하는 모든 신들의 씨름하는 모습이 비슷한데, 유독 세번째 등장하는 신들은 나와서 똑같이 인사를 하고 이때 사관이 막 중앙에 모습을 나타내어, 들고 나온 종이에 쓰인 神歌를 읽는다. 이 사이에 神樂을 중지하고 神歌도 끝나면 두 신이 인사를 하고 긑낸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형극이라기보다 글자그대로 씨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형들의 건강체조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31) 어쨋든 내용 자체를 볼 때는, 하등 우리가 생각하는 줄거리를 갖는 인형극이 아닌 그야말로 相撲舞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묵극의 형태로 진행되는 이 극 구성을 볼 때 伎樂과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또한 이들의 모습이 오늘날 전해지는 한국의 홍동지와 어떤 유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볼 수는 있겠지만, 섣부른 추출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같다. Ⅵ. 마 무 리 이상 16,7세기를 중심으로 삼국의 인형극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국은 이 시기 명에서 청으로 넘어간 과도기로서 전통인형극이 각지로 퍼져 전승되었다. 특히 명나라 중엽 이후 동남 연해의 城市의 경제적 부흥과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더욱 발전했다. 환태평양의 문화 중심지인 福建은 문화전파지로서 역할을 다 했는데, 극중에 나타나는 공통적이고 계통적인 가락을 잘 배합해서 생명력 있는 예술로 발달시켰다. 또한 청대에 들어서는 목우희와 희극 전체가 비슷하게 되었는데, 그 연행 모습이 깜찍해 궁내의 황후와 황제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한국은 이 시기에 인형극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공연되었는가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박승임과 라식에 의해 표현된 꼭두각시놀음에 의해 인형극이 거리극으로 발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시로 인해, 이 시기 한국에서는 중국 한고조의 곽랑극의 영향하에서 벗어나, 한국형 인형극의 내용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나중에 홍동지를 연출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흔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이 인형극을 형성한 시기는 室町期이다. 그러나 괴뢰자기에 의하면, 平安時代에 벌써 인형극이 행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에 의하면, 일본의 인형극은 서역으로부터 중국을 통해 조선의 白丁들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쓰여진 인형이 古表八幡의 괴뢰자라는 것이다. 16,7세기에 들어, 文樂의 인형과는 달리 이 인형은 매우 서민적인것으로 일반인에게 친숙하게 되었다. 묵극의 형태로 진행되는 이 놀이는 기악과의 관련성이 깊다. 한편, 등장 인물인 씨름꾼의 인형 모습이 한국의 홍동지와 비슷하다고 해서 한국과 직접 연관 짓는 것은 더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출처: 동양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