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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깊은 계곡, 용문산 백운봉 전경, 눈 그리고‘유격’으로 기억될 유명산
1. 일자 : 2010. 3. 13 (토)
2. 장소 : 유명산 (864m)
3. 행로 및 시간
[자연휴양림(10:07) -> (좌측 입구지계곡) -> 규영소(10:22) -> 박쥐소(10:31) -> 용소(10:45) -> 마당소(11:15) -> 합수곡(11:22, 유명산 1.3km) -> (된비알) -> 유명산(12:21) -> (중식 -12:52) -> (길헤멤) -> 소구니 능선 초입(13:09) -> 소구니산(13:46) -> 이정표(14:15, 유명산 2.2km, 소구니산 1km, 서너치 0.7km) ->서너치(14:30) -> (임도, 도로, ‘유격’) -> 휴양림텐트촌(15:20) -> 주차장(15:38)]
4. 동행 : 성우
< 유명산 산행을 준비하며 >
가야산 산행을 예약하고 준비를 하고 있던 차, 성우가 눈이 많이 와서 주말에 속초행을 취소했다며 같이 산에 가자 한다. 처음엔 예약을 핑계로 홀로 산행을 감행할 까 생각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뀌어 성우와 함께 산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서 문어나 삶아 먹기로 했다. 평소 신세를 많이 지고 있는 친구에 대한 작은 배려라 생각했다.
산행지로는 유명산을 택했다. 입사 초기 직장 동료들과 이미 올랐던 곳으로 당시엔 어디로 올랐는지는 몰라도 계곡 하산 길이 몹시 길고 힘겨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수년 내에 100대 명산을 완주하려는 계획상 유명산은 거쳐 가야 하는 곳으로, 집에서 거리가 멀지 않고 코스도 크게 무리가 없어 차량을 이용하여 오전에 갔다 오후에 돌아 오기에 적합한 곳이라 하겠다.
용문산 서쪽에 위치한 유명산은 원래 정상에서 말을 길렀다는 뜻에서‘마유산’이라 했으나, ‘70년대 어느 산악회에서 국토자오선 종주 과정에서 당시 지도에 무명봉으로 남아 있던 이 산에, 종주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 대원의 이름을 따서 ‘유명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여성 산악인의 이름이 진유명이며, 잡지사에서 수소문하고 있으나 근황은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이 산이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 반열에 오른 것에 대해 말이 많다. 사실 수도권과 가깝고 대규모 휴양림이 개관했고, 여름 입구지계곡의 시원함을 제외하고는 명산에 풍모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녀 와서 보니 유명산은 1시간 이상 이어지는 깊고 시원한 계곡, 정상에서 바라보는 용문산, 백운봉 전경, 소구니산 등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 등 여느 산에 뒤지지 않을 명산의 실체로 가지고 있었다. 나의 단편적인 선입관을 반성한다.)
집에서 등산 코스를 물색해보니 휴양림에서 지능선을 타고 유명산에 올랐다가 계곡으로 내려오는 평범한 코스보다는, 입구지계곡으로 유명산에 올라 소구니산과 서너치 고개를 거쳐 휴양림으로 하산하는 코스도 4시간이면 가능할 것 같아, 미련 없이 그 길을 택한다. 차까지 끌고 가는데 3시간만 산행을 하고 돌아 오는 것은 기름값도 나오지 않지 않겠는가? 산행 준비 단계부터 이리 유명산을 얕보고 있으니 산신령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사실 그랬다. 특히 서너치에서 휴양림까지의 길을 일고 헤매는 과정은 유명산을 얕본 것에 대한 응징이었다.)
< 희망사항 >
최근 몇 년 동안의 산행에서 명산은 그 이름 값을 함을 여러 산에서 체험한 바, 오늘 찾는 유명산도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 믿음의 근거를 산을 오르내리며 직접 찾아 보고자 한다. 그리고 오랜만에 동시에 두 개의 산을 하루에 오르는 즐거움도 맛보고 싶다. 각각의 정상에서 유명산과 소구니산의 차이도 확인해 보아야겠다. 무엇보다, 주중에 내린 눈이 남아 올 겨울 마지막으로 눈 속에서 흠뻑 젖어 보고 싶다.
힘겨웠던 예전 힘겨운 하산 경험을 잊으려 오늘은 입구지계곡으로 오르며 젊은 시절의 나를 추억할 수 있었으면 더욱 좋겠다.
< 휴양림에서 유명산 정상 >
아침을 든든히 먹고 차를 몰아 분당 성우 집으로 향했다. 시원하게 뚫린 경춘 고속도로를 달려 유명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조금 지났다. 생각보다 이른 행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지계곡을 들머리로 길을 나선다(10:07).
등산로 초입에 비틀맴으로 그려진 커다란 산행 안내도가 서 있다. 가야 할 길을 살피니 북서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걷다가 동진하여 정상에 오른 후 등선을 따라 걷는 형상이다. 합수곡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지능선 길을 제외하고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햇살도 따사롭다. 행복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 유명산 산행 안내도 / 규영소 부근에서 >
입구지계곡(혹자는 유명계곡이라 한다) 초입은 빙판이다. 최근 내린 눈이 녹고 추운 날씨에 길이 얼어 붙은 모양이다. 길 좌측으로 흐르는 계곡의 수량이 예사롭지 않다. 흰 포말을 그리며 빠르게 내려 가는 형상이 한여름을 연상시킨다. 그 우렁찬 소리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세차다. 예전 20대 후반 하산 길의 힘겨운 기억을 맑고 시원한 낭만으로 바뀌어 놓기에 충분할 정도로 멋진 모습이다. 길을 걸은 후 10여 분 만에 작은 소에 도착한다(10:22). 아마도 ‘규영소’일 것이다. 작은 폭포의 흰 포말과 시리도록 푸른 물의 빛깔, 지난 가을의 흔적을 아직도 품고 있는 누런 나뭇잎, 백색의 눈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조화가 아름답다.
크램폰을 차고 오르는 길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군데군데 빙판과 눈 길이 이어지지만 험한 곳에는 녹색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걷기에 무리가 없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을 따라 박쥐소(10:31), 용소(10:45)를 거쳐 마당소(11:15)에 이른다. 들머리 주차장 고도가 250m 수준이었는데 1시간 이상을 걸어도 450m 수준이다. 유명산 정상이 862m이니 남은 길의 고도차가 슬슬 걱정이 되는 순간, 길게 이어지던 계곡길이 갈림을 맞는다. 합수곡이다(11:22). 길은 좌측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오르면 ‘어비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측 지능선 길을 택한다. 여기까지는 정말 편하게 왔다. 속초가 고향인 성우 말로는 계곡의 길이가 설악산 여느 계곡 이상 수준이라 한다. 내게도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 1시간 이상 이어지는 입구지계곡은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 용소 / 마당소 >
< 용소 부근에서 >
아름다운 풍광을 보니 문뜩, 얼마 전 다시 읽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참 아름다운 시구다. 때이른 맑고 깊은 입구지계곡 물을 보니 나도 아름다운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기분이다. 서울대 상대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그들 동문 중에 천상병이라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라는 글을 읽고 인상 깊었는데 그의 시 역시 내게는 더 인상적이었다.
합수곡에서 이어지는 지능선 길은 초입은 작은 계곡이 이어지더니 이내 물 길은 사그라지고 가파른 오르막 길로 변한다. 따스한 햇살에 눈이 녹아 진창도 이루고 미처 녹지 못한 눈은 빙판을 이룬다. 50여분 이상을 힘겹고 오르니 작은 언덕에 올라선다. 소나무 군락지이다. 잔 가지들의 빗금 뒤에서 장엄한 하늘이 열리고, 그 뒤로 용문산 정상이 우뚝 솟아 있다. 인상 깊은 모습이다. 2년 전 이맘 때, 강형과 함께 용문사를 들머리로 용문산을 올랐던 기억이 난다. 고도차 800m 이상을 이기고 올라선 정상에서의 일망무제의 풍광이 당시 새롭게 개방된 정상에 오른 흥분과 함께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어지는 하산 길의 진창 길, 봄/여름/가을/겨울을 동시에 경험했고, 힘겨움을 잊고자 강형과 함께 부른 노래의‘아! 이 길은 끝이 없던 길, 계절이 다하도록… 걸어 가는 길’의 가사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길의 후면을 다른 산에서 훔쳐 보고 있다. 옛 추억을 기억하는 것은 즐겁고 가슴이 아리다. 합수곡에서 힘든 비탈을 오르며 살핀 성우의 얼굴에 힘겨움이 묻어 난다. 평소 강원도 산에만 오면 힘이 더 든다 했는데, 오늘 산도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 지역이니 그 징크스가 영 아닌 것은 아닌가 보다. 찬 날씨에 땀을 흘리며 걸으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혈압에 무리가 생기나 보다. 쉬어 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잠시 비탈에 선 나무에 기대어 짧은 휴식을 가져 본다.
눈 앞에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유명산은 예전 정상에서 말을
길러서 ‘마유산’이라고도 불렀다 하는데 실제로 올라 보니
정상 부근이 너른 평지다.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이겠다. 마유산이라는
이름이 허세는 아님이 틀림없다. 마지막 힘을 내어 오르니 유명산 정상이다(12:21). 합수곡 출발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등산 지도에는 40분이 소요된다 했는데, 별다른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는데 시간이
훨씬 많이 소요되었다. 아침을 일찍 먹은 성우가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다. 그래도
< 유명산 정상에서 >
정상에서 둘러 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용문산 정상부는 조금 더 가깝고 선명해졌고, 그 우측 한국의 마테호른(아이거, 그랑조라스와 더불어 알프스 3대 북벽으로 유명한 곳이다)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백운봉의 모습도 압권이다. 멀리 남한강 지류의 모습도 아스라하다. 높고 큰 산을 보면 가슴이 차분해지고 겸허해 진다 하더니, 다시 산정에 올라 그 뜻을 되새겨 본다.
< 유명산에서 본 용문산 정경 / 정상에서의 성우 >
정상 옆 벤치에서 점심 상을 편다. 성우표 샌드위치에 김밥 그리고 오늘은 미소 된장국이 특식으로 준비되었다. 다 성우가 준비한 것이고 나는 입만 가지고 왔다. 미안하고 고맙다. 따사로운 초봄의 햇살을 맞으며 친구와 함께 하는 식사가 맛나다. 새 한 마리가 이정표 위에 서성인다. 먹이를 주려 하는데 놀라 달아 난다. 먹이를 구하려 왔을 것인데, 내 서툰 행동에 놀라 한다. 고약한 내 심보를 동물들도 알고 있나 보다. 30여 분의 식사 겸 휴식을 마치고 다시 늦겨울/초봄의 산하를 둘러 본다. 마테호른은 역시 우람하고 잘 생겼다.
< 마테호른을 배경으로 / 용문산을 배경으로 >
< 유명산에서 소구니산 >
소구니산으로 길을 나선다.
제대로 된 길의 초입에 서서 가야 할 소구니산의 전경을 살핀다(13:09). 눈 덮인 길이 아스라하다. 일단 내려 갔다 다시 올라야 하는 V자 코스다. 힘겨움이 예상된다. 길은 완전한 눈 길이다. 선답자의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레 내려 간다. 길 사정만 보면 아직도 한겨울이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 가서 한참을 평지 길을 걷다가 소구니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지점부터 10여분 깔딱고개를 힘겹게 올라서야 정상이 나왔다(13:46). 한 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만만치 않음을 확인하다. 정상에는 검은 오석(烏石)으로 만든 돌비석이 서 있다. 해발은 800m라 명기되어 있다. 오늘 목표한 두 번째 산에 오른 것이다. 오늘 산행을 준비하며 두 산의 차이를 살펴 보고자 했는데, 이제 보니 유명산은 정상부가 너른 초원지대였다면, 소구니산 정상은 좁고 주위가 가팔라 두 산의 모습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리고 소구니산은 독립 산이라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된비알을 오르느라 성우도 나도 힘겹다. 눈 길을 오르내리는 것은 역시 힘겨운 싸움이다. ‘소구니산’ 이름이 특이하다. (집에 돌아와 유래를 확인하니, 산 모습이 소쿠리 같다고 소쿠리산(?)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하는 글이 있다, 실제로 소구니산에 소쿠리 만드는 싸리나무는 수없이 많다고 한다.)
< 소구니산 모습 / 소구니산에서 >
< 소구니산에서 유명산 휴양림 >
서너치를 향해 길을 나선다. 이제는 정말 오르막에 대한 걱정 없이 하산할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의 기운이 솟는다. 완만한 내리막을 쉼 없이 걷는다. 가는 길에 마땅한 쉼터가 없어 오늘은 계속 걷기만 한다. 소구니산을 지나 한참을 걸어도 고도는 큰 변화가 없다. 하산 지능선 길이 꽤 길게 느껴진다. 중간에 좌측으로 갈림을 하나 지나 또 한참을 걸으니 선어치까지 700m가 남았음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유명산에서는 2.2km, 소구니산에서는 1km를 왔다. 이어지는 길은 급격한 내리막이다. 고도가 마구 떨어진다. 2시 40분경 드디어 오늘의 하산 중간 경유지 선어치에 도착했다. 37번 국도가 지나는 차 길이다. 주변에는 포장마차 촌이 형성되어 있어 어수선하다. ‘선어치’ 역시 특이한 이름이다. 양평과 가평의 경계를 이루는 선어치에서 중미산을 오를 수도 있다. 울창한 수림 때문에 ‘하늘이 서너 치 밖에 안 보인다’는 선어치, 옛길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유명산 자연휴양림 출발 4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역시 눈 길이 원인이다. 선어치에서 크램폰을 벗어 던진다. 족쇄를 푼 발이 가볍다. 지도를 살핀다. 선어치 우측으로 임도길이 나 있다. 그 길을 40여 분 내려가면 자연휴양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임도의 초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도로를 따라 내려 가다 비슷한 길을 발견하고 내려섰는데 이내 길은 끊기고 잡목이 우거진 곳이 나왔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아니면 사람들의 왕래가 줄어 길의 흔적이 흐릿해졌던가). 주변은 온갖 쓰레기로 어수선하고 동물 발자국과 배설물이 여기 저기 널려 있다. 기분이 좋지 않다. 다시 도로변으로 올라서야겠다. (자! 이제부터 비극의 유격은 시작된다.)
도로로 올라서야 하는데 길이 없다. 게다가 가시덩굴이 많아 성가시다. 길 없는 비탈을 올라 하수구 돌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서서야 도로 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10여분 이상을 헛수고하여 다시 도로에 서다니, 산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길 눈 어두운 내 자신에게 화가 났고, 모진 놈 만나 헛고생한 친구에게 미안했다. 차가 쌩쌩 지나가는 국도를 따라 걸으며, ‘다음에 차를 타고 지나다가 도로를 걷는 등산객을 만나면 꼭 태워줘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만큼 내 꼴이 말이 아니다.
한참을 내려 가다가 다시금 우측 휴양림 쪽을 바라본다. 분명 길이 있는데 하고 생각하며 걷는데, 한 지점에서 멀리 임도 길을 발견한다. 그래 산꾼은 산 길을 걸어야지 하는 생각에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 소나무가 우거진 비탈을 하염없이 내려 간다. 무척 가파른 구간이다. 다행히 소나무 숲으로 눈이 적어 걸을 만 했다. 한참을 내려 서니 다시 길이 끊긴다. 그야말로 산악 유격훈련이다. 일단 고생을 각오하고 나니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앞서 나간다.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말은 진실인가 보다. 어렵사리 눈 길을 헤치며 나아 가는데, 산판을 했는지 나무를 벤 흔적이 많아지고, 곳곳에 빈 술병들이 나뒹군다. 머지 않은 곳에 길이 있다는 예감이 든다. 곧이어 전선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내려 가니 휴양림의 도로와 만나게 되었다. 마지막 비탈을 내려 오니, 웬 할아버지가 “길을 잃으셨군요” 한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하고 혼잣말을 했다. (사실은 거기가 어딘지 몰랐고 또 한참을 유격을 해야 했다.)
휴양림에 들어 서면 모든 게 끝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여기저기 방갈로가 들어서 있는데, 통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주차장이 있는 관리사무소까지의 거리도 감감 이다. 부근 사람에게 길을 물으니 관리사무소는 오르막 도로를 넘거나 또 하나의 산을 넘어 가야 한단다. 이런 제길 휴양림이 뭐 이리 넓단 말인가? 산꾼이 도로를 따라 갈 수야 없지 라는 생각에 다시 산을 넘는다. 오늘 도대체 몇 개의 산을 넘는지 모르겠다. 길도 없다. 문뜩 눈 길 속에 눈에 익은 잎이 있어 살피니 복수초로 생각되는 야생화가 꽃 잎을 티울 준비를 하고 있다. 긴 겨울이 곧 끝날 것이라는(그리고 우리의 긴 산행도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솟는다. 눈 길을 헤쳐 산을 넘어서니 또 다른 캠핑장이 나온다. 시간은 3시 30분이 넘어 가고 있다. 오늘 산행은 참 길다.
< ‘유격’을 마치고 휴양림 캠핑장 앞에서 / 주차장 부근 다리에서 >
오토 캠핑장을 지난다. 텐트 옆에 차량을 세우고 가족 단위로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바야흐로 오토캠핑 대중화 시대가 도래했나 보다. 이 추운 날씨에도 텐트 데크에 빈 곳이 별로 없다. 오토캠핑장 부근 이정표에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 표시되어있다. 이제야 비로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관리사무소 부근에는 사람들이 오전과는 비교가 안되게 많다. 다시 사람 사는 동네에 돌아 온 소감이 나쁘지 않다. 두 산꾼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가시에 찔린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고 등산화는 눈에 젖어 물에 빠진 것 같다. 다시 차에 오르니 아늑한 캐빈에 들어 선 느낌이다.
3시 50분 평촌으로 출발한다. 산행을 시작할 때는 너무 일찍 산행이 끝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는데, 이제는 5시가 되어도 도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우려가 든다. 한치 앞을 모르는 세상이라더니 꼭 그 꼴이다. 다행히 경춘고속도로와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따라 오니 길이 막히지 않아. 5시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 유격훈련 같았던 초봄의 산행이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어서 집에 가서 친구들과 즐거운 뒤풀이를 하자.
< 에필로그 >
길었던 오늘 유명산 산행을 되 집어 보면, 들머리에서 입구지계곡을 따라 오르던 한 시간은 말 그대로 ‘꽃 길’이었다. 최근 잦은 눈 비에 계곡의 수량이 한여름처럼 풍부해 시원함을 느껴 좋았고, 이후 합수곡에서 유명산 정상까지는 길고 험한 된비알이 이어졌다. 힘겨움 끝에 다다른 유명산은 용문산, 한국의 ‘마테호른’이라 불리는 백운봉과 멀리 남한강 지류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며, 이후 소구니산과 서너치로 이어지는 길은 한 겨울의 눈 길이었다. 이후 임도길을 잘못 찾아 덤불과 비탈과 눈 길을 헤 메는 과정은 공수부대의 산악 훈련과 같았다. 이 모든 과정을 성우와 함께 했다. 가뜩이나 집안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는지, 나의 얕은 길을 보는 안목 부족으로 애꿎은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다.
사람을 만나서 길들여지고 인연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으나 그것을 유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오늘 내가 유명산에서 맺은 성우와의 인연이 행운처럼 다가 온다. 이 인연을 계기로 친구와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될 것이다. 자연이란 위대한 환경에서 같이 뒹군 추억이 앞으로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