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의 새음반이 정식 발매 되기도 전인 9월8일 이른 새벽부터 MP3파일이 인터넷을 떠돌았고, 동이 트기도 전에 서너건의 표절시비가 불거졌다. 거으 전곡이 Korn, Limp Bizkit, Crazy Town 등의 표절이라는 주장들, 이젠 조용하면 어색할 지경이다. 하지만, 정작 이제껏 한번도 들어본적 없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음악을 발표했다면 그러면 그렇재, 이게 무슨 하드코어냐, 집어 치워라! 소리를 들었을게 뻔하다. 어떻게 해도 서태지는 욕을 먹는다. 그것도 너무나 치졸한 이유로, 저열한 방법으로 욕을 먹는다.
서태지는 차라리 표절 이야기가 고마울지도 모른다. 그나마 표절 시비라도 없다면 그의 음악 자체에 대한 논의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연일 신문을 메우는 것은 상업적 신비주의, 고도의 술책, 억대 광고 수입, 팬들을 저버린 공인의 신분 망각, 왜색 울트라맨, 일본 해상 자위대 깃발과 유사, 꼭 그래야만 했나, 구태의연한 전략 등과 같은 수준 이하의 딴지걸기 뿐이다. 명색이 평론가라는 이들도 수박 겉핥기식 감상 비평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음반 판매량에만 미련스레 집착한다.
이다지도 세상이 변하지 않을때, 방법은 단 한가지다, 스스로가 먼저 달라지는것. 세상이 변함으로써 내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달라짐으로써 세상을 견인하는 방법. 그래서 서태지는 달라졌다. 이제 그 어떤 상황에도 직접, '친히' 대응하지 않는다. 솔로 1집 때는 아예 국내에 없었다지만, 전국 투어와 대규모 남북한 평화 콘서트까지 계획 중인 이번엔 언론과의 공조 시스템이 불가피할 텐데도, 언론에 대한 고자세가 솔직히 아니꼬울 정도다.
포토라인을 무너뜨린 기자들 탓에 공항에서의 귀국 소감 발표가 무산 되어 버린 이후 컴백 쇼까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언론과의 직접 접촉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귀국일 밤, 서태지 개인의 전화 사서함을 통하여 팬들에게 육성 인사를 남기는 세심함은 잊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상세 일정 및 컴백 쇼 준비상황이 서태지와 아이들 세 멤버 다음의 인기를 누리는 사서함 언니 채송아 씨의 음성을 통하여 팬들에게 소상히 전달됐다. 기자들도 기사 소스를 얻기 위해 다른 팬들과 똑같이 전화 사서함에 매달리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기자들은 괘씸죄를 적용시킬 꼬투리를 찾아 헤맸고, 팬들은 마냥 행복했다.
드디어 컴백 쇼 당일, 2시로 예상됐던 기자 입회 리허설은 특수 효과 최종 점검을 이유로 3시로 미루어졌다. 1시부터 프레스 카드를 발급받아 카메라 설치까지 다 끝내고 기다리던 기자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서태지가 무대에 없는데. 별수 없이 기자들 전원은 체육관 밖으로 다시 나올 수 밖에. 반드시 지키겠다던 3시 리허설은 3시 반이 넘어서야 기자 입장이 허용됐고 4시가 넘도록 시작되지 않았다. 슬슬 분을 삭이는 한숨과 담배 연기와 욕설이 튀어 나올 때쯤 "이제 5분 뒤에 서태지씨가 나오십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밴드 멤버들이 먼저 나와 자리를 잡았고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로부터 몇 분, 수백대의 카메라들이 숨죽이고 서태지를 기다리는 가운데 어두운 무대 뒤편에서 빨간 털실 뭉치 하나가 찰랑거렸다. 빨간 레게 머리의 서태지였다. 빨간 머리, 노란 셔츠, 청바지. 삼원색의 명시도 만점의 서태지는 한 마디의 인사도 리허설이 2시간 이상 늦어진데 대한 사과 표시로 가벼운 목례 한 번 없이, 곧바로 90도 꺾어 지는 헤드뱅잉으로 첫 인사를 대신했다. 타이틀곡 '울트라 맨이야'였다.
저자식, 저 난리를 치고 싶어 어떻게 5년을 참았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리허설이 한순간에 몰아쳐 지나고 기자석에선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솔직히, 나를 포함한 몇몇 기자들은 기자의 본분을 잃고 혼이 빠져 있었다) 딱 한 곡, 딱 한 번만 촬영을 허용한다는 일방 통고에 당황하던 기자들은 한 번만 더를 애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서태지는 현재 자신의 매니저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양현석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전했고, 양현석은 리허설 시간이 늦어진데 대한 사과의 뜻으로 한 번 더 부르겠다고 전햇다. 하지만 서태지의 표정은 절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은총을 한 번더 베풀겠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차라리 조소에 가까운 무표정. 다시 한 번, 처음보다 더 역동적인 리허설이 이어졌고, 끝난 후엔 간단한 질문을 할 틈도 주지 않은 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대를 빠져나갔다.
올림픽 펜싱 경기장이 좁다 느껴질 만큼 거대한 무대와 5천여 관중들이 꽉 들어찬 공연장. 스탠딩 플로어에서 "축, 복귀!"라고 쓰여진 종이 플래카드를 들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우리말로 또박 또박 따라 부르는 일본인 팬이 특히 눈에 띄었다. 드디어 조명이 하나 둘 꺼지고, 정확히 8시 10분에 공연이 시작되엇다.
먼저 우주에서 돌아온 서태지라는 컨셉트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됐고, 무대 상단의 전광판이 좌우로 갈라지며 서태지가 나타났다. 이어지는 첫 곡은 솔로 1집의 'Take 1'.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너의 아픔들은 이제 없을 거라고. 이 한마디로 팬들의 5년 한은 한 순간에 녹아내린 듯 했다.
서태지는 오렌지, 탱크, Take2/교실 이데아, 인터넷 전쟁, 울트라맨이야 순으로 진행된 콘서트 내내 5천여 관객들과 공연장 밖에 설치된 멀티 화면 앞의 1만 5천여 팬들을 무섭게 빨아들였다. 이번 앨범은 그자체로 커다란 에너지 덩어리라는 서태지의 설명이 더할수 없이 딱 들어맞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공연 중간 중간 서태지의 인터뷰, 각계 반응, 팬들의 환영 인사가 영상으로 소개 되었는데, 은퇴 번복 부분에 대한 서태지의 코멘트는 그의 변화를 가장 집약적으로 정리해 주고 있다.
"은퇴 다시의 상황은 어찌 보면 철이 없었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도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대국민 사과를 하라는데 내 생각엔 넌센스다. 나를 싫어하고 내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사과할 뜻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준, 내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에겐 진심으로 사과하며 음악으로 보답하고 싶다."
서태지가 시도했으니 하드코어가 우리 대중음악의 주류로 올라설 것이라는 둥, 서태지와 조성모의 싸움이 아니라 제작 시스템의 대결 구도가 예상된다는 둥 그 어렵고 잘난 분석 같은 건 난 모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하드코어란 말 자체가 장르에 앞서 태도의 개념인 것처럼, 서태지의 새 앨범이 우리 대중 음악계에 던지는 화두는 바로 이땅의 뮤지션들이 견지해야 할 태도의 문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태지는 이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적을 만드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치 없는 싸움에 자신의 에너지르 낭비하진 않을 생각인 것 같다. 그는 아이돌 스타가 아닌 뮤지션 서태지의 평가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싸워야만 한다면 그 창도 방패도 오직 음악이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것 같다.
뮤지션이 음악 이외의 일로 피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이 나라엔 그게 먹히질 않았다. 그래서 서태지는 이제 음악 이외의 그 모든 조잡한 싸움들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일방적인 휴전을 선포한 듯하다. 적이 너무 비루해서 맞서 싸우기가 비겁하게 느껴질 정도라면 무시해 주는 것이 기분적인 예의이며, 스스로의 기품을 지키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다 정말 임자 만나면 피 터지게 싸워주는 거다. 그게 진정한 하드코어의 태도다.
하지만 또 그게 이나라 상황에서 호락호락한 일일까? 그래서 많은 팬들이 감동과 기쁨의 눈물을 흘렷다는 히든 트랙, '너에게'의 핌프 락 버전이 사실 내겐 너무 가슴 아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 정작 십자가를 찾아 지는건 자기 자기 자신이면서 기자회견장에선 "전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아닌데, 왜 자꾸 저에게 십자가를 지우려 하시는지 모르겠어요"라며 밝게 웃어 보인다. 그 해사한 웃음이 히든 트랙의 명랑 발랄한 보켤에 이어지는 절규, '다 잔뜩 힘든 일일 뿐이지!'와 겹쳐질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믿는다. 살면서 허약한 믿음으로 수없이 상처를 주고 받을지라도 버릴 수 없는 한마디가 있다. '믿음이 힘이 된다.' 이 또한 얼마나 무모하도록 아름다운 태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