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칠지교(膠漆之交)
조 철 형
앞으로 3년 후에는 내 고향에서 지구촌을 후끈 달굴 동계 올림픽이 열린다.
재수도 아닌 3수 끝에 따낸 쾌거라 동계올림픽 준비 소식을 고향친구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전해 듣는 게 즐겁기만 하고 동계스포츠 중계에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어디를 가도 평창올림픽 얘기만 나오면 귀가 번쩍 뜨인다. 빙상경기에서 우리나라가 강세를 지속해 가는 동안, 컬링, 봅슬레이 경기에 서도 처녀출전한 우리 선수들 선전함이 대견스러웠는데, 3月3日字 신문! 봅슬레이 세계 선수권 경기에서 결선은커녕 본선진출도 버거울 거라 했던 예상을 뒤엎고 썰매강국의 높은 벽을 넘어 2인조 우승까지 차지한 낭보를 읽었다. “그럼 그렇지!” 나도 모르게 박수와 환성이 절로 터져 나왔고 난 어느새 내 유년시절의 겨울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로 향하는 길 좌측에 正方山, 그 남쪽으로 달래골 냉이골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녹으면 겨울을 이겨낸 달래, 냉이가 지천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경사면은 上田이고 둑 아래는 천수답인데 우린 늘 이곳을 지나 학교를 오갔다. 5학년이 끝나갈 무렵, 철늦은 폭설이 내려 허리까지 쌓였다. 봄 방학하는 날, 눈에 빠질까봐 설피(雪皮)를 신고 등교하는데 반나절이 걸릴 정도였다.
하학 길에서 어깨동무 네 명이 내일 달래골에서 눈썰매타기로 작정하고 각자 필요한 임무를 정했다. 밭길 정상에서 논의 경계 둑까지로 썰매코스를 정하고 밤에 얼도록 눈을 꼭꼭 밟아 다진 뒤 귀가했다. 다음날 모두 도시락과 눈가래, 낫 등 도구를 지참하고 약속장소에 모였다. 그날은 5일장이 열리는 장날이어서 어른들은 일찍 장에 가신 후라 난 아무런 제지 없이, 견물생심 눈여겨 보아두었던 헛간의 빈 분유통을 빼내 달래골까지 굴려갔다. 6.25동란이 갓 지난 터라 구호물자로 밀가루 설탕 분유가 배급되었다. 그 분유통이 눈썰매 감으로 제격이었지만 썰매로 만들기는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우선 두 명씩 나누어 어제 밟아 얼린 눈얼음 위에 다시 눈을 덮고 썰매코스 중간지점에다 턱을 만들었고, 종착지점 밭둑엔 눈을 높게 쌓아 제동시설이 되도록 했다.
나와 봉달이는 분유통을 해체하는 몫을 맡아 큰 바위 사이에 눈을 치우고 앙상한 활엽수를 낫으로 잘라와 모닥불을 피웠다. 아! 하필이면 땔감으로 쓴 그 나무가 옻나무일 줄이야! 그로인해 백주(白晝)의 설원에서 봅슬레이 교칠지교가 맺어졌다. 해체한 조각을 불에 달구어 전단은 구부리고 후단을 편 네 조각을 나란히 붙이고, 최종 옻 재로 바닥이 반들반들하도록 문질렀다. 드디어 썰매가 완성되자, 몸무게가 비슷한 사람끼리 2인조가 되어 중간 턱에서 연습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호흡이 안 맞고 서툴러 출발하자마자 곧장 옆으로 꼬라박았지만 출발순간 자리 앉기, 중심잡기, 자세 낮추기, 정지 요령 등을 반복 연습하였더니 어느 만큼은 자신이 생겨 “실전은 연습처럼”이라고 다짐하며 “시작”이라는 신호와 함께 썰매는 시발점을 출발했다. 가속이 붙게 되자 중간 턱을 지날 때는 마치 활강이라도 하듯 썰매도 우리도 함께 비상(飛翔)하였다가 착지하면서 그대로 비호같이 활주로를 내려 달려, 종착지에 멋지게 멈춰야 했지만 눈 둔덕을 넘어 논에 추락한 것이 흠이었다. 명불허전 2인조의 실력은 호각지세였다.
점심때가 훨씬 지나 모닥불에 데워둔 도시락 뚜껑을 열었더니 약속이나 한 듯 보리밥, 조밥 위의 굳어있던 분유가 누글누글 부드러워졌다. 꿀맛 같은 별미로 허기를 채우고 썰매타기는 계속되었다. 손발이 시리면 옻나무 모닥불에 녹였다. 바다를 건너 멀리 이국에서 온 구호물자 분유통은 기발하게도 썰매로 둔갑하여 벽지의 소년들은 해가는 줄도 몰랐다. 내일 다시 타기로 기약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가려워 눈(雪)으로 문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옻이 옮은 걸 몰랐다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서는 아들을 보자, 장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놀라 자초지종을 캐물으시고 달래골 모닥불이 사단임을 아셨고 그것도 옻 진을 만지다시피한 중환자로 취급해 방엔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외양간 여물 끓이는 곳에 격리된 난 옷을 벗은 채 어지랑물(외양간 흑갈색 소 오줌)을 바르는 신세가 되었다. 역겹고 고약한 냄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두메산골이라 민간요법에 의존해야만 했고 마땅한 옷이 없어 멍석거적이로 몸을 감싸고 부엌 앞에 앉은 몰골은 꼴불견임에 틀림없었으리라!
집안에 날벼락을 안겨 주었으니, 어머님께선 밤새 여물 가마에 불을 지피고 정지 밖에 정안수를 차리는 등 아들의 무탈을 기원하며 꼬박 새우셨다. 마치 붕대처럼 만 멍석 두루마리 속에서 초죽음이 된 난 신음하면서도 비몽사몽 슬로프에서 비상하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대문을 바라보니, 숯이 매달린 금줄이 처져있었다. 다음 날 중탕한 청주로 온 몸을 닦아내고 다시 어지랑물을 발랐다. 격리치료 중 앞집 봉달이는 손발만 경미한 환자라 허락을 받고 내 옆의 말동무로 같이 지냈다. 이틀이 지나자 용하게도 부기가 가라앉고 가려움은 참을 만 했다. 무료함을 달랜다고 봉달이가 눈을 가득 담은 대야에 소금을 섞은 후 분유와 홍시를 주물러 탄 컵을 눈대야에 넣자 신기하게도 금세 아이스크림이 되어 그 와중에도 둘이 마주보며 맛있게 먹었다. 3일이 지나자 금줄이 걷히고 교칠지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즉각적인 대응치료였던 민간요법과, 어머님의 지극정성에 구사일생 기적같이 나은 셈이었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치료로 옻 내성은 강해졌지만 옻닭 식당 앞을 지날 때는 절로 외면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달이의 말동무와 간병을 해준 교칠지심은 나의 좌우명이 되어 재직 시 산재환자가 입원했을 적엔 잦은 문병과 관심으로 애사심이 떠나지 않도록 배려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칠지교들은 고교 졸업할 때까지 눈이 오면 으레 달래골에서 봉달이가 잘 간수한 고색 찬연한 썰매로 썰매타기를 계속하였다. 해가 바뀔 때마다 기록 단축을 하며 달래골을 질주했던 우리들은 태극마크만 안 달았을 뿐 가히 불모지였던 봅슬레이 종목의 원조라 일컬을 만 했고, 고작 함지박 썰매를 타는 동네 꼬마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우리들은 요즈음도 정기모임으로 그 시절의 옻과 썰매에 얽힌 얘기로 꽃피우며 끈끈한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고희를 넘긴 교칠지교들이여! 우리가 탔던 구호물자 썰매는 우리나라가 개발한 신기술, 신소재로 진화되어 레인을 질주할 때가 다가오고 있지 않는가. 그때 봉달이와 함께 피웠던 모닥불은 성화가 되어 다시 타오르고 동네 꼬마들의 탄성은 온 국민의 열광으로 승화되어 우리 교칠지교 응원단은 북과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일심동체가 될 것이다. 우리 후예들은 당당히 세계를 제패하고 시상대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거는 쾌거를 이룰 것이다. 아!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
膠漆之交:끈끈한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 膠:아교 교. 漆:옻 칠
첫댓글 가난하지만 정이 많았던 옛시절의 아름다운 교칠지교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평창 올림픽이 우리의 기억에 영원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키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겠지요.
교칠지교!
그러한 관계의 친구가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할 것입니다.
'나는 어떤가? '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야 구분이 되겠지요.
우장춘 박사님이 말하기를 진성한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여...."까짓 거 "하였으나
사실은 어렵습니다.
달래골 냉이골 의 네 악동들 지금도 여전하시지요?
그게 다 제비리에서 똘똘 뭉쳤던 소년들 의리가 아니었겠습니까
,
아 ~~~ 제비리가 나오는걸 보니 혹시 대관령쪽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그 쪽에는
작으나마 행복했던 2년여의 추억이 서린 곳이지요 .
지금 다시 그 시절로 돌아 간다면 그 곳을 안 뜰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