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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2016년 8월 5일(금) 오후
우리는 드디어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 예상된 검문이 생략되고 무사통과하니, 국경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신에 한국대사관에서 보내는 여행자들의 안전과 관련된 문자안내가 휴대폰으로 전해지니, 국경을 통과했다는 느낌이 든다. 휴대폰에 의해 여행자의 위치를 알 수 있으니, 여행객들의 안전은 더 확보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부유럽에 해당하는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에 오게 되니, 무척이나 하늘은 맑고 공기는 건조함이 느껴진다. 전형적인 지중해식 온대기후를 이제부터 느껴보게 될 것 같다. 이번 12일간의 유럽여행 중에 가장 많은 날짜를 보내는 곳이 바로 이곳 이탈리아다. 그만큼 볼거리와 체험할 거리가 많다는 얘기일 것 같다. 이곳은 유럽을 지리적으로 구분할 때 분명 남부유럽임에도 여행사에서는 서유럽이라는 범주로 취급하는 것 같아 좀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기후가 다르고 인문환경이 확실히 다른 곳인데도.
스위스에서 보았던 검정색 전통가옥 대신에 여기서는 대리석 석재건물에 붉은 기와지붕을 올린 이탈리아의 전통가옥을 실컷 보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으니 마을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히틀러의 별장이 있었다는 꼬모(Como)마을을 통과하였는데, 산 중턱에 형성된 마을이 석양에 빛을 발하며 매혹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우리의 친절한 가이드님은 이탈리아(Italy)와 관련된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지역별 특산물과 먹거리, 이탈리아 식재료의 사용법, 이탈리아인들의 장수(長壽) 비결 등이었다. 이탈리아 인들이 대체로 장수하는 이유는 올리브, 포도, 토마토 등을 많이 섭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리브는 기름을 만들고, 포도는 포도주와 발싸믹(balsamique: 포도 엑기스)식초로 발효시키고, 토마토는 가열하여 요리하게 된다.
간단한 이탈리아어와 몇 가지 단어도 배우게 되었다.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인데, 듣기로는 특정지역의 사투리가 지금의 이탈리어가 되었다고 한다. 먼저 숫자를 나열해본다. 1 uno(우노), 2 due(두에), 3 tre(트레) 4 quattro(콰트로), 5 cinque(친퀘), 6 sei(세이), 7 sette(세떼), 8 otto(오토), 9 nove(노베), 10 dieci(디에치) 그리고 몇 가지 단어를 배웠다. 물은 acqua(아쿠아), 와인은 Vino(비노), 맥주는 Birra(비라), 좋은 아침(Buon giorno 본 조르노=good day), 감사합니다(Grazie 그라치에), 안녕(Ciao 차오), 건배(Salute 살루테: 신의 축복을 위하여), 아이스크림(Gelato 젤라토).
이곳에서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하는데, 요즘은 이탈리아 로마보다 프랑스 파리가 더 위험하다고 한다. 유럽연합 체제에서는 소매치기들도 보다 물 좋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프랑스 파리를 찾는 관광객이 더 많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알프스산맥에 자리 잡은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의 시골마을을 실컷 감상하고, 이제 이탈리아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롬바르디아 평야에 자리 잡은 밀라노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수도 로마(Rome)가 정치의 중심지라면, 이곳 밀라노(Milano)는 이탈리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경제의 중심지라고 한다. 세계사를 가르칠 때마다 언급되는 ‘밀라노 칙령’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진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트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역사적 사건을 ‘밀라노 칙령’(313년)이라고 한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펼쳐지고 경전철(輕電鐵)이 그 사이로 느릿하게 운행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경전철이 사라지기 직전에 타본 경험이 있기에 더욱 정감 있게 느껴진다. 건물마다 셔터가 있는데, 더운 여름에 열기를 차단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벽돌이나 돌로 만든 두터운 벽체는 여름에 생각보다 시원하여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한다.
* 밀라노(Milano, 영어로는 Milan): 밀라노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주의 주도이다. 밀라노는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로, 19세기 후반부터는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 도시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밀라노 패션쇼’로 유명한 밀라노는 패션뿐만 아니라 음식, 오페라,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라 스칼라 극장,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도 유명하다. 프로축구 팀으로는 AC 밀란과 인터 밀란이 유명하다.
우리는 밀라노의 구도심 지역에 접근하기 위해 좁은 도로를 통과하였다. 중세시대 마차가 달리던 도로였으니, 지금은 무척 비좁아 보인다. 하지만 이들은 그 불편함을 감수하며 밀라노의 옛 건물들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기능성과 편리성을 내세워 진작 개발하였을 것이다.
우리 기사님은 이곳 지리에 밝은 듯 능숙하게 버스를 운전하였다. 네모난 돌을 모자이크처럼 바닥에 깔아 만든 도로는 오랜 세월 사람과 마차가 다니며 닳았기에 반질반질한 느낌이다. 바닥만 보아도 이 도시의 역사와 전통이 저절로 느껴진다. 구도심의 잘 보존된 고풍스런 건물은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이곳 뿐 만아니라 유럽 어디를 가나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하다. 최소 백 년에서 수백 년 이상 된 건물들이 즐비하다는 것은 옛 것을 지키려는 그들의 보존 노력도 작용하였겠지만, 가옥의 재료가 대부분 돌이나 벽돌이기 때문에 화재나 부식에 강하여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세계적인 오페라 극장인 라 스칼라(La Scala) 건물과 그 앞에 위치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각상을 보게 되었다. 다빈치 조각상 아래쪽에는 제자들의 조각상도 함께 있었다. 다빈치는 이탈리아 피렌체 부근에서 태어났고,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며,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살았다. 밀라노에 레오나르도의 조각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당시 밀라노의 골칫거리였던 교통문제를 해결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좁은 도로에 일방통행(One way traffic)제도를 도입하여 문제를 쉽게 풀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일방통행제가 일반화되었지만 레오나르도가 처음 이런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다방면에 천재성을 발휘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왼손잡이, 채식주의자, 무소유 실천, 평생 독신, 요리를 즐긴 남자 등의 이력(履歷)을 남겼다. 호기심이 강하여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정작 제대로 마무리한 것은 많지 않았다고 하니, 모름지기 창의력이 강한 사람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는 능력은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라 스칼라(La Scala):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가극장 라 스칼라는 불타버린 극장 자리에 1776년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제(당시 밀라노는 오스트리아가 통치했음)가 지었다. 1872년 라 스칼라 극장은 밀라노 시가 소유하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문을 닫았다. 1920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회의를 소집해서 극장문을 다시 여는 데 필요한 기금을 모았고, 이 극장을 일종의 자치법인으로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폭격당했지만 1946년 다시 문을 열었는데, 경비의 일부는 토스카니니가 개최한 자선 연주회들에서 모집된 기금이었다. 19세기 베르디, 풋치니, 롯시니 등 작곡가들이 활약하였으며, 20세기에는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성악가 마리아 칼라스가 공연한 곳이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 - 1519 ):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 피렌체에서 서쪽 30km)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피에르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르네상스의 만능인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음악·회화 외에 모든 학문에 있어서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소와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조각상 앞에서 각자 기념촬영을 한 후에 우리는 걸어서 두 번째 견학장소로 이동하였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건물에 도착하였다. 대리석과 유리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유리와 철제로 만들어진 웅장한 아케이드(Arcade),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바닥의 대리석 장식 등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건물인데,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양식과 21세기 현대적인 감각이 함께 느껴지기도 하였다. 당시 첨단의 유리세공 기술이 적용된 아케이드는 햇빛을 받아들이며 비를 차단하는 시설인데, 무척이나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밀라노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두오모 대성당과 더불어 반드시 들르는 명소답게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참고로 아케이드는 아치형 등의 건축구조를 통해 우천 등의 기후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개방된 통로공간으로서, 지구단위계획으로 아케이드 설치구간을 지정하거나 그 조성방법을 정할 수 있다.
이탈리아 통일 후 첫번째 황제가 되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는 갤러리 건물
이탈리아에서 통일이후 첫 번째 왕이 되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조각상이 전국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이름을 딴 갤러리아도 그런 차원에서 통일 직후 만들어진 것이다. 참고로 유럽에서 가장 늦게 통일을 이룩한 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 이렇게 2개 나라이다. 이탈리아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사르데냐 왕국(카보우르 수상)을 중심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의용군을 이끌었던 가리발디가 적극 협조하였고, 드디어 1861년 3월 17일 통일 이탈리아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초대 왕으로는 사르데냐 왕이었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추대되었다.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를 베네치아에서 몰아내고, 1870년 교황령까지 합병함으로써 지금의 이탈리아가 성립된 것이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 비토리오 엠마누엘 2세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룬 1861년 Giuseppe Mengoni가 설계,1865년부터 13년간에 걸쳐 1877년에 완공된 아케이드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는 대표적 건물이라 한다. 유리로 장식된 높은 돔형의 천장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바닥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로 양쪽에는 멋진 카페와 레스토랑, 부티크 등이 줄지어 서있다. 이 갤러리아는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과 스칼라 극장사이의 십자형 아케이드 쇼핑몰이다. 밀라노 사람들은 여기가 바로 밀라노의 응접실이라며 한껏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설계자인 Giuseppe Mengoni는 갤러리아 준공 이틀 전에 중앙 철골 돔의 세부 장식을 살펴보다 떨어져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드디어 우리는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성당)에 도착하였다. 가이드님도 이 성당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 전율(戰慄)을 느꼈다고 하듯이, 우리 일행 모두는 저절로 감탄(感歎)의 목소리를 내었다. 마침 시간이 늦은 오후여서 석양에 비친 두오모 성당의 외관은 빛의 향연을 보여주었다.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성(聖)스러움까지 느껴지기에 충분하였다. 인간이 만든 지상의 건축물 중에 이렇게 화려하고 감동적인 건축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건물이었다. 건축사적으로는 중세시대의 고딕양식에 해당하며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첨탑마다 조각 작품이 장식되어 있었다.
석양빛에 비쳐 더욱 황홀한 모습의 밀라노 대성당.
여기에서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아들을 성당 앞쪽에 세워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관광객들은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 주고 유인하여 사진을 찍기도 하는데, 이곳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옥수수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는 피부색깔이 까만 흑인계통이 많은 것으로 보아 외국에서 온 이민자들 같았다. 문제는 그 옥수수를 팔며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수고비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들에게도 접근하여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도움을 주고 나서 무려 20유로의 거금을 요구하였다. 너무 어이없어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 돈을 달라고 하여 어쩔 수 없이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 2유로 정도를 지불하고 말았다. 나처럼 어수룩한 관광객에게 접근하여 이런 행패를 벌여도 경찰은 단속하지 않는 듯하다. 두오모 성당의 감동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쾌한 경험도 기억하게 된 것이다. 살다보면 동전의 앞뒷면처럼 호사다마(好事多魔)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 시쳇말로 ‘삥’을 뜯는 사람들로 인해 오랫동안 찝찝한 기분을 감내(堪耐)해야만 했다.
성당 건물에 카메라를 들이대니 햇빛을 받는 곳과 받지 못하는 곳의 명암차이가 너무 커서 카메라의 자동초점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경험도 특별한 경험이긴 하지만 무척 당황스런 상황이었다. 눈앞에 환상적인 장면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어김없이 광장(plaza)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엄청난 인파와 비둘기 떼로 인해 어수선 하였다. 성당 맞은편에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는 거대한 조각상이 위치하였다. 우리는 두오모 성당의 뒷부분을 감상하며 걸어서 버스를 탈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밀라노 구도심의 건물들은 대개 600년 전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는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조선건국 후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탈리아는 우리나라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마치 긴 부츠신발이나 장화를 닮은 모양이다. 그래서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나타나며, 심지어는 신체적으로도 차이가 있다고 한다. 대체로 북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게르만족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상대적으로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이며, 부지런하게 일을 하여 경제력이 앞선다고 한다. 반면에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남부지방 사람들은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이며, 낙천적인 성격에 일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남부지방에는 시에스타(Siesta: 낮잠)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경제적 차이로 인하여 북부지방에 사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남부지방 사람들을 혐오하며, 기회가 되면 차라리 별도의 독립 국가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 한다. 인생에 대한 가치관 차이 그리고 이에 따른 경제력의 차이가 남북 간의 갈등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마피아(mafia: 폭력조직)와 로또(Lotto: 복권)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것을 상기해보면, 이 두 가지 단어는 이탈리아 남부지방 사람들의 정서에 잘 어울리는 단어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소개된 이솝이야기의 한 대목인 ‘개미와 베짱이’가 떠오른다. 비유하자면 남부이탈리아인들은 하루하루를 즐기는 베짱이라 할 수 있고, 북부 이탈리아인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어려울 때를 대비하는 개미라고 하겠다. 어린 시절에는 이 이야기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베짱이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존재이고 개미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크게 변하여 지금은 예술을 즐기고 인생을 낙천적으로 즐길 줄 아는 베짱이 같은 캐릭터가 더 각광을 받고 있는 시대이니,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 지도: 20개의 주(regione)로 구성됨〉
우리 일행은 밀라노의 남쪽 소도시에 위치한 숙소까지 약 1시간 동안 버스로 이동하였다. 숙소는 홀리데이 인(Hollyday Inn)이라는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을 갖는 호텔이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이탈리아 전통의 피자와 스파게티(토마토 국수) 맛을 보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이용하는 호텔은 지금까지 이용했던 숙소 중에 가장 널찍하고 쾌적한 숙소였다. 화장실에는 특별한 시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게 바로 변기와 나란히 설치되어 있는 비데(Bidet)이다. 우리나라처럼 변기에 일체형으로 설치되어 전력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변기보다 작은 크기로 별도로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비데의 시작은 역사적으로 양변기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 같으며, 그곳은 바로 유럽이라 하겠다. 특히 이탈리아 지역은 모든 호텔에 재래식 비데가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 국민이 생활화 되어 있는 것 같다. ‘비데’라는 단어를 백과사전에서 찾으면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비데(프랑스어: Bidet)는 대변 혹은 소변을 본 후 항문 또는 국부(局部)를 세척하거나 발을 닦는 용도로 사용하는 기구이다.”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데는 조랑말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양변기를 말처럼 타고 앉으니, 비데는 몸집이 작은 조랑말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비유가 적절한 것 같다. 한국인들이 처음에는 비데의 용도를 몰라서 여기에 머리도 감고 걸레도 빨고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현지가이드를 통해 듣게 되었다. 나도 용변 후 비데에서 실습(?)을 해보았지만 정확한 매뉴얼을 몰라 편리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보다 위도가 낮아 여름이 덥겠지만, 아직까지 난 그렇게 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워낙 더위에 단련이 되어 이런 정도의 더위를 덥다고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다음에 계속]
밀라노 숙소에서 처음 본 이탈리아 비데와 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