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라디오와 유행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커다란 라디오에서 시간이 멀다하고 자주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노래가 너무나 경쾌해서 초등학생인 나마저도 금방 따라 부르게 하였다. 몇 번 듣고 나니 저절로 노래를 외워 부르게 되었다.
라디오를 듣기 위해선 집 앞 미루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안테나를 설치해야 했다. 철사를 얼키설키 고기 굽는 석쇠모양으로 만들어서 나무 꼭대기에 매고 집 안까지 선을 연결해서 라디오 외장 안테나에 걸어두면 되었다. 그렇게 안테나를 매면 그런대로 몇 개의 주파수를 잡을 수 있었다.
라디오는 가끔 찌지직 소리를 내면서도 그런대로 산골마을에 도시의 문명을 전해주었다. 겨울이면 동대문 시장에 가서 옷을 떼서 시골에 팔던 아버지의 서울이야기와 구로공단에 가서 일을 하고 일 년에 한 번쯤 명절이면 선물을 사서 들고 왔던 동네 누나들의 서울 소식을 제외하면, 라디오는 산골마을에서 최고의 문화전파매체였다. 그런 서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은 유머 섞인 노래와 함께 장난을 하였다. 그 장난은 산골 아이들의 머쓱한 유머였으며 동시에 서울에 대한 동경이었다. 삽당령 너머 강릉에만 갔다 와도 크게 유세하던 시절이었으니 서울에 대한 동경은 말해 무엇 하랴.
“서울에 가면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차도 많고~~”
그렇게 서울에 대한 동경을 하면서 옆 사람을 발로 차면서 ‘차도 많고’를 ‘차도 좋다’로 바꿔 읊조리기도 하였다. 등잔불에 그을린 까까머리들의 서울 동경에 대한 어설픈 장난이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서울에 가고 싶은 꿈을 키웠다. 그런 아이들에게 서울에 사는 가수들이 유행가를 부르는 현장이 라디오를 통해서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버스도 한 대 다니지 않는 산골 구석에 라디오를 통해서 울려 퍼진 유행가는 아이들에게 또 다른 관심거리였으며 흉내내기를 하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지만 달콤한 가수들의 목소리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당시 우리 집에 라디오가 있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 라디오는 강릉에서 전파사와 시계점을 운영하는 고모부가 여름휴가 차 처가에 오면서 선물로 가져온 것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 라디오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기야, 당시 그 동네에 라디오는 처음인지라, 우리 뿐 아니라 동네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라디오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실제로 라디오를 보고 그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처음 봤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다들 라디오 속에 작은 사람이 들어가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뭔 사람이 그 속에 살아요. 뭘 먹고 사나요? 거 참 노래도 잘 하네.”
이 물음을 들을 때면, 순박한 호기심과 웃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검게 탄 산골 아낙의 표정이 생각날 것이다. 그 때문에 처음 라디오를 본 사람들은 라디오를 ‘소리기계’로 불렀다. 모두들 그 소리기계를 보기 위해서 저녁이면 삼 광주리를 들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 소리기계에서는 매일 저녁이면 라디오연속극을 하였다. 절실하게 목소리를 통해서 들려주는 라디오연속극은 산골 아낙들에게 웃음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라디오 때문에 삼을 삼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산골의 밤풍경은 그렇게 바뀌었다.
미닫이문을 사이에 둔 산골의 겹집은 방 하나에만 라디오를 틀어도 사랑방, 안방, 건넌방, 도장방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콧숨 때문에 껌벅거리는 등잔불 밑에서 숙제를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 라디오 소리로 가 있었다. 어린 나에게 그런 라디오 소리는 신비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유행가는 정말 달콤했다. 그 때문에 가끔 주파수 싸움도 있었다. 연속극, 뉴스, 유행가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다.
라디오는 또 다른 산골의 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 당시 산골의 10대들은 밤이면 남녀가 모여서 일명 ‘착착이’라는 놀이를 하였다. 이 착착이는 어른들이 허락한 젊은 남녀의 놀이문화였다. 착착이는 다름 아닌 손뼉을 칠 때 내는 소리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그때 가장 많이 했던 놀이는 ‘착착이’와 ‘은나나나나’라는 후렴을 넣어서 돌아가면서 해당하는 나무나 희망 등의 단어를 끊이지 않게 내는 것이었다. 가령, “나무 이름 대기 착착, 소나무가 착착, 대나무가 착착, 벚나무가 착착~~~”하면서 착착이라는 말은 손뼉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또 ‘은나나나나’는 “무엇이 되고 싶나 은나나나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 목수가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 은나나나나~~~”라면서 두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고 박수를 치면서 그 자리에 모인 10대들이 돌아가면서 소원을 부르다가 직업을 대지 못하면 벌칙을 받아서 노래를 부르든가 춤을 추든가 하는 것이었다. 10대들의 심심풀이 놀이문화이면서, 산골과 농촌을 벗어나고 싶은 꿈을 키워가던 놀이문화였다. 이 놀이는 같은 동네 처녀총각들이 만나기도 했지만 산을 넘어 다른 동네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바로 이 ‘착착이’에 동원된 것이 라디오를 개조한 마이크와 앰프시설이었다. 작은 라디오 스피커를 떼서 마이크를 만들고 라디오 본체는 확성기로 사용한 것이다.
10대 아이들은 그렇게 개조한 라디오 앰프를 이용해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배운 유행가를 불렀다. 마치 누가 잘 하나를 시합하듯이 노래를 하면서 꿈을 키운 것이다.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고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 하네~~”
산골사람들의 마음과 너무나 일치하는 가사였다. 산골에 사는 아이들은 자신들의 고된 삶을 그렇게 달랜 것이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임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임과 함께면 임과 함께 같이 산다면~~~”
그렇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산골 아이들의 고된 삶을 달래면서 꿈을 키웠다.
일 년에 한 번쯤 마을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인 콩쿨대회는 라디오를 통해 배운 유행가 실력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고등학교 밴드부학생들이 연주를 하고 트럭의 엔진을 켜놓고 밧데리의 전기를 이용해서 확성기를 통해 노래를 하였다. 트럭의 엔진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박자를 놓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사람들은 환호를 하면서 다들 좋아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여름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흥 때문에 막내 고모에게 부탁해서 노래값을 내고 무대에 섰다. 결과는 당연히 ‘땡~’이었지만, 그때 뜻도 모르면서 불렀던 노래가 <임과 함께>였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다들 웃고 난리였다. 어린 애가 유행가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아리랑 춤을 추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언제 노래를 시작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헤매는 우스꽝스런 모습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시절 라디오는 산골마을을 서울과 연계하는 최고의 문화매체였다. 뉴스는 남자 어른들의 관심거리였고, 연속극은 여자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유행가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전축이나 녹음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라디오가 주는 문화충격은 정말 대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