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유명한 부자들은 초기에는 주로 대지주들이었습니다. 1 년에 수확하는 곡식으로 천석꾼이니 만석꾼이니 하는 것이죠. 그러나 갈수록 상업 자본가가 거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아직 화폐경제가 안착하기 이전에 초기의 상업자본은 역관들이 축적했습니다.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했던 통역사들이 그들인데 실물경제에 밝았고 언어소통이 자유로운 것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당시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의 경비로 각자 인삼 열 근 짜리 여덟 꾸러미 즉 80 근을 지참하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인삼 여덟 꾸러미를 팔아서 여행 경비에 충당하라는 취지였는데 이 자금을 이용한 무역이라고 해서 이를 팔포무역 (八包貿易)이라고 하죠.
당시는 인삼이 재배되기 전이라 100% 채취삼 즉 산삼이었고 인삼 80근의 가치는 은(銀) 2천 냥에 달했습니다. 물론 인삼 씨를 산에 뿌려 채취한 반(半) 자연산인 장뇌삼이지만. 인삼을 팔아서 생긴 은으로 비단이나 약재, 혹은 바늘(針)을 사서 귀국하면 몇 배의 차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관 중 유명한 거부가 숙종때의 일본어 통역관 변승업이었습니다. 그는 청일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고 장안 제일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유명해서 부인이 죽었을 때 왕실 사람들처럼 관(棺)에다 옻칠을 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정 요로에 수만냥을 뿌렸습니다.
그는 남아도는 돈을 고리채로 놓았는데 그가 죽을 때 후손들이 보복을 받을 것을 염려하여 채권 문서를 모두 불사르게 하고 빚을 탕감시켜 버립니다. 이때 탕감된 총액이 은으로 환산해서 50만 냥이었다고 합니다. 변승업은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10만 금을 빌려 주는 변부자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16세기 이후 중국에는 서양으로부터 막대한 은(銀)이 유입되었습니다. 콜롬부스로 시작된 지리상의 발견 이후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멕시코 은이 당시 제해권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포르투갈로 흘러 들었습니다.
초기 150 년동안 1만 6천톤 이상의 은이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었고 이는 유럽의 경제 질서를 새로이 개편해서 스페인의 페소화가 그때까지 국제결제의 중심화폐였던 오스만 제국의 화폐를 대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놈들은 이렇게 생긴 은으로 민간자본을 육성해서 국부를 도모하지 않고 왕실을 위한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대부분을 썼습니다. 사치품 중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유명했고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으로 멕시코 은이 중국으로 유입된 것이며 또한 인삼 구입의 대가로 조선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당시 중국의 징더진(경덕진, 景德鎭) 도자기는 유럽 상류계층에 일종의 유행병이었고 도자기는 거의 보석에 준하는 가치로 거래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도자기를 차이나(China)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17세기에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도자기 기술을 도입하여 수출을 시작하고 유럽이 도자기 생산을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 도자기는 독점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신대륙 은의 3분의 1, 거의 2억냥에 가까운 은이 도자기 구입 대금으로 중국으로 유입되었습니다.
18세기에 인삼이 대량 재배되기 시작하자 생산량이 폭등하였고 인삼은 조선의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습니다. 임상옥 등 조선 후기 거부들은 대개 청국과 인삼무역을 하던 상인들이었지요. 인삼무역 허가증인 황첩(黃帖)을 따 내려면 100만 냥이 들 정도로 엄청난 특혜였지만 그걸 내고도 남는 장사였다니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였는지 알 만 하죠.
조선 상인의 또 한 축으로는 육의전 상인을 들 수 있습니다. 한양의 도성 안에 상설 시장을 개설하고 여섯 가지 품목을 취급하는 큰 상인 집단입니다. 지금의 종로 근처의 큰 대로가에 가가를 지어 놓고 상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게 하는 대신 세금을 거두고 관용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게 하는 어용 상인들이죠. 그들에게는 일반인이 도성 안에서 장사를 못하게 금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독점적 권리가 부여되었습니다.
도성(4대문 안)의 금난전권을 회피하려다 보니 한양 주변에 큰 장시(場市)가 형성되었습니다. 충청, 경상도 등 내륙의 물화가 경기도 이천, 광주, 과천을 통해 집산되었던 송파 장터, 한강으로 올라 온 해산물, 소금이 거래되었던 마포, 서강, 용산의 어물객주, 경기 강원으로부터 뗏목으로 수송된 목재가 하역 되는 뚝섬의 시목(柴木) 시장, 원산으로 내왕하는 명태상인이 중간 기착하는 다락원(누원, 樓原), 그리고 한양 도성 내의 영세민이 필요한 물화를 구매하기 위해 남대문 밖에도 난전이 섰습니다.
육의전 상인들은 정부와의 유착 속에서 성장했기에 그들은 당쟁에 필요한 정치 자금의 주요한 조달처가 되었습니다. 또한 상인조합의 우두머리인 도령위(都領位)나 대행수(大行首)등의 임원을 선출하는 데도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정조는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는 금난전권의 혁파조치를 취하게 되고 육의전의 위상도 약화되었습니다.
상인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개성 상인입니다. 그들의 조합을 송방(松房)이라고 했는데 엄격한 신용과 절제된 거래 태도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그들은 사개다리(四介置簿)라는 발달된 분개(分介), 기장(記帳)의 회계 기법을 운용했습니다. 서양식 복식부기와 같은 것이죠. 또한 전국적인 조직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어음은 요즘의 국공채와 같은 정도의 공신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주요한 상인으로는 개성 상인 외에도 서울의 경상(京商), 평양의 유상(柳商), 일본과 무역에 강세를 보인 동래의 내상(來商), 의주의 만상(滿商), 그리고 해운업에 종사했던 강상(江商) 등이 있었습니다.
첫댓글 음...
맨날...음~ .....난~ 흠....
이번엔 읽을시간이없어...클릭 인증..^^
음...3
쩐이란...???
시대에 따라 귀중가치가 변하는
하나의 물건....^^
내한테 붙지말고 독립들하세욧... ㅡ.ㅡ^
아라쪄~
아잉...참..ㅋ
ㅅㅅㅅ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사람은 그 중간에 있나니 위 아래 중간이
바로 서야 천재지변이 안일어나징...
기런데
천지인 중 하나가 잘못되면 말그대로
천재지변이 일나징...
헐~~
음~~
흠~~
좀 하지 말어유...
의미심장한 글인디 심장이 의미하게되는
현실인거 같군...
기준, 표준, 올바른 정책, 분리되나 한길이고
한길이되 다른길을 가게되는...
돈 은 경제 산삼 인삼
그리고 상도!!!
바른 길은 없음인가???
없는 바른길이 옳은것인가??
점점 사차원으로 가넹...
니는 한잔 혀고 말을혀야~~~
헐~~~!!!
덕분에 역사공부 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