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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김제 52코스 제2부
몽산마을 입구-화포마을-만경낙조전망대-신창마을-새창이다리-신촌마을
20230614
1.만경평야를 적시는 만경강을 거슬러 오르다
만경읍 몽산리 몽산마을 입구에서 서해랑길 52코스 남은 구간을 탐방한다. 무성히 자란 갈대풀을 헤쳐 수로 다리를 건너 만경읍 화포리 들녘으로 나왔다. 화포리 들녘은 만경강과 접하여 이곳에서 동쪽과 남쪽 지역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만경(萬頃)은 ‘백만 이랑’이란 뜻으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만경평야(萬頃平野)는 '백만 이랑'의 드넓은 평야요, 만경강(萬頃江)은 '백만 이랑'의 넓고 긴 강이라는 뜻일 것이다. 만경강이 흐르고 만경평야가 펼쳐지는 화포리 지역은 북쪽에 낮은 구릉이 이어지며 조앙산과 주행산이 솟아 있고, 동남쪽에 율산이 솟아 있다. 화포리 화포 들녘을 가로질러 낮은 구릉지 남쪽에 자리한 화포마을 입구로 갔다. 입구에는 '평산 신씨 충효열지비'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돌보지 않은 탓에 현판의 글씨는 보이지도 않고 비각편액은 없었다. 비각 뒤에서 화포리 들녘을 바라보니 어느새 태양은 하늘로 솟아 있다. 날씨가 흐린 탓에 이글거리는 붉은 색을 잃은 붉노란 빛이 구름 속에서 흘러나온다.
화포리(火浦里)는 고승(高僧)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태어난 곳임을 탐방 뒤에 알게 되었다. 화포(火浦)라는 지명도 진묵대사와 같은 고승(高僧)이 태어났다는 '불거촌(佛居村)'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즉 ‘불(佛)’의 음을 불을 뜻하는 ‘화(火)’자를 쓰고, ‘거(居)’가 개로 변한 뒤 갯마을을 뜻하는 ‘포(浦)’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위에는 진묵대사를 흠앙하는 조앙사(祖仰寺)와 진묵사(震默寺), 그의 어머니 무덤이 있는 성모암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속명 일옥(一玉)인 스님은 부친을 잃고 7세 때 완주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하여 그곳에서 활동하다 열반하였으며 봉서사에 진묵대사 부도가 있다고 한다. 어스름이 드는 때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노래했다는 한시는 스님의 호탕한 자유인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노라."
화포리 마을들은 대부분 만경강을 북쪽에 두고 낮은 구릉지 안쪽인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화포리 지역의 마을을 감싼 낮은 구릉지 뒤쪽 만경강 유역 들녘으로 서해랑길은 이어진다. 만경강 들녘으로 나가니 새벽의 어둠 속에서 어림만 했던 만경강 갈대습지와 넓은 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만경강 갯벌은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갈대습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만경강 공유수면을 불법으로 점용하거나 매립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경고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새만금간척사업 이전의 만경강과 갯벌을 상상하며 만경강 제방길을 걸었다. 들길은 아득하게 이어지고 갈대습지에 조성된 목초지에는 '소풀'이라고 이르는 소먹이 사료 뭉치 '곤포사일리지'들이 목초지에 널려 있다.
화포리 마을이 등진, 낮은 구릉지가 이어져 솟아오른 조앙산 아래 조앙사가 어림된다. 조앙사는 진묵대사를 흠앙하여 세운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라고 한다. 조앙산 뒤쪽에 진묵대사의 어머니를 기리는 성모암과 진묵대사를 기리는 진묵사가 있을 것이다. 남쪽 구릉지를 살피며 만경강 갈대습지와 구릉지 사이의 드넓은 들녘의 들길을 걷는다. 동쪽으로 들길은 이어지고 만경낙조전망대가 가늠된다.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을 보고 마음을 씻어낸다고 한다. 들길을 걸으면서는 관야세심(觀野洗心), 들을 보고 마음을 씻어내게 된다. 길은 걸어온 삶을 뒤돌아보게 하고 걸어갈 길을 상상하게 한다. 들(野)을 보면서 걸어온 삶의 티끌을 씻어내고 걸어갈 삶을 맑은 길로 상상한다. 들길에서 떠오르는 무수한 사람들과 사건들, 그 속에서 커다랗게 떠오르는 또렷한 사람과 가슴에 기쁨과 상처를 준 분명한 일, 이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을 정화한다. 그리고 동경의 길, 시행착오 없이 맑음과 평화로 걸어갈 삶을 희망으로 그린다. 그러나 그 길은 언제나 도전이고 모험이기에 그런 삶이 되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 없어 불안하다. 그럼에도 들길을 걸으며 추억하고 상상하는 마음은 이내 곧 평화와 환희로 넘친다.
들길에서는 쉼이 필요하다. 들길에 쉼터정자가 세워져 있고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다. 화포마을 뒤쪽 만경강 제방길을 따라 걸어온 들녘길에서 쉬어가기 위해 만경낙조전망대로 오른다. 입구에 "많은 흔적과 생명을 품고/ 완주, 익산, 전주, 군산, 김제를 거쳐/ 바다로 가는 만경강/ 갈대들도 알고 있지/ 그 땅의 모든 이야기를"(만경강은 기억하지) 만경강은 이곳 땅의 역사를 알고 있다는 시를 읽으며 만경낙조전망대로 올랐다. 만경강이 한눈에 보인다. 만경강은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티마을에서 발원하여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국사봉까지 이르는 뱀 모양의 하천으로, 전라북도 북부 평야 지대의 젖줄이자 생명수로서, 만경강 유역은 완주군·익산시·전주시·김제시에 이른다고 한다. 만경강 건너편 북쪽은 군산, 동쪽 멀리 전주, 익산, 완주 지역을 어림한다.
'만경낙조전망대'에는 만경정과 한 그루 소나무, 그 둘레에 만경강을 소개하는 안내비와 안내도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만경팔경 중 제1경 '만경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만경낙조전망대'이다. 만경강 안내도를 살펴보니 만경강을 거슬러 오르며 '만경팔경' 한 곳 한 곳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정자를 조성하여 놓은 것 같다. 만경팔경을 정리해 본다.
제1경 만경낙조(萬頃落潮) 만경강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낙조를 조망할 수 있는 곳.
제2경 신창지정(新倉之情) 새창이 나루를 오가던 사람과 이곳에 남겨진 역사 문화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
제3경 사수곡류(泗水曲流) 만경강의 옛 이름인 사수(泗水)의 중심에서 옛 물길과 사람들의 어우러짐을 의미하는 곳.
제4경 백구풍월(白鷗風月) 백구정에서 만경강을 내려다보며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자연을 노래하는 곳.
제5경 비비낙안(飛飛落雁)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만경강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와 낙조가 아름다운 곳.
제6경 신천옥결(新川玉潔) 옥같이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로, 만경강의 허파 역할을 하는 신천습지가 있는 곳.
제7경 봉동인락(鳳東人樂) 편안하고 즐거운 봉동의 자연환경과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곳.
제8경 세심청류(洗心淸流) 세심정에 앉아 마음을 씻고, 흐르는 만경강에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곳.
만경낙조전망대에서 사방을 둘러 본다.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 만경강입니다."라는 안내판의 글은 가을 풍경을 찬미하는 글이다. 만경강 가을 풍경을 상상하면서 6월의 만경강 풍경을 내려본다. 만경강 주변은 온통 초록 물결이다. 갈대습지의 무성한 갈대풀, 들녘에 물결치는 논벼들, 초록으로 넘실거린다. 생명이 약동하는 활력, 청춘의 만경강 풍경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만경 제1경 '만경낙조' 한자를 보니 만경낙조(萬頃落潮)다. 지는 햇빛, 노을의 '落照'가 아니라 바닷물이 밀려 나가는 '落潮'이다. 그렇다면 제1경은 만경강에 밀려들어온 바닷물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풍경이다. 그렇지만 지금 만경낙조(萬頃落潮)를 감상할 수는 없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바닷물은 차단되어 고군산군도까지 바닷물은 밀려나 있다. 그렇다면 제1경을 '만경낙조(萬頃落照)'라고 고쳐야 할 것이다. 만경낙조대는 만경강 서쪽으로 지는 노을과 붉게 물든 강물, 그 위를 날아가는 철새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곳이다.
만경낙조전망대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화포리 지역의 마을이 모두 구릉지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토정마을만은 구릉지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토정마을은 약 500년 전에 청풍 김씨가 터를 잡고 살면서 형성된 마을로, 깨끗하고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 토정(土井)이었는데, 이후 토정(土亭)으로 고쳤다고 한다. 토정마을 앞에는 두 길이 평행으로 달린다. 하나의 길은 만경강 제방길이고 또 하나의 길은 만경강 갈대습지 옆에 조성한 자전거길로 제방길과 나란히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자전거길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갈대습지만을 조망하게 되어 몇 차례 제방길로 올라가 만경평야 너른 들을 조망하였다. 화포리에서 소토리로 넘어와 남쪽 만경읍 만경평야를 바라보았다. 서쪽 화포리 토정마을, 동쪽 소토리 입석산 아래의 소토마을, 그 사이로 만경평야갸 펼쳐지는데 이른 새벽에 걸어온 진봉면 지역도 가늠된다. '징게맹게 외배미들' 풍경이 장관이다.
자전거길은 갈대습지 옆으로 이어가다가 갈대습지 안쪽으로 뎈길을 조성하여 갈대를 감상할 수 있는 길을 내놓았다. 만경강 갈대를 노래한, "노을빛 그리움으로 물드는/ 강둑에 갈대들이여/ 그리움에 흔들려라/ 굽이치는 만경강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라" 구절은 노을빛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각에 저녁 노을은 어불성설이요, 아침 노을도 구경할 수 없다. 길손은 가을 갈대의 그리움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초록으로 물결치는 갈대의 꿈과 동경을 더 사랑한다. 만경평야와 갈대는 지난 시대의 질곡의 고통을 그리움으로만 추억하고, 평화와 영광으로 반짝이는 초록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끝없이 물결치는 갈대의 초록물결, 그 속에 만경강과 만경평야의 내일이 있다. "노을은 지지 않는다/ 노을 속으로 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삶도 없이 죽음에 이르고 있느냐/ 누가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느냐/ 이슬처럼 풀잎 위에 앉아 있어라/ 죽어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느니/ 만경평야에 첫눈 내리면/ 첫눈처럼 풀잎 위에 앉아 있어라"(정호승의 '만경평야' 전문) 만경평야는 삶과 죽음을 모두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는 이 노래에 울림이 큰 이유는 만경(萬頃)의 의미에서 우러나는 것 같다. 백만 밭이랑이 지금 초록으로 물결치다 다음에 황금 물결을 이루며 죽음으로 가고 그 위에 첫눈이 내린다. 우리의 인생은 풀잎 이슬이요 풀잎의 첫눈이다. 만경평야의 삶과 죽음이 절묘하게 '만경(萬頃)'의 의미로 나래를 펼치고 날아간다.
만경강 갈대습지의 자전거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만경읍 소토리에서 장산배수문을 지나면 청하면(靑蝦面) 장산리(莊山里), 조금 더 가면 곧바로 청하면 동지산리(東芝山里)로 넘어가 청하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만경8경 중 제2경 '새창이나루터'로 올라갔다. 표석에는 "만경강의 역사와 문화교류의 장소이며 대표적인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제2경 '신창지정(新倉之情)'입니다."라고 적혀 있고 앞에 새창이다리가 만경강을 가로지르며 김제시와 군산시를 잇고 있다. '새창이나루(新倉津)'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포구로 서해로부터 고산포, 동자포, 춘포로 물길이 연결되며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어 번성했던 곳이며, 신창(新倉)마을은 1905년경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에 살면서 군산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지난 시절의 흥성했던 풍경, 수탈 당하는 미곡 가마니 등을 상상한다. 만경강 하류 군산항으로 떠가는 돛단배들, 그 안에 가난한 조선인들 모습이 그려진다. 선창의 선술집을 어슬렁거리는 한량들이 나루로 내려가 무언가 흥정하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군산이 왜 우리나라 최초의 증권시장인 미두시장이 생겨났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만경강 팔경 중 제2경 새창이나루터에서 잠깐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만경강 새창이다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만경강의 유래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신창진(新倉津)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재의 만경강 이름으로 고쳤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도 신창진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는 ‘사수(泗水)’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김제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이 강을 신창진으로 부른 것 같으며, 다만 <대동여전도>에는 사수강(泗水江)이라 이른 것 같다. 그런데 만경낙조전망대 안내판에는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사수(泗水)'로, 사수는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강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만경현 앞을 흐르는 강'으로 격하되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안내문의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신창진', '사수강'으로 불리던 강을 만경강으로 바꾼 것이 이 강을 격하했다"는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만경현을 흐르는 강이니 만경강이라는 구체적 강 이름으로 바꾼 것이 사수강(泗水江)의 의미를 격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통일신라는 757년(경덕왕 16) 때 이 지역을 만경현(萬頃縣)으로 개칭하였고, 이후 '만경' 행정구역명은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에도 김제시 행정구역의 일부로 김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경평야(萬頃平野)는 '백만 이랑'의 드넓은 평야요, 만경강(萬頃江)은 '백만 이랑'의 넓고 긴 강이라는 의미가 이 지역과 관련하여 보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래서 만경강 이름이 이 지역의 역사적 유래와 특성을 잘 나타내는 훌륭한 강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새창이나루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강탈해서 군산항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경강 하구에 조성한 나루였다고 하는데, 교통량이 많아지자 1933년 이 나루 위에 우리나라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인 '만경대교(일명 새창이다리)'를 준공하였다고 한다. 이 다리가 노후화되고 교통량이 늘어나자 그 옆에 폭이 넓고 튼튼한 다리를 1989년 2월 개통하여 '만경대교'라고 이름하여 예전의 다리는 새창이다리, 구만경대교라 불리게 되었다.
새창이다리 교명주에 '만경대교'가 새겨져 있고 그 반대편 입구 기둥에는 건립연도가 새겨져 있다. 김제시 청하면 장지산리에서 새창이다리로 들어선다. 부안에서 동진대교를 건너 김제에 들어왔다가 새창이다리(만경대교)를 건너 김제와 작별한다. 김제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김제평야와 만경평야, 일제강점기의 간척사업, 드넓은 보리밭과 밀밭의 지평선, 끝없는 수로가 이어지는 물의 농촌, 모악기맥의 봉화산과 진봉산, 심포항, 새만금방조제, 만경강과 만경낙조전망대, 새창이나루터 등 새벽과 이른 아침과 대낮의 수많은 풍경들이 되살아온다. 안녕, 김제 만경강과 징게맹게 외배미들이여!
새창이다리를 통해 만경강을 건넌다. 다리 난간에는 김제 관광지를 홍보하는 안내판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심 지역을 사진에 담는데 귀신사가 나온다. 아, 이 절은 1992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이 배경한 절이었지. 어느 여름날 이곳을 찾아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귀신사는 '귀신의 절' 鬼神寺도, '신에게 돌아가다'는 歸神寺도 아니요, '믿음으로 돌아가다'는 뜻의 '歸信寺'이다. 이 소설은 숨어 있는 꽃들의 이름을 찾아내고 그 꽃말의 의미를 알아보는 것처럼, 우리의 구체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서해랑길 탐방은 양귀자의 '숨은 꽃'을 찾아가는 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새창이다리를 건너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로 넘어왔다. 새창이전망대 북단 입구 난간 기둥에 서해랑길 53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고, 새창이다리 북단 뎈광장 입구에 서해랑길 52·53코스 안내도와 서해랑길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길었던 서해랑길 탐방 52코스를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어진다. 그렇지만 새창이전망대에는 올라가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먼저 새창이다리 뎈광장 난간에 설치된 새창이다리 관련 기록 전시물을 살펴보고서 새창이다리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사방을 조망하였다. 만경강 건너 걸어온 김제시 징게맹게 외배미들이 가늠된다. 장지산리 갈산마을 왼쪽 신창마을의 만경팔경 제2경 새창이나루터 쉼터정자와 그 왼쪽에 신창정미소를 분명히 확인하고, 동쪽으로는 만경강 상류를 가늠한다. 그리고 북쪽으로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의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길은 걸어야만이 참다운 길이 된다. 걸어온 길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가지 않은 길을 이어서 걸어야 한다. 하나의 탐방길을 끝내고 다음의 탐방길을 이어가기 위해 전망대에서 내려왔다. 동행하는 일행은 벌써 복교리 신촌마을을 지나 앞서고 있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9.02km 중 8.02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13분 중 2시간 20분
만경읍 몽산리에서 이정목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여 수로 둑방에서 다리를 건너 만경읍 화포리로 넘어간다.
만경읍 화포마을 1.1km 방향으로 이어간다.
수로 다리를 건너 만경읍 화포리로 넘어가 오른쪽 쉼터정자 앞 농로를 따라간다.
농로를 따라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꺾어 화포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만경읍 광역 탐방로는 만경읍 토정마을에서 진봉면 심포마을까지 12.5km 거리이다.
서해랑길은 화포리 농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왼쪽 솔숲이 있는 방향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는 율산인 것 같다.
김제시 만경읍에 속하는 火浦里는 조선 말기 만경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흥리·대토리·창자리 일부를 병합하여 화포리라 하고 김제군 만경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동년 3월 2일 만경면이 만경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가 되었다. 만경강(萬頃江) 하구와 인접한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다. 모악산(母岳山)[793.5m]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백산면과 만경읍을 거쳐 화포리에 이르기까지 점차 낮아져 구릉지를 이룬다. 마을 앞으로 지평선까지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뒤쪽으로 만경강이 드넓은 서해로 흘러든다. 동쪽으로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 서쪽으로 만경읍 몽산리, 남쪽으로 만경읍 송상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화포·창자(昌子)·장흥(長興)·주행산(舟行山)·토정(土亭)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읍 화포리 들녘, 오른쪽 솔숲을 거쳐 왼쪽 산 자락에 있는 화포마을 방향으로 농로를 따라간다.
농로를 따라가면 아스팔트길 '화포로'와 만난다. 앞에 보이는 마을이 만경읍 화포리 화포마을이다.
화포로를 따라 화포(火浦)마을 입구로 이어간다. 진묵대사는 화포마을에서 태어나 7세 때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사(鳳棲寺)로 출가하였으며 봉서사에 진묵대사 부도가 있다고 한다.
진묵대사(震默大師)[1562~1633]의 속명은 일옥(一玉)으로 1562년(명종 17)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지금의 김제시 만경읍 지역]에서 태어났다.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받았으며,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신통력으로 많은 이적(異跡)을 행하였다고 한다. 저서에 『어록(語錄)』이 있다. 진묵대사가 태어난 화포(火浦)는 불거촌(佛居村)의 다른 이름으로, 즉 ‘불(佛)’의 음을 취한 뒤 불을 뜻하는 ‘화(火)’자를 쓰고, ‘거(居)’가 개로 음이 변한 뒤 갯마을을 뜻하는 ‘포(浦)’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불거촌은 진묵대사와 같은 고승(高僧)을 낳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의 비각은 '평산 신씨 충효열지비'를 모신 비각이다. 서해랑길은 왼쪽 길로 진행하여 산 뒤쪽 만경강 방향으로 이어간다.
화포(火浦)는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불개·불거(佛居)·불포(佛浦)라고도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부처 ‘불(佛)’자를 불 ‘화(火)’자로 바꾸어 화포(火浦)가 되었다고 한다. 진묵대사는 1562년(명종 17)에 태어나 1633년(인조 11) 열반에 들기까지 살아 있는 부처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는 진묵대사를 흠앙하는 조앙사(祖仰寺)와 진묵사(震默寺)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화포마을은 평산 신씨 집성촌인가 보다. 비각에는 비각명이 없었고 현판도 오래되어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붉은 해가 떠올랐다. 화포리 들녘 중앙에 주행산마을, 오른쪽에 장흥마을, 맨 오른쪽에 창자마을이 있는 것 같다.
주행산마을은 화포 북동쪽의 주행산(舟行山, 29m)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산 밑까지 배가 드나들어 뱃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산 밑까지 배가 드나들어 주행산(舟行山)이라 하였다. 마을 뒤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로 유명한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소와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창자(昌子)는 마을이 길다 하여 장지메, 마치 긴 칼처럼 생겼다 하여 장검리라고도 한다. 장흥은 마을이 길다고 하여 장리(長里)라고 부르다가 오래도록 길이길이 흥하라는 뜻에서 고친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화포마을 뒤 농로를 따라간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하고 있다.
화포마을 뒤 농로를 따라가다가 화포마을을 살핀다.
'만 개의 밭이랑'이란 뜻을 지닌 만경강(萬頃江) 들녘에 소의 먹이가 되는 곤포사일리지가 널려 있다.
오른쪽길은 조앙사와 성모암으로 가는 길, 서해랑길은 왼쪽 만경낙조전망대 방향으로 이어간다.
새만금광역탐방로는 서해랑길 52코스 진봉면사무소 입구에서부터 만경읍 소토리 시점까지 동행한다. 오른쪽에 새만금간척개발사업 공유수면 매립면허구역 금지사항 경고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만경강 제방길을 따라 오른쪽 뒤에 보이는 만경낙조전망대 방향으로 이어간다.
왼쪽 뒤에 만경읍 화포리 만경낙조전망대가 보인다.
탐방길에서 조앙산과 주행산을 구별할 수 없다. 지도를 살펴도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주행산 지명이 여럿 있어서 어느 곳이 주행산마을과 관련된 주행산인지 파악할 수 없다. 중앙을 주행산, 오른쪽을 조앙산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진묵대사와 관련된 사찰을 분명히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맨 오른쪽 조앙산 자락에 조앙사가 있는 것 같으며 그 뒤쪽에 성모암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왼쪽 산자락 뒤에 만경읍 화포리 토정마을이 있다.
이 산이 조앙산인지 주행산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다. 산 아래에 있는 절이 조앙사일 것이라 판단하면 이 산은 조앙산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조앙산 왼쪽에 진묵사, 조앙산 뒤쪽에 성모암, 그 오른쪽에 주행산마을이 있을 것이다. 진묵대사와 관련된 사찰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지만 이후의 탐방을 위하여 조앙사, 성모사, 진묵사를 참고한다.
1.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조앙산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조앙사(祖仰寺)는 진묵조사(震默祖師)를 흠앙(欽仰)하는 뜻에서 진묵조사의 ‘조(祖)’자와 흠앙의 ‘앙(仰)’자를 따서 이름 지었다. 이곳 불거촌(佛居村)에서 훤당(萱堂) 조의씨(調意氏)가 진묵조사를 잉태하였을 때 인근의 산천초목이 시들어가더니 진묵조사가 출생하였다고 하여 산천의 정기를 뽑아 태어났다고 전한다.
2.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유양산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성모암(聖母庵)은 일제강점기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華之地)로 전해오는 전라북도 지역의 고승 진묵대사(震默大師) 모친의 묘소에 세워진 암자이다.
3.진묵사(震默寺)는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에 있는 한국불교 화엄종 소속 사찰. 현재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진묵사(震默寺) 근처에서 진묵대사(震默大師)가 탄생되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진묵사는 실질적으로 조앙사(祖仰寺)의 조사전(祖師殿)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현판도 ‘진묵조사전’으로 되어 있다. 진묵사는 1928년에 창건되었고 그 뒤 1930~1940년대에 김상률이 만경현의 동헌 건물을 해체하여 그 부재로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진묵조사전의 주련에는 진묵대사가 쓴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아 산을 베개로 베고, 달을 촛불삼고 구름으로 병풍치고 바다를 술단지를 삼았네. 크게 취해 일어나 춤을 추려니, 긴 소매가 중국 곤륜산에 걸려서 귀찮구나[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居然仍起舞 却嫌長袖掛崑崙].”라는 시가 행서로 걸려 있어 호방한 성품의 진묵대사를 접할 수 있다. 진묵사는 만경강 하류 및 서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 산 뒤에 화포마을, 왼쪽 조앙산 자락 뒤에 주행산마을이 있을 것이다.
화포(火浦)는 진묵대사가 태어난 곳이다. 진묵대사는 1562년(명종 17)에 태어나 1633년(인조 11) 열반에 들기까지 살아 있는 부처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마을 주위에는 진묵대사를 흠앙하는 조앙사(祖仰寺)와 진묵사(震默寺)가 있다. 마을 주위에는 진묵대사를 흠앙하는 조앙사(祖仰寺)와 진묵사(震默寺)가 있다. 주행산은 화포 북동쪽의 주행산(舟行山, 29m)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산 밑까지 배가 드나들어 뱃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되었다. 산 밑까지 배가 드나들어 주행산(舟行山)이라 하였다. 마을 뒤에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로 유명한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소와 성모암(聖母庵)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만경강 간석지가 개척되었다. 이곳에 드넓은 목초지를 조성하여 곤포사일리지를 생산한다.
만경강 제방길을 따라 중앙 언덕에 조성되어 있는 만경낙조전망대를 찾아간다.
정면에 만경읍 화포리 토정마을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왼쪽 언덕 앞을 거쳐 이어간다.
토정마을은 약 500년 전에 청풍 김씨 중시조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깨끗하고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 토정(土井)이라 하였다가 행정구역 개편 때 토정(土亭)으로 고쳤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오른쪽은 토정마을 가는 길,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이어간다. 종점까지 4.4km 거리가 남아 있다.
오른쪽 뒤 구릉 뒤 화포마을에서 작은 구릉을 돌라서 만경강 제방길을 따라왔다. 왼쪽 조앙산 아래에 조앙사가 보인다.
쉼터정자 입구에 시인 정호승의 '만경평야' 시비가 세워져 있다.
노을은 지지 않는다/ 노을 속으로 새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가 삶도 없이 죽음에 이르고 있느냐/ 누가 죄인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느냐/ 이슬처럼 풀잎 위에 앉아 있어라/ 죽어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느니/ 만경평야에 첫눈 내리면/ 첫눈처럼 풀잎 위에 앉아 있어라(정호승의 '만경평야' 전문)
쉼터정자 입구에 정호승 '만경평야' 시비와 만경강 생태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소나무/ 과명 : 구과식물목 소나무과, 꽃말 : 불로장수 - 소나무는 우리나라에 널리 분포하는 나무로 솔, 솔나무, 소오리나무라고도 한다. 바늘 같은 잎이 2개씩 뭉쳐나고, 꽃은 5월에 피며 화분의 송홧가루는 다식으로 만들어 식용한다. 다양한 쓰임새와 함께 수려한 모습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소나무를 푸른 기상의 상징으로 여기고 사랑하여 시구(詩句)나 노래에도 등장시켜 왔다.
만경강 공유수면 습지에 꽃길을 조성하기 위해 식물을 식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생겨난 드넓은 간척지에 갈대습지가 형성되었다. 이곳에 꽃길을 조성한다고 하며 만경강 건너편 다리는 군산시 대야면 지경리와 회현면 증석리를 잇는 지경교이다.
만경강 강변을 따라가는 자전거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을 벗어나 만경낙조전망대에 오른다.
만경낙조전망대 입구에 '만경강은 기억하지' 시비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흔적과 생명을 품고/ 완주, 익산, 전주, 군산, 김제를 거쳐/ 바다로 가는 만경강/ 갈대들도 알고 있지/ 그 땅의 모든 이야기를
만경낙조전망대 오르는 길에 안도현의 '만경강 노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노을아/ 피멍진 사랑아/ 어릴 적 고향집 뒷방 같은 어둠이/ 들을 건너오는구나/ 그대 온몸의 출렁거림/ 껴안아줄 가슴도 없이 나는 왔다만/ 배고픈 나라/ 하늘이라도 쥐어뜯으며 살자는구나/ 내 쓸쓸함 내 머뭇거림 앞에서/ 그대는 허리띠를 푸는데/ 서른살이 보이는 강둑에서/ 나는 얼마나 더 깊어져야 하는 것이냐/ 서해가 밀려들면/ 소금기 배인 몸이 쓰려/ 강물이 우는 저녁에/ 노을아/ 내 여인아(안도현의 '만경강 노을' 전문)
만경정 쉼터정자와 만경강에 대한 여러 표석이 조성되어 있다. 만경정 옆 소나무 한 그루가 멋지다.
낙조의 한자가 지는 햇빛, 노을의 '落照'가 아니라 바닷물이 밀려 나가는 '落潮'인데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落潮'는 볼 수 없다.
1경 만경낙조(萬頃落潮) - 이곳은 만경강의 아름다운 노을을 조망할 수 있는 제1경 '만경낙조'입니다. 만경강과 바다가 만나 소중한 생명을 품고, 수많은 철새가 반기는 곳, 강변을 따라 이어진 갈대와 낙조가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조망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만경낙조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세요.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 만경강입니다. 과거에는 호남지역의 정취가 머물고 나루터를 통해 문물이 오가던 소통의 중심지였고, 현재는 보호종의 서식처이며 희귀 철새가 날아드는 생태학 통로입니다. 만경강의 주요 공간인 민경8경을 만나보세요.
1경 만경낙조(萬頃落潮), 만경강 물길을 따라 갈대와 낙조가 어우러지는 자연의 통로. 만경8경 포토존 설명 표석의 글을 옮긴다.
이곳은 만경8경 중 1경인 '만경낙조'로 만경강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좋은 포토존입니다. 만경강 물길 따라 어우러지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처럼 사시사철 변하는 수려한 만경강을 배경으로 추억을 남겨보세요.
고지도로 보는 만경강 8경 이야기 - 고지도에 나타난 만경강의 모습은 굽이굽이 흐르는 곡류하천으로 표현되었으며, 옛 나루터와 물줄기의 모습이 잘 남아 있습니다. 만경강의 본래 이름은 '사수(泗水)'로, 공자의 고향 '곡부'의 강 이름과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조 유방의 고향 풍패 지역 강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사수는 유교문화의 발상지이자 왕조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강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의해 직강하천이 되고 그 이름도 '만경현 앞을 흐르는 강'으로 격하되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만경정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이곳 만경정은 만경강 바다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갈대와 낙조가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만경강의 대표적인 쉼터입니다. 해가 지는 모습과 철새가 날아가는 모습이 난간에 새겨진 만경정에서 만경낙조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세요.
만경정 난간벽을 해가 지는 모습과 철새가 날아가는 모습의 공간으로 뚫어 조성하였다.
만경정에서 아침을 먹고 사방을 조망하였다.
만경강과 건너편 군산시 대야면 지경리와 회현면 증석리 일대를 조망한다. 다리는 대야면과 회현면을 잇는 지경교이다.
만경강 하구 방향을 조망한다. 드넓은 간석지가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간척되어 드넓은 갈대습지가 형성되었다.
만경강이 북서쪽으로 굽이지고, 걸어온 만경강 방조제길이 한눈에 보인다.
화포리 만경강 들녘이 펼쳐지고 중앙 뒤에 화포마을, 왼쪽 조앙산 아래 조앙사가 있다.
동남쪽을 조망한다. 앞에 청솔농장, 그 뒤에 토정마을이 있다.
동쪽으로 중앙에 만경읍 소토리 입석산과 소토마을 그 왼쪽 뒤에 청하면 동지산리 새창이다리가 가늠된다.
동북쪽에서 만경강이 흘러오고 서해랑길은 만경강 갈대습지 옆에 조성된 자전거길을 따라 동쪽 청하대교 방향으로 올라간다.
북동쪽을 조망한다. 만경강이 동쪽에서 직강한다. 오른쪽 위에 청하대교와 새창이다리, 만경강 건너 지경교가 확인된다.
만경정 출입구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노을빛 그리움으로 물드는/ 강둑에 갈대들이여/ 그리움에 흔들려라/ 굽이치는 만경강따라/ 내 마음도 흘러가라
낮은 구릉에 자리한 낙조전망대는 만경강과 주변 전망의 최고이다. 출입구에 만경강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 위 도로는 만경강 제방길이고, 이 자전거길은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형성된 갈대습지에 조성한 것 같다.
만경읍 화포리에서 소토리(小土里)로 넘어왔다. 잠시 만경강 제방길로 올라가 걸어온 만경읍 화포리 일대를 살폈다. 오른쪽 뒤에 화포리 토정마을, 왼쪽에 보이는 곳은 화포리 장흥마을이라고 짐작한다. 맨 왼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빙 돌아온 것이다.
만경읍 소토리(小土里) 지역을 살핀다. 왼쪽에 입석산, 오른쪽에 와석산, 왼쪽 소토마을, 그 오른쪽에 춘천마을을 가늠한다.
김제시 만경읍 소토리(小土里)는 이웃한 화포리의 토정이나 대동리보다 작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소토리(小土里)라 하였다. 입석산(立石山)[61.7m] 밑에 있어 돌이 많기 때문에 돌설메라고도 한다. 조선 말기 만경군 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흥리·율리·춘천리·대토리·장흥리·창자리 각 일부, 북일면 공향리 일부, 김제군 마천면 신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토리라 하고 김제군 만경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면에 속하였고, 동년 3월 2일 만경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김제시 만경읍 소토리가 되었다.
입석산과 와석산(臥石山)이 남북 방향으로 뻗어 내려가면서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율산과 이어지는 구릉 일대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동북쪽으로 만경강(萬頃江)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갯벌이 발달하여 소토제방을 쌓기 전에는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간척이 이루어진 뒤부터 마을들이 규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구릉지를 제외한 지역은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다. 동쪽으로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 남서쪽으로 만경읍 화포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소토·춘천·율리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만경강 제방길 북쪽 아래 자전거길을 따라 청하면 동지산리 새창이다리까지 이어진다.
만경강 갈대습지에 조성된 자전거길을 따라 청하면 동지산리 새창이다리까지 이어간다.
잠시 서해랑길을 벗어나 갈대습지 조망뎈길을 따라간다. 왼쪽 뒤에 만경강을 가로지르는 청하대교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 수로를 경계로 만경읍 소토리와 청하면 장산리가 경계를 이루는 것 같다.
입석산 아래에 만경읍 소토리 소토마을이 있다.
만경읍 소토리에서 청하면 장산리로 넘어와 자전거길을 따라 새창리다리로 향한다.
靑蝦面 莊山里는 마을의 산이 길게 뻗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청운산 고개에서 여자 장수가 태어났다 하여 씩씩할 ‘장(壯)’자, 뫼 ‘산(山)’자를 써서 장산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금차리·거산리·공향리·신월리·관원리 일부, 김제군 마천면 청하리·제상리·제하리·거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산리(莊山里)라 하고 김제군 청하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가 되었다. 남서쪽에 능제저수지가 있는 낮은 언덕 지형이다. 동쪽으로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 서쪽으로 만경읍 소토리, 남쪽으로 청하면 관상리와 이웃하고 있다. 자연마을로 청하산(靑蝦山)·구장산(舊莊山)·제상(堤上)·신월(新月)·거산(巨山)·신금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쪽에 김제시 청하면과 군산시 대야면을 잇는 청하대교가 보인다. 길을 따라 청하대교 아래를 지나 새창이다리 앞으로 간다.
청하면(靑蝦面)은 청하산(靑蝦山)[50m]의 이름을 따서 청하(靑蝦)라 하였다. 면 중앙에 청하산 등이 형성한 구릉이 있을 뿐, 전체가 넓은 충적 평야 지역이다. 만경강(萬頃江)의 지류인 내신천·외신천·동지천·갈산천·용산천(龍山川) 등이 흐른다. 동쪽으로 김제시 공덕면(孔德面), 서쪽으로 만경읍(萬頃邑), 남쪽으로 백산면(白山面), 북쪽으로 만경강을 사이에 두고 군산시 대야면(大野面) 및 익산시 오산면(五山面)과 이웃하고 있다. 동지산리·장산리·대청리·관상리·월현리 등 5개 법정리 28개 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군산과 김제를 잇는 지방도가 지나고, 작은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다. 만경강 하류에서 잡히는 실뱀장어가 유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품질 좋은 쌀을 공출이라는 명분으로 강제로 빼앗아 군산으로 실어 가기 위해 신창진[일명 새창이나루터]을 만들었다. 1933년 신창진에 다리를 놓았고, 교통량이 증가하자 1989년 만경대교를 개설하면서 신창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적으로는 선사시대 주거지와 동지산리 토성 등이 있다. 동지산리 토성은 만경강 남쪽의 동지산[289m]에 쌓은 테뫼식 토성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하대교 아래를 지나 만경8경 제2경 '새창이나루터'로 왔다. 앞에 새창이다리가 만경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곳은 새창이나루터(新倉津)입니다. 신창진은 만경강의 대표적인 포구로 서해로부터 고산포, 동자포, 춘포로 물길이 연결되며 수 많은 배들이 드나들어 번성했던 곳입니다. 수많은 사연이 깃든 새장이나루터에서 만경강을 바라보며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 가던 옛 선조들의 정취를 느껴보세요.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 만경강입니다. 이곳은 만경강의 역사와 문화교류의 장소이며 대표적인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는 제2경 '신창지정(新倉之情)'입니다. 새창이나루는 이곳을 오고 가던 사람들과 문물이 남기고 간 역사와 문화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버들매치, 붕어, 참마자, 도로기, 망둥어, 뱀장어, 감돌고기, 참종개, 동자개, 버들붕어, 금개구리, 치리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곳이 새창이나루가 있던 곳인데 그 자리에 새창이다리가 1933년 준공되었다.
새창이 나루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강탈해서 군산항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경강 하구에 조성한 나루터이다. 현재 만경대교(일명 새창이다리)가 놓여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만경강 이야기 표석 뒤 교명주(橋名柱)에 '만경대교' 다리 이름이 보인다.
풍요의 강 만경강 이야기 - 황금빛 들녘과 푸른 물길이 만나는 풍요의 강 만경강입니다. 새창이다리(만경대교, 1933 준공)는 일제 수탈의 흔적이자 지역의 애환이 깃든 곳입니다. 조선시대 고지도인 '대동방여전도'와 '조선지형도'를 통해서도 당시와 지금의 지형을 비교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만경강을 따라 수많은 인연이 함께했던 이곳에서 지난 역사의 자취를 느껴보세요
단기 4266년 7월 준공이라 기록되어 있다. 1933년 완공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콘크리트 다리라고 한다.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새창이다리 남단을 통과한다. 다리 난간에는 김제 관광지를 홍보하는 안내판들이 전시된다.
만경대교(萬頃大橋, 새창이다리)는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와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를 잇는다. 만경대교 부근은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신창진(新滄津)이란 포구로 불려왔다. 이곳은 군산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김제평야에서 나는 쌀을 가져가기 위해 만든 나루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교통량이 많아지자 1933년에 시멘트로 다리를 놓았는데, 이 다리를 ‘새창이다리’ 또는 만경강을 건너는 다리라고 하여 ‘만경대교’라고 하였다. 다리가 노후화되고 교통량이 늘어나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1988년부터 폭이 넓고 튼튼한 다리를 놓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개통하였다. 옛 만경대교는 노후화로 인해 붕괴와 사고의 우려가 높아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곳곳이 파이고 금이 간데다 일부 난간은 콘크리트가 떨어지고 철골이 드러날 정도로 흉물스럽게 부서지는 등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런데도 이 다리 위에서 망둥어와 숭어를 낚기 위해 하루 평균 수백 명이 몰려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새창이다리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3년 昭和 8년 공사비 25만원으로 준공되었다. 김제평야의 쌀을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新作路)를 거쳐서 군산을 통해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리이다. 세월이 흘러 다리가 노후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89년 바로 옆에 새로운 만경대교를 만들게 되어서 지금은 차량통행이 금지된 상태다. 한때 다리 위에서는 망둥어와 숭어 낚시로 강태공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다리 아래 만경강에서는 실뱀장어 잡이를 통해서 이곳 주민들이 큰소득을 올리기도 했으나 새만금공사로 해수유통이 막히면서 지금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귀신사는 '鬼神寺'도 '歸神寺'도 아니요,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歸信寺'이다.
귀신사는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부처로 모신 법당이며 신라 문무왕16(676년)에 의상스님이 처음 세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적광산을 비롯 석탑, 부도 등 다수의 유형문화재가 있다.
1.미즈노씨네 트리하우스 - 동화 속에서 보았던 나무 위에 직접 올라가 500년 된 느티나무, 상수리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자연생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장소로, 올라서는 순간 남녀노소 누구나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나뭇가지, 솔방울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자연 소재를 활용한 목공예 체험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곳의 주인은 일본 삿포로 출신의 아빠 미즈노 씨와 김제 출신의 아내, 그리고 사랑, 기오, 선화, 태양, 수아, 5남매다. 2004년 아내의 고향 마을로 온 미즈노씨 가족은 폐가로 방치됐던 한옥을 수리하고 아이들을 위한 트리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오늘도 우리 집은 공사 중'이라는 가훈을 따라 8년째 그들만의 낭만하우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트리하우스는 5남매의 추억과 꿈이 담긴 공간이자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2.청운사(靑雲寺) - 보기 드물게 순수 한국어로 된 기둥과 벽의 글씨가 무척이나 신선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1927년 4월 한주석 스님이 다시 창건하고 1931년에 인당 스님이 중창하였으며 1938년에 백운스님이 보살과 함께 관음보살을 완성하였다.
중간 지점에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김제 관광지 홍보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새벽 어둠과 이른 아침에 진봉면 들길을 걸었다. 보리는 이미 모두 베어져 없었다.
매년 5월 경 호남평야의 중심, 김제시 진봉면의 광활한 보리밭을 무대로 다양한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축제이다.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자연생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이제는 건강식이 된 보리를 이용한 각종 음식을 맛보며, 축제기간 행사장 곳곳에서 펼쳐지는 공연 관람은 만물이 소생하는 5월, 삶에 활기를 더한다.
국도 29호선 청하대교가 만경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새창이다리 북단에 새창이전망대가 조성되어 있고 새창이다리 관련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새창이다리 북단 새창이전망대 입구 난간 기둥에 서해랑길 53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52·53코스 안내도, 서해랑길 이정목, 새창이다리 기록물 전시대, 새창이다리전망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새창이다리 북단 뎈광장 입구에 서해랑길 52·53코스 안내도와 서해랑길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52코스는 18.4km, 소요시간 6시간, 난도 보통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 탐방한 결과 19.02km, 5시간 13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52·53코스 안내도와 함께 서해랑길 52코스 탐방 종주를 기념한다.
53코스 탐방을 시작하기 전 새창이다리 관련 기록물을 살피고 전망대에 올라 주변 풍경을 조망하기로 한다.
새창이전망대 앞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푸른 가지를 드리고 있다.
새창이다리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새창이다리 뎈광장 난간에 설치된 새창이다리 관련 기록 전시물을 살펴 본다.
구 만경대교인 새창이다리는 일제강점기 기존 가교의 안전문제와 군산, 김제 간 수송상 편의를 위해 1933년 준공된 콘크리트 다리입니다. 당시, 만경강 일대 넓은 평야지대에서 수확된 양곡을 일본으로 수탈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 이후 교통량이 늘고 다리가 낡아 1998년 바로 옆의 새로운 만경대교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萬頃大橋(만경대교) 竣工祝賀曾준공축하증) - 김제만경(金提萬頃)평야와 임피옥구(臨陂沃溝) 평야를 관통연락하게되는 중요선의 하나인 신창진(新倉津) 만경대교가 八(팔)월二(이)일에 준공되엇다함은 기보한바어니와 지난 五(오)일에 신창진에서 우천임에도 불구하고 관민유지 수백명의 집회하에 성대한 축하식을 거행하엿다한다. 동교는 총장 一(일)천三(삼)백八十六(팔십육)척이오 총공비는 二十五(이십오)만 二(이)천八(팔)백三十(삼십)원이라 한다. 1933년 10월 7일 동아일보 3면
새만금간척사업에 의해 만경강변에 습지가 형성되어 이곳에 연꽃마당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하늘에서 내려보면 한반도 모습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곳은 순결하고 고귀한 이미지로 우리 문화와 역사 속에서 널리 사랑받아온 연꽃을 테마식물로 조성한 새창이 연꽃마당입니다. 연꽃의 수질정화기능을 통해 만경강 생태가 회복되고, 진흙 속에서도 늘 깨끗한 꽃을 피우는 연꽃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강의 푸른 물길과 더욱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새창이는, 예로부터 불리던 '새로 지은 창고'라는 뜻의 신창(新倉)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발달했던 포구 신창진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이 지역 만경강 일대의 곡식을 수탈하기 위해 다리를 놓았고 지역 이름을 따라 '새창이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을 흐르는 만경강은 예로부터 망둥어, 실뱀장어, 숭어 등 민물고기 어획이 잘 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万頃橋落成(만경교낙성) 總工費廿五萬圓(총공비입오만원) - 다년간 현안중이든 전북김제옥구(金堤,沃溝)간만경대교(萬頃大橋) 신창진「新倉津」은 총공비 二十五(이십오)만一(일)천八(팔)백三十(삼십)원八(팔)전六(육)리라는 거액을 드리여 소화六(육)년十一 (십일)월十一(십일)일 기공하야 六(육)백三十七(삼십칠)일만인 지난七(칠)월三十(삼십)일에 준공이되엇는데 다리기리가 四(사)백二十(이십)메돌(一千三百八十六尺(일천삼백팔십육척)) 광이五(오)메돌반이라한다. 지난八月二(팔월이)일에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하엿다한다. 1933년 8월 4일 동아일보 3면
새창이전망대 입구 난간 기둥에 서해랑길 53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전망대 2층으로 올라가 조망한다.
전망대 2층에 새창이 연꽃마당 이야기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새창이 연꽃마당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았을 때 한반도 모습으로 보이게 형상화되어 우리 민족의 상징과 함께 만경강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순결과 청정을 뜻하는 연꽃마당을 함께 조성하여 그 의미가 오랜 시간 흘러온 만경강 생태와 어우러지도록 하였습니다.
새창이전망대 2층에서, 한반도 모습으로 조성했다고 하는 연꽃마당을 내려보았다. 뒤쪽에 국도 29호선 청하대교가 만경강을 가로지르며, 만경강 건너편 왼쪽에 만경읍 소토리 입석산이 조망된다. 53코스에서 연꽃마당 앞을 통과한다.
새창이전망대에서 새창이다리와 건너편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 신창마을과 신창정미소, 오른쪽 맨 뒤의 청하산을 조망한다. 건너편 오른쪽은 갈산마을, 그 왼쪽 신창마을 언덕에 만경 제2경 '신창지정(新倉之情)' 표석이 세워져 있는 쉼터정자도 보인다.
김제시 청하면에 속하는 東芝山里는 마을 앞산인 동지산(東芝山)에서 이름을 따서 동지산리(東芝山里)라 하였다. 자연마을로 척산(尺山)·내신(內新)·궁동(弓洞)·동지산·연봉(蓮峰)·동촌(東村)·시장(市場)·신창(新倉)·갈산(葛山) 등이 있다. 신창(新倉)마을은 1905년경 일본인 중시가 시장마을에 살면서 군산으로 가기 위해 나룻배를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다. 새로 생긴 나루터라는 뜻에서 새창이로 부르다가 신창(新倉)으로 고쳤다. 가을이면 전국 최대의 망둥어 낚시터가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새창이 나루터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강탈해서 군산항으로 운반하기 위해 만경강 하구에 조성한 나루터이다. 현재 만경대교[일명 새창이다리]가 놓여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의 낮은 다리는 1989년 2월 새로이 개통된 지방도 711호선 '만경대교', 그 뒤 높은 다리는 고속국도 제15호선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만경강교'이다. 서해안고속도로는 2001년 12월 21일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
새창이다리 뎈 광장 동쪽에 버드나무가 푸른 가지를 드리고 청량감을 준다.
아래의 마을은 군산시 대야면 복교리 신촌마을이다.
복교리의 남쪽으로 만경강이 흐르고 있으며 대부분이 논농사가 이뤄지는 평야 지대이다. 복교리에는 남우 마을, 신동 마을, 상리 마을, 고산촌 마을, 고산 마을, 함열촌 마을, 신촌 마을, 신창 마을, 장좌 마을, 신복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거주민들은 주로 논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동쪽으로 대야면 광교리, 서쪽으로 대야면 지경리와 회현면 증석리, 남쪽으로 만경강 하류지역에 접하고 만경강 건너 김제시 청하면 동지산리에 접한다. 북쪽으로 대야면 죽산리에 접하고 있다. 군산시 주요 도로가 겹치며 교차하는 지역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대모산님,
서해랑길 52구간 19km 탐방을 마치셨군요.
만경강 하구 주변 풍경과 역사 설명 잘 보았습니다.
노을이 지는 시간대였으면 또 어땠을까 상상해봅니다.
새창이다리 지나 연꽃마당으로 시작되는 53코스 기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수고하셨고,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노을의 시간대 탐방이 아주 멋질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그 시간대에 가보고 싶습니다.
고운 마음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53코스도 곧 기록하겠습니다.
꿈마니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