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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72)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눅 10:25-37
어느 유람선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만 실수로 배에서 떨어졌습니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뿐,
아무도 그 사람을 구하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용감하게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쳐가서
그를 구해냈습니다.
그가 배 위로 올라왔을 때
모든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그 영웅적인 용감한 행동을 치하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뒤에서 나를 떠민 놈이 누구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일에 대해서
안타까워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별로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단지 귀찮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일상의 평온함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1964년 3월 13일 미국 뉴욕 퀸즈
어느 아파트 앞에서 16세 소녀
Kitty Genovese(키티 제노비스)가
한 괴한에 의하여 30분 동안 폭행을 당했습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무려 38명이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아무도 이를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그 소녀는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제노비스법’(일명 사마리아인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는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런 일들이 미국에서만
일어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남을 고의적으로 해치는
그런 못된 사람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랑이 식어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어떤 율법교사와의 대화중에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
그 상황은 이렇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25절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가 될 것입니다.
누가는 율법교사가 이 물음의 답을 몰라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교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
예수님이 ......
율법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시험하려는 의도에서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되묻습니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자신 있게 신명기의
쉐마를 인용하면서 대답합니다.
27절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신 6:5, 레 19:18)
이렇게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에게 성경은 자신의 전문분야입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정확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것으로 사실상 대화는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이 옳음을 확인하셨습니다.
다만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이를 행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율법교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성경의 진리를 잘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앎’에서 ‘삶’으로 나가지 않는 진리는
진정한 의미의 진리가 아닙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율법교사는 우쭐대면서
이번에는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29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번에는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율법교사는 여전히 ‘앎’에 관심이 있습니다.
특히 이 율법교사의 질문은....
자신이 해야 할 사랑을 다했다는
교만함이 들어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바로 유대인들뿐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이웃이 아닙니다.
저주받은 존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면......
자신은 이웃에게 온전한 사랑을
다했음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교사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깨우치기 위해서 ....
오늘 비유 곧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본문 30절-35절 읽어라>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절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절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절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절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절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를 심하게 때리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는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제사장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으로
바로 살라고 지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를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다음으로 그곳을 지나간 사람은 레위인 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지위 있는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오직 레위 사람들 중에서만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그를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그냥 지나쳤는지....,
본문은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제사장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을 때에 망설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만지는 자는
칠일 동안 불결하다는 율법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자세히 모르지만,
만약 가까이 갔다가 죽어 있는 것을 본다든지,
혹은 이 사람을 치료하다가 죽게 된다면,
그는 불결해져서 일주일동안 제사장으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2장 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치료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은 쉬는 날이므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고통을 들어주며,
그 고통을 없애주는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셨습니다.
율법의 조항보다 인간의 근본적인 요구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도 자신의 직무를 생각하기 전에,
고통 받는 사람에게 먼저 발걸음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또 상상해 보건데...,
레위인도 그 옆을 지나가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옆에 갔다가 자기도 그 사람처럼
당하면 어떡하나 겁이 났을 것입니다.
강도가 언제 또 나타날 런지
또한 지금 어디에 숨어서 자기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이 레위인은 ‘안전제일’이라는 생각에,
다른 것 볼 것 없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손해와 희생도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도 혹시 자기에게
어떤 위험과 손해가 따를 가능성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결국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만나
쓰러져 있던 사람에게 실망만 더해 주었을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 번째로 지나간 인물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의미심장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전 북이스라엘의 수도 - 이방인과 혼혈).
그래서 예수님은 일부로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강도만난 사람은 유대인이었겠지요.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는
그 사람을 사랑으로 돌본 곳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도왔습니까?
첫째, 본문 33절-34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에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 자신에게 닥칠지
모를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은
찾아오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처럼
스스로 일어서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찾아오도록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찾아가야만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잘 듣고,
찾아가서 문제와 부딪히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도왔습니까?
첫째, 본문 33절-34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에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사용하여 강도만난 사람을 도왔습니다.
본문 34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를
강도만난 사람의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치료해 주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희생한 것입니다.
자신이 간직했던 여행경비 전부를
지출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즉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물질, 시간, 정력을
전부 희생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지극히 작은 형제자매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서 본 사람이....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도
이와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약2:15-17 읽어라>
15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덮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도와주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도왔습니까?
첫째, 본문 33절-34절에 의하면,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에
강도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가진 것을
기꺼이 사용하여 강도만난 사람을 도왔습니다.
셋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책임 있게 끝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은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되
책임 있게 끝까지 돌보아 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사랑은 잠시 보여주는 동정이 아닙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끝까지
인내하며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이웃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36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교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a) 라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b)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 율법 교사를 부끄럽게 한 것입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잘못하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심각한 오해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원과 영생은
율법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
믿음으로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
율법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가 말씀하는 율법은
믿음 없는 율법으로는 구원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 없이도 율법을 행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직하고 착한 것은 좋으나....
그러나 그와 같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인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믿음이 없는 율법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성경말씀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훤하게 꿰뚫어 알고 있어야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 사회는 4무병에 걸려 있습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
이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읽는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우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
이 시대의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내고.....
나아가 천국 영생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