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국의 기도 도량 / 강화 낙가산 보문사
관음 품 아래 웅크린 갸륵한 마음 큰 신심으로 날다
선덕여왕 4년 회정대사 창건
홍련·보리암 등 3대 기도처
나반존자 영험담으로도 유명
▲작은 몸 웅크린다. 마애불, 관세음보살은 말이 없다.
그래도 웅크린 몸 폈다 다시 웅크린다.
관음보살 품고 있는 눈썹바위 그늘에 작은 웅크림 하나, 큰 신심 하나 있다.
30대 후반 왕수경씨는 강화 낙가산 보문사를 처음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강화도에 이르면 외포리 선착장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그곳에서 보문사까지 털털 거리는 버스를 타야 했다. 편한 여정은 아니지만 꺼릴 것 없었다.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관음기도처에서 기도할 수 있는 복이 있으니.
그녀는 어린 시절 가족 걱정뿐인 우리네 어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이른 새벽녘 밤새 곱게 다린 하얀 저고리 고름 정성스럽게 매고 장독 앞에 선 그 모습처럼
마애 관세음보살 아래 무릎을 꿇었다. 새벽에 길은 맑은 우물물을 장독 위에 올리고
두 손 닳도록 빌고 빌던 어머니들처럼 그녀 역시 온 맘 다해 빌었으리라.
이제 그녀의 키는 절반으로 줄었다. 허리는 굽었고, 다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보문사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울었다.
어떻게 하든 꼭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관세음보살에게 매달렸다.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말을 들었고, 108배는 눈물이 함께 했다.
▲보문사 전경.
계절은 220번이나 옷을 갈아입었다.
나이가 들어 한 번 보문사를 참배하면 며칠씩 머물렀다. 저녁이면 으레 철야기도를 했다.
관음전은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밤새 1000독을 했다.
며칠씩 보문사서 기도하다보면 2만독을 훌쩍 넘길 때도 있었다.
관세음보살을 그렇게 부르고 불렀다.
중생을 굽어 살피는 관세음보살의 신묘한 가피로 자신을 정화하고 바른 길 걷고자 했다.
긴 세월 마음자리 낮췄고 곧은 허리도 고개 숙였다. 올해 그녀 나이는 93세다.
오전 8시30분 서울 신촌서 출발해 강화시외버스터미널을 거쳐
시내버스로 25분을 더 가니 외포리 항에 도착했다.
10시55분 철선을 타고 석모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다시 버스를 타고 15분쯤 달려 보문사(주지 덕관 스님)에 다다랐다.
왕수경 할머니에게 이 길은 어떤 의미일까. 가파른 오르막길 따라 놓인 작은 돌탑들.
보문사와 인연 맺은 수많은 기도객들 마음이다.
할머니가 쌓아온 원력 하나하나 저 돌탑에 알알이 새겨졌으리라 믿는다.
▲보문사 석실.
보문사 석실 화주 주인화(55) 보살도 왕수경 할머니의 원력에 연신 감탄했다.
할머니 얘기를 전하는 주인화 보살 얼굴엔 환희와 신심이 피어났다.
55년 동안 보문사를 찾은 할머니와 지금도 자주 얘기를 나눈단다.
석실은 시원한 공기가 감돌았다.
엄마 손을 잡고 참배하러 온 아이는 엄마 따라 제법 의젓하게 절을 했다.
버스타고 보문사에 동행했던 한 보살님은 나한기도에 열중했다.
관음기도도량에서 왜 나반존자가 유명한 지는 후에 자료를 뒤적이다 알았다.
신라 선덕여왕 9년(640) 4월, 한 어부가 바다에 그물 쳤다가 이상하게 생긴 돌들만 걷어 올렸다.
또 그물을 쳐도 같은 돌들이 걸렸다. 놀란 어부는 그물질을 접고 집에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스님이 나타났다.
스님은 “인도에서 21명의 성인과 중생 복락을 성취하는 법을 전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마을 뒤 낙가산에 오래도록 편안하게 쉴 곳이 있으니 안내 해달라”고 스님은 말했다.
날이 밝자 어부는 그물을 쳐 석상 22위를 건져 낙가산 석굴에 모셨다.
현재 석실이 그때 석굴이란 설화다.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22명의 석상을 바다에서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는 유명하다.
기도 영험을 많이 봐 신통굴로도 불린다.
나반존자 영험담은 또 있다. 보문사에는 고려왕실에서 왕후가 헌정한 옥등이 있었다고 한다.
옥등은 석굴 인등용으로 사용됐다고 하나 10·27법난 때 행방을 감췄단다.
재밌는 얘기가 서려있다. 하루는 석굴을 청소하던 어린 사미스님이 옥등을 닦다가
실수로 법당 바닥에 등을 떨어뜨렸다.
칼로 자른 듯 두 조각이 났고, 담겨있던 기름은 흘러 내려 바닥을 적셨다.
주지스님이 다급히 석굴법당 안으로 들어섰는데, 이상하게도 석굴 안이 훤했다.
옥등이 깨져 굴 안이 어두워야 하나 불이 켜져 있었다.
주지스님 머리에 언뜻 뭔가 스쳤다. 불 켜진 등을 만져보니 그 옥등이었다.
주지스님 입에서 신음 섞인 말이 새어나왔다. “아, 나한성중!”
나반존자가 팥죽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전해진다.
1892년 동짓날이었다. 공양주스님이 새벽에 팥죽을 쑤려고 부엌으로 향했다.
불 피우려 아궁이를 보니 불씨는 죽고 싸늘한 재만 남아 있자 공양주스님은 당황했다.
공양 못 올리게 됐으니 낭패였다. 그날따라 불씨는 절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방에 처박혀 부처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자책하고 있었다.
순간, 장작불 타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아침공양을 올린 스님은 아랫마을에 사는 노인 집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
노인은 다짜고짜 춥고 어두운 새벽에 어린아이를 보냈냐며 따져 물었다.
노인이 말하길, 불씨 얻으러 왔던 아이가 “부처님께 팥죽을 못 올리게 됐다”며
“굴법당 나한들이 팥죽을 좋아하니 공양 올려 달라” 했단다.
부리나케 절로 돌아온 스님은 굴법당 나한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분 입에 팥죽이 묻어있었다고.
▲33관음보탑을 둘러싼 오백나한.
보문사 경내는 기도객 뿐만 아니라 나들이 나온 가족이나 연인들과 등산객들로 붐볐다.
300살 이상 나이든 향나무, 느티나무 그늘아래 삼삼오오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이들도 많았다.
석실 위, 천 사람이 앉는다는 천인대에는 와불전과 오백나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2009년 조성된 오백나한은 사리가 봉안된 33관음보탑을 오백나한이 감싼 모습이다.
합장한 엄마와 딸, 사진 찍는 사람들, 탑에 동전을 붙여보려는 객 모두 보문사 인연들이다.
와불전엔 신장 10m 규모의 부처님이 누워계셨다.
참배하고 뒤를 돌아가니 지폐들이 부처님 등에 붙어 있었다. 하나 같이 꼬깃꼬깃하다.
부처님만 믿고 손때 묻은 쌈짓돈 꺼낸 객들 마음이다.
종무소 건물에 일렬로 놓인 기와에도 맘이 머문다. 가부좌 튼 옥불이 신심 담은 동전을 끌어안았다.
▲신심 담은 동전을 끌어안은 옥불.
극락보전을 참배한 뒤 법당 왼쪽 소원이 이뤄지는 계단을 따라 마애불로 향했다.
마애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러 오른 계단 중간쯤에서야
카메라 배터리가 떨어진 사실을 알았다. 낭패였다. 별 수 없이 오르던 계단을 내려왔다.
순간, 작은 깨달음이 스쳤다. 맘이 여물지 않았다고 느꼈다.
일요일 취재라는 불편한 맘을 관세음보살이 꿰뚫어 보신 게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계단을 다시 오르니 서원지를 담은 예쁜 유리병들이 시선을 붙잡았다. 1
00일이 지나면 스님들이 축원을 올려준단다. 서원을 썩히지 말고 익혀가라는 당부처럼 들렸다.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 관세음보살은 탁 트인 서해를 내려다봤다.
천년 넘게 이곳에 오른 이들의 고통스런 일들로 꼬여버린 마음자리를 조용히 풀어냈을 게다.
노부부가 마애 관세음보살 아래 한참을 앉아 있다.
석등 앞 한 거사는 108염주를 돌리며 묵묵히 절만 한다.
관광객과 등산객 잡담이 귀에 거슬리지 않는 모양이다. 작은 몸 웅크린다.
마애불, 관세음보살은 말이 없다. 그래도 웅크린 몸 폈다 또 웅크린다.
관세음보살 품고 있는 눈썹바위 그늘에 작은 웅크림 하나, 큰 신심 하나 있었다.
마애불을 지키는 석등. 합장한 동전과 좌불도 함께 밤을 지새우리라.
▲ 마애불을 지키는 석등. 합장한 동전과 좌불도 함께 밤을 지새운다(위).
석등 사이로 보이는 합장한 마음들(아래).
그토록 간절한 맘은 어디서 나올까.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이들이 어찌 그리 많을까. 정월 초하루였다.
육지 사람들 수십명이 섬을 찾아 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널 때였다.
이상하게도 겨우내 얼어 있던 임진강이 갑자기 녹았고,
커다란 얼음덩이가 외포리 바다로 흘러들었다. 배는 빙산에 밀려 먼 바다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추위와 굶주림은 날로 더해갔다.
죽음이 배를 휘어 감고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한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보문사에 계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
사람들은 간절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보문사를 향해 절을 했다.
홀연히 낯선 스님이 뱃머리에 나타나 얼음덩이를 밀어내고 노를 저었다.
배는 순식간에 보문사 앞바다에 이르렀다.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이란 이름처럼 보문사(普門寺)는 관음기도도량이었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했다.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 낙가산이라하고
관세음보살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해 보문사라 이름 지었다.
산과 절 이름 모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다.
▲석실 앞 맷돌과 향나무.
매주 일요일 보문사 찾았던 김배정(47)씨는 6월24일 100일 기도를 회향했다.
김씨는 도반 법륜화(54) 보살과 함께 100일 동안 치성을 드렸다. 둘은 기도처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법륜화 보살의 수험생 아들이
‘시옷(ㅅ)’ 두 개와 ‘기역(ㄱ)’, ‘니은(ㄴ)’이 들어간 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꿈을 꿨다.
100일 기도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수소문 한 결과 강화 보문사임을 알았다.
강화도 삼산면에 ‘시옷(ㅅ)’ 두 개, 관음기도도량에 ‘기역(ㄱ)’, ‘니은(ㄴ)’이 들어간 곳은 보문사뿐이었다.
100일 기도 중 둘이서 차를 타고 보문사를 찾을 때 마다 로드킬 당한 동물을 보던 일이 점차 줄어들었다.
김씨 직장은 그녀를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인사발령을 냈다.
법륜화 보살과 아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땅에 떨구며 쉴 새 없이 무릎을 꿇기도 했다.
겨울 찬바람 맞을 준비로 분주한 나무는 앞 다퉈 이파리를 떨군다.
비우고 비워야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수천년 세월 동안 깨달은 탓이다.
비우고 나니 가벼워졌을까. 더 치열한 몸부림으로 속살 안에서 새 생명을 키우고 있으리라.
마애 관세음보살 아래 웅크린 갸륵한 마음 하나, 날아오른다.
2012. 08. 30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