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天刑)이란 낱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이 내리는 벌(罰), 즉 천벌(天罰)이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천형과 천벌의 의미가 서로 달리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데...천형(天刑)은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인 나병(癩病), 즉 문둥병을 가리킨다고 하며, 천벌(天罰)은 하늘이 잘못을 저지른 인간을 징계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근디 서양의 기독교 신앙을 믿는 사람들에게 천벌이란 말은 아주 익숙한 단어일 수밖에 없는 게 성경이나 쿠란 등의 경전에 자주 나오기도 하지만, 성직자들이 우매한 인간들을 협박하는 데는 그 이상의 도구가 없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하늘이 인간들을 혼내 준 사례들을 몇 가지 열거해 보자. 고작 복숭아 한 개 따먹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아담 부부를 내쫓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건방진 인간들을 혼내준다고 바벨탑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타락한 인간들의 씨를 말린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질 않나, 평등의식은 얻다 버리고 대홍수를 일으켜 노아에게만 특혜를 준 게 하늘이다. 성경 이전에도 하늘은 심심하면 인간들을 징계했으니, 죽을 고생하며 불노초를 구해온 길가메시가 몸을 씻는 사이에 뱀을 시켜 불노초를 훔쳐 내게 한 건 하늘의 고약한 심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보여지지만...
작가 김순명은 이미 장편소설 『독야』1~3(1998, 창해),『小菊』1~3(2001, 창해) 등으로 나름 독자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의 장편소설『어매』(2003, 열매출판사)는 제목이 암시하듯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갖은 고생을 하며 아들을 키운 어머니가 어느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데서 가족의 비극은 시작된다.
옛사람들은 문둥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했으나, 오늘날에는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나환자에 대한 의료 서비스도 개선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고 보여지는 건 나만의 생각은 아닐 터. 소설에서도 어머니가 앓는 치매라는 질병을 꼭 집어 천형이라고 하진 않고 있으나, 한 평생 일궈 온 한 개인의 소중한 인격이 흔적 없이 송두리째 사라지고 남은 가족의 삶이 처참하게 무너져 가는 일련의 과정을 눈물겹게 그려내고 있다.
평생을 오직 자식을 위해 살아왔던 어머니가 당연히 며느리와 손자에게도 깊은 애정을 베풀며 지내오다 어느날 덜컥 찾아온 천형(天刑)으로 가정이 무너지면서 주인공인 아들 혼자 어머니의 병 수발과 보호를 떠맡게 되었으니...게다가 야간업소 밴드 마스터란 직업으로 끊임없는 경쟁과 자기갱신의 요구에 내몰리다 보니 이야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의 연속이었던 까닭에, 글을 읽는 내내 나 역시 안타까움과 땅이 꺼질 데 비할 탄식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으니...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어서리 어쩔 수 없이 혼자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야 하는 주인공의 눈물겨운 사연에 눈시울이 더워지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같은 업계에서 일하며 맺은 의형제들의 교묘하고도 치밀한 작전에 의한 도움과 자신을 끝까지 따르는 후배, 동료들이 있으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 속에서도 이야기는 제법 훈훈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뿐인가? 어머니를 간호하는 간병인, 그리고 여의사의 이해와 도움으로 소설의 마지막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도 주인공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는 데서 끝난다.
작가가 어머니를 모시면서 직접 겪은 이야기를 기술한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인지 많은 장면에서 치매를 앓는 가족의 비참한 현실과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데...더구나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경험에서 알게 된 치매라는 무서운 질병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는 방법을 나열하고, 치매에 걸린 가족을 케어하는 마음가짐을 하나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작가는 치매 환자를 보살피고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