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9)
어머님과 어머니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이 84년도에 완전 개통되었다. 우리 집에서 신림역이 도보 7분 거리였다. 가까운 거리에 지하철역이 생긴 것은 주민 모두에게 경사였다. 개인적으로 내겐 친정 동네인 굴레방다리 입구에 아현역이 들어선 것도 못지않게 기뻤다. 내가 부모님 뵈러가기도, 어머니가 지하철을 타고 신림동으로 오시기도 편해졌기 때문이다.
막내딸 사는 것이 보고 싶어도, 시어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우리 집에 잘 오시지는 못하셨다. 그래도 가끔 버스를 타고 딸집을 찾아 오셨었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면 어머님은 그야말로 버선발로 뛰어 나가다시피 반갑게 사돈마님을 맞이하셨다.
친정어머니는 어머니, 시어머니는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호칭이지만, 내용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후의 글에서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쓰겠다. 사실 우리 자매는 어머니를 늘 '엄마'라고 불렀다. 우리 자신이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엄마라는 호칭을 썼다.
엄마는 1901년생이시고, 어머님은 10살 아래인 1911년생이시다.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셨지만 두 분은 서로를 좋아하셨다. 어머님은 우리 엄마의 말의 말씨와 단정한 몸가짐, 그리고 음식솜씨를 좋아하셨다. 특히 엄마가 만드신 북어찜과 고비나물 맛에 반하셨다.
엄마는 어머님의 달변과 일솜씨에 탄복하셨다. 어머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셨다. 몇 시간이라도 계속 이야기 할 수 있는 목청을 가지셨다. 1백포기 김장 정도는 소꿉장난처럼 순식간에 해치우는 능력과 교자상을 번쩍 들어 옮겨 놓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셨다.
한편 우리 엄마는 경청하는 타입이셨다. 상대방이 말 할 때 집중하며 재미있게 들어주셨다.
어머님의 말씀이 산문이요 웅변이라면, 엄마의 말씀은 촌철살인이고 시적(詩的)이었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면 가슴에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지나가는 것 같구나!” 이런 식이었다. 대화 할 때는 과장도, 말을 보태지도 않고 생각을 꼭꼭 씹어서 간결하게 표현하신다.
고향에 계실 때 어머님 별명이 변호사요 재판관이었다. 일가친척 간에 분쟁이나 불화가 있을 때 중재에 나서는 분이 어머님이셨다. 서울에 올라오신 이후에도 숙부님 당숙님들이 집 안 문제들을 상의하러 자주 오셨다. 손님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언제나 어머님이셨다. 아버님은 가만히 듣고만 계시다가 잠시 거드실 뿐이었다. 남편은 듣고 있다가 아예 자리를 뜨곤 했다. 어머님은 그런 아드님들을 향해 말씀하시곤 했다.
“그 인물에 그만큼 배웠으면서 어찌 그리 말주변이 없단 말이냐? 내가 너희들만큼 공부했다면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님은 학교 문턱에도 못가보신 분이시다.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치시어 겨우 이름 석 자 쓰실 줄 알고 책 몇 줄 읽으시는 정도시다.
어머님 말씀처럼 그분이 이 시대에 태어나셨다면 어떤 일을 하셨을 까, 아마 정치인이 되셨을 지도 모른다. 여야 대치가 극에 달할 때 친화력 좋고 대화의 달인인 어머님이 나서서 중재하면 꼬인 정국도 풀리게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필리버스터 할 때 우리 어머님이 마이크를 잡고 밤새 목청껏 주장을 펼치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어머님은 사업가로도 성공하셨을 것 같다.
남편이 대학교 입학한지 얼마 안돼서의 일이다.
어머님이 혼자 상경하시어 아들이 하숙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셨는데, 아들이 풀이 죽어 축 쳐져 있더란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어떤 자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친구라고 속이고 방에 들어와 책과 옷가지를 다 가져 갔다는 것이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룻밤을 주무시며 이 궁리 저 궁리 하신 어머님은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시어, 아들 고기 사 먹이려 갖고 오신 돈과, 집에 내려가실 차비를 털어 제기동 시장에서 과일 몇 개를 사가지고 와서 학교 담장 밑에서 팔기 시작하셨다. 시골에 계신 아버님께는 당분간 못 내려간다는 전보를 치셨다.
과일은 솔솔 잘 팔렸고, 팔다 남은 것들은 싼 값으로 몽땅 주기도 하고 더러는 집에 가져오기도 하면서 장사 수완을 발휘하셨다. 때로는 단속반에 쫓겨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기도 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한 달을 하시니 잃어버린 책과 옷을 사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버셨고 집에 내려가실 차비까지도 마련하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후에 그 때를 회상하시면서, 시골에 계신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아예 서울에 눌러앉아 과일가게를 차렸을 거라는 아쉬움을 토로하셨다.
학교에 다녀보신 적은 없는 것은 우리 엄마도 어머님과 똑같으시다. 어머님과 다른 것은 책을 무척 좋아하신 것이다. 특히 역사 소설을 좋아하셨다. 박종화의 세종대왕, 이광수의 단종애사 같은 책은 줄줄 외우다시피 하셨던 것 같다. 이야기에 빠지어 책 속의 인물을 사모하시기도 했다. 박종화의 삼국지가 나오기 훨씬 전에 고어체로 쓴 아주 작은 글씨로 된 삼국지가 있었다. 상하권으로 된 책이었는데 엄마는 그 책을 읽고 또 읽고 하시면서 유비 유현덕의 팬이 되셨다.
어머님처럼 정치적 기질은 없으셨지만, 시대 따라 엄마가 좋아하시는 정치인이 있어 열렬히 지지하셨다. 요즘에 태어나셨다면 팬클럽에도 가입하셨을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간신문이 오면 제일 먼저 집어다가 샅샅이 훑어보시어 정치 사회 돌아가는 것에 환하셨다.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셨다. 기상도까지 보시어 오늘은 고기압이다, 또는 저기압이니 비가 오겠다까지 맞추셨다. 엄마는 시어머님처럼 사람을 대하고 다루는데 능하지 않으셔서 냉정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내면에 뜨거운 열정을 지니신 분이셨다.
지하철이 개통된 후로는 한 동안 엄마는 지하철을 이용해서 우리 집에 오셨다. 하지만 84년도이니 그 때 엄마 연세가 84세였다. 엘리베이터도 에스컬레이터도 없던 시절 층계를 오르내리는 일이 쉽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 후에는 사위에게 차를 내달라고 부탁하시어 다녀가시곤 했다.
엄마는 98년도에 98세를 일기로, 어머님은 그로부터 20 년 후인 2018년에 108세로 일생을 마치셨다. 두 분 다 장수를 누리시다 가셨다. 친정아버지는 85 세인 85년도에, 시아버님은 84세인 94년도에 세상을 뜨셨다.
8호선 연장선인 별내선이 개통되어 우리 집 옆에 역이 생겨 40년 전 2호선이 개통되었을 때의 기쁨을 다시 맛보았다. 그 때는 부모님이 우리 집에 편하게 오실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는데 지금은 우리 자식들이 자동차 운전하지 않아도 올 수 있게 된 것이 좋았다. 우리 부부는 이제 지하철을 이용하며 외출 할 일도 그리 많지 않다.
10년 전 어느 날, 남편과 나는 말했었다. 우리 아버님들만큼만 살고 싶다고...
남편은 희망하던 나이를 이미 살고 있고, 곧 나도 그 나이가 된다. 큰 병 없이 이 나이까지 온 것이 감사하다. 지금부터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우리 어머니께서 살아 오신만큼, 시어머님이 견뎌 오신만큼은 아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