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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말이 진부한 생각을 만든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전통 속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우리는 한자 혹은 한자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시인들은 한자의 형상이 드러내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한자가 시인들을 자극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같지만 '산'이라고 쓸 때와 '山'이라고 쓸 때 그 함의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어릴적에 나는 음식점 간판에 적힌 '산낙지' 를 보고 한동안 산에 사는 낙지인 줄 알았다. 가재처럼 심산유곡의 돌덩이 밑 어디쯤 사는… … )
그런데 뜻글자라고 해서 그 뜻과 형상이 다 미학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관념적인 한자어는 시에서 척결해야 할 대표적인 낡은 언어다. 시적 언어의 성취 목표를 한 50년 이전쯤에 두고 있는 사람일수록 관념적인 한자어를 쉽게 지워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유치환이 「깃발」에서 "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라고 노래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박인환이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라며 절망스러워 한 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김현승이 「堅固한 고독」을 발표한 때는 60년대 중반이었다. 이 시인들이 '애수'와 '애증'과 '견고한 고독'을 노래할 즈음에 그 시어들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그 시어들은 시간의 무덤에서 하얗게 풍화된 죽은 말들이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몸'이 빠진 관념은 '화자 우월성'의 화법과 사유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꼭 짚어 말한 바 있다. 우리 시인들이 대상이나 상황을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봄으로써 그 안으로 스미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서둘러 앞서 가고자 지시의 화살표를 긋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결국 추한 욕망이 되고 만다"고 꼬집는다.⁶¹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우애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애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평화 폐허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백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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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2음절의 이런 말들은 매우 심오한 깊이를 함축하고 있는 언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어휘들은 구체적인 실감을 박제화하고 개념화함으로써 스스로 진부하게 되어버린 말들이다. 사전에는 단어로서 버젓이 실려있고 일상생활에서도 가끔씩 사용되는 말이지만 시에서는 죽은 언어와 다름없다. 시는 이런 진부한 시어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사유라는 것은 원래 그 속성상 관념적인 것이고 추상적인 법이다. 하지만 관념을 말하기 위해 관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학대행위다. 관념어는 구체적인 실재를 개념화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시에만 관념어가 시를 좀먹고 있는 게 아니다. 예식장에도 있다. 흔해빠진 주례사가 그것이다. 행복과 공경과 우애와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주례사가 귀에 들리면 한시바삐 밥을 먹으러 가고 싶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개념으로 말하는 순간 지겨워진다.
관념어는 진부할 뿐 아니라 삶을 왜곡시키고 과장할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알맹이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삶의 껍데기를 어루만지게 한다. 당신의 습작노트를 수색해 관념어를 색출하라. 그것을 발견하는 즉시 체포하여 처단하라. 암세포 같은 관념어를 죽이지 않으면 시가 병들어 죽는다. 상상력을 옥죄고 언어의 잔칫상이어야 할 시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관념어를 척결하지 않고 시를 쓴다네, 하고 떠벌이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내고 나면 그 휑하니 빈자리가 몹시 쓸쓸하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그 빈자리를 오래 응시하라. 당신의 상상력이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고, 상상력은 이미지라는 처녀를 데리고 올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그 처녀를 꽉 붙잡고 놓지 마라. 관념어를 떠나보낸 자리에 그 처녀를 정실부인으로 들어앉혀라. 그래도 관념어의 옛정이 그리워져 못 견디게 쓰고 싶거든 그 말을 처음 쓴 지 30년 후쯤에나 써라.
당신에게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 나는 이 시에서 '고독'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온몸이 찌릿찌릿해졌다. 이쯤은 되어야 고독을 말할 자격이 있다.
고독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그건 사기리
밤새도록 앞뜰에 폭풍우 쓸고 지나간 뒤
뿌리가 허옇게 드러난 잔바람 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위태로이 위태로이 자신의 전존재를 다해 사운거리고 있다
이시영, 「그대의 시 앞에」 전문⁶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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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정진규, '질문과 과녁, 동학사, 2003,29~30쪽
62 이시영,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89쪽
안도현의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중에서
2025. 1. 31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