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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망과 안분지족
김정오
야망은 잠자고 있는 천재를 깨운다.
야망은 좋은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야망이 있다. 그 야망의 물결을 잘 탄 사람은 성공한다. 야망만큼 강력한 자기 격려는 없기 때문이다. 야망은 잠자고 있는 천재를 깨워 주고 숨어있는 보석을 찾아 준다. 그것을 사명감이라 한다. 사명감은 자기 능력을 키울 수 있다. 하늘이 내려준 모든 재능과 힘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꿈, 비전, 입지 앰비션(ambition)창조적 열망이라고도 한다. 그 야망을 이루고자 애쓴 사람은 성공한다. 야망은 어떻게 이루는가? 그 첫 번째는 실패했던 지난 일들을 잊어야 한다. 슬펐던 일, 괴로웠던 일, 분하고 억울했던 일, 등 모든 쓰라린 기억을 잊어버려야 한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도 세수하고 손을 씻듯이 마음을 씻어(catharsis)야 한다고 했다. 정신병도 옛날에 있었던 나쁜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잘 걸린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이사야 43:18) 라고 기록했다.
또 아브라함이 실의에 빠졌을 때 위로와 용기를 주시며,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고 하시면서 꿈을 심어주었다. 야망을 가진 사람은 앞으로 닥아 올 일만 생각한다. 그것이 꿈이다. 끊임없이 앞을 내다보며 끝없이 힘쓰고 애쓴다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
탐욕은 파멸로 간다.
그러나 어느 정도 꿈을 이루고 나서가 문제다.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탐욕이란 필요 없는 욕망을 말한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으로 성공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죄인이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들은 안분지족의 진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려 충렬왕 때 노당 추적은 동양 선현들의 명언들을 모아 명심보감을 엮었다. 그 책 안분 편 경행록에는 「운지족이면 가락이요 무탐칙우라 云; 知足可樂, 務貪可憂」라. 했다. 이 말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 만족하면 즐거운 것이요, 권력이나 재물을 탐내고 욕심을 부리면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분지족을 말함이다. 사극들이나 드라마에서도 권력을 위해 음모와 암투로 날 밤을 지새운다. 또 부모의 재산을 더 갖겠다고 골육상쟁으로 처절한 싸움질만 해대고 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상대방을 내 세우는 선조들도 있었다. 역사에서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신라는 나라 56대왕 992년 동안 덕이 없는 왕들도 있었다. 그러나 훌륭한 임금도 많았다. 신라 초기에 박혁거세를 이어 2대왕이던 남해왕은 사위 석탈해를 3대 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석탈해는 사양했다. 그리고 남해왕의 아들 유리 왕자를 3대 왕으로 받들었다. 그 후 유리왕은 자기 아들에게 왕을 물려주지 않고 부왕 남해왕이 지명했던 석탈해에게 4대 왕위를 물려주었다. 석탈해 왕도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유리왕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제5대 왕 파사왕이다. 아름다운 양보의 미덕이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면서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같은 당에서도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면서 환멸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신라 48대 경문대왕도 훌륭했다. 경문은 18세 때 국선이 되었다. 영특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그는 헌안왕의 눈에 들어 왕의 사위가 되었다. 그가 왕의 사윗감으로 천거되었을 때 왕은 세 딸 중 마음에 드는 딸을 아내로 고르라 했다. 그 때 화랑 경문은 얼굴은 예쁘지 않지만 마음씨가 더 고운 장녀를 아내로 맞았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후 세 가지 아름다운 행실을 말했다.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오를만한 사람이 겸손하여 오르지 않는 사람이고,
둘째는 부자이면서 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며,
셋째는 원래 고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엄을 보이지 않고,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겸양의 미덕이다.
이런 임금들이 있었기에 문제가 있는 왕들도 있었지만 신라는 박, 석, 김 세 성씨가 왕위를 이어가면서 992년 이라는 세계에 유래 없이 긴 세월의 왕국을 이루었던 것이다.
조선조 때 큰 덕을 이룬 사람들
조선조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 자리를 장남 양녕대군(1394~1462)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양녕은 셋째 충령이 더 영특하다는 것을 알았다. 양녕대군은 일부러 미친 척하고 태자의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 왕자인 효령대군이 왕세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양녕은 효령대군에게 귀 뜸을 했다. 우리들 보다는 셋째인 충령이 더 영특하니 그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효령도 알아차리고 승려가 되었다. 충령대군이 왕세자가 될 수 있었고 후에 세종대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엄청난 왕의 권세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그래서 관악산 꼭대기에다가 연주암(戀主庵)을 지어놓고 경복궁을 내려다보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아름다운 양보의 미덕이 있었기에 조선왕조 최대의 성군 세종대왕이 탄생 되었고, 위대한 한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나라의 기틀을 반석위에 올려놓았다.
숙종 1년(1675)에 양녕대군을 지덕으로 높이고 있다. 당시 우의정이던 양녕의 외손 미수 허목이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지덕사’라고 이름한 양녕대군의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지덕사기’를 지었다. 그 글에는 양령이 “아우 충령대군(세종)이 어릴 적부터 성덕이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가니 세자가 알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도망가서 사양했다. 이후에도 사냥하고 말 달리고 술 마시고 취하는 것으로 미친 행동을 스스로 했을 뿐 다른 일은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 후 정조는 재위 13년(1789)에 지덕사에 사액하면서 직접 ‘지덕사기’를 지었다. 그 글에는 폐위 전까지 “술과 음악과 기생 속에서 거짓으로 미친 체하면서 10년을 하루같이 보냈다”면서 “오조를 섬기면서 70 가까이 장수했지만 그때의 어진 사대부들도 그의 깊은 심정을 엿볼 수 있는 이가 드물었다.”고 기록했다. 그 후 고종 13년(1876) 양녕의 후손들이 편찬한 『지덕지』에도 폐출당해 도성문을 나서면서 손뼉을 치고 웃으며 “충령이 과연 나에게 속았구나.”라고 하였다는 ‘가전’을 인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 공자가 “태백을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태백은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의 큰아들이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 계력의 아들 창(훗날 주나라 문왕)이 높은 덕이 있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리를 피해 왕위를 창에게 넘겼다. 그래서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이 「지덕」 즉 왕위를 넘겨주는 일이라고 한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닌토쿠 천황이 그의 스승 왕인박사의 영향을 받은 일화가 있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일본 오우진 천황에게 칠지도를 선물로 보냈다. 백제의 문화가 일본보다 많이 앞서 있었던 때이다. 왕인박사가 일본 황실의 초빙으로 도일하여 황실의 스승이 되었던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서기 402년에 오우진천황이 죽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405년에야 제4왕자 오오사자기노미코토(大雀命)가 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위자리가 3년이나 비어 있었을까! 태자 우지노와키이라쓰코(제3왕자)가 자신보다 더 영특한 제 4왕자에게 간곡하게 왕위를 권유했다. 그러나 제 3왕자는 그 자리를 사양했다. 3년이나 왕위 자리가 비어 있었던 이유이다. 마치 신라 때 남해왕과 유리왕 그리고 석탈해왕들이 왕위를 사양했던 사실과 비슷한 일이다.
두 왕자들이 왕위를 사양하고 있을 때 그들의 스승 왕인박사가 제 4왕자인 오오사자기노미코토를 왕위에 오르도록 권유했다. 그가 닌토쿠 천황이다. 왕인박사는 그때 ‘난파진가’라는 노래를 지어 새로 등극한 왕을 축하했다. 이 시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씌어진 「와카 시」이다.
난파 나루터의 노래 (난파진가·難波津歌) - 왕인 박사
奈迩波ツ尓 佐久夜己能 波奈布由 己母理伊麻 波波流倍等 佐久夜己乃 波奈
난바르진이 다구야구노. 바나보유 구모리이마. 하-르배도 다구와구네 바나.
난파진에는/피는 구나 이 꽃이/겨울 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 구나 이 꽃이
奈迩波ツ尓 佐久夜己能 波奈布由 己母理伊麻 波波流倍等 佐久夜己乃波奈
나니와쓰니 사구야고노 하나후유 고모리이마 하~루베도 사구야고노 하나(일본식 해석)
'나니와쓰에/피는구나 이 꽃은/겨울 잠자고 /지금이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은(일본식 해석)
왕인의 와카용 한자들은 훗날 부수들이 생략되어 히라카나가 된다.
なにはつにさくやこのはなふゆこもりいまははるべとさくやこのはな
탐욕은 사상의 빈곤에서 온다
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나쁜 일이 탐욕이다. 우리는 현대사에서 탐욕으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최고 권력자들을 많이 보아왔다. 뛰어난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柳永模)는 탐욕으로 잘못 된 것은 우리의 사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전통사상이 이어 오지 못하고 그래서 생각하는 힘이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라를 일으키는 데는 힘(武力)으로 가능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는 정신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
민족정신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전통적인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내려왔다. 한때는 샤마니즘으로 내려오다가 고려는 불교를 빌려 쓰고, 조선은 유교를 빌려 썼다. 고려는 불교로 망하고 조선조는 유교로 망했다. 고려의 불교 피해는 신돈의 예 한가지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조에서 유교는 한 낱 입신출세의 방편으로만 이용되었다. 유교를 앞세운 유생들은 특권층을 이루고 나라를 지배하는 귀족양반이 되었다. 다시 말해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욕의 화신으로 전락한 것이다.
특히 근 현대사에서 “유생들은 공자의 가르침인 수기안민에는 마음이 없고 탐욕, 방탕, 교만에만 사로잡힌 전형적인 소인배들이었다, 그들은 받들어야 할 백성을 멸시하고, 돌보아야 할 백성을 짓밟았다, 그들이 입을 열면 공자요 맹자이지만 하는 짓은 유교정신과는 거리가 멀고, 멀었다.”
결국 “소련을 망친 것은 공산당원 노멘클라투라의 부정부패였고, 조선왕조를 망친 것은 조선왕조의 당파싸움과 부정부패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유교는 부패했었지만 우리 민족 혈관으로 흘러내려 오던 아름다운 전통은 살아 있었다. 예를 들면 율곡 이이는 황해도에서 당시로서는 최하위 천민들이 했던 대장간을 열고 농기구 개량에 힘썼으며, 토정 이지함도 대표적인 양반이었는데도 마포 강변 움막집에 살면서 온갖 기행을 하며 불상한 천민들의 벗이 되었다.
화담 서경덕, 성호 이익, 하곡 정재두, 남명 조식 등은 임금이 벼슬을 주어도 싫다 하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 후에도 연암 박지원,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같은 실학자들과 그 후로도 이어지는 개화 사상가들이 줄을 이어 나왔다. 이런 분들만 같았더라면 좋았으련만 벼슬아치들은 탐욕에 눈이 뒤집혀 불쌍한 동포들의 피와 땀을 빼앗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양반들과 탐관오리들의 횡포에 치를 떨었으면 하루아침에 나라가 일본에 망하자 당시 백성들은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는 분노에 떨면서도 양반들의 몰락에 대해서는 두 손 들고 기뻐하였을까! 오죽했으면 김구 선생까지 “상놈 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 없이 고마웠다.”고 그의 백범 일지에 기록했겠는가!
그래서 큰 야망을 가지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일신의 성공을 거둔 것은 좋은 일이요 반드시 권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안분지족을 모르고 탐욕으로 나라를 거덜 내고 자기 자신도 파멸해 버린 사람들을 우리는 불쌍하게 보면서 멸시하는 것이다.
야망은 아름답다. 인간으로서 세상에 태어나 큰 야망을 가지고 대성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탐욕을 가지고 추악한 삶을 누리는 것은 비극이다. 반드시 파멸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는 탐욕에서 근심이 생기고, 탐욕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탐욕에서 벗어나면 무엇이 근심되고 무엇이 두려우랴. -"라고 가르쳤다. 아름다운 인생으로 한 삶을 살아가려거든 탐욕은 버려야 한다. 그리고 안분지족을 찾아야 한다.
김정오(金 政 吾 )
수필가, 문학펑론가, 숭실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받음, 중국연변대학교 객원교수, 러시아 국립극동연방대학교 교환교수 역임, 현; 위 대학 종신연구교수. 현; 숭실대학교 평생교육 HRD 연구교수, 한겨레역사문학연구회장, 한국일보 수필공모 심사위원장,(역) 수필집: 빈 가슴을 적시는 단비처럼,- 그 깊은 한의 강물이여,- 양처기질 악처기질,- 한이여 천년의 한이여,-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푸른솔 이야기- (대학국어 교과서 작품 수록 외 논저 및 평론 다수, 소청문학상, 법무부장관상, 교육부장관상, 대한민국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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