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흰 두루마기 (한상열목사에게 전수된 통일유지)
2. 추모 미술전시(신영복 임옥상 박재동 이철수)
십여년 전 이었다. 전국의 미술인들이 총망라한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 작업전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 되었었다. 지극히 기본적이고 평범한 민족의 일상적 삶의 행복이 외세가 획책한 남북분단으로 하여 차단되었다는 반세기 세월의 굴욕과 울분의 종속적 비극을 끝장 내자는 작품마다에서 발산하는 작가들의 통일을 갈구하는 욕망과 정열은 흡사 용광로의 불길이었다.
그 중심에 통일을 달성 할 수만 있다면....문익환목사의 투쟁적 의지를 형상화한 임옥상의 인물 사실화 작품이 있었다. 그것은 통일을 저해하려는 무리들에 대한 가열한 저항의 몸짓이요 사랑과 희생 거기에 더하여진 예수그리스도의 지혜로운 혁명적 예단과 맞먹는 실천의 기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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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목사가 흰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진달래가 핀 철조망을 넘고 있다. |
1993년 미술전문지 월간미술세계 10월호에 소개한 (현장을 찾아서DMZ 전)에서 해당부분을 발췌 전재한다. 전시실 중앙을 찾이한 김구 문익환 임수경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염원 남북 평화회담의 결의를 담고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진달래가 핀 곳으로 철조망을 넘는 임옥상의 인물 사실화......
일견 우아하기만 한 선비의 외모를 한 문익환 목사가 민족이 성취해야 할 최고 가치의 실현을 위해 그 아무도 생심조차 못했던 자진 월북의 장면을 담대하게 묘사한 문익환목사의 전신화는 수난(가시철망)속에서도 희망(진달래)을 간직한 통일운동의 역동성( 펄럭이는 두루마기 )으로 민족의 가슴에 각인 되어 있다.
현재 6.15 공동선언 1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한상렬목사가 로마시대 비라도 법정에서 총독의 군대와 유대교 제사장 그리고 장로들에 의해 조롱 당하고 매질 당하던 예수그리스도가 격었던 수난의 그모습 그대로 기독교 장로가 집권한 대한민국 법정에서 곤욕을 치루고 있다.
누가복음 18절29장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성을 받지 못할 자가없느니라 하시니라” 궂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아도 사이비 유명종교인 말고는 대부분의 기독교신자들이 가난하고 핍박받는자들과 더부러 누릴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고저 통일운동에 (통일이우선임으로) 목숨까지도 던진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
한상열 목사에게 10년구형(23일뉴스보도)을 했단다 한상렬 목사가 잘못했다고 빌 것 같은가 착각하지 말라. 6.15공동선언을 부인하는 그대들이 사람인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기나 하라. 한상렬 목사를 환영하는 평양의 화기애애한 장면이 TV에서 방영 되었을 때 포근하고 평화로운 한상렬목사의 신선같은 분위기에 대다수 국민이 경견함을 느꼈을 것이다.
한상렬목사의 흰 두루마기에서 번지는 은은한 신비로움에서였다 . 그 두루마기는 군사분계선의 가시철망을 뛰어넘던 임옥상의 작품에 등장하는 문익환목사의 펄럭이던 그 두루마기 였음을 알게 되었다. 문익환목사의 유지를 받들어 문익환목사의 부인 박용길장로께서 한상렬목사에게 전달한 통일운동의 혈맥의 상징인 것이다.
.문익환목사를 기리는 16주기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10.11.30.-12.6. 인사동 서울미술관에서 신영복 임옥상 박제동 이철수 4인전이 개최되었다. 사단법인 통일맞이가 주최했고 문익환목사의 원대한 포부를 따르는 공익단체인 노무현재단, 한반도 평화포럼, 한겨레 통일문화재단 ,한국기독교 장로회총회가 후원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서 자석에 끌리듯 내시선이 일필휘지의 호기로 백두산 천지를 표상한 생명 평화 그리고 꿈전의 Logo에 가서 꼬쳤다. 가슴에 차오르는 뿌듯한 감회가 밀물처럼 밀려든다. 바람을 탄 범의 용자요 여의주를 물고 구름을 가르는 청룡의 기운이 꿈틀 거리는 필치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백두에서 한라에 이르는 백의 민족의 숭엄한 통일 염원의 의지라고 여겨졌다..
한국 유수의 관록이 두터운 유명 서예가의 작품이려니 했는데 가녀린 여인의 휘호라니........LOGO는 단지 산업미술의 상품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시를 5인전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붓놀림의 원숙한 솜씨가 일편단심 통일이었던 문익환목사의 유장한 삶을 은유한 이번 전시의 LOGO는 감흥이 도도했다.
전시실을 둘러 보기로 하겠다.
특별 찬조 출품한 신영복의 서예 작품은 그가 스스로 택한 민주화 투쟁에서 감수할 수 밖에 없었던 형극의 발자취로 여겨져서 였는지 미적 정서에 앞선 아픔이 퍼내면 채워지는 옹달샘 물과 같다.
한국 현대사의 구비구비마다 선혈이 낭자했던 희생자들의 단말마적 비명이 울려오기 때문이다. 지옥보다 더한 고문도 겪었으리라 그러기에 더 깊고 넓게 인간과 싦 사회 국가와 민족을 성찰하게 되었고 더부러 사는 이상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한 인간관계의 연대를 시구보다 간결하고 차돌같이 옹골진 무게의 언어를 추려내어 작품화 하지않았을까.
“네손은 내가잡고 내손은 네가 잡고 함께가자 우리 새날을 향하여” 얼마나 절절한 우리의 소망인가. “함께가면 길이 된다.”폭설이 몰아치는 설원 또는 자갈밭 가시밭길을 헤쳐가며 고난의 행군을 했던 과거의 어두웠던 추억의 반추가 아니었을까. “처음처럼” 얼룩진 화선지는 자유를 박탈당한 옥중 기록인듯 음산하다. 장기간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의 회유에 지조를 꺽은 전향자들의 회한의 흔적 같기도하다. 모든 정치인들에게 주는 채찍이리라.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되어 지키자 ”남북의 우리겨례에게 주는 신영복의 간구한 멧세지가 아닐까. 필도삼매에 도사가 된 감방에서의 신영복의 좌선의 모습이 그의 서체에 어른거린다.
임옥상의 꽃 감각기능 연작 . 임옥상은 주저함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눈치코치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결코없다. 임옥상의 예술적 감각은 예리하다. 그가 정부의 부당한 사찰의 불법행위를 묵과하겠는가.
꽃잎술
도톰하고 보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건강한 사나이라면 누구라도 설사 성희롱 죄에 걸린다 해도 꽃잎술에 살짝 입술을 누르고 싶은 성감에 달뜰 것이다. 임옥상 리얼리즘의 편린이다. 입안에 물린 꽃술이 독으로 피어날지 약으로 피어날지 꽃송이가 너무 탐스러워 징그럽다. 두번 째 꽃코는 짐작컨데 만다라의 제단에 모셔진 코라고 여겨 지는데 무슨 냄새를 맡았을까 섬찍하다. 세번 째 꽃귀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대화의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
두 귀를 모아 안테나를 달아야 할까보다 네번 째 꽃눈은 샤머니즘적 기운으로 하여 감시의 눈초리가 서릿발같다 . 소통 이라기 에는 색채도 구성도 매직하다 정보사찰의 씨리즈를 현란하게 치장하지 않았을까 . <여강여목> <모두 하나다 >에서도 으시시한 공포감이 느껴진다
간결한 단선으로 우주를 말하고 삼라만상의 생존 형태를 전달하는 이철수의 예술세계는 실로 능청맞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이 도록에 다 수록이 되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안심하고 나는 작품 앞을 떠났다. 이철수편을 쓰려고 도록을 뒤지나 없다 비슷한 작품 “길이멀지요”가 올라와있다. 전시장에서 내가 눈도장을 찍어 놓은 작품도 도록의“ 길이 멀지요”도 낙엽이 흣날리는 배경이다.
등장인물의 수 가 다를 뿐이다. 안내자의 말만믿고 메모를 하지 않아 타이틀은 적지를 못한다. 작품1(전시작품) 작품2(길은멀지요)로 해두자 작품1에서의 흣날리는 낙엽은 우수가 비오듯 쏱아지는 감 이었고 작품2에서의 낙엽은 길손의 발걸음을 독촉하는 느낌이었다.
작품2에서의 남녀는 부부일 수도 오누이 일 수도 있다. 목도리가 바람에 날리고 발걸음 나비가 크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기에 작품2에는 생동감이 있다. 작품1의 고개를 떨구고 어깨를 웅크리고 걷고있는 사나이는 실직을 한 것일가? 해고를 당한 것일까? 구직에 실패한 것일가? 부도를 내고 수습 방법이 없어 한강으로 가려는 것일까? 구부정한 어깨의 선은 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정치인의 정견 발표보다 더 웅변적이다.
사색과 관찰과 사회를 인식하는 형안의 인지로 갈고 닦인 이철수 예술의 테크닉이다. 미술평론가 김준기의 이철수에 대한 도록의 글에서 매듭부분을 전재한다.
선묘와 여백의 담백한 형식미와 생태 자연과 삶을 명상적으로 집약하는 명상적인 서사구조의 판화작품들은 우리에게 분주한 삶의 한 가운데서 잠시 물러나 뒤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힘을 가지고 있다.
박재동의 익살은 엔돌핀을 마구 분출케 한다.
터진감. 붉어지다 못해 검어지고 익어가다 못해 갈라 터졌다. 내가슴아 너도 터져 버려라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으면 익어서 터진감을 주먹으로 치고 고개를 떨군채 사색에잠겼을까 아트코리아 1998.4월호에 소련에서 망명한 LEONID LERMAN의 작품을 소개했다.
그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머리로 들이받아 빌딩이 두 동강 나며 기우뚱하는 작품이었다. 작가의 말인즉 소련에 불만을 품고 이곳에 왔는데 미국은 더 형편이 없다는 것이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뉴욕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LEONID는 직설적으로 울분을 토했고 박재동은 속으로 울분을 삭이느라고 물러 터진감을 줘박았다.
동.서정서의 다름이다. 작가의 수십배 크기로 묘사한 감크기의 우화성이 박재동 예술의 기지이리라 박재동의 가슴에 각인된 노무현은 10대소년이다. 코주부에 눈은 샛별같다. “강남은 집입니까 보석상자지” 마음 먹은대로 쏟아내는 노무현의 원석같은 막 말. 노사모는 시골 타작마당 같은 소박하고 넉넉한 그 막 말이 그립고 그리운 것이다.
.2008년 한신대 수유리캠퍼스에서 늦봄 시비제막식을 가졌다. 작가 황석영의 축사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기억이 제대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는대로 옮겨보겠다.
“.........집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대책(정보기관에서 어떻게 진술해야 할지)을 세워야 하겠기에 정경모선생과 문익환목사를 찾았습니다 그런데정경모선생은 호텔방에서 클래식 음악감상에 젖어있었고 문익환목사는능라도에서 대동강을 바라보며 시작( 詩作)에 골몰하고 계셨습니다.........”
휴전선을 넘자마자 정보사찰 수사관들이 대기하고 있을텐데 정경모 문익환 두 분에게는 구속 따위 염두에도 없다. 속박의 위기 앞에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두 분의 배짱은 무엇일까. 부모형제의 인연을 소생시킴이 어찌 이적행위인가, 라는 통일의 신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