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 변하여 저주가 됨
17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13장에서는 두 비유, 곧 “베 띠”와 “포도주” 비유를 들어서 유다에게 임했던 영광이 어찌하여 저주로 변하게 되었는가를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거부하게 되면 복만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1) 썩어버린 베 띠
둘째 단원(12-14) 병에 가득 찬 포도주
셋째 단원(15-27) 교만하지 말지어다
첫째 단원(1-11) 썩어버린 베 띠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1-2).
① 하나님께서 “베 띠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의도가 1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하십니다. ㉠ “내게 속하게 하여”(11상), ㉡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11상), ㉢ “내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11중)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라”는 행동계시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② 베 띠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베 띠를 하나님께서 허리에 띠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내게 속하게 하여” 하신 “속함”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띠를 하나 준비하라고 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네 허리에 띠라” 명하셨습니다. 옷이나 장식을 통 털어 띠만큼 몸에 밀착되어 있는 것은 없다 하겠습니다. 띠는 밀착되어있는 것만이 아니라 질끈 동여맨 허리띠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이렇게 “속하여” 있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허리띠는 품위 있게 하는 장식품이기도 했습니다. 챔피온 벨트를 연상해 보십시오. 이사야 49:18에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이 “내 이름과 칭예(稱譽)와 영광이 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리에 차신 베 띠로 비유한 이스라엘의 신분과 지위였던 것입니다.
③ 그런데 “이 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이 강팍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10)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④ 그리하여 그 띠를 “유브라데 바위틈에 감추라”(4) 하십니다. 유브라데는 바벨론에 있는 강입니다. 이는 그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을 나타냅니다.
⑤ 결국 그토록 영화롭던 베 띠는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다”(7)고 말씀합니다. 이는 ㉠ 그들의 부패상을 상징합니다. ㉡ 나아가 버림받게 될 것을 나타냅니다. ㉢ 9절에서는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하십니다. ㉣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썩어서 쓸데없이 된” 자신들의 부패한 모습을 깨닫게 하여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단원(12-14) 병에 가득 찬 포도주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12상).
① 그렇게 말하면 그들은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12하), 다시 말하면 포도주를 병에 차도록 담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비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계 19:15)를 상징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② 그러므로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13-14)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영화롭던 베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된 것만이 아니라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셋째 단원(15-27) 교만하지 말지어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15).
“베 띠 비유와, 포도주 비유”를 말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하여,
① “교만하지 말지어다”(15)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포효하는 사자같이, 짐승을 뜯어먹는 무늬 있는 매(12:8-9)같이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교만하여졌다는 증거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한 대로 모든 악의 뿌리라 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②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6)고 권면합니다. “…전(前), …전, …하시기 전에”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③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 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17)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고 권면했습니다. 이런 점이 예레미야와 바울이 닮았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웃으면서 설교하고, 회중들을 웃기는 것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웃으면서 농담하듯 전해도 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하고 말씀하십니다.
④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18) 합니다. 이 경고는 “저(느부갓네살)가 여호야긴(왕)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왕후)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왕하 24:15) 하고 그대로 성취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⑤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20),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21) 합니다. 이는 바벨론이 침공하여 느브갓네살이 그들의 수령(首領)이 될 것을 가리키는 경고입니다.
⑥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2) 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악이 큼이라” 하신 그 큰 죄가 무엇일까요?
⑦ “내가 너의 간음(우상숭배)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우상숭배)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27상) 하십니다. 10절에서 이미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없음같이 되리라” 하고 그들이 멸망을 자초한 큰 죄는 다름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긴 우상숭배였음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성도들이 정절을 지키며 하나님만을 섬기는 방도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만 속죄제와 화목제 등을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약의 성도들도 중보자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할 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은 물론 명백히 그리스도를 배척한 행위였음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⑧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 23절인 것입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23) 하고 전적타락, 전적무능한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음의 불가능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⑨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행함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 방도를 마련해 나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방도라는 것은 신약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구약의 성도들도 동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무엇을 믿는 믿음입니까?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는 제물을 드리면서, 동시에 우상에게도 제물을 드렸다는 것은 다름 아닌 혼합종교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점이 바로 이 점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봉에 서서 싸운 싸움이 혼합종교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부인하거나, 믿지 말라고 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할례도 행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가리켜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7-8) 하고 격앙된 저주를 한 것도 복음이 혼잡 됨을 경계하고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 2:14-15) 하고 책망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혼합종교에 대한 경계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비하면 현대교회는 복음이 얼마나 더 변질 된 시대입니까? 이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까? 교만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를 믿으면서 복음을 혼잡 되게 합니까?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에 이를 각색하려는 교만 때문입니다. 복음이 혼잡 되게 되면 “썩어버린 베띠”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영광이 변하여 저주”가 되고 맙니다. 그 결국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