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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백호나한이 돌아오자 봉수성은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각 거점에서 개별적으로 움직이던 수군들을 흡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그간 봉수성 창고에 자리만 차지하던 물건들은 백호수군이라 불리기 시작한 투함(鬪艦)들에 옮겨 실었다.
“대수영에 속하지 않은 수군들을 흡수하는 것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숫자상으로 천하제일의 함대가 만들어졌습니다. 투함이 23척, 순시선이 87척, 쾌속선이 157척입니다. 수군 병력만 8천이 넘습니다. 그러나 배가 노후하거나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배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해노가 앞으로 힘써주시오.”
“힘 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라혼은 수군을 흡수하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장상의 보고를 받았다. 라혼은 장상이 돌아오자 봉수성 상인들에게 창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사들여 투함에 싣게 했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북지성의 항구 요새를 물색하던 토귀를 불러들여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토귀, 지금 토금전장의 자금 사정은 어떠한가?”
“부족합니다. 주공이 추진하는 일들이 모두 워낙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인지라….”
“부족하면 꾸어 쓰면 되지 않나?”
“예?”
“토금전장의 이름으로 제평, 남경, 중경, 상경, 북경, 서경 등의 대부(大富)들에게 빌리고 여인천궁에서도 얼마간의 자금을 가져와라. 그리고 향당도 도와줄 것이다.”
“향당이오? 감곡의 그 향장자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는 인색한 구두쇠로 유명한데 어찌….”
“내가 검소하기는 해도 인색한 구두쇠는 아닌데….”
“….”
토귀의 말에 한쪽에서 말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추레한 노인이 끼어들며 말하자 토귀는 크게 놀랐다. 향당은 그런 토귀를 보고 라혼에게 말했다.
“주공, 아무리 그래도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향당은 단 하루에 사탕수수 벌채를 끝내고, 곧바로 석밀을 만들기 시작했다. 추수하던 날 향당은 백호나한이 누구인지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날 백호나한은 검기(劍氣)로 사탕수수를 벌채했고 백호영이라는 군사들이 나서자 일주일을 예상했던 벌채는 하루에 끝이 나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추수한 사탕수수밭에 비료를 주고 다시 심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했고, 동시에 벌채된 사탕수수를 다듬어 착즙을 하고 가마솥에 끓여 불순물을 제거해야 하는 작업을 봐야 했다. 그러나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참가하라는 명을 받고 봉수성으로 왔는데, 주공인 백호나한은 돈을 내라는 말만 할 뿐 앞으로 한 배를 탄 사람들은 소개조차 시키지 않았다.
“남례성의 장자 향당으로, 앞으로 우리와 함께 일할 동지다. 서로간의 안면은 차차 익히기로 하고 내가 오늘 모이라 한 이유는 밝힐 것이 있어서 그렇다.”
라혼의 말에 고학과 모원, 모석 등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챘지만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라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천상천화는 백호다.”
“….”
“목표는 원주로의 진입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력만으로 원주에 진입할 생각은 없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라혼은 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현 조정에 반(反)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영향력을 키워갈 것이다. 3년이다. 3년 안에 서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동시에 장강대하를 장악할 것이다. 또한 남해에도 영향력을 키울 것이다.”
“그럼 남상의 서해대수영과 남례성은 어찌하시렵니까?”
고학이 물었다.
“나서지 않는다. 그 일은 조정의 하남천원군 참장으로서 임무를 완수할 거다.”
간단명료(簡單明瞭)한 라혼의 대답은 그러나 실상은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다. 현 조정을 뒤엎지 않고 이어받는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고, 때를 보아 기다린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했다.
“토귀, 해진이 들어설 자리는 물색해놓았나?”
“예! 비교적 한갓진 곳을 찾았습니다. 태회진(泰回陣)란 곳으로 옛 수군 터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해두어 수십 가구가 모여 사는 어촌입니다.”
“위치는?”
토귀는 주공의 물음에 지도책을 짚어가며 말했다.
“태회진은 여기에 위치해 있고,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 있어 교통도 불편함이 없는 곳입니다. 게다가 주변에 질 좋은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는 숲이 있어 조선소에서 필요한 목재와 철방에서 사용될 연료를 구하기 쉬운 곳입니다.”
“철광석의 수급은?”
“그것에 관해서는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거의 모든 철광은 조정에 속해 있습니다. 해서 철광석은 외부에서 사들여야 하는데 저희가 소모할 대량의 철광석을 댈 수 있는 곳은 의백성(義白城) 해상 세력인 의백최가(義白崔家) 정도입니다. 게다가 배를 만드는 장인을 많이 보유한 곳도 바로 그곳인지라….”
“여인천궁의 이름으로 그들과 손을 잡으면 되겠군. 가능한가?”
“저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의백성은 인시드 대륙 북부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광산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것은 조정이었지만 외부에서 철광석을 들여오는 것은 묵인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의백성에는 대단위 철광이 있어 거기서 채굴되는 철광석이 민간에 흘러나왔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금에 이르러서는 철광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라혼은 토귀의 보고를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설명했다.
“북지성에 만드는 해진은 배를 만들고 철기를 생산하는 것이 주가 되고, 이곳 봉수성이 기항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함대의 제독은 여기 장상이 맡아 나와는 별도로 운영한다. 고학!”
“예, 주군!”
라혼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고학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앞으로 모든 일은 공과 사가 나뉘어 처리될 것입니다. 공으로는 하남천원군으로서 임무를 다하는 것이며 사로는 바다를 장악해야 합니다. 바다를 장악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남상의 서해대수영은 조정의 토벌 함대를 도움으로써 인시드 남주 무역의 지분을 확보하고 여세를 모아 여기 금 대부의 토금전장의 이름으로 장강대하의 내륙 수운에 진출하여 영향력을 확대시킬 겁니다. 또한 향장자의 감곡 사탕수수 농장을 더욱 확대하여 석밀 생산을 늘리고, 석밀과 철기를 주력으로 세를 확대시키게 될 것입니다.”
고학이 처음 라혼에게 천명을 이야기할 때 생각한 것은 천명을 받아 조정에 반해 할거(割據) 후 세력을 키워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主)가 될 존재가 신수(神獸) 백호(白虎)인 이상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백호가 비록 신수이나 수인(獸人)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섣불리 조정에 반기를 들면 조정에서는 백호를 주(主)로 하는 쪽을 가장 위험하게 보고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컸다. 현 천자(天子)인 호황의 입장에선 백호가 가장 껄끄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주 조정 내부로 들어가면 백호의 존재는 후계자의 지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지 기반이 확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라혼의 하남천원군의 장수로서의 지위와 바다를 무대로 한 세력은 참으로 적절하다 할 수 있었다. 원주와 멀리 떨어진 남례성을 기반으로 하고, 바다의 길을 확보함으로써 언제든 아무런 장애물 없이 물길을 통해 원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타 세력을 압도하는 해상력이 필수 조건이었다.
“그리고 백호 함대도 그 운영을 남례성 수군 함대의 얼굴과 토금전장의 상선단의 얼굴을 따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토금전장의 선단을 남례성 수군이 빌려 쓰고 이후로 다시 돌려주는 것으로 모양새를 꾸밀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창설한 토벌 함대와 서해대수영이 서로 힘을 겨룰 때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학의 설명이 대충 마무리되자 모석이 물었다.
“그럼 하남천원군은 어찌하실 겁니까?”
“금영월 대장군 말인가?”
“예.”
“내가 하남천원군 장수 신분을 유지하는 이상은 그를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례성의 안정이다. 남례성의 소요를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백호영은 그것을 명심해라!”
“존명.”
“최우선 순위는 백호수영(白虎水營)이다. 그 다음이 북지성의 태회진이다. 남례성의 병력 증강은 봉수태수부의 자금으로만 감당한다.”
회의가 끝나고 라혼은 귀림 드워프 마을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앞으로 여러모로 요긴하게 쓰일 역석(力石)과 그 역석을 이용한 목우유마(木牛流馬)를 설계하기 위해서였다. 목우(木牛)는 직접 등에 싣게 되어 있는 것으로 다리가 있어 수레로 이용하기 어려운 곳을 지날 때 쓰였고, 유마(流馬)는 바퀴가 달려 수레를 끌거나 하는 역할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한 분이시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석은 완성되었나?”
“예, 활성화만 시키면 충분히 기능할 겁니다.”
라혼은 촌장 블로가 건네주는 어른 머리통만한 12면체 형태의 역석에 마나를 주입해 역석을 구성하는 108개의 마법진을 활성화시켰다. 역석의 구조는 12면체의 마나 물질을 다섯 겹 감싼 형태로 가장 안쪽의 안쪽만 제외하고 양면에 한 가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시드그람 대륙에서 사용하던 마나스톤과 엑스시온이 합쳐진 형태였다. 마나스톤은 마법이 걸린 물체나 마법진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공급하고, 엑스시온은 마나스톤이 공급하는 마나를 다른 운동 에너지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만든 역석(力石)은 마나스톤과 엑스시온의 일체형이었다. 마나스톤의 작동 원리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원소 원리에 에테르(Ether) 개념이 섞인 것이었다면 역석은 일원(一元), 양의(兩儀), 삼재(三才), 사상(四象), 오행(五行), 육효(六爻), 팔괘(八卦), 칠성(七星) 구궁(九宮)의 원리로 만들어졌다. 일원은 태초에 우주에 존재했던 단 하나의 기운으로서 질서와 혼돈(混沌)이 뒤섞인 형태 즉 에테르(Ether)를 말했고, 양의는 음양으로 하늘과 땅,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 활동과 휴식, 억셈과 부드러움 등 서로 상반된 두 가지를 말하고, 삼재(三才)는 하늘(天), 땅(地), 사람(人)인데 하늘은 시간, 기후, 보이지 않는 원리, 기(氣) 등이며 땅은 풍토와 보이는 물체나 힘이다. 인은 그 안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양성(陽性), 중성(中性), 음성(陰性)이다. 사상은 태양(太陽), 태음(太陰), 소양(少陽), 소음(少陰)이고, 오행은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 육효(六爻)는 삼재의 음양, 칠성은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 팔괘는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구궁은 휴(休), 사(死), 상(傷), 두(杜), 개(開), 경(驚), 생(生), 경(景)에 중궁(中宮)이다. 이 모든 것은 각각 상징하는 것이 모두 다른데 방향으로 예를 들면 일원은 아무것도 아닌 점(點), 양의는 선(線), 삼재는 면(面), 사상은 사방(四方)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 오행은 오방(五方)으로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육효는 육합(六合)으로 동서남북(東西南北)에 상하(上下), 칠(七)은 거기에 중심, 팔괘의 팔방(八方)은 동서남북(東西南北)에 동북(東北), 동남(東南), 서북(西北), 서남(西南), 구궁은 팔방에 중궁(中宮)을 더한 것이다. 십(十)은 거기에 시간(時間)의 흐름이 더해진 것이다. 그것은 마나(Mana)나 기(氣)의 운용에도 소용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라혼이 마나를 주입함으로써 활성화된 역석은 그 자체적인 힘으로 허공에 띄워졌다. 108개나 되는 마법진을 단 한 번에 활성화시킨 라혼의 능력에 역석을 만들어놓고 과연 이것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던 드워프들은 경이적인 드래곤(?)의 능력에 전율했다.
“성능을 시험할 도구는 있나?”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블로는 어른 머리통만한 역석의 8각 면에 관(管)을 연결하고 기관을 풀었다. 그러자 임시로 만들어진 기관에 달린 바퀴가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
―오오~!
“성공이다.”
―우웅웅웅웅웅웅~!
그러나 바퀴가 도는 속도가 점점 배가 되면서 바퀴살 사이에서 엄청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
―꽈직! 퍽~!
그리고 자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맹렬히 회전하던 바퀴는 임시로 만든 기관에서 떨어져 나와 천장을 부쉈고 기관은 터지듯 분해되어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자 드워프들은 드래곤(?)의 진노를 걱정하며 라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라혼은 자신이 설계한 역석의 성능에 만족스러워했다.
“괜찮군. 하지만 조금 큰 듯한데?”
라혼의 만족스러워하는 반응에 드워프 촌장 블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것은 시제품적인 성격이 강해서 그렇습니다. 혹시나 몰라 분해와 조립이 용이하도록 일부러 크게 만든 것이니까 앞으로는 어린아이 주먹만하게까지 쉽게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좋다. 앞으로 얼마나 만들 수 있지?”
“지금 저희가 가진 재료로는 1백여 개 정도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은?”
“1백일 정도 필요합니다.”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에서 목우유마의 설계도를 꺼내 블로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역석을 이용한 운송 기구다. 만들 수 있겠나?”
“어렵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역석을 이용한 여러 가지 동력 기관을 만들려고 한다.”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석밀을 만드는 공정을 설명하고, 배를 움직이는 자동 노(櫓)의 설계도 부탁(?)했다. 드워프들은 자신의 손재주를 뽐내거나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열정적인 면이 있었다. 역석도 그렇지만 그 역석을 이용한 다양한 생각들은 드워프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라혼은 드워프들에게 일거리를 한 아름 안겨주고 나서 가니아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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