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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 흉노의 등장과, 흉노의 성장.. // * 흉노족..
임광자 추천 0 조회 68 14.05.08 2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금은 사라져 버린 역사속의 흉노족이; 세계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

 

실크로드에 관한 몇 가지 책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점은; 스키타이와, 흉노족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이; 새삼스럽게 크게 느껴지곤 한다.

 

그 중, 흉노는; 비록, 중국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갔지만,

서쪽으로는, 여러 오아시스 국가들을; 평정하며,

 

수백 년 후에는, 훈족이란 이름으로, 서양에 잘 알려진 전설적인 악마(?)아틸라(5c ~453)로 나타나,

유럽을 공포로 떨게 했으며,

동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내, 여기서 밀려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키는, 민족대이동발단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이들에게 밀려난 월지족박트리아 그리스인들이 정착간다라지배하여 쿠샨왕조건설하여 카니슈카 대왕시대 간다라 미술탄생시킨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흉노의 영향을 우리와 결부시켜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어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이; 한나라 무제에게 건의한, 

투항(BC121) 흉노족 혼야왕이; 텅 비어 있으니, 오손을; 이 에 불러들여....” .

 

4만명이나 되는 혼야왕 무리가; 어디로 간 것 일까?

혼야왕은; 선우질책을 두려워하여, 휴도왕을 죽이고, 한나라투항 하였는데, 

한무제는; 인질로 잡은 휴도왕의 아들 일제에게 김씨라는 을; 주었다.

이들 무리가; 우리나라 고조선한사군 설치 때,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즉, 낙랑군의 주력부대가; 흉노족 김일제 무리라고 보며,

이들 무리가; 김씨(김알지 AC67)시조라는 주장이 있다.

 

신라 유리왕 14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AC37)이; 낙랑침입하게 되는데,

낙랑사람 5,000명이; 신라에 내려와, 6부에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훗날, 서기 313년 낙랑이; 고구려에게 멸망되었을 때,  신라로 들어가,

전에 들어온, 집단과; 손잡고, 미추왕 때, 석씨계에 빼앗긴 왕권을; 되찾아, 내물왕(17대)김씨계로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합니다.

[ 대원릉에 묻힌 미추왕(13대) ~지증왕(22대)까지 무덤 중, 낙랑과 같은 적석목곽분묘 매장 묘를 근거로 듬. ]

 


흉노의 등장

흉노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흉노열전에,

기원전 1300여년전, 은나라 갑골문에 토방이라는 이민족이; 변경을 침입하여, 주민과 가축을; 약탈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전 800년경(서주말)의 청동기 명문에,

낙수(지금의 섬서성 북방)에 출몰험윤이라는 유목민을; 퇴치했다는 기록과,

진(秦)목공시대(BC660~621)에,

서융(중국 북방이민족을; 지칭하는 말)8개국이; 복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기원전 수세기부터, 중국북방에,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중국주류와는 별개의 구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원전후 수세기 동안, 중국과; 끊임없는 분쟁을; 초래한 흉노의 직접적인 조상인지는 확실치 않다.

 

전국시대에는, 흉노를; (胡)라고, 총칭하였으며,

흉노서쪽은; 임호,/ 동쪽은; 동호라고,/// 불렀다.


흉노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때는; <사기 진본기>에, 전국시대 중기(BC318) 북방5개국(한,위,조,연,제)이; 대항하다, 참패하여, 북방으로 쫓겨 갔다는 기록이; 있다.

 

흉노시조는;  은나라시대 때, 북방으로 쫓겨난, 순유라는 설과,

걸왕의 아들인, 훈죽이란 설. 등이; 있는데,

당나라 때, <괄지보> 기록에는, 폭정을 일삼던 걸왕이; 은나라 탕왕에 의해 추방당한 후, 3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 훈죽이; 걸왕처첩을; 거느리고, 북방으로 이주하여, 유목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 흉노열전에는,

흉노시조는; 왕조의 일족인, 하후씨의 자손 순유”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즉, 중국인들은; 흉노는; 정쟁에서 패한, 중국인후예가; 북방으로 이주하여,

유력원주민(몽골계)과, 손을; 잡고, 지배층을; 이루며, 초원지대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유목생활을; 한, 집단이라, 생각하고; 있다.


흉노는 어느 민족인가?

문화 및 생활 방식을; 비교할 때,

기원6세기경 최고의 전성기를 가진 스키타이 족과 너무나 흡사하여 종종 스키타이민족과 비교되고 있기도 하는데,

흉노족혈통이; 몽골계인가, 투르크 또는, 아리아계인지, 여러 의견들이; 있다.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된 몽골노인울라 분묘(AC1 울란바토르 외곽 100km)의 매장 유골을 분석한 결과,

흉노인은; 아리아계통서방민족(스카타이 계통)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5호16국시대(4~5세기)북방 흉노족후예에 의해 건립된 후조(後趙)왕조의 용모에 대해,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높으며, 턱수염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위서 석륵전 과 진서>

 

반면, 진시황제 병마용에서,

흉노병사를 묘사한 토용은; 체구가 작고, 코가 낮은 몽골계통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1938년. 중앙아시아 탈라스 강가에서 발굴된,

북흉노(기원1~2세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켈쿤 분묘에서 발굴된 남녀 한 쌍의 유골은;

낮은 코와, 높고 둥근 눈은; 몽골 인종적 특징을; 지닌, 투르크인(돌궐)과, 파미르페르가나인(대원 현재우즈베키스탄지역)의 혼혈로, 보고 있다.

 

여러 기록과 광대한 지역 분포로 보아,

흉노는; 단일 종족이; 아닌, 여러 부족집단을; 중심으로,

이동과, 혼인관계로; 연계된 것으로, 보인다.

 

즉, 흉노집단 중,

중앙아시아 쪽은; 아리안계 혈통이; 우세하며,

동쪽은; 몽골계통혈통이; 주를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선우는; 부족장 회의인 융성회의에서 선출하는데,

중국 <진서>에는,

흉노는; 19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각종연제씨가; 대대로, 흉노우두머리선우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연제씨는; 8개의 부족과; 인척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흉노는;  중국에서, 이주집단과, 몽골계집단이; 지배층을; 이루며, 주변 부족들을; 병합하여 이룬, 부족연맹체집단으로, 여겨진다.


기원3세기경 흉노주변상황

흉노의 세력 범위는; 시기마다 다르나 대체로 만리장성 북방을 기준으로 동쪽은 요동반도 위쪽 대흥안령산맥 북바이칼 호수부근 이남 서쪽알타이 산맥 동쪽 과 하서지구 월지족북방이며, 오르도스를 포함한 내외몽골지방의 주 세력범위생각된다.

 

대흥안령산맥 동쪽(현재길림 흑룡강성)동호가; 자리 잡고,

전국시대(BC5~BC221)에, 중국나라를; 자주, 공격하였다.

 

북쪽바이칼 호수 남부까지 정령족(훗날 투르크계일부)이 차지하며 자주 흉노지역을 넘어왔다.

 

흉노서쪽은; 알타이산기련산맥 사이 하서회랑지역은; 강력한 월지족이; 서방으로, 무역로를; 점령하고, 세력을 떨치고 있으며, 그 서쪽으로는 오손이  자리 잡고 있다.

 

흉노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강족(티벳계)이; 월지를 사이에 두고, 지금의 청해성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흉노의 최대 적수인 중국오르도스지방(지금의 산서성, 황하남쪽으로 굽이져 방향을 튼 지역)누번백양족 지역을; 경계로, 일진일퇴를; 하면서, 흉노남진을; 막고, 있었다.

 

 

http://cafe.daum.net/wndtkehdno1/De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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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성장과,  중국 및 이웃국가와 대립

 

흉노최고지도자선우라고 하는데, 정식명칭은; 탱리호도선우이다.

(탱리=하늘,투르코 몽골어의 텡그리에서 유래 / 호도=아들,퉁구스어의 쿠도 /선우=광대하다)

 

선우라는 명칭은; 5~6세기 가한(칸 Khan)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전까지, 북방민족에게 널리 쓰이던 칭호였다.


흉노와 진.한과의 대립

 

흉노의 두만(?~BC209)이;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선우라는 칭호를 얻게 되자, 남하하게 되는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충돌하게 된다.

진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를 치게 하는데,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오르도스지역(Ordos 만리장성섬서성영하회족자치구)을 차지하고,

종전의 연,조,진나라 장성을 수리하고, 44개의 성을 축조하여 유명한 만리장성을; 건설하였다.

(진시황제가 대대적인 흉노정벌에 나선 것은; 흉노가;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점꽤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함.)

 

기원전210년 진시황제가  순행도중 하북성평양(사구)에서 숨을 거두자,

황제계승유언을 조작한 막내아들 호해와 환관조고의 모략으로 장자인 부소자결을 하고, 부소 편에 섰던 장군 몽염처형당하게 되었다.

 

진시황제의 폭정에 따른 농민봉기(진승 오광의난 BC209~BC208)유방항우궐기북방수비할 여력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흉노두만이; 다시, 오르도스지역회복하였다.


묵특선우(BC209~BC174)

 

흉노한나라와 일진일퇴하던 기원전 200년대 정세는 팽창 하려는 흉노와, 이를 막아선 강력한 주변국들 간의 팽팽한 힘겨루기로 긴장된 시기였다.

 

당시 동쪽은, 동호가 버티고 있었으며, 서쪽은, 월지라는 강력한 아리안계 유목족이 동서의 교통로를; 차지하고 있었다.(비단무역의 독점)


묵특(용감한자)은; 두만선우의 장자였으나, 후비(연지)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묵특월지에게 인질로 보내고, 월지를; 습격하여, 묵특이; 월지에게; 죽게 하려고, 하였는데,

묵특은; 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빼앗아, 흉노로 돌아왔다.

 

이에 두만은 묵특에게 기병1만을 주어 후계자 서열 1위인 좌현왕의 지위를 주었다. 

묵특은 이 1만기병을 활시위를 당기면 소리가 나는 명적이라는 화살을 이용하여 타군과 구별하였으며,

자신의 명마와 애첩 연지를 화살로 쏘고 따라 하기를 주저하는 병사들을 즉시 목을 베어 철저히 복종하도록 충실한 가신정예군으로 만들었다.

 

BC209년 두만선우를 사냥터로 유인한 묵특은 아버지 두만을 살해하고 계모와 동생들 및 대신들을 살해하고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묵특은 재위기간동안 흉노의 세력을 크게 확장 시켰는데,

즉위 후 얼마 후 동호묵특을 시험하기 위해 천리마를 달라고 사신을 보내왔다.

 

묵특은; 이웃과 관계를 중시 천리마를 선뜻 보내주자 이번에는 묵특애첩하나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여러 대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는데 어찌 계집하나가 아까운가?” 라며  애첩까지 순순히 내주자, 이번에는 흉노와 경계지역인 구탈지라는 땅을; 요구하였다.

대신 중 한명이; 그 땅은 쓸모없는 땅이니 주어도 별 문제없다고 말하자, 크게 진노하여,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다 !” 흉노의 땅을 넘보는 적은 용서치 않겠다고 전군을 호령하여 동호를 쳐 동호왕을 살해하고 백성가축을 빼앗았다.

여세를 몰아, 서쪽월지를; 침공하여 쫓아내고, 오르도스지방의 누번과 백양, 한나라 땅을; 침입하였다.


한고조의 평성의 치

항우와 대결에서 승리하고 전국을 통일한 한고조(BC202~BC195)유방은;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북방을 괴롭히는 흉노 정벌 길에 올랐다.

한왕 에게 명하여 흉노정벌케 했으나,

흉노 기마군단의 강력함을 잘 아는 고조의 명을 어기고 흉노화친을 맺었으며, 한고조의 징계를 우려하여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묵특은 투항한 한나라 군대와 함께 40만 대군을 이끌고 지금의 태원으로 진격하였으며,

이에 맞선 한고조는; 친히 32만 대군으로 이끌고, 선서성 대동동쪽 평성으로 진격하여 흉노일전을 벌였다.

당시 흉노군단은 조직적인 기마군단으로 북방은 흑마, 남방은 적황마, 서방은 백마, 동방은 머리에 흰색점이 있는 흑마 군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활을 쏘는 자가 30만이나 되는 대군단 이였다.

한고조는; 흉노의 기마군단에 포위되어, 7일 동안이나 굶주리다가, 가까스로 묵특연지()에게 뇌물을 주고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이른바 평성이다.

 

평성 이후, 흉노와, 한나라는; 형제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한나라가 형의 위치에 있었으나 흉노가 국서를 보낼 때 한나라의 1척1촌보다 큰 1척2촌의 목독을 보내는 등 우위에 있었으며,

매년  한나라 왕실의 여자를; 선우연지로 보내고, 솜과 비단 술 곡식 등을 흉노에 보내야 ?다.

흉노는; 이 때 받은 비단 등을 서방의 여러 나라와 교역하며, 막대한 이윤을 남겼으며, 교역로를 가로막은 월지족토벌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선우의 연지와 수혼제

한고조가; 평성의 치를 당하고,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연지(선우)역할인데,

일화로는, 연지에게, 사자를; 보내, “중국에는, 미인이; 많아, 묵특이; 중국을; 점령하면, 연지자리가; 위태로울 것” 이라고 설득하며, 많은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일화의 진위를 떠나서 전쟁 중에도 연지발언권이 강했다는 점이다.

연지는; 통상, 흉노의 유력 부족왕의 이; 선우가; 되는데,

강력한 친정후광을 업고, 정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흉노풍습에는 아버지나 형제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나, 어머니를 죽이는 일은 외가의 응징이 있었으며,

젊은이가 좋은 음식을 먹고 대접을 받고, 노인은 홀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독특한 수혼제가 있어, 아버지가 죽으면 그의 처첩을 아들이 승계하여 거느렸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화는, 기러기가 비파 치는 미모에 반하여 떨어졌다(낙안)는, 중국4대미인 중 하나인 왕소군에 관한 것이다.

한나라 원제(BC33)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을 갔다가 아들 하나를 낳고 호한야가 2년 만에 죽었는데, 훗날 호한야 선우사이에 난 지산의 친아들과 결혼을 강요당하자,

아들에게“ 너는 한인으로 살고 싶으냐 흉노인으로 살고 싶으냐” 라고 물었다고 한다.

아들이; “흉노인으로 살고 싶다”고 하자 독을 먹고 자살을 했다고 전한다.

[ 실제로는 왕소군은 다른 5명의 후궁과 함께, 호한야 선우에게 보내졌다.

호한야와 사이에 이도지아사 라는 아들 하나를 낳고 2년 후 호한야가 죽자, 다른 연지에게서 낳은 조막고도 (복주루 선우)에게 시집을 가, 2명의 여자를 낳았으며, 친아들은; 좌현왕이; 되었다.

 

그녀의 무덤은; 현재 내몽골 호화호특에 있는데,  청총(흉노의 풀은 흰색이나 한나라의 풀은 푸른색)이라고 한다.

왕소군이; 떠날 때, 장안은 봄날이었으나, 북쪽흉노 땅은; 아직 찬바람 부는 날씨였다.

이 때지은 시가 유명하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 

 

흉노서역정벌 (월지, 오손, 누란 등)과, 서방교역로 확보

월지는; 천산산맥 북쪽과 타림분지. 등, 서북 몽골지역에서 감숙성 (돈황, 하서회랑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으나

흉노의 세력에 밀려, 서북몽골지방을 잃어 세력이 축소된 상태였다.

 

그러나  서역으로 가는 길목을 장악하고, 비단과 옥 등 을 교역하며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월지는; 서방에는 비단이 나는 나라중국에게는 호탄옥이 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유명한  화씨벽 등이 월지를 통해 중국에 전해졌으며, 교역으로 받은 비단을 서방으로 수출하여 많은 수익을 남기고 있었다.

   

세력을 확장하던 묵특 선우는; 기원전176년 한문제(BC180~BC157) 월지를 비롯한 서역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는데 묵특의 아들 노상선우 때까지 이어졌다.

의 문제에게 보낸 문서에“ 월지를 비롯한 누란, 오손, 호계와 부근의 26국을 평정하고 모두 흉노 땅에 포함시켰으며, 여러 활 쏘는 민족을 통합하여 일가가 되고 북방이 안정 되었다”고 사기 흉노열전에 전한다.

   

묵특에게 쫓긴 월지는 둘로 나누어져 일부는 이리지방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남하하여, 감숙, 청해지구의 강족지역 주민과 정착하였다.(소월지)

이리지방으로 이주한 월지를; 묵특의 아들 노상선우가; 다시 정벌하여, 타클라마칸 사막 분지 밖으로 쫓아내버렸다.

 

이 때, 노상선우(BC174~BC161)가; 월지왕을 살해하고 그 두개골술잔을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약 30여년 후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이; 한나라 무제의 명으로, 흉노에게 원한을 가진 월지를 찾아가 동맹을 맺으려 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화이다.

(흉노에게 쫓긴, 월지는; 몇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천산산맥 파미르 고원 서쪽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중의 한 갈래인 큐샨족은; 간다라지방의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을 지배한, 같은 월지족의 일파인 샤카족 복속시키고, 쿠샨왕조를; 엽니다.

광대한 영역을 점령한 쿠샨왕조의 제3대왕 카니슈카대왕시대. 불교가; 융성하게 발달하여, 제2의 아쇼카 왕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 시대에 유명한 간다라 불상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스박트리아 인들은; 동방 원정길에 오른, 알랙산더대왕(BC356~BC323)을 따라온 군인 중,

일부가; 남아, 200여 년간 박트리아 왕국을; 건설하며 살았으며, 이들이; 간다라 지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

 

 

 

 

 

http://cafe.daum.net/wndtkehdno1/DeP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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