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실학자 홍만선(洪萬選, 1643년~1715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중(士中), 호는 유암(流巖).
아버지는 예조참의 홍주국(洪柱國)이다.
166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 30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내직으로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의금부도사, 공조의 좌랑·정랑, 익위(翊衛), 사옹원·사재감·장악원·사복시 등의 정(正)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연원찰방, 함흥·대구 등지의 판관, 대흥·합천·고양·배천·단양 등지의 군수, 인천·부평의 부사, 상주목사 등을 거쳤다.
인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벼슬생활에서는 당대의 순량리(循良吏: 법을 지키면서 백성을 잘 다스리는 관리)로 꼽혔다.
당론(黨論)의 대립이 심하였던 당시 판단을 공정히 하여 많은 인사들이 그를 찾아 의견을 들었으며, 부족함이 없고 결점이 없는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
연로할 때 지은 『산림경제(山林經濟)』 4권은 대표적인 향촌경제서로서 사대부의 산림생활의 지침서가 될 뿐만 아니라 농업기술에 관한 한 18세기 이후 새로운 농서(農書) 발간에 기여가 컸다.
유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實用厚生)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발전의 선구적 인물로 평가된다.
유중림(柳重臨)·서유구(徐有榘)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