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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남산. 그 잔잔했던 감동"
언젠가 이른 새벽에 봉화골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여물지 않은 풋풋한 보리 이삭은 하늘로 곧추 서 있고 수염 한 올마다 이슬이 달렸다. 하얀 보리밭. 애기붓꽃이며 은대난초가 검은 산길에 액센트처럼 툭툭 피어 있던 지난 봄. 남산으로 가는 길은 늘 그랬다. 새벽이면 한 움큼 이슬을 머금은 보리밭을 지나 마치 순례자처럼 골짜기로 접어들었었다. 그 곳은 언제나 모나거나 불거지는 법 없이 아늑했다. 보리밭이 없으면 솔밭이 있었고 그마저 없어 고개 들면 어디선가 부처님이 그윽하게 날 바라보고 계셨다.
그 감동은 뭐라 말 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천년, 그 긴 세월을 견뎌온 미소를 오늘에도 마주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찌 큰 감동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남산을 다니면 다닐수록, 속속들이 그 속내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섣부른 감동은 환희로움에서 겸허함으로 바뀌어 갔다. 마치 깨어나지 않은 새벽녘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그렇게 잔잔한 감동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만 천년 전 신라인들에 대한 경외일 뿐 종교적 성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10개월 여, 백일기도하듯 남산을 다니고 나서야 겨우 경주, 아니 신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국사와 석굴암 그리고 첨성대로 대변되는 신라와, 남산으로 대변되는 신라는 꼬챙이 내밀며 바로 이것이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들이 내 속에서 서로 오버랩 되면서 신라와 지금의 경주가 보이기 시작하니 남산엘 오르지 않거나 그 언저리에도 가보지 않고 경주에 다녀왔다는 말은 삼가야 할 것 같다.
이제 마음 다잡고 남산 순례 길로 나서자. 남산은 경주 톨게이트를 나서면서 오른쪽 앞으로 희끗희끗 상처처럼 바위를 내 보이는 산이다. 468m의 금오봉과 494m의 수리봉 혹은 천룡산이 솟으며 만들어 내는 능선과 계곡 그 모두를 합쳐 남산(南山)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선덕여왕릉이 있는 망산(望山)과 부부 산이라고 한다. 남산이 남자 망산이 여자라고 하는데 얼핏보면 남산은 바위가 불거져 있는 근육질의 산이고 망산은 유연하며 완만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 말도 맞을 듯 하다. 이들은 산으로 모습이 변하기 전에 신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산으로 변한 전설은 이렇다. 부부였던 이들은 살 곳을 찾아 여기 저기 떠돌다가 아름다운 서라벌의 경치에 반해 "야,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구나"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던지 근처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니 산처럼 거대한 남녀가 자기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란 처녀는 "산 같은 사람 봐라" 라고 해야 할 것을 "산 봐라"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곤 혼절해 버렸다. 거대한 부부 신은 발 아래에서 들려 오는 처녀의 외마디 비명에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그 후로 다시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굴이 검붉고 근육질이었던 남자 신은 남산이 되었고 아름다웠던 여신은 포스랍게 솟은 망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가, 조금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전설은 전설로 가치가 있는 것이니 그것을 터무니없다고 타박하거나 앞뒤를 꼼꼼히 재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좋은 생각은 아닌 듯 하다.
남산엔 가장 짧은 왕정골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있는 골짜기만 26군데나 되는데 그 곳에서 발견되는 절터는 무려 110군데이며 지금은 허물어지기도 한 석탑이 수가 61기, 바위에 새겨 놓거나 입체로 모신 부처님만 78체이며 남산을 중심으로 그 기슭에 묻힌 왕만 하더라도 헌강, 정강, 경애왕을 비롯해 7분이나 된다. 이러니 어찌 남산이 성지가 아니겠는가. 지난겨울 타계하신 윤경렬 선생은 남산을 두고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더 한 표현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표현이지 싶다.
봉화골 칠불암 마애삼존불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이 남산에서 가장 잘 생긴 부처님이라면 칠불암 마애불은 가장 호쾌하고 장대하며 위엄을 갖춘 부처님이다. 봉화골 초입에서 느린 걸음으로 사십 분 정도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이 마애불의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는 아래로 핀 복련과 위로 핀 앙련 두 개를 모두 갖춘 쌍련이며 그 사이에 팔각의 중대석이 놓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대좌는 바로 꽃잎끼리 맞대어 놓았다. 상호를 보면 코 부분에 검은 색이 보이는데 시멘트로 수리를 해 놓은 것이어서 눈에 거슬린다. 폐사지는 그대로 두어야 그 곳에서 갖은 상상을 할 수 있듯이 솜씨있게 하지 못할 것이면 그냥 두는 것이 올바른 보존 방법일 것인데 아쉽기만 하다. 오른쪽의 협시보살이 들고 있는 병은 맑은 정화수를 담고 있는 정병이다.
칠불암 사방불
자연석에다 삼존불을 새기고 그 앞에 따로 떨어진 바위에 사방불을 새겨 모두 일곱 분의 부처님을 모셨다.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남면의 여래상이고 오른쪽 끝에 보이는 분은 동면의 약사여래이시다. 나머지 두 분 여래는 직접 찾아보기 바란다.
신선대 마애보살상
신선대는 칠불암에서 가파른 바위길을 십여 분 올라 아슬아슬한 절벽 위를 걷다 보면 툭 불거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 길이 너무도 아찔하여 모두 그것에 신경 쓰느라 보살상은 지나고 한숨 돌린 후에 "아 저기 있구나" 하는 경우가 많다. 되돌아보면 모두 보살상이 새겨진 바위를 붙들거나 안고 지나 왔으니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을 찾아오는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참, 그윽하기 짝이 없다. 한쪽다리는 접고 한쪽은 늘어뜨리고 앉았으니 반가(半跏)라 하기 쉽지만 이는 유희좌(遊戱坐)이다. 아래에는 구름이 뭉개뭉개 피어나고 그 속에 한 송이 연꽃이 피었고 보살님의 발이 드리워져 있다. 왼손은 설법인을 하고 오른손엔 보상화를 들었는데 그대로 구름을 타고 우리들의 세계로 내려오실 것만 같다.
금오산 정상
남산은 금오봉과 수리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두 산 모두 해발 500미터 미만이라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산 속에 들어가 보면 그리 만만한 산은 아니다.
용장사 3층탑
전형적인 신라 탑으로 하층 기단 없이 바위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상층 기단부터 바로 올린 탑이다. 상층기단에 기둥처럼 보이는 우주와 탱주가 세 개인 것으로 미루어 신라 석탑의 정형이 완성된 9세기경의 것인 듯 보인다.
용장사 터 마애석가여래좌상
연꽃위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을 한 채 결가부좌로 앉은 석가여래의 옷 주름을 자세히 보니 다른 불상의 굵직한 표현과는 달리 아주 폭이 좁게 물결치듯 되어 있다. 이는 인도 굽타시대의 마투라 불상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용장사 터 삼륜대좌불
용장사에는 경덕왕 때 대현스림이란 분이 주지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스님은 매일 삼륜대좌불 주위를 돌며 염불을 했는데 그때 탑의 꼭대기에 앉은 불상이 스님을 따라 같이 돌았다고 한다. 이 터무니없는 듯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이다. 이렇게 지붕 돌이 둥근 탑은 전라남도 화순의 운주사에서도 볼 수 있고 석굴암의 뒷마당에도 이와 같은 둥근 탑이 있다.
상선암 마애여래대좌불
이 부처님의 높이는 5.2미터가 넘고 무릎의 끝에서 끝까지가 3.5미터나 되니 크기는 크다 또 이 부처님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까지의 부처는 모두 정면을 보거나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었지만 큰 바위에 기대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냉골 석조여래좌상
마치 성형수술이 잘못된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는데 시멘트로 발라 놓은 얼굴은 상상할 수 있는 여유마저 빼앗아 버려 아쉽기만 하다.
냉골 마애여래좌상
얼굴은 돋을 새김으로 나머지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했는데 부처님의 상호가 근엄하지도 위엄이 갖춰지지도 않아 소박미가 넘치며 친근한 느낌이 든다.
냉골 마애선각육존불
동쪽은 본존 석가여래상이며 가운데 여래는 연꽃 위에 서 있고, 양쪽에는 문수와 보현 두 협시보살도 서 있다. 서쪽은 아미타여래상이다. 여기에는 여래와 협시보살 모두 연꽃 위에 함께 있으나 여래는 서고 협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이 또한 드문 경우이다. 보살들이 서고 여래가 앉는 경우는 있으나 그 반대인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냉골 머리 없는 불상
마치 어제 묶은 듯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듭과 왼쪽 무릎 아래까지 드리워진 영총(纓總) 수실의 사실감은 천년의 세월을 견딘 것이라고 보기에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생생하기만 하다.
냉골 마애관음 보살상
머리 없는 불상에서 불과 50m쯤 왼쪽으로 고개 들어 보면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상이 따사로운 저녁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변한 채 멀리 눈길을 보내고 계신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설법인을 하고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머리에는 보관을 쓴 채 환희의 찬 미소를 보내고 계신 것이다.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부처골에는 남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을 부처님이 계신다. 흔히 감실 여래좌상이라고 하는 그것은 큰 바위에다 굴을 파듯이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따로 부처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아예 감실을 파 들어가면서 부조라 할 수도 그렇다고 입체라고 할 수도 없는 부처님을 새겨 놓았다. 참 특이한 기법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이 감실 부처를 대했을 때 그 상호만 보고 있으면 마치 부처가 아닌 듯도 했다. 수인이라고 하는 손 모양도 그렇고 말이다. 둥글둥글 그 원만한 얼굴은 부처님의 상호라고 하기보다는 여인네의 얼굴 같기도 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선생은 '마음씨 좋은 하숙집 아주머니'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를 본 많은 사람들 또한 그 넉넉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푸근한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하니 잘 들여다보기 바란다. 이 감실 부처님이 남산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것은 손 모양을 보고 알 수 있다. 익숙한 부처님의 손 모양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감실 부처님이 하고 있는 손 모양은 없다. 부처님은 대개 일정한 손 모양을 지니고 있는데 감실 부처님은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다. 이 낯 선 손 모양과 함께 앉아 있는 대좌 위로 흘러내린 옷자락 또한 눈 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대좌를 덮은 부처님의 옷자락은 6세기나 7세기 중국에서 유행했던 것이며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옛 백제의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 된 불상이 이와 같은 양식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6세기 후반에 만들어 진 것이라 하니 부처골 감실 안에 게신 부처님 또한 그 때쯤 만들어 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한다. 그렇게 보니 이 부처님이 남산에서 가장 오래 된, 처음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되는 것이다.
옥록암뒤 마애조상군, 탑골 부처바위
탑골에는 지금 옥룡암이라는 암자가 있고 그 뒤편에 다시없을 신라 사람들의 걸작인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 즉 높이가 9m에 가깝고 둘레가 30m에 가까운 사방 사불정토를 나타낸 부처바위가 있다. 그저 감탄일 따름이다. 숨은 그림 찾듯이 새벽부터 저녁까지 난 이 바위 앞에 앉아 혹은 서성이며 햇빛에 따라 그 모습을 보이기도 감추기도 하는 환상의 파노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감동적인 모습을 서너 차례 보고 난 다음, 내가 진행하는 답사 팀들에게 모두 그 이야기를 해 보지만 시간 많은 한량의 한갓진 생각이라는 눈총만 받을 뿐 선뜻 그렇게 하자는 팀들은 없었다. 아니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조차 없다. 나 또한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시간 많은, 하나라도 자세히 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은 새벽 6시30분부터 이 부처바위에 나가 있어 보라. 자연과 인간의 절묘한 조화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넋두리가 길었다. 사방 사불정토(四方 四佛淨土)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이 만들어 내는 불국(佛國)정토 라는 것이다. 정토란, 부처님의 세상이라는 뜻이다. 태양보다도 더 무한한 부처님의 빛이 고르게 비추는 곳, 그 곳이 바로 불국정토인 것이다. 태양 빛은 사물을 비추기는 하되 그것을 꿰뚫지는 못하지만 부처님의 빛은 능히 사물은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도 꿰뚫는다. 이런 빛이 비치는 곳이 바로 불국정토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동쪽에는 아촉여래라는 분이 다스리는 묘희국정토가 있고, 서쪽에는 아미타여래가 다스리는 극락정토가 있으며 남쪽에는 보생여래가 다스리는 환희국정토가 마지막으로 북쪽에는 미묘성여래가 다스리는 연화장엄국정토가 있으며, 이들의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진여(眞如)의 빛을 형상화 한 비로자나불 혹은 대일(大日)여래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부처바위 속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게신 셈이며 그 사방에다 각각 불국정토를 표현 해 놓은 것이다. 먼저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정토로 가 보자. 방위 개념으로는 동쪽이지만 정토의 개념으로는 서방 극락정토인 이곳은 부처바위의 네 면 중 가장 화려하다. 중앙에 본존불이 긴 옷자락을 대좌 밑으로 늘어뜨리고 머리에는 두광을 쓴 채 미소짓고 있으며 왼쪽 협시보살을 아예 머리를 본존불 쪽으로 향해 돌린 채 앉았다. 그 위로 여섯 명이나 되는 천녀들이 하늘을 날고 있으며 오른쪽 아래에는 본존불에게 공양드리는 스님이 사각형의 방석에 앉아 있다. 스님 위로 다시 천녀가 날고 있으며 왼쪽 끝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여겨지는 나무 아래에서 천년 동안 선정에 빠진 스님이 고요하게 앉아 있다.
선정에 든 스님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오르면 이젠 남쪽이다. 이 곳 또한 장관이다. 이 바위의 주지인 듯한 스님(혹은 나한)이 발길 닿는 아래에 숨은 듯 게시며 감실을 만들 듯 바위를 파고 삼존불을 모셨다. 이 삼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은 밝은 표정을 한 채 아예 머리를 갸우뚱하며 본존에게로 기댔다. 언뜻 보면 개구쟁이 보살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가 삼존불의 조성형식에서 본존이 앉으면 협시는 서는 것이 보통인데 이들은 모두 앉았다. 그런가 하면 그 왼쪽 아래로 다시 작은 감실을 파고 스님인지 부처인지 잘 알 수 없는 상이 새겨져 있다. 대좌도 없고 두광도 없으니 스님인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머리 위로 육계 같은 것이 솟아 있어 또 부처님인 듯 하기도 하다. 그 앞에는 여래입상이 서 있다. 상호는 깨어져 볼 수 없지만 두광이며 넓은 어깨에 잘룩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가 일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입상은 오랫동안 안산(安産)을 기원하는 여인들의 좋은 기도처였다. 그것은 입상의 손 모양이 언뜻 보아 촉지항마인 같기도 하지만 왼손을 배에 올리고 있어 안산불로써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가파른 고개를 내려간다. 미끌어 질 듯 하며 서너 발자국, 문득 고개를 돌리면 그 곳이 서쪽이다. 빛을 받지 못하는 편이라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 곳에도 분명 부처님은 계신다. 머리 위에는 끝이 뾰족한 보주형의 두광을 쓰고 반듯하게 연꽃 위에 앉아 계신다. 그 주위를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비천상이 하늘을 날고 있다.
그 아래로 내려서면 이제 북쪽 면이다. 지금껏 어디 하나 황홀하지 않은 곳 없었지만 북쪽엔 거대한 탑이 두기나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에 부처님이 앉으시고 머리 위에는 천개(天蓋)가 햇빛을 가리고 다시 그 위를 비천이 날고 있다. 앞에서 바위를 마주 보아서 왼쪽의 탑은 모두 9층이며 오른쪽 그 보다 낮은 7층탑이다. 이들은 모두 목탑을 형상화시킨 것이며 탑이 기단부 아래에 사자를 한 마리씩 두었다. 이 탑을 목탑이라 보는 이유는 지붕과 지붕 사이에 탑의 몸체 부분이 있는데 그 곳에 창이 두 개씩 나 있기 때문이다. 또 추녀 끝에 풍경을 매 달았는데 이는 풍탁이라고 하기도 한다. 본디 탑의 추녀에 모두 풍탁이 달려 있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쇠로 만든 그것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 현재 우리들이 볼 수 없을 뿐인 것이다. 부처님이 머리에 쓰고 계신 천개는 햇빛 가리개이다. 즉, 요즈음 양산 같은 셈이지만 예전에는 그것을 쓰고 안 쓰고의 차이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늠하기도 했다. 탑 아래에 있는 사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불교의 외호신장(外護神將)들 중 둘만 있는 것은 금강역사 뿐이다. 인왕상으로도 부르는 금강역사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과 입을 벌리고 있는 것으로 '아 금강역사'와 '훔 금강역사'로 나뉘는데 이 사자들을 봐라. 이들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왼쪽의 사자는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은 다물고 있으니 그들은 금강역사의 기능을 하고 있는 '아 사자'와 '훔 사자'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제 불국정토의 순례가 끝이 났다. 그렇다고 훌쩍 떠나진 마라. 삼층탑 있는 곳으로 올라 그 한적한 솔밭 그늘에 앉아 잠시 땀이라도 식힐 일이다. 땀이 식었으면 미륵골로 향하자.
부처바위 동면전경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부처님은 미소지으시고 머리 위로는 천녀들이 환희에 찬 얼굴로 날고 있다.
부처바위 동면 협시보살
아예 부처님 쪽으로 고개 돌려 앉은 협시보살. 손은 합장을 했으며 연꽃대좌 위에 앉았다. 그 뒤로 비천상 하나가 날고 있다.
부처바위 동면 공양 스님상
스님이 사각형의 방석 위에 앉아 본존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으며 동면 오른쪽 아래 부분에 있다.
부처바위 동면 비천상
공양 올리는 스님상 위에 있는 비천상이다. 가장 조각이 뛰어 난 dll 비천상을 포함해 동면에는 모두 여섯의 비천상이 날아다니고 있다.
부처바위 동면 선정에 든 스님
보리수나무 아래 묵묵히 앉아 천년의 세월을 수도하고 있는 스님 상이다. 동면의 가장 오른쪽에 있다.
부처바위 남면 삼존불
생김새가 재미있게 생겼다. 익살스럽기도 하고 개구쟁이 보살들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가운데 본존이 앉으면 협시들이 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들은 모두 앉았다.
부처바위 남면 주지스님
어떤 이는 나한상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이 부처바위의 주지스님일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 있을까. 비가 많이 오면 스님의 게신 곳까지 물이 차 오른다.
부처바위 남면 입체여래입상
상호는 깨져 알아 볼 수 없지만 잘룩한 허리와 큰 어깨 그리고 가슴이 일품이다. 왼 손에 배에 대고 있어 아이를 얻기 위한 여인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오른쪽 뒤에도 감실을 파고 스님을 새겼는데 자세히 보면 머리에 육계 같은 것이 있기도 하다.
부처바위 서면 여래좌상
서쪽은 부처바위 중 가장 볕이 들지 않는 곳이어서 늘 어두컴컴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도 부처님이 게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머리 위로 비천상이 날고 있으며 양쪽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부처바위 북면 전경
탑이다. 양쪽으로 9층탑과 7층탑을 새겼고 그 가운데 부처님을 모셨다. 부처님은 천개를 쓰고 계시고 그 위를 비천상이 날고 있다. 사진에 보이는 탑이 9층이어서 황룡사 탑을 새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탑의 기단부에 해당하는 곳에 사자를 새겼는데 금강역사와 마찬가지로 한쪽은 입을 벌리고 있고 한쪽은 입을 다물고 있다.
미륵골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
이제 만날 부처님은 남산에서 가장 잘 생긴 부처님이며 불상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이다. 마을에서 긴 대나무 밭 오르막길을 올라 절 집에 들어서면 마당이 정갈하다. 단아하게 꾸며진 절 마당을 가로질러 대웅전 왼편 언덕으로 오르다 문득 고개 들면 바로 그 곳에 이 잘 생긴 부처님이 미소짓고 계신다. 광배가 깨어진 것을 다시 붙여 놓은 것을 빼면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 완벽한 불상이다. 한 눈에 남자다움과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무한정으로 느껴지는 얼굴은 앙 다문 입술과 풍만한 양쪽 뺨 그리고 눈매가 절묘하게 만들어 낸 미소로 가득 차 있다.
그 미소는 오전에 가서 보는 것이 좋다. 10시에서 11시 사이, 그 미소는 절정이다. 해가 비치는 쪽에서 볼 때와 안 비치는 쪽에서 볼 때 그리고 정면과 옆에서 비스듬히 보는 것에 따라 미소는 달라지니 그 오묘함은 문화유산을 보는 사치일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보는 것, 돈 드는 일 아니고 시간만 맞추면 될 테니 그 사치 한번 만끽 해 보기 바란다.
우선 광배부터 보자.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상징화한 것으로 불상의 뒤쪽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늘 불꽃처럼 보이는 것은 불상을 만드는 기본 길상 32상 80종호의 규범에 15번째인 장광상(丈光相)의?한길이나 되는 빛이 비친다는 항목을 형상화한 것으로 부처님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장엄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또 그 끝으로 작은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화불(化佛)이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연꽃 대좌 위에 앉았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맑은 연꽃이 피어나는 정토이며 그 곳에 바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경주 땅 어디에서도 온전하게 남아 있는 광배를 잘 볼 수 없으므로 눈여겨보기 바란다. 또 광배의 뒤에는 약사여래불이 조성되어 있다. 마멸이 심하여 상호는 잘 알아차릴 수 없지만 왼손에 약합을 들고 있으므로 분명 약사 여래불이다. 다시 앞으로 가자. 잠시 틈을 주고 다시 보는 부처님은 무한한 안정감을 보여 준다. 지긋한 미소로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듬직하기 그지없다. 아마 틀림없이 산 내려가는 발걸음 지켜 주지 싶다.
주차장으로 내려서다가 오른쪽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 분 여, 바위에 새겨진 작은 마애불이 숨차 헉헉거리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니 내가 비키자 그이는 지금은 사라진 망덕사며 사천왕사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계셨던 듯 묵묵히 배반동 들녘을 바라보고 계신다. 급한 경사에 앞으로 기우뚱 기운 바위에 새겼으니 이 바위가 바로 부처님의 집인 듯하다.
삿갓골 석조여래입상
여래입상이라지만 지금은 모두 조각이 나 있는 상태다. 그것도 보존한답시고 시멘트로 단을 만들고 푹 박아 놓았으니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개의치 않으시는 모양이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무렵 석양빛을 받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없는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선방골 배리삼존불 협시
선방골 초입에 삼불사라는 작은 절이 있고 그 옆에 배리삼존불이라 불리는 삼존석불입상이 있다 지금은 전각 안에 가두어져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서 계시니 그 또한 안타까운 노릇이며 늘 그늘속에 있으니 상호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삼존불은 감실여래좌상과 마찬가지로 몇 안 되는 삼국시대 신라의 작품이어서 그 가치가 돋보이는 것이다. 어두움에 눈이 익으면 겨우 상호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얼굴이 기존 불상에서 느끼던 것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세련되거나 분명하지 않고 조금은 뭉툭하거나 인간적인 모습에 가깝게 원만한 것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은 앙련과 복련이 맞붙은 대좌에 서 있다. 아주 화려한 장식으로 목에는 세 줄의 목걸이를 걸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큰 꽃이 피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 보살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목에서부터 발등까지 늘어뜨린 굵은 영락이다 이러한 양식은 6세기나 7세기 초 중국의 수나라 시대 보살상 장식과 같은 것이라 하니 그 시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셈이다.
윤을곡 마애삼존불
윤을골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포석정에서 십여 분 오른 곳에 있다. 바위 면 한쪽엔 약사와 석가여래를, 다른 한쪽인 남면엔 보생여래를 모셨다. 남산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며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석가와 약사여래 사이에 명문이 있다는 것이다. 명문이 있는 것은 용장사 터 마애석가여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것은 판독이 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윤을곡의 명문은 판독이 되어 이 마애불이 태화을묘 9년(太和乙卯), 즉 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새겨진 것임을 알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마애불은 남산 전체에서 유일하게 조성연도가 밝혀진 것이다.
*마애불*
- 바위에 새겨 놓은 옛사람들의 마음-
마애(磨崖)란 말은 돌출 되거나 노출된 자연 그대로의 바위 면에 선(線) 새김이나 면(面) 새김 혹은 돋을(浮彫) 새김 기법으로 바위를 파서 무엇을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니 선사시대 암각화나 삼국시대에 시작해 통일신라시대에 꽃을 피워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불교 관련 조각들이 모두 이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이 흔히 볼 수 마애 조각으로는 불교 관련 유적과 사람의 이름이나 시를 새겨 놓은 것들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불교와 유교 중심의 문화 속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바위에 새겨 놓은 불상들은 그것을 새긴 지역이나 조성시대의 사회사나 미술사 연구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위에 새겨 놓은 것들은 재산개념으로 보아 쉽게 움직일 수 없는 크기를 지니고 있는 부동산에 속하는 붙박이의 개념을 지닌다.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불상의 경우는 재산개념으로는 동산이라 볼 수 있어 마땅히 지금 있는 자리가 꼭 그것이 만들어진 지역이라는 점을 담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애불은 이리저리 옮겨 다닌 적이 없으니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에서 지역조사를 펼칠 때 찾아다니는 그 지역에 터 잡고 살아 온 토박이와 같은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토박이들은 그 지역의 말에서부터 음식이나 가옥 혹은 전래되어 오는 민간신앙 같은 모든 습속을 그대로 계승하며 사는 사람들이기에 그 지역의 자연 지리적 조건과 의식주에 관한 모든 것 그리고 사회적 특성과 종교적 성향을 고스란히 담보하고 있는 문화적으로 아주 귀중한 존재임에 틀림없으며 마애불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또한 마애불은 일반적인 불상들과는 달리 선이나 면 그리고 돋을 새김으로 이루어져 있거나 이러한 다양한 조각수법들이 하나의 불상에 혼합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선이나 면이라는 것은 미술에서 그리는 행위인 회화의 기법을 닮아 있는가 하면 새긴다는 점에서는 조각의 기법을 담고 있어 한 시대의 회화와 조각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로 보면 마애불 하나가 담보하고 있는 것이 조성 당시의 사회상이나 종교적 성향에서부터 예술성까지를 모두 아우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마애불이 새겨지기 시작한 것은 부처가 열반(涅槃)에 들고 난 다음인 서기전 2~3세기경에 인도의 아잔타나 엘로라 석굴사원의 바깥벽이나 입구의 기둥 같은 곳에 새겨진 것이 그 처음이며 그 후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중국의 운강이나 용문 그리고 널리 알려진 돈황 석굴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 마애불이 처음 조성된 것은 서기 600년을 전 후한 시기로 중국 산동반도와 가까운 서해의 태안반도 지역에서이다. 태안에 있는 마애삼존불(보물432호)과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 마애삼존불(국보84호)이 그 처음일 것이며 이들과 근거리에 있는 예산 화전리의 사면석불(보물794호)과 같은 이들 백제시대의 마애불들은 모두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바다 길을 통해 산동반도의 운문산 석굴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해 준다.
또한 인도와 중국에서는 석굴을 중심으로 마애불이 성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석굴보다는 자연 속에 노출되어 있는 바위 면에 마애불을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양질의 화강암들이 산재해 있는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껏 천년 전에 새긴 마애불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당시의 솜씨가 탁월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새겨질 수 있었던 밑바탕인 단단한 화강암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앞 서 말했거니와 마애불은 어디에서 어디로 옮겨 질 수 없는 부동산의 개념이어서 한 시대의 미술사나 사회사를 포함한 종교적 성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없으며, 폐쇄성을 지니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보일 수 있는 개방적인 자세를 지닌 것들이어서 더욱 친근한 듯 하니 어디 길 가다가 바위에 그윽하게 새겨진 마애불 만나면 친근한 눈빛과 따뜻한 마음 한번 베풀고 가기 바란다.
첫댓글 남산을 가지 못한것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