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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netian.com/~mari9797/index-2/ma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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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 그리고 위 사진을 바탕으로 밑그림을
▽ 완성된 걸개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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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님 멋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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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ood.donga.com/docs/magazine/woman_donga/200101/people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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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갯벌에 70여개의
장승과 솟대 설치한 80년대를 대표하는 현장미술가
최병수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
등 19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80년대뜨거운 변혁의 현장에서 민중미술과 조우, 현장미술가로 변신한 최병수씨. 두해 전 전북 부안읍 하서면으로
터를 옮긴 그는 요즘 한창 갯벌 위로
작품을 설치하기에 여념이 없다.
갯벌 위로 장대하게 펼쳐진 70여개의
장승과 솟대들은 분단과 독재를 넘어,
이제 환경문제와 정면 대치한 최씨의 말없는 싸움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거리를 가득 메운 6·10 항쟁의 함성과 함께 기억되는 한편의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그 걸개그림을 그린 화가 최병수씨(42)는 요즘 갯벌을 헤치고 다닌다.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해창(새만금)갯벌이 그에겐 ‘오늘의 항쟁현장’이다.
최씨는 지난해 초 경기도 일산의 작업장을 걷고 아예 새만금이 있는 전북 부안읍 하서면 평지마을로 옮겼다.
그를 만나기 위해 부안으로 가던 취재일행은 작업실이 있는 ‘하서면’ 이정표를 그냥 지나쳤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바다를 먼저 보자’는 계산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를 밀쳐두고 온 바다에 놀랍게도 그가 있었다.
70여개의 장승과 망둥어, 갯지렁이, 꽃게를 올려 최씨가 만든 솟대들이 그 바다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첫눈이 내리는 바다’도 감동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지체할 수는 없었다.
바다를 머리에 올린 솟대들을 보자 그가 더 빨리 보고 싶어졌다.
붓과 망치를 들고 우리 사회의 병든 곳을 찾아다니던 최병수씨.
그는 지난해 3월 새만금 갯벌 지키기 운동을 벌여온 환경단체가 ‘간척사업 반대 장승제’를 해창 갯벌에서 벌이자는 제안을 하자 주저없이 이곳에 내려왔다.
그리고 그 뜻에 동참하는 이들과 함께 70여개의 장승과 솟대를 갯벌 위에 세웠다.
장승제는 많은 관심 속에 치러졌다.
행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떠나고 그는 장승들과 함께 새만금에 남았다.
간척사업으로 문을 닫게 된 김 공장을 작업실로 제공해 주겠다는 이가 있어 아예 갯벌
곁에 살기로 한 것이다.
굳이 ‘왜 여기 남았느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10대 초반에 가출해 19가지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막노동을 했던 그가 현장미술가로
변신한 후 우리에게 보여준 작품들의 면면이 그 이유를 충분히 말해주기 때문이다.
붓과 망치를 들고 우리 사회의 병든 곳을 찾아다니다
최씨에게 어린 시절은 ‘고독의 시간’이었다.
서울 상도동이 고향인 그는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많은 형제들.
집이 싫었다.
목조건물이 정겨웠던 학교가 어느날 시멘트덩이로 변하자 학교에도 정이 뚝 떨어졌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대신 산에 올라갔다.
계곡 옆 바위에 누워 하늘 보고, 나무 보고, 그래도 심심하면 양말을 빨아 나뭇가지 위에 널어놓고 물에 발을 담갔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고 자유로웠다.
학교에 가지 않고 산을 뱅뱅 돌았던 소년은 잦은 결석으로 초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한광산업전수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학교가 답답해졌다.
학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역정을 피할 길이 없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집과 학교를 동시에 나오는 것.
가출 이후 그는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 보일러공, 목수 등의 일을 하면서 살았다.
숨죽인 채 오직 먹고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조각을 좋아해 선생님의 분필로 조각하곤 했던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조각도로 뭔가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현장미술가란 직업은 필연 같은 우연으로 찾아왔다.
어린 시절 커서 만화가가 되자는 꿈을 같이 키우던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중 한 친구는 홍익대 미대에 진학했다.
목수로 일을 하던 시절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생들이 자비를 들여 통일의 의미를 담은 벽화를 신촌에서 제작하는데 와서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벽화를 그리는데 사용할 사다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단지 친구를 돕기 위해 사다리를 짰다.
하지만 고생해서 그려진 벽화는 경찰당국에 의해 지워졌다.
친구는 다시 정릉에 벽화를 그리기로 했다.
달라진 현장에 맞는 사다리가 또 필요했다.
벽화의 높이가 이전에 비해 낮았기 때문에 사다리는 빨리 만들어졌다.
시간이 남았다.
일을 끝내고 어슬렁거리던 그에게 친구가 벽화를 한번 그려보라고 제안했다.
초등학교때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린 이후 처음이었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낯설었지만 즐거웠다.
<상생도>란 제목의 벽화를 완성하기 위해 학생들은 걷혀진 철조망과 진달래꽃을 그려가고 있었다.
‘봄이면 개나리도 피는데…’하면서 그는 개나리꽃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벽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벽화팀은 경찰에 연행됐다.
그곳에서 그는 이념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현실을
알게 되고 ‘우리 사회’를 정면으로 보게 된다.
가출 이후 전전한 밑바닥 생활
그려진 진달래꽃의 숫자는 죽어간 열사의 숫자와 같은 것 아니냐? 아래쪽 풀은 전경들의 옷 색깔인 것을 보니 전경들 아니냐? 밑그림이라 까무잡잡한 인물을 보곤 왜 검둥이를 그렸느냐? 왜 농민을 헐벗고 굶주린 모습으로 그렸느냐? 태극에서 청색보다 적색이 큰데 그것은 적화통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 신문도 보지 않고 살았던 그의
그림을 두고 만든 아전인수격의 이런 질문들은 기막힌 ‘희극’이었다.
그는 다른 학생보다 더 심한 추궁을 받았다.
노동현장에 대학생이 하나 있으면 위장취업으로 의심받듯 대학생들 틈에 끼여있는 노동자에게 경찰은 색안경을 쓰고 달라붙었다.
하지만 털어 봤자였다.
나올 것 없는 노동자일뿐이었다.
경찰도 조사 후 조서를 쓰자니 난감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싫다는 그에게 우김질해 직업란에 ‘화가’라고 써넣었다.
그래서 지인들은 그에게 지금도 ‘관제 화가’라는 우스갯말을 건네곤 한다.
그 경험은 어쨌든 그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예술을 통해 발언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도대체 뭐가 잘못돼서 이럴까.
공부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월간 <말>지 등 진보적 잡지와 <전태일 평전>과 같은 책을 열심히 들여다봤다.
세상을 들추니 악취가 났다.
자신이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고생했던 이유도 보이는 듯 싶었다.
분단과 독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가슴을 쳤다.
열심히 못질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순과 싸우기 위해서 직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보적 미술운동을 하는 민족미술협의회 벽화분과에서 일을 시작했다.
삶의 현장을 관통해 왔기 때문에 전시장미술보다는 현장미술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이한열 사건’이 터졌다.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이한열군을 친구가 부축하고 있는 보도사진을 신문에서 본 그는 피가 끓었다.
스크랩한 그 사진을 고무판화에 새겨 찍었다.
그 그림은 저항하는 이들의 가슴에 부착됐고 10×7.
5m의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다시 제작됐다.
지금은 국립 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이 걸개그림은 80년대 미술운동을 상징하는
걸개그림의 대표작이 된다.
한국의 걸개그림을 소개한 브리태니커 사전 역시 최병수란 이름 석자와 그의 걸개그림들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가 제작한 <메이데이 투쟁도> <장산곶매> <백두산> 등 걸개그림은 대규모집회와 행사현장에서 우리들의 눈과 가슴을 타오르게 했다.
그의 걸개그림들은 그 시대의 저항적 상징을 뚜렷하게 압축해내는 힘을 가졌던 것이다.
긴박한 80년대의 상황 속에서 피어난 ‘걸개 그림들’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체계적 교육이나 오랜 창작의 역사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닌 그의 그림이 뜨겁고 진솔하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궁금했다.
소설가 전성태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그림은 ‘음악의 피날레처럼 가장 고양된 부분을 포착하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집회가 있을 때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마치 선지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밑바닥 삶의 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와 세상 일의 거친 모서리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삶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건가요?” 그저 짐작으로 묻는
말을 크게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는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무엇인가가 예민한 시대를 만나 한꺼번에 분출됐던 것 같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가출해 밑바닥을 전전하는 동안 그는 특별히 무엇을 꿈꾸지는 않았다.
열심히 일했고 남들처럼 돈 벌어서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문득 가슴을 치밀고 뭔가 뜨거운 것이 올라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말아 넣고 쥔 주먹을 보면서 ‘네 손으로 어딘가를 치면 네
손이 부서져’하며 가슴을 진정시키곤 했다.
하지만 현장미술가가 되면서 그는 엄지손가락을 밖으로 빼 쥐고 세상의 문제점들을
향해 주먹을 힘껏 날렸다.
자신도 놀랄 정도의 무서운 힘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한열의 죽음 등으로 이어진 긴박한 시대상황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섭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만 골몰했다.
문제를 생각하고 구상하고 그린 후 사람들의 눈앞에 걸었다.
그리는 것만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었다.
‘거는 것’ 역시 중요한 작업이었다.
미술평론가 박찬국씨는 한 평론에서 “그의 노동자로서의 면모는 예술가로서의 면모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동행한다”고 언급했다.
“깃발이나 만장은 어떻게 부착해야 하는가.
걸개그림의 바탕칠은 어떻게 하고, 사변의 마무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걸어야
찢어지지 않으며, 어떤 천을 어디서 구입하고 하는 등등, 그의 노동자로서의 경험과
노동자로서의 치밀함이 없고서는 사실 화가로서의 최병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최씨 자신도 노동자로서 자신의 경험이 현장미술가가 갖춰야 할 많은 미덕을 갖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 데뷔했을 때부터 “왜 노동자를 그리지 않지?”라고 물으면 난감했다.
노동문제 역시 분단과 독재의 모순과 별개이지 않건만.
사실 화가들이 그린 노동자의 모습에 불만이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고통에 일그러진 스테레오 타입의 노동자를 그렸고 최씨가 보기에
그것은 극히 피상적인 접근이었다.
메이데이 1백주년을 맞아 그가 그린 걸개그림 <메이데이 투쟁도> 역시 노동자를 그리기 위해서라기보다 시대적 모순을 깨는 ‘변혁의 힘’을 시의에 맞게 표현한 것이다.
그는 항상 시대의 모순에 ‘결정타’를 날리고 싶어했고 ‘결정타’를 날려왔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전략적으로 크기나 메시지에서 사람들을 압도해왔다.
시애틀행 비행기에 동승한 A씨와 올해 초부터 열애설 나돌아
전세계 언론도 주목한 그의 ‘환경 설치물’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도 그런 맥락에서 비롯됐다.
“88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을 지켜보면서 참 안타까웠지요.
노동현장을 들여다보니 임금투쟁보다 더 절실한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환경의 개선이었어요."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기 위해 노동자들의 생명을 볼모 삼는 상황에 분노가 일었던 것이다.
환경문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우선 그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쉼 없이 고민하는 것이 최병수다.
그런 다음에야 그림이 나왔다.
반독재투쟁의 현장에서 그의 걸개그림이 힘을 발휘했듯이 ‘환경’을 생각하는 자리에서도 그의 작품은 사람들을 움직였다.
90년 공해추방운동연합이 주최한 ‘지구의 날’ 행사장에서 처음 소개된 그의 <쓰레기들>(10×7m)은 92년 브라질 리우 지구촌환경정상회담 당시 행사장 앞에 걸려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97년 교토 기후변화 당사국회의장 앞에 그는 얼음조각 <펭귄이 녹고 있다>를 세웠다.
녹고 있는 펭귄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구온난화로 녹고 있는 남극을 실감하고 몸서리쳤다.
또 한번 전세계 언론이 그의 작품을 사진에 담아 보도했다.
9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환경회의에서는 <지구반지>와 <문명의
끝>이라는 작품을 걸어 환경메시지를 전달했다.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구라는 건강한 삶터를 파괴하고
있는 반환경적 자본주의 그리고 끝없는 인간의 욕망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끓었다.
핵무기가 가져올 무서운 재앙을 표현한 <성장한 야만>시리즈, 우주의 보석인 푸른 지구를 형상화한 <지구반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재킷에 그려진 눈부신 해에 방독면을 씌운 비극적인 <해> 등 수많은 작품들은 지구의 위기를 통째로 드러내야 한다는 현장미술가 최씨의 긴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새만금에 오기 전 머물렀던 일산에서 그는 ‘꿩 먹고 알 먹으면 멸종이다’라는 주제로 어린이 환경캠프를 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생명과 희망을 가르치는 일 또한 그에게 소중했다.
틀에 짜인 교육이 싫었던 그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아이들에게 <콩 심은데 콩 난다>라는 작품을 보여줬다.
화분에 심어진 분단의 철사줄 위에 피어난 것은 꽃이 아니라 수류탄이라는 것을 말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음을 화분에 심게 했다.
에디슨처럼 과학자가 되고픈 아이는 ‘전구’를, 반듯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살고 싶은 아이는 ‘자’를 화분에 심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대화가 깊어가던 차에 갯벌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새만금으로 달려온 것이다.
“새만금의 갯벌은 전북 갯벌의 90%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곳을 간척해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어림없다는 이야기다.
갯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야 했다.
새만금 갯벌 위에 ‘바다대장군’ ‘갯벌여장군’이 눈을 부릅떴고 망둥어 솟대, 꽃게 솟대가 아우성쳤으며 어촌의 신음을 실은 ‘새만금호’가 떴다.
그렇게 ‘장승제’를 지낸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단 ‘새만금’이 사랑을 얻는 것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최씨는 벌써 두 번째 장승제를 준비한다.
이번엔 민중을 구원하는 전설 속의 이심이를 갯벌 위에 올리고 더 많은 사람들을 불러내기 위한 전략을 짤 것이다.
멀리 새만금을 앞에 두고 있는 작업실과 그가 눈을 붙이곤 하는 작은 방.
잔뜩 벼르고 있는, 다음 싸움을 위한 고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싸움’을 작정한 현장미술가의 것답게 그것들은 긴박하고 장황했다. 작업실 앞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밑 빠진 항아리들. 마을 여기저기서 옮겨온 이 항아리들로 그는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부어도 끝이 없는 ‘1백8개의 욕망’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레게음악의 창시자인 밥 말리의 포스터가 이색적으로 눈을 끄는 방에는 두 번째의 장승제를 위한 스케치와 세계환경회의에서 세계 각국의 환경론자들과 펼치게 될
대규모 이벤트 도면, 그리고 앞으로 그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싣고 있는 신문, 잡지들이 장황하게 널려 있다. 그 속에서 그는 혼자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삶이 외로워
보이겠지만 사실 별로 외로울 틈도 없다면서 웃는다.
■ 글·이서영<프로덕션 엔터닷컴 기자>
■ 사진·형민우<프로덕션 엔터닷컴 기자>
■ 기사 입력시간 : 20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