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술)와 생산력의 수호신
디오니소스/바쿠스
사실 올림포스 신들 가운데 디오니소스의 위치가
가장 애매하다. 우선 그의 성격을 규정할 때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술)의 신이며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며 술에 취하게 하는 힘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술이 가지고 있는 사교적이며 자선적인 힘과 그것을 내포하는 세력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생설화
디오니소스에 관한 신화 대부분은 그리스 본토가 아닌 외래의 도취적 신앙이 그리스 지배계급의 전통적인 올림포스 신앙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시사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아코스(데메테르와 엘레우시스 밀교와 관계가 있는 신)와 동일시되기도 하는, 상당히 복잡한 성격을 띄고 있다.
즉 디오니소스의 탄생설화는 다른 신들에 비해서 복잡하다는 말이다. 우선 그의 어머니인 세멜레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의 딸 하르모니아였으며 아버지는 테바이를 건설한 카드모스였는데 신화에서 인간이 여신과 결혼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들로부터 아름다운 세멜레가 태어났다.
타고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세멜레는 성숙한 처녀가 되자 많은 남신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는데, 특히 여성전문위원장(?)인 제우스도 손녀 뻘인 세멜레를 탐하게 되었다. 어느 날 헤라 몰래 기회를 엿보던 제우스가 세멜레의 방으로 침투하여 떳떳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달콤한 밤을 즐겼고 그의 사랑을 받은 세멜레는 곧 임신하였는데, 그 아이가 이번 장의 주인공 '디오니소스', 라틴명으로 '바쿠스'이다(그림: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
그녀와의 관계를 아내 헤라가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제우스는 마음놓고 세멜레의 방을 들락거렸지만 헤라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헤라는 질투심에 불타서 세멜레를 죽일 음모를 꾸몄는데 이번에는 제우스가 직접 세멜레를 죽이도록 한다는 고도의 음모를 꾸몄다. 제우스가 처음 세멜레를 유혹할 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면서 세멜레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음을 알고 있었던 헤라는 그것을 역이용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헤라는 세멜레의 늙은 유모 베로에로 변신한 다음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에는 그렇지만 모두 아가씨를 위해서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보시오. 아가씨의 애인이 진정 제우스라면 단 한번이라도 천상에서 온 우주를 호령하는 위엄있는 모습으로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아가씨를 방문해야 하는데, 언제나 간편한 캐주얼 차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백수건달이 위대한 제우스를 사칭하면서 아가씨의 신세를 망쳐 놓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랴!"
이 말을 들은 세멜레, 갑자기 의심이 들었다.
"엄머, 만약 유모의 말대로 백수가 사기를 친 거면 이 일을 어쩌죠?"
세멜레의 유모로 변신한 헤라는 쾌재를 부르며 이렇게 의심을 부추겼다.
"만사를 그르치기 않기 위해서는 조심하는 마음과 확인이 필요해요, 아가씨! 신분을 분명히 확인해보세요. 애인이 찾아오면 본래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하세요."
세멜레 그녀 역시 그동안 '혹시나'하는 의심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모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분명히 정체를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곧 그의 아이를 낳아 줄 몸으로서 적어도 아이에게 '네 어버지는 이러저러한 분이시다'는 말은 제대로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세멜레는 자신을 찾아온 제우스에게 그저 하나의 소원이 있으니 들어달라고 졸라댔다. 제우스가 스틱스 강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하면서 뜸을 들이지 말고 속시원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세멜레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당신의 아이를 낳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헤라께 항상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나에게도 천상의 휘황찬란한 광채를 보여 달라'고 졸랐다.
이 말을 들은 제우스는 그녀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한번 약속한 이상 어길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 그 말을 취소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런 말하지마! 다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약속은 약속 아닌가! 그러나 어찌 신의 광채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세멜레를 달래보았으나 이미 그녀의 마음은 '정체미확인이면 관계단절불사'(正體未確認 關係斷切不辭)로 굳어져 있었다.
제우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세멜레의 집을 날아올라 천상으로 올라가서 정장차림을 하였다. 주신(主神)으로서의 화려함을 기본으로 휘황찬란한 천상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주신의 공식행차처럼 번개와 천둥으로 둘러싸인 전차를 몰고 나타나자. 세멜레는 신의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우스의 전차에서 나오는 벼락에 맞아 재가 되고 말았다(그림: 제우스의 빛을 당해내지 못하고 재가 되는 세멜레).
그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육 개월 정도 자란 태아를 불에 타지 않도록 보호하였고 제우스는 그 사이에 세멜레의 몸에서 태아를 구출하여 자신의 허벅지에 넣었다. 그로부터 달이 차서 아이가 아버지의 허벅지를 뚫고 나왔는데 그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이다.
제우스는 모든 것이 헤라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고, 갓 태어난 디오니소스가 걱정되어 세멜레의 언니인 '이노'와 그녀의 남편 '아타마스'에게 맡겨 헤라가 눈치채지 않도록 여자아이처럼 키우라고 지시하였으나 헤라의 정보력도 결코 어리숙하지 않았다. 결국 이노와 아타마스를 비롯한 일가족이 모두 헤라의 복수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에 놀란 제우스는 디오니소스를 산양의 새끼로 변신시켜 헤르메스로 하여금 멀리 소아시아의 '뉘사 산'의 님프들에게 맡기도록 명령하였다(일설에 의하면 '이노'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헤르메스가 에우보이아의 아리스타이오스의 딸이며 님프인 마쿠리스에게 데리고 갔다는 설도 있음).
헤라의 박해는 디오니소스가 성장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디오니소스가 미쳐버린 것이다. 미친 디오니소스가 이집트와 시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황하였는데 그가 소아시아의 프리기아에 이르자, 제우스와 헤라의 어머니인 레아가 미친 병을 고쳐 주고 나중에 디오니소스의 축제 때 행하여질 종교의식을 가르쳐 주면서 축제에서는 디오니소스와 그의 신도들은 새끼 사슴의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일러두었다(그림: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온 디오니소스는 멀리 인도까지 여행하면서 포도를 발견하고 그 재배법과 즙을 짜내어 술을 담그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면서 자신에 대한 신앙을 전파하였다. 그때 한 무리의 추종자들이 디오니소스를 따랐는데, 그를 길러준 뉘사 산의 요정들과 판 신을 비롯하여 사티로스, 세일레노스, 광신집단인 마이나데스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