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화
[李願華, 1884~1964]
본명은 봉순(奉順). 법호는 사타원(四陀圓). 법훈은 대봉도. 여자 전무출신 제1호. 소태산대종사가 대각하기 전 구도의 뒷바라지에 힘썼다. 1884년 10월 3일 전남 영산포에서 부친 이씨와 모친 김시심화(金是心華)의 무남독녀로 출생했으며, 문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천성이 어질고 활발하여 사람들과 잘 화(和)했다. 어려운 전반생을 살다가 소태산을 곁에서 시봉하는 인연이 되었다.
소태산의 대각 후에는 제자로서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조력했으며, 영산원 안살림의 주인이 되어 모든 노고를 다했다. 이후 영산교당에서 감원ㆍ순교의 직으로 40여년간 봉직했다. 《대종경》 변의품 2장에 등장하는 이원화는 소태산으로부터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받았다. 1964년(원기49) 2월 17일 세수 81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으며, 1988년(원기73) 수위단회에서는 법훈을 대봉도로 추서했다.
* 소태산의 여성 첫 제자, 바랭이네
소태산이 교단을 창시했던 1900년대 초는 남성성이 가치로 인정되는 시대였다. 여자는 자연히 억압과 규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소태산은 과거 시대와 미래 시대를 밤과 낮에 비유하며 다가올 양의 시대는 과거의 모든 불합리와 차별제도가 그 빛을 잃게 되며 도덕이 크게 드러난다고 했다.
소태산의 여성 첫 제자, 여자전무출신 1호 사타원 이원화 선진의 삶에 대해 지난 2월3일 발표자로 나선 원불교환경연대 이태은 교도는 소태산을 '페미니스트'라고 평했다. 모든 존재는 존엄하며, 성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관에 바탕한 소태산의 남녀차별에 대한 인식은 21세기 여성의 눈으로 보아도 가히 놀랍다"며 "원기16년에 발간된 <보경육대요령>에 나타난 남녀권리동일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소태산은 페미니스트이다. 페미니스트 소태산은 여성제자들을 '평등'이라는 기준으로 초기교단시절 거침없는 교화동력으로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그러면 과연 페미니스트 소태산이 바라본 사타원 선진은 어떤 제자였을까. 사타원 선진은 어릴 적부터 이름 없이 사람들에게 '바랭이네'로 불렸다. 9세에 영광 김진사의 수양딸로 키워져, 17세 되던 해 장성사람 문재환과 결혼했지만 23살 되던 해 남편을 병사로 잃게 된다. 이후 대장간을 하는 박판동씨와 살며 둘째아이를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또 홀로된다.
당시 바랭이네의 상황에 대해 이 교도는 "애비가 다른 두 아이를 둔 과부 바랭이네는 망해가는 조선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말한다. 바랭이네에게 그나마 실낱같은 끄나풀이 되어준 것은 수양어머니의 오빠 김성서였다. 김성서는 소태산의 부친인 박성삼과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그는 "김성서가 친구 박성삼이 죽고 아들 처화(후일 소태산)가 마음을 잡지 못하자 덕성 있고 음식솜씨 좋은 질녀 바랭이네를 소개해 읍내 부자의 채무를 갚을 주막을 차리게 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난데없이 차려진 주막은 길룡리 앞길을 오가는 이들의 사랑방이 됐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바랭이네는 음식솜씨도 좋고 후덕하여 손님들이 꽤 북적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주막에는 도무지 남는 게 없었다. 셈을 맡아야할 주인양반 박처화가 그때부터 귀영바위 굴에 들어가면 한나절도 좋고 시도 때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다 읍내 부자의 성화에 못 이겨 처화는 채무 청산을 위한 탈이파시를 떠난다.
그는 "이때 동승한 사람 중에 여자는 오직 바랭이네 뿐이었다"며 "바랭이네가 성자를 알아보기 시작한 때도 이쯤이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질곡의 삶을 살아온 바랭이네 눈에 비친 성자의 면모는 어땠을까. 이에 그는 "뜻 모를 말이나 불쑥불쑥 내놓고 귀영바위 터에 자리 잡고 앉으면 돌부처가 되어버리는 남정네에게 쏟아질 것은 욕바가지에 원망투성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기록에도 바랭이네의 성난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다"고 전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처화가 '이 일을 어찌할꼬?'하며 고통스런 수행을 이어갈 때다. 그 고통스런 수행자의 곁을 지키는 것도 바랭이네 몫이었다. 이 시기에 대해 그는 "구도자의 마지막 관문을 넘어서기 위한 외로운 구도의 길을 묵묵히 지키며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바랭이네를 평가했다. 그리고 병진년 음력 3월 스무엿새 날, 바랭이네는 대종사의 대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빠르게 보았다. "그래서 소태산의 여성 첫 제자 바랭이는 결국 '성자의 첫 제자'여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소태산은 "원화는 숙세의 선연이 심중할 뿐 아니라,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회상의 발전에 따라 무량한 복록의 주인이 될 것이다"고 칭찬했다. 그는 "대종사가 아무런 바람 없이 공도에 헌신한 사타원 이원화에게 주는 스승의 가장 큰 상이었다"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사타원 이원화 종사의 삶을 그리며 그는 "재가로 출가로, 동행자로, 조력자로 너른 생을 깊이 살았던 바랭이네가 21세기에도 수없이 나왔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 전무출신 1호, 영산의 어머니
원불교 전무출신 1호를 묻는다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뭐래도 소태산 대종사 대각 전후로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던 사타원 이원화 종사가 아닐까 싶다. 당시만 해도 사타원 종사는 길룡리 사람들에게는 이렇다할만한 이름조차 없는 무명 여인으로 아들 아명인 ‘바랭이’를 따 바랭이네로 불려졌다. 뽑아도 뽑아도 금세 온 밭을 다시 뒤덮고 만다는 바랭이풀,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했으면 사막화가 진행되는 몽골에 바랭이풀을 심자는 제안이 다 있었을까? 사타원 종사가 살아온 일생을 이렇게 잘 대변하는 호칭이 또 있을까 싶다.
우여곡절 많던 험난한 일생
법훈록에 따르면 사타원 이원화 종사는 본디 전남 나주 영산포 출신으로, 어느 해 엿을 사준다는 낯선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섰다가 영광 김진사 댁 부엌데기로 팔렸다. 하지만 사타원 종사가 미천한 집의 아이가 아니란 것을 짐작한 김진사는 그를 수양딸로 삼아 자식처럼 길렀으며, 17세 되던 해에는 장성 사람 문재환과 혼인까지 시켰다. 사타원 종사는 그와의 슬하에 아들(바랭이)을 두고 다복한 가정을 이뤘으나 23살 되던 해에 남편과 사별하고 홀몸이 됐다. 이후 주위의 주선으로 얼마 있다가 대장장이 박 모씨에게 재가하여 둘째를 낳았으나 오래지 않아 결별하고 다시 혼자가 됐다.
마침 길룡리 용암에 살던 사타원 종사의 외삼촌 김성서가 불운한 생질녀의 살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심하다가 친구의 아들인 소태산 대종사와 연결을 시켰다. 김성서는 소태산 대종사의 부친 박성삼 공과 막역한 사이로, 박성삼 공이 갑작스레 열반한 뒤 소태산 대종사가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알고 도울 길을 찾다가, 후덕하고 음식 솜씨 좋은 사타원 종사와 풍채 크고 인물 좋은 소태산 대종사가 함께 주막을 한다면 서로 살길을 여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마침 두 사람 모두 살길이 막연했으므로 일은 이내 성사됐다.
소태산 대종사와의 인연
소태산 대종사와 사타원 종사는 김성서의 주선으로 귀영바위 앞 길가 ‘흙구덩이터’에 오두막을 얻고 김성서에게 양식 몇 말을 얻어서 주막을 차렸다. 이 길목을 통해 법성포로 나가는 숯포며 장작다발, 연초 등짐을 지고 나루터로 가는 행인이 많았으므로 주막은 늘 손님이 끓었다. 그러나 주막은 앞으로는 이문이 남는 것처럼 보였으나 뒤로는 늘 밑지고 손해보는 장사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틈만 나면 주막을 모두 맡기고 귀영바위에 들어가 입정 돈망에 빠지기 일쑤였고, 사타원 종사 또한 인심 후하고 사람만 좋았지 그다지 셈이 밝지 않았던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막은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주막이 별 이문 없이 문을 닫자 빚 독촉은 한결 심해졌고 소태산 대종사는 이웃마을 사람 이순순 종사의 제안으로 사타원 종사와 함께 탈이섬 민어파시에 나섰다. 소태산 대종사는 탈이섬 민어파시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얻었고 마침내 부친이 남긴 채무를 모두 청산할 수 있었다. 사타원 종사는 파시 후에도 소태산 대종사의 곁을 떠나지 않고 5년 간 함께 노루목 대각터에 머물며 시봉의 도를 다했다. 하지만 사타원 종사의 노루목 생활은 그야말로 간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일체 생활을 돌보지 않고 수시로 입정돈망에 들었으므로 살길이 막연했다.
하지만 사타원 종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의 밭을 매주고 양식을 얻어 끼니를 연명하며, 그나마도 일이 없을 땐 굶고 지내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감수하며 거의 폐인과도 같던 소태산 대종사를 지켰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타원 종사는 노루목 샘터에 정화수를 올려놓고 ‘우리 처사양반 발복하여 고을 원님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쉬지 않았는데, 하루는 소태산 대종사가 그 모습을 보고 ‘기왕이면 만국만민 구제하고 일체생령 제도하는 성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주문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 후 한결같은 신성으로 함께한 사타원 종사에게 원화(願華)라는 법명을 주고 첫 여성 제자로 받아들였다.
자비덕화 무아봉공의 삶
소태산 대종사는 사타원 종사를 늘 든든한 응원군으로 여겼다. 원기3년 봄 대종사가 방언공사를 시작하자 그는 방언관리소로 운영되던 강변주막으로 이사를 해 과거 주막을 운영하던 경험을 십분 살려 일꾼들 뒷바라지에 힘썼다. 전에 주막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데다가 셈을 따지지 않는 넉넉한 인심에 음식 솜씨까지 좋았던 사타원 종사는 늘 분위기를 이끌었고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사타원 종사는 이렇게 더 큰 믿음과 기쁨으로 방언공사와 구간도실 건축에 조력했으며 영산원 안살림에 책임을 다했다. 당시 길룡리 사람들은 사타원 종사를 원화 어머니로 부르며 따랐다.
사타원 종사의 말은 항상 구성지고 재미있어 사람들을 끌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 사람들과 속정이 잘 통하고 세정을 잘 살폈다. 배고프고 고달팠던 어려운 시절에 재가든 출가든 사타원 종사에게 간장이나 된장 한 사발 또는 막걸리 한 사발 대접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 자칫 거칠어지기 쉬웠던 길룡리 인심들은 사타원 종사의 그 훈훈한 덕화에 마음이 녹아나고 성정이 순해졌다. 길룡리 사람들은 제 일이 아무리 바쁜 농번기라도 사타원 종사가 부탁을 하면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와 일을 도와 주었다. 사타원 종사가 머무는 영산원은 언제나 훈훈함이 감돌았다.
사타원 종사는 원기9년부터 영산지부 감원으로 원기49년까지 무려 40여 년 간을 한결같이 사 없는 마음으로 살았다. 봉직하는 동안 뛰어난 음식 솜씨로 영산성지의 살림을 알뜰히 꾸려가며 각지에서 찾아드는 인재들을 늘 따뜻한 사랑으로 보살폈다. 모두 “그 양반보다 덕 많은 사람 못 봤다. 얼굴은 얼금얼금 얽었지만 말 한 마디 귀에 거슬리는 소리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타원 종사의 속깊은 심성은 미물 곤충에게까지도 그 덕화가 미쳤다. 사타원 종사는 밭을 매다가도 지렁이와 굼벵이가 나오면 “어서 다른 데로 가거라” 하고 심고를 올린 뒤 밭을 메었다.
사타원 종사는 한 번도 대중 앞에 나서 설교를 한 적이 없었다. 재가 1등 유공인이었지만 대중 앞에 서서 박수를 받아본 일도 없었다. 오로지 일평생을 식당과 논밭을 오고가며 대중들과 함께 봉공하고 순교하는데 온 생애를 다 바쳤다. 사타원 종사에게는 처음부터 공과 사의 개념이 아예 없었다. 누구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사량 분별 하지 않고 있는 모든 정을 베풀었다. 사타원 종사는 영산 교화에 있어서 그야말로 숨은 일등 공신이었다. 사타원 종사 열반 후 주민들은 한결같이 “원화 어머니가 간 뒤로 영산원에 찬바람이 불어” 할 정도로 그가 머물던 영산원은 정답고 훈훈함이 감돌았다.
사타원 종사는 “일찍부터 심중에 도사를 만나 도를 배우고 도사를 후원하고 싶은 남다른 서원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주세불이신 대종사님을 만나 가까이서 구도를 돕고 회상 창립에 참여하는 행복을 누렸다”는 최후의 말을 남기고 원기49년(1964) 2월 17일에 세수 80세를 일기로 영산원에서 열반했다. 재세 시 사타원 종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던 소태산 대종사는 대종경 선외록 사제제우장 16편에서 “원화는 숙세의 선연도 심중할 뿐 아니라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회상의 발전에 따라 무량한 복록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후일을 전망했다.
참고 / 『원불교 선진열전3』 ‘구수산 칠산바다’, 『대종경 속의 사람들』, 원불교 법훈록 등
사타원 이원화 종사 약력
1884년 10월 3일 전남 나주 영산포 출생
원기9년(1924) 출가
영산지부 감원 순교
수위단원 역임
원기49년(1964)년 2월 17일 열반
원기101년 11월 6일 종사 법훈 수여
ㅡ 일화 2
ㆍ
대종사님 익산 총부에서 영산에 오시면 미리 연락을 주셨다.이원화님은 이집 저집 또는 마을 마다 소식을 알려 주었다.대종사님 며칟날 오신다고...
대종사 선진포로 오시는데 눈이 다리 까지 쌓이는지라마을 사람들은 당그랭이로 눈길을 터서 모시고 왔다.
몇년만에 영산에 오시면영광근동 교도들이 모두 모이는지라..이 밤 야회를 마치시고 내일은 삼밭재로 가자. 삼밭재를 가셔서 마당바위 눈을 다지면서 (물욕충만 이세상에...)성가를 불렀다.
삼밭재 바당바위 눈을 밟고 자리를 준비하면 앉아서 법설을 하셨다(너회들이 나를 어찌 알겠느냐?...역대 성현들이 많이 다녀 갔으나 사은(四恩)법을 내놓으신 분이 어디있드냐?.. 오는 시대에는 사은법으로 큰 평화시대를 맞이하리라..두도 보아라...>하시면서무수히 자화자찬을 하시었다.
대종사님은 가셨어도 유산이 있으니 바로 사은의 은전 (恩田)을 발견하여 주신 것이다.
ㆍ 이원화(李願華)와 김삼매화(金三昧華)는 평소 인심이 후덕했다.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짐승들에게 까지도 인정을 많이 베풀었다. 그래서 평소에 교당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에게 까지도 밥을 많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소태산 대종사가 말했다.
『개나 고양이가 아무리 귀엽다고 해서 함부로 밥을 많이 주지마라. 교당에서 사는 개나 고양이는 후생에 사람으로 진급하기 쉽다. 그러나 분수에 넘치게 많이 얻어먹고 살면 후생에 사람이 되더라도 빈천보를 받게 된다. 지어놓은 것 없이 받기만 하는 것도 큰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원화나 삼매화가 진정으로 개나 고양이를 사랑한다면 밥을 적당히 주어야지 과분하게 많이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빚쟁이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 사타원 이원화 종사
‧ 1884년 10월 3일 전남 영광 영산 출생‧ 원기 9년(1924) 출가‧ 영산감원․ 순교· 영산내 감원· 수위단원 역임‧ 법랍 41년‧ 정식 출가위‧ 원기 49년(1951) 2월 17일 열반‧ 원기 73년(1968) 대봉도 추서‧ 원기 100년(2015) 종사 추서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사타원님은 여성 전무출신 1호로써 큰 직책을 맡지 않으셨지만 교단 창립기 기초가 되었던 방언공사를 하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림살이를 도맡아 많은 사람에게 덕을 펼치시어 주변을 감화시키셨습니다.공을 위해서는 당신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공익만을 생각하셨습니다. 사타원님의 공익정신과 덕화를 본받아 선공후사를 우선시 하고 훈훈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대종경선외록 5.사제제우장 16절>대종사의 구도 당시부터 회상을 건설하시기까지 이원화(李願華)는 오랫동안 시봉에 정성을 다 하였으며 회상을 여신 뒤에는 전무출신하여 교중사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대종사 칭찬하여 말씀하시었다. "원화는 숙세의 선연만 심중(深重)할 뿐 아니라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회상의 발전에 따라 무량한 복록의 주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