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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70) 2024. 6. 19
아라우나 타작마당
사무엘하 24:18-25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를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을 계기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갓을 보내, 다윗에게 세 가지 재앙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칠 년간의 기근’, ‘석 달 동안의 도피 생활’, 그리고 ‘사흘 동안의 전염병’입니다.
고민 끝에 다윗은 직접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사람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빠지게 해달라’고 말했습니다(14).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한 것입니다. 즉 자연과 사람을 통한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리시는 벌(전염병)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천사를 보내셔서, 전염병을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때 무려 7만 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발동되어 천사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눈에 심판하는 천사를 보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 천사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그가 심판하는 천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17).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비록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참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이니, 백성들의 죄는 묻지 마시고, 오직 자신만을 벌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듯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단을 쌓으라>
그러나 모든 재앙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천사의 손은 멈추게 하셨지만(17절), 선지자 갓을 다윗에게 보내어 특별한 요구를 하십니다.
18절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원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단은 존재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제작한 하나님의 ‘장막’과 ‘번제단’은 그 당시에 아직도 ‘기브온 산당’에 있었습니다(대상21:29). 따라서 번제를 드리려면 기브온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새로운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하필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집(성전) 터를 준비해오신 하나님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이 어딘가 하면,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 산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사흘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하고 묻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올라갑니다. 그리고는 이삭을 묶고 번제로 드리려고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으로 대신 제자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창22:14).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후 사람들은 모리아 산을 ‘여호와의 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는 천사에게 다급하게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삼하24:16)고 하신 말씀하셨던 장소와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던 아브라함에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창22:12)고 말씀하신 장소가 같은 장소입니다. 이 두 말씀이 바로 같은 장소(모리아 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당신의 전을 세우기로 계획하셨던 장소입니다. 그곳을 제사가 이루어지고, 죄 사함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구별하여 놓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솔로몬은 이 자리에 ‘솔로몬 성전’을 짖습니다.
제단을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예,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 따라 제사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구약의 5대 제사> 번제(레1:1〜17/6:8〜13) - 동물의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부위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 제물은 생활 형편에 따라 수송아지, 숫양, 숫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등으로 나뉜다. 소제(레2:1〜16/6:14〜23) - 곡물을 이용한 피 없는 제사. 고운가루, 기름, 유향, 소금을 있는 그대로 혹은 요리를 해서 드렸다. 제사장은 제물의 일부분만을 불살라 기념물로 드렸다. 소제는 항상 번제 혹은 화목제와 더불어 지냈다. 화목제(레3:1〜17/7:11〜36)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한 제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경우나 서원하는 경우에 드렸다. 제물은 소, 양, 염소 등을 사용하되 암수 모두 가능했다. 속죄제(레4:1〜5:13/6:24〜30) -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 드리는 제물은 신분에 따라 달랐다. 제사장이나 온 백성은 수송아지, 족장은 숫염소, 평민은 암염소 혹은 어린 암양을 드렸다. 만일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의 경우 비둘기 두 마리를 드렸는데, 이마저도 어렵다면 고운 가루 십 분의 일 에바를 드렸다. 속건제(레5:14〜6:17/7:1〜10) - 하나님의 성물을 범하거나, 계명을 어겼을 때 또는 이웃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사. 성물과 이웃에 대한 보상은 본래 금액에 5분의 1을 더해 갚아야 했다. 제물은 오직 숫양으로만 드렸다. |
25절에 의하면 다윗은 어떤 제사를 드렸습니까?
25절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예,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특별히 인구조사 사건의 죄, 즉 하나님보다 백성의 숫자를 의지하려고 했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관계의 회복을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원상회복할 뿐 아니라 왕과 백성들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번제는 모두 태워서 바치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지방과 내장은 여호와께 태워드리고 가슴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로 감사와 교제를 나누는 제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시는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재앙을 내리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멸하려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나갈 경우, 징계하시겠다고 예언하신 바가 있습니다. 삼하7:12~16(다윗과 다윗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긍휼과 사랑으로 징계를 거두신 다음,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하는 자리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히12:6~8, 1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받는 징계를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만 하다가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결국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징계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였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증거가 바로 예배입니다.
<순종하는 다윗과 아라우나의 반응>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즉시 올라갑니다.
19~21절 “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 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다윗의 일행이 자신을 향해 올라오는 모습을 아라우나가 보았습니다.
아라우나는 ‘여부스 사람’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예루살렘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던 본토인입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과는 다릅니다(대상21:20에 보면 아라우나가 아니라 오르난으로 나옴). 다윗이 원래 여부스 사람들의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다윗성으로 삼으며 수도로 삼았는데, 그들을 다 죽이거나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거나 추방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조공만 거두어들이기로 하고 계속 살게 해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의 주장처럼, 여부스 족속의 왕족이거나 지도자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곳에 그렇게 넓은 노른자위 땅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땅을 향해 올라오는 모습을 본 아라우나는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한때 사울은 그 왜곡된 종교적 열정으로 가나안 땅의 이방 족속을 멸절시키고자 시도하기도 했었습니다(21:2). 이런 배경하에서 가나안 땅의 잔존 원주민인 아라우나는 자신의 외진 타작마당에 왕이 친히 수행원들과 더불어 올라온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부터 앞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라우나는 분명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다윗 왕과 그 수행원들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는 다윗 왕 앞에 바짝 엎드려 절하며 맞이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올라온 목적을 분명히 말합니다.
21절b “...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그곳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림으로 백성에게 내리는 전염병의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일은 다윗의 사사로운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다윗에게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빨리 끝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라우나의 반응입니다.
22~23절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라’고 하면서 농사를 짓던 소를 번제물로 드리고, 마당질하던 도구와 멍에를 땔감으로 쓰라고 선뜻 내어줍니다. 그러면서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한다’며 축복의 말도 전합니다.
아라우나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저는 아라우나가 참 지혜롭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이 자신에게 나온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함입니다. 빼앗고자 함이 아니라 백성을 치유코자 함입니다. 다윗의 선한 의도를 깨달았습니다. 아라우나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역시 자신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동족인 여부스 사람들도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음으로 모든 백성에게 임한 재앙이 끝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무상으로 드리겠다고 말한 것입니다(부자였지만 탐욕 가운데 죽은 나발과 비교(아비가일) – 삼상25장).
<값을 치르는 다윗>
다윗은 아라우나의 배려를 거절하며 값을 치르겠다고 말합니다.
24~25절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아라우나의 배려에도 다윗은 ‘그럴 수 없다’며 ‘값을 주고 사겠다’고 선언합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는 자신이 큰 희생을 치르면서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즉 공짜로 얻은 제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져와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서 제물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짜로 얻은 것으로 드리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가 죄 사함 받는 것도 공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대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제사의 대가는 구약시대 제사의 대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아무 대가 없이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죄와 용서와 회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것을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값싼 은혜란)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은혜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와 교회의 권징 없는 세례와 신앙고백 없는 성찬과 죄의 고백 없는 사면을 남발한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주의 지성 가운데 한 분인 댈러스 윌라드 박사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윌라드 박사는 “오늘날 크리스천 사이에는 그릇된 신화가 있습니다.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찢어짐과 비움, 돌이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 없이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회퍼 목사와 윌라드 박사는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기독교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본회퍼 목사의 ‘값싼 은혜’를 후세대인 윌라드 박사는 ‘제자가 되지 않고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행20:28)입니다. 가장 고귀한 피로 사신 ‘값 비싼’ 교회입니다.
둘째는 돈을 지불해야만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왕이라도 백성이 기업으로 받은 토지를 함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비슷한 사건이 창23장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의 장지를 구입하고자 했습니다. 그때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인 굴을 팔라고 제안했습니다. 에브론은 헷(히타이트)사람인데, 아브라함에게 거저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지만, 아브라함이 거절합니다. 아브라함은 당시 거래가보다 비싼 돈을 주고 그의 밭과 굴을 구입합니다. 그래서 소유권은 영원히 아브라함에게로 가게 됩니다. 나중에 아브라함도 거기 묻히고, 아내 레아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도 거기 묻힙니다. 그렇게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언제 흐지부지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법적으로 확실히 돈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실 변심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우리가 지금 호의로 뭔가를 해도 나중에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도 희미해집니다. 후손들이 나타나 원상회복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당시 상거래 절차에 따라 원래 가격보다 훨씬 비싸도 막벨라 굴을 구입한 것은 훗날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의미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은 50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삽니다.
병행 구절인 대상21:25에는 그 땅값으로 금 600 세겔을 지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각기 다른 두 품목에 대한 가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여기에서 지불된 은 50세겔(은1세겔은 대략 노동자 4일의 품삭에 해당)은 소와 타작 마당에 해당하는 값이며, 대상21:25에 나타난 금 600 세겔은 성전 부지로 사들인 모리아 산 전체에 대한 값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립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셔서, 이스라엘 위에 내린 재앙을 멈추게 하셨습니다(공식적인 완성의 의미).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가지만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재앙은 돌이켜 다시 화목하게 되기 위한 과정입니다. 때로 연단의 시간이 다가와도, 원망과 불평하기보다는 내 안에 있는 죄성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제단을 쌓고 제사하는 곳으로, 곧 하나님과 화해하는 장소로 택하셨듯, 오늘 우리 ‘사도 교회’를 이 시대의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으로 세워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에 들어와 예배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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