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의 묘를 파보다 1
팔월 중순이 되어 오도록 지함 일행은
한양으로올라오지 않았다.
정휴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홍연진결>을 잃어버린 것은 둘째 치고
화담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살아있다면 그까짓 책을 잃어버렸든 태워버렸든
상관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죽었다면…
정휴는거기까지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형님, 송도로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다.
여기서는 더 기다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듯합니다."
"그러게나. 올 사람이 아닌 듯하이."
지번도 정휴를 말리지 않았다
남궁두와 전우치도 정휴를 따라 길을 나섰다.
정휴는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송도로 갔다.
남궁두와전우치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정휴는 빨리 걸었다.
그야말로 한달음에 송도에 이른 정휴는
곧장 화담의집으로 달려갔다.
"저, 정휴올습니다."
화담의 부인이 마침 집에 있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화담 선생님의 묘를파보아야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오?
돌아가신 분의 묘를파겠다니?
부관 참시라도 하겠다는 거요?"
"화담 선생님이 살아계시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선생님이 살아서 여행하시는 모습을 보았다는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원 살다 보니 별 소릴 다 들어보는구먼.
영감님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그러우.
이 염천에 다썩었겠구려."
"제 손으로 묻었잖습니까?"
"그렇지요. 나도 보았잖구요."
"그러니 더 미칠 노릇입니다.
제가 홍성에도가보았고,
해남, 지리산, 한양을 다 가보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화담 선생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도 다 있군요."
화담의 부인은 아들을 불렀다.
곧 화담의 아들이달려왔다.
"아니,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닌 밤중에홍두깨라더니
아버님이 살아계시다니요?"
"하여튼 가보십시다."
"그래도 그렇지, 아들인 제가 아버님을 몰라뵙고
다른 분의 시신을 아버님이라고 했을까봐
그러십니까?"
"아이고, 저도 답답합니다.
"궁두, 자네가 말씀 좀해드리게나."
정휴는 주먹으로 제 가슴을 쾅쾅 쳤다.
남궁두가 화담의 아들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설명했다.
"저희도 처음에는 정휴의 말을 믿고
화담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돌아가셨습니다."
"글쎄 그 말은 정휴한테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화담 선생님을 보았다는 사람이
한둘이아닙니다."
"모를 말씀이외다."
"그러니 정휴 스님이 이렇게 답답해서
화담산방까지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답디까?"
"보았다는 사람만도 벌써 여러 명이 되고,
지리산에서는 남명 선생께 편지까지 보내셨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들르지 못해 미안하다고 쓰신 서찰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한두 사람이 본 게 아니랍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함께 가서 우리 눈으로 확인해봅시다."
화담의 아들은 괭이와 삽을 헛간에서 꺼내와
어깨에둘러메었다.
정휴 일행은 화담의 아들을 앞세우고
화담 계곡으로올라갔다.
흥분한 일행의 걸음은 뛰는 것만큼이나빨랐다.
그들은 정휴와 화담의 아들이 직접 썼다는
화담의묘로 갔다.
"이 묘일세. 여기에 화담 선생님이 묻혀 계시다네."
정휴가 손가락으로 묘를 가리켰다.
전우치와 남궁두가 괭이와 삽을 잡았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화담의 묘를 팠다.
찌는 듯한 삼복 더위라 조금만 몸을 놀려도
땀이비오듯 흘렀다.
한참 만에 관이 나타났다.
"열어 보게."
정휴가 전우치에게 말했다.
전우치가 관 뚜껑을 힘껏 잡아당겼다.
"휴우."
정휴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관에는 죽은 화담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뜨거운여름날이건만 시신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썩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에는 산 사람처럼
핏기까지 도는 듯보였다.
그렇지만 죽어서 땅밑에 묻혀 있는 것은사실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조심해서 묻읍시다."
화담의 시신을 다시 땅 속에 묻으면서
정휴는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말을 믿어주는 동지가생겼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심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전우치와 남궁두
이 두사람만큼은 이제 더 이상
화담의 죽음을 부인하지못할 터였다.
그러나 묘지에서 내려오는 정휴의 가슴은
다시답답해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봤다고증언한
그 화담이란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사람들이 모두 입을 맞추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인가?
정휴는 한양 지번의 집에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이유가전혀 없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자기만 돌려놓고
그토록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둘러댄단 말인가?
세상이 다 광대 놀음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전우치와 남궁두가 시신을지접 확인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만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이네."
"나도 그런 생각이 드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이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걸세.
우치 말대로지리산으로 다시 가세.
남명 그 양반이 무언가 말을 해줄 것일세."
남궁두도 전우치의 말에 찬성했다.
정휴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무리 먼 길을가더라도
화담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그수수께끼의 발단이
<홍연진결>에 있는지도 모르는일이었다.
그 책을 훔쳐내기 위하여 누군가가 일부러 거짓말을
퍼뜨리고 다닌 것일 수도 있었다.
정휴는 지리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가세. 끝까지 가서 밝히세."
"이제는 우리 두 사람도 정휴 자네의 말을 믿으니
힘을 내게."
전우치가 정휴를 위로했다.
정휴는 전우치, 남궁두를 대동하고
또다시지리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
울주를 떠난 다음날,
화담 일행은 경주에 도착했다.
경주는 그래도 염병이 창궐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울주만큼은 아니었으나
경주도 염병으로 꽤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고 했다.
죽음이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하긴 했으나
살아남은백성들은 또 쉽게 죽음을 잊어가고 있었다.
추석명절을 눈앞에 두고
대목장이 열린 경주는 제법혼잡했다.
경주에서 소문난 선비 박철환은
화담 일행을 반가이맞아들였다.
박 진사의 창고에는 빈 곳 하나 없이
쌀로 가득 차있었다.
창고 앞을 들락거리는 쥐도 통통한 게
여간기름져 보이지 않았다.
박 진사는 화담의 고명을 들었다며 음식을 잔뜩내왔다.
지함과 박지화는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주린 위장을 채우고 밀린 여독을 풀어낼 수 있었다.
박 진사 일가는 양반집답게 청결히 지낸 덕분인지
염병 피해 없이 무사히 여름을 넘긴 모양이었다.
박진사는 염병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풍문으로 들었을 한양소식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요즘 좌의정 박순 대감이 선비들 입에
자주오르내립니다."
"그이가 뭘 잘못한답디까?"
화담이 응대했다.
"아니오. 화담 선생님의 제자시라면서요?"
"그렇소."
"그런데 화담 선생님 제자들은
이학보다는 기학을중시해서
삼강 오륜 알기를 짚신짝 보듯이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신주단지처럼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올시다."
그런 학문의 폐해를 짐작이라도 하셨습니까?"
백성을 삼강오륜의 그물 속에 가두는 것보다는
드넓은 바다에 풀어놓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오."
박 진사는 그뒤로도 몇번 화담을 물고 늘어지는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러나 화담은 일일이 대응하기도귀찮은지
어느 순간 손을 내저으면서 자리에 누웠다.
"내가 노구라서 몹시 피곤하오.
나중에 더 이야기를합시다."
일행중 누구도 박 진사와 대작할 기분이 아니어서
술자리는 일찍 파작을 했다.
아쉬운 눈치로 박 진사가물러가자
박지화는 심가가 뒤틀렸는지 그의 뒤통수에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백성은 염병으로 죽고, 굶어 죽어
들에 일할사람도 없고,
백성들의 곳간에는 쥐새끼 한 마리얼씬거리지 않는데
양반집 창고에는 백성보다 살찐쥐들이 득실거리는구나."
박 진사는 곧장 사라져 버렸다.
박지화의 말을 못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서도 대꾸할 염치가 없어
못들은 척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호화로운 금침에서잠을 잔 지함은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깊이 잠들지못해
이리저리 뒤척이다 일찍 잠이 깼다.
그런데화담이 보이질 않았다.
박지화는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형님, 아침입니다."
지함이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박지화는
겨우 눈을뜨고 지함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땀이 줄줄흐르고 있었다.
"그 염병이 내게 옮았는가보이…"
"예?"
지함은 얼른 박지화의 몸에 손을 대보았다.
열이 높았다.
그런데도 박지화는 오한이 들어
몸을덜덜 떨고 있었다.
틀림없는 염병이었다.
"형님, 가만 계시면 제가 약을 지어올 터이니
걱정마시고 기다리십시오.
"그런데 화담 선생님은 어딜가셨지요?"
"글쎄 나도 모르겠네. 저기… 저게 뭔가?"
박지화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서찰인 듯한종이가 접혀 있었다.
"서찰인 것 같습니다."
화담이 누웠던 이부자리가 곱게 개켜져 있고
바로그 옆에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지함은 화급히 그것을 펼쳤다.
"자네들과 여행을 끝마치고 싶었네만
더 이상지기(地氣)를 모을 수가 없구먼.
나 먼저 가네.
자네들은 이 땅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보고
천천히 돌아오게나.
이것이 영영 이별일 터이네만
사람 사는 매일매일이이별이며
또다른 만남인 것이니 너무 서운해 하지말게.
사람으로 태어나 이런 좋은 인연을 맺고 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이.
내게 구애 받지 말고천천히들 돌아오게나.
주유를 그만두어서는 제자의도리가 아니네. "
지함과 박지화는 멍하니 서로를 마주보았다.
도대체 왜 갑자기 떠나신 것일까?"
박지화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형님, 아무래도 스승님께서
더 사실 수가없어서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떠나신 것 아니겠나?"
지함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가르침을 주시려고 그토록 애쓰셨건만
나는 아직도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흑흑흑."
"지함, 그만 하게. 이미 예정된 일이 아니었던가.
어서 송도로 돌아가면 선생님을 뵐 수도 있을 것이아닌가."
그러면서 박지화도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렇지않아도 빨개진 얼굴이 더 붉어졌다.
화담은 지함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북창이 길을 열어주고 화담이 맞이한 도의 세계.
이제 그를 이끌던 스승 한 분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써 지함은 세상을 홀로 살아가야 했다.
혼자살아야 한다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화담, 그 분은 도대체 누구이길래
그토록 나를아끼고 이끌었던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정을 줄 수 있는 것인가.
박지화는 숨을 죽여 울고 있었다.
"형님, 선생님 말씀대로 계속 주유를 하십시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더 가나?
"차라리 선생님을따라 돌아가는 것이 더 낫겠네."
"아닙니다. 그 병은 곧 낫습니다."
"자네가 귀찮아졌네."
"형님두. 잠시 진정하시고 더 누워 계십시오."
화담이 떠난 사실이 두 사람에겐 몹시 서글펐다.
그러나 앞에 닥친 염병을 물리치는 게 더 급했다.
아침 햇살이 떠올랐는지 창호지가 밝게 비쳤다.
얼마 뒤에 아침상이 들어왔다.
어제 저녁상과 전혀 다른 차림이었다.
꽁보리밥에된장국,
그리고 김치가 전부였다.
주인 박 진사가,
엊저녁에 박지화가 중얼거린 말을 듣고
무언가 느낀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화담이 남긴 편지로 받은 충격도 잠시 잊어버리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웃었다.
그런데 밥상을 들이민하인배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방문을 기웃거리며미적거리고 있었다.
"무슨 볼 일이 있는가?"
"저, 아침 자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진사 어른께서 전해드리라는 말씀이 있어서…"
"말해 보게."
하인배는 재촉을 받고서도 두 손을 비비며
민망해서어쩔 줄을 몰라 했다.
"괜찮으니 말해보게."
"저… 진사 어른께서 쥐새끼 살찌울 양식은 있어도
돼먹지 않은 떠돌이들 배 채워줄 양식은 없다,
초라한행색을 불쌍히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에서 베푸는음식이니
감지덕지한 마음으로 먹어라,
이렇게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인배가 내미는 것은 엽전 한 냥이었다.
하인배는 민망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있던 지함과 박지화는
느닷없이 박장대소를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