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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73) 2026. 7. 26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행17:1-9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과 실라는 그 순간까지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죄수는 물론 간수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상관들의 명령으로 풀려나게 되었지만, 그냥 나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시민임을 밝히고 그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질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와서 직접 자신들을 감옥에서 이끌고 나갈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당황한 상관들은 바울의 요구대로 감옥으로 와서 바울과 실라를 감옥 밖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성을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루디아의 집을 방문하고, 그들을 위로(권면)하고 빌립보 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누가는 남음).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빌립보를 떠나 바울과 실라, 그리고 디모데가 간 곳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1절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지도 보기)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입니다. 빌립보에서부터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인구 약 20만의 대도시로 정치, 무역,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BC 316년경 마게도냐의 빌립 2세(Philip II,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의 사위였던 카산더(Cassander)가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누이 이름이었습니다.
오늘날 데살로니가(데살로니키 Thessaloniki)는 그리스에서 수도 아테네 다음에 가는 인구 200만 명이 살고 있는 제2의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때 한국 축구팀이 경기를 한 도시였습니다.
땅끝을 향하여 나아가는 바울에게 선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렇게 부유하고도 거대한 도시 데살로니가에 바울 일행이 나타났는데, 그들의 모습이 어땠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초라하고 더러웠겠습니까? 게다가 먹지 못하고, 편히 자지 못하고, 옷도 빨아 입지 못하고... 더군다나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심한 태형을 당했기 때문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런 몸으로 빌립보에서부터 여기까지 160km를 걸어왔으니 그 몸의 상태가 어땠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도착은 데살로니가에 큰 역사를 이루어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소명(집념)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대도시답게 데살로니가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 남자 10명이 있으면 세울 수 있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회당’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the)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데살로니가에는 회당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은 ‘자기의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강론하였습니다.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그곳의 유대인들을 가장 손쉽게 단체로 만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동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역시 뜨거웠습니다(롬1:16, 2:9~10).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이방인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세 안식일 동안’(최소 ‘3주 동안’) 머물면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낯선 곳에서 처음 바울 일행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요?
그 힌트를 훗날(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전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데살로니가에서 지내는 3주간 동안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자비량 선교, 아마도 천막을 만드는 일 – 18:3 참조). 아마도 바울 일행이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를 떠날 때에 가져왔던 돈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소아시아를 다녀올 경비만 준비했을 것, 그런데 유럽으로...). 당장에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바울은 직접 일을 하면서도 복음 전하는 본업을 계속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선교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빌4: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뜻밖에 도움이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사실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 160km나 되는 먼 거리인데, 3주 동안 두 번이나 선교비를 보냈다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여성 사업가 루디아와 누가의 도움).
빌립보 교회는 마지막까지 바울을 잊어버리지 않고 후원했는데,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필요한 것을 보내기도 했습니다(빌4:18).
빌립보 교회의 이러한 사랑과 후원은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에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내용>
한편 ‘세 안식일 동안’, 회당에서 전한 복음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늘 ‘성경을 풀어주는 것’(해석)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율법과 선지서’입니다. 그 내용이 3절입니다.
3절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서 주로 하는 일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성경을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읽었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53:3~6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내용은 메시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입니다. 유대인들을 오랫동안 이사야서를 읽어왔는데, 그리고 거기에 분명히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는데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성경만 읽어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예언의 말씀이 자신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메시아 상’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데 시대가 지나면서 ‘구원자’로 의미가 굳어졌습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한 말이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어이고 하나는 헬라어입니다).
바울이 한 일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잘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말씀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어떤 이들은 바울의 해석에 마음 문을 닫아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헬라인의 큰 무리가 믿다>
그러나 헬라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4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사도 바울이 3주 동안 성경을 강론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유대인보다는 헬라인들이 이 복음에 더욱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특히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살전 1:9).
나중에 살펴보시겠지만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 중에 가장 어려웠던 곳이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였습니다(행17:16-31). 헬라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한 우상숭배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앞서 언급했듯이, 바울 일행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바울이 부유하고 우아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훗날,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살전1:5a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한편 그때 믿게 된 사람 중에 ‘야손’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롬16:21에 언급된 ‘야손’이란 사람이 동일인이라면 그는 유대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빌립보의 루디아처럼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5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울의 설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유대인들은(유대교 지도자) 바울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 그들은 바울에 대하여 ‘시기심’을 품었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유대인들은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 회당의 지도자 그룹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강론했을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역사가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들어온 떠돌이 여행자 바울을 통해, 많은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시기한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들이 그동안 누리던 기득권을 잃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상황(행13:44-50)과 아주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자신들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을 파괴하는 세력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2) 그들은 몰상식하게도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깡패)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바울 일행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장이나 거리에서 힘깨나 쓴다고 하는 불량배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사람은 행위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 마7:16~18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오늘날 교회의 분쟁 – 불량배를 고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런 교회는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모양이 있는지 몰라도, 그 속은 흉악한 이리와 같습니다.
<대신 잡힌 야손>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기 위해, 야손의 집을 급습하였습니다.
6~7절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그러나 다행히도 바울과 실라는 마침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손이 미리 알고 피신을 시켰을 것입니다(10절 - 밤에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피신시킨 것으로 보아). 폭도들은 야손의 집에서 바울과 실라를 발견하지 못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그 자리에 있던 집 주인 야손과 몇몇 형제들(여기서 ‘형제’(아델포이)는 육신의 형제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믿음의 형제를 의미)을 대신 잡아서 그 도시의 관리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읍장’이란 로마제국 자치도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장관을 말합니다.
그들은 읍장에게 야손의 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말을 보면, 다른 도시에서 행한 바울의 전도 활동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을 야손이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죄목을 붙입니다. 단순히 ‘사회적인 불안을 야기한다’는 수준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7절 “...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가이사 율리우스(Julius Caesar)였는데, 그는 '황제의 법령'을 내렸습니다. 로마제국 내에 ‘다른 왕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신격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고 전하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은 고소할 때에 비슷 – ‘유대인의 왕’이라며 정치적인 죄목을 뒤집어씌움.
바울은 예수님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왕으로 보아, 이 일을 정치적인 이슈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풀려나는 야손>
유대인들과 폭도들의 고소로 인해 야손과 믿음의 형제들은 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8~9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그러나 그들을 오래 가두어둘 수는 없었습니다. 야손에게 물을 수 있는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무죄 석방해야 하지만, 무리들의 눈치를 보느라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야손은 예수님을 믿고 물질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과도 같습니다.
그럼 이후,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본래 예정보다 갑작스럽게 데살로니가를 떠나게 된 이후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동족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살전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살전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또, 인근 지역에 믿음의 소문이 났습니다.
살전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바울은 그저 3주 정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 데살로니가에 이렇게 믿음으로 크게 소문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라’(고전3:7)는 바울의 고백처럼,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심고 물을 줄 뿐입니다. 자라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소문’이 널리 퍼지는 그런 교회로 성장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맺는 말씀 -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저는 오늘 6절에서, 폭도들이 바울 일행을 고소하는 내용에서 도리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6절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말은 ‘세상을 뒤집어엎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의미로 고발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평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느 미국인 교회에서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성경퀴즈를 맞추게 했습니다. 질문은 ‘신약은 ( )로 끝난다’의 괄호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요한계시록’(Revelation)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그만 ‘Revolution’이라고 적었답니다. ‘혁명’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오답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는 아주 정확한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면 ‘혁명’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가치관(삶의 목표)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들어가면 그 공동체가 뒤집어 엎어지는 ‘혁명’이 일어납니다.
‘예수 혁명’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뒤집어지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뒤집어엎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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