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전사무총장 목촌의흥예춘호선생 기적비명
前國會議員 民主共和黨 前事務總長 牧村義興芮春浩先生 記蹟碑銘
정치인이 정치에 중독되지 않았고 정치가 정상을 벗어날 때 정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바른 길을 향해 앞장선 선생의 생애는 시대사적 의미를 함축한다. 선생하면 상기(想起)되는 것이 제3공화국의 3선개헌과 유신체제를 반대한 결연한 소신이며, 그 후 선생의 행보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중심에 자리하고 많은 민주 구국선언과 시위를 주동하여 연행, 구류, 연금 등 인권 및 자유가 유린된 굴욕과 형언할 수 없는 가혹한 박해를 겪었다. 무릇 독재권력의 어둠의 시대 그 중심에서 고군분투한 선생은 마치 꺼지지 않는 한자루의 촛불과 같았다. 촛불은 외롭지만 항상 어둠을 밝히고 명상(瞑想)의 길잡이가 되어 생명의 역동성으로 타오르며 자신과 이웃을 상등(相等)시키는 정신운동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근현대 경제학의 깊은 소양과 해박한 역사지식에 의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 야인의 길을 택하여 명분을 지키며 소신껏 살아온 선생은 의흥예씨 중시조 고려조 문하찬성사 부계군 휘낙전(樂全)공의 23대손이다. 세조때 대사간(大司諫)의 직책으로 국정의 전면개혁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려 호된 추국을 당한 휘승석(承錫)공이 16대조, 경주부윤 재임시 에밀레종을 복원하고 연산군의 채홍준사(採紅駿使)를 거부하여 중벌을 받은 휘충년(忠年)공이 15대조, 임진왜란때 의병장으로 운문산에서 7년간 항전한 휘몽진(夢辰)공이 10대조이며 한말 경북 청도를 출향하여 부산에서 소상인으로 정착한 휘성옥(成玉)공과 서흥김씨 사이 3남으로 1927년 부산영도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의 석사학위를 취득한후 가업인 극동경금속(極東輕金屬)을 운영하면서 고장의 선배들과 공립남여중고등학교 등 4학교의 유정(誘政)설립을 비롯한 수많은 후생복지사업을 하였으며 영도체육회회장 청년문제연구회 경남대표와 중앙사무국장을 역임하였다. 부산시 개발위원회위원장을 맡아 3년여에 걸쳐 6.25전재(戰災) 피난민을 위한 난민주택 6백동과 부대복지시설 등을 건립하였다. 5.16직후 재건국민운동 경남지부 민간인대표 및 부산시촉진회회장에 선임되었고 이어 민주공화당 경남과 부산시당 사무국장 부산시당 회장을 거쳐 6대 국회의원에 당선 공화당 원내부총무,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그간 사재로 영도도서관 사회관, 옥성고등공민학교, 어린이집 탁아소, 무료예식장을 건립운영하고 영도관내 초등학교학생 종합예술제전을 연례행사로 주최하며 문화후생 복지생활의 증진을 기하였다. 이는 시급을 요하나 정부예산의 열악으로 실시하지 못하는 국책사업을 사비로 선도하는 운영이었다.
이어 7대 국회의원에 당선 신문윤리위원회 국회선출위원과 국회상공위원장을 역임하던 중 3선개헌 반대로 공화당에서 제명되었다. 공화당 창당주역이자 명실공히 실세로 알려졌던 선생의 3선개헌 반대는 오직 건전한 현대적 국가발전의 근본인 민주질서의 고수를 위한 호헌투쟁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사적 인간관계를 초월한 강인한 기개와 소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한때 복당하였으나 창당이념과 괴리되는 유신체제를 강행하자 반대선언을 하고 탈당한뒤 곧바로 재야에 뛰어들었다.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상임위원으로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며 전국회의원을 규합 민주헌정동지회를 결성 민주세력을 확대하면서 10대 국회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온갖 탄압을 받았지만 결국 당선되어 십여명의 친야무소속의원 모임의 대표를 지내다 신민당에 입당했다. 때마침 유신정권이 자행한 김영삼(金泳三)에 대한 총재직 삭탈과 의원직불법 재명에 격분 반대서명운동과 야당의원 전원 의원동조사퇴를 주동하였다. 그 전후 부산 경남지방에 격렬한 반정부 소요가 일어나자 선생은 그 배후 인물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79년 10월 뜻밖에 박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했다. 1212 군사반란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과도정부의 요청에 따라 선생 등이 참여한 국회개헌특위가 민주적 개헌안을 결의하여 정부에 이송했음에도 공고를 지연하며 집권야욕으로 마침내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에 517구데타를 감행 선생과 김대중(金大中) 등 다수의 민주인사를 불법 체포하였다. 법절차를 무시한 강제연행으로 55일간 정보부 지하실에 격리감금한 뒤 그들은 선생이 국민연합을 통해 계엄해제 개헌안 공고 및 정치일정 공개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주도한 일과 재야지도자 70여명이 이사로 참여하여 발족한 민주제도연구소의 이사장에 취임한 사실을 빌미로 선생이 동의하지 않는 일방적인 조서를 강박과 혹독한 고문으로 날조하여 내란음모죄로 기소하면서 국회의원을 삭탈하고 이어 국회를 무력으로 강제해산한 뒤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정당한 심리없이 12년형을 선고하여 2년여를 독감방에서 옥고를 치루게 했다.
1982년 3월에 가출옥한 선생은 신군부측의 위협과 집요한 회유공작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더욱 적극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몰두하여 정치범동지회장에 취임하였고 민주동우회를 결성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 무렵 선생은 함석헌, 이부영, 문익환, 홍남순 등과 재야를 대표하여 시국선언을 하고 단식투쟁중이던 김영삼에 동조 20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1984년 선생과 김영삼, 문익환이 회동하여 양김계가 공동으로 보다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하기로 합의하여 양김계와 재야인사 등 75명의 연서로 시국선언을 한뒤 8명의 양김계 핵심이 선생댁에서 협의 끝에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켜 선생은 부의장을 맡았다. 또한 선생은 함석헌을 비롯한 33인의 재야원로들과 재야간담회를 결성하여 시국선언과 집회시위 등을 주도하며 장기표, 김근태 등 젊은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민청련의 지도위원을 맡아 이들을 후원하여 노태우의 유신체제를 폐기하는 629개헌 성명이 나오기까지 험한 고난의 투쟁을 이어나갔다.
한편 우리사회의 바람직한 발전과 민주화 운동의 이념적인 체계화를 위한 연구소 설립을 절감해온 선생은 장기간 동지들과 토론하고 협의하여 수백명의 교수 재야지도자 및 청년운동가들이 참여한 한겨레사회연구소를 개소하여 이사장을 맡았다. 그 즈음 정치활동이 재개되면서 대선을 목전에 둔 양김이 각각 후보를 고집하여 민추협을 통해 공동투쟁을 해오던 양김진영이 분열하였고 재야 또한 갈라서고 있었다. 1980년이래 재야에서 가장 우려하고 경계하던 최악의 분열사태에 직면하자 선생 등 재야지도자들은 의견을 모아 대통령 후보단일화촉구 국민협의회를 결성 선생은 공동의장으로서 백방의 노력을 다했으나 양김은 끝내 분립(分立) 입후보하여 민주정부수립이 가능하였던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고 영호남의 영원한 대립과 각축를 초래하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민주진영이 선거후보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학생운동출신의 제정구 원혜영 등 천여명이 연서로써 시대에 걸맞는 참신한 신당건설을 제의해오자 창당상임공동대표가 되어 1987년 총선에 상당수 유력입후보자를 내었으나 새정치의 이해를 얻지못해 패퇴하였다. 그 직후 선생은 미련없이 정계를 떠났다. 한동안 구름과 물결따라 자연을 벗삼고 낚시삼매에 시서(詩書)를 탐독하고 서예에 몰두하며 세속을 멀리하던 중 사재로 건립한 도서관사회관이 정부가 당연히 보조해야하는 비영리공익기관임에도 반정부인사의 사업이라 방치하여 운영난을 겪자 생각다 못해 매각 그 대금으로 재단법인 영도육영회를 설립 현재까지 육영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1991년 사단법인 한국사회과학연구소 이사장에 선임되었으며 1994년 의흥예씨대종회 초대회장을 맡아 집안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2008년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회 고문을 위촉받았고 2009년 대한민국 국민원로회의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2년 평해황씨와 혼인 슬하에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장을 역임한 종석, 자부 인천이명순, 손녀 미국 웨스턴민스타대 경영학교수 나연, 손자 미국 일리노이대 통계학교수 상백; 국민대 경제학교수 종홍, 자부 강릉최영빈, 손녀 윤지, 윤아; 원주가톨릭대 국제학부교수 종영, 자부 이화대 국제대학원교수 선녕남영숙, 손자 상원; 장녀 종옥, 외손녀 조현정, 효정; 차녀 지숙, 서박성준, 외손자 재현, 외손녀 세현을 두었다.
한국의 혼탁한 현대정치에서 선생처럼 나설때와 물러설때를 분명히 하여 처신한 정치인은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은 평생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았기에 도인의 삶을 살았고 시대의 양심이라고도 하며 정치에서 성공하였다는 것이 정평이다. 영선반보(領先半步)는 성공하려면 반보만 앞서가라는 말이다. 선생은 평생 입신에 연연하지 않았고 시대적 현실에 따라서 언제나 한발이상 앞서간 정치인이다. 탄압이 심할수록 변화의 주체가 되었으며 비판의 소리를 높이면 그만큼 고달픈 삶을 담내하여야 했지만 인권과 민주화에의 형극의 길을 초심이래 한눈을 판일이 없었기에 어떤 정치인보다 훌륭하고 참된 행복한 정치인으로 한국정치사에 길이 남을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생을 통해 분단시대의 고뇌하는 인간상을 보았고 올곧고 반듯하며 굳센 의지와 청렴하고 강직한 소신으로 삶을 일관한 정치인의 전범(典範)을 실감한다.
새 사회는 새 유형의 사람이 담당자가 되는 60년대 새 정치의 꿈은 먼 이상이 되고 지난 세월의 구비마다 얼룩진 상흔(傷痕)에 시달리면서도 사실은 사실대로 승복하고 바른 것은 바른대로 주장하는 주체적인 인간을 우직하게 강조하던 선생의 발자취는 결코 한사람의 세월이 아닌 후학들의 길잡이가 되는 산역사임을 확신하며 다시한번 오래도록 기리기를 다짐한다.
2014년 9월 일
전 국무총리 전 서울대학교총장 정운찬 근찬
한국난정필회회장 박정규 근서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전 한양대학교 경영대학장 종석 건수
예춘호기적비명-한글한자.hwp
예춘호기적비명(세로쓰기).hwp
첫댓글 한자로(http://hajaro.juntong.or.kr - 한글한자 자동변환기를 사용하여 한글로된 텍스트를 한자로 변환하였습니다.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가 "울산대학교 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예재두 대종회장께서 비문에 적힌 원본파일을 보내 주셔서 비문에 적힌 그대로 세로쓰기된 것을 첨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