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나라를 위해 독립 운동가이시고 우리 글을 널리 알려주신 학자가 태어난 발자취를 찾아 외솔 최 현배 선생기념관 (2010년 개관)을 방문 했다.
시내 외곽이 아닌 주택가에 있는 기념관에는 마당에 우뚝 선 선생님의 동상을 보며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에 진열된 한글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해설사님의 친절하고 자세한 해적이(연혁)를 듣고 영상으로도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생한 음성 녹음도 들었다.
겨레의 큰 스승이신 외솔 선생님은 주시경 선생의 수제자며 학생 신분으로 조선어 교육에 온 힘을 다 하시고 연희전문(연세대 전신) 교수로 계셨고, 한글이 목숨이라는 붓글씨를 남기시고 우리말본(1937), 한글 갈(1942) 출간, 세종대왕의 한글 업적과 한글 역사를 바로 세웠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도 하셨고 광복 뒤에는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과장이 되어 우리 한글로 교과서를 만드시고 한글 전용 가로쓰기를 실행했다. 한자 혼용을 주장하는 이들과 논쟁에서 이기고 자음 명칭을 체계화 하며, 한글 전용법이 통과되었고 한글 전용 교과서를 만들어 간소화 파동도 막으며, 우리말 사전도 출판했다. 한글 정신을 잇고 기계화하며 시골말, 사투리 찾기에도 앞장을 섰다. 가수 패태김과 그의 남편 길옥윤씨가 부부사이에 부르는 말을 찾는다는 사연을 듣고 남편을 아비의 비자를 따 써서 그린비, 아내를 어미의 미자를 따서 단미로 ‘그리운 남편’ ‘달콤한 아내’라는 뜻으로 새 말을 만들어 준 일화도 있었다.
선생은 “나라 사랑의 길” 머리말에 “겨레는 나의 어머니요 나라는 나의 아버지다.” “겨레와 나라에 대한 나의 끝없는 사랑과 충성의 작업이다.” 라고 적어신 것만 보아도 선생의 한글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셨던가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다른 여러 가지 전시된 일생 업적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말과 글을 사랑하셨는지 구구절절 베여 있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외솔 명언들을 읽으며 생가까지 들러 보고 돌아 왔다.
2023.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