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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4.06 03:30
퇴계 이황의 교육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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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태(1916~1999) 화백이 그린 퇴계 이황의 표준 영정. 1000원권 지폐에 사용돼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습이에요.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상북도와 안동시, 도산서원은 지난달 27일부터 오는 9일까지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재현 행사'를 열고 있어요. 서울 경복궁에서 시작해 지금의 동호대교 근처인 두뭇개나루 터, 경기 여주 배개나루, 충북 충주 가흥창, 제천 청풍 관아, 경북 영주 죽령 옛길 등을 거쳐 안동 도산서원까지 이어지는 약 270㎞의 여정이죠. 454년 전 퇴계 이황(1501~1570)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간 길을 따라 40여 명이 함께 걷는 행사입니다. 당시 퇴계는 왜 사직(맡은 직무를 내놓고 물러남)을 했던 것일까요?
이조판서에 임명된 퇴계, 끝내 취임 거부
"꼭 사직을 하시겠다면 더는 어쩔 수가 없지만, 이제 과인을 위해 말씀 한마디만 남겨 주십시오."
1569년(선조 2년) 3월 4일, 17세 소년 임금 선조는 68세의 퇴계 앞에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임금은 학문과 인품이 깊어 조선 최고의 학자로 칭송받고 있던 퇴계를 늘 가까이 두고 가르침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조판서·대제학 같은 벼슬을 내렸지만 퇴계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기를 거듭했습니다.
퇴계가 사직서만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연(임금이 학문을 배우고 국정을 협의하는 자리)에 참석한 퇴계는 "빈곤한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 정치의 급선무"라고 강조하며 여러 고전을 강의해 어린 임금을 깨우쳤습니다. 자신의 평생 학문을 응축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임금에게 바치기도 했죠. 임금이 성군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성리학의 요점을 도표로 설명한 책으로, 인륜(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형제·부부 등에서 지켜야 할 도리)을 밝히고 덕업(어질고 착한 업적)을 이룩하도록 노력하며, 일상생활에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높이도록 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569년 1월 이조판서에 임명된 퇴계는 끝내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 선조 임금은 마침내 퇴계의 사직을 허락했죠. 마지막 말을 청한 선조에게 퇴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평한 세상을 오히려 걱정하고 밝은 임금을 오히려 위태롭게 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는 항상 위난(危難·위급하고 곤란한 경우)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임금은 겸허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과 2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을 생각하면 선조가 퇴계의 가르침을 얼마나 실천했는가 의문이 듭니다.
퇴계와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율곡 이이(1536~1584)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퇴계) 선생이 작별을 고하고 나자 대궐 안에서 벼슬하는 선비나 공부하는 선비들이 작별 연회에 나와서 도성이 들끓었다. 소매를 이끌고 만류해 사흘을 강가에서 자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퇴계가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던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선비가 조정에서 뜻을 펼치기 어렵구나
퇴계는 왜 그렇게 임금의 간곡한 청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일까요? '퇴계 평전'을 쓴 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는 퇴계가 나서서 활동하기보다 물러나 고요히 독서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벼슬보다는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안(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퇴계는 과거 시험에 합격한 뒤 성균관 교수직인 사성 등을 지냈는데, 명종이 즉위하던 1545년 조정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수많은 선비들이 희생된 을사사화가 일어났어요. 이때 퇴계도 일시적으로 삭탈관직(벼슬을 빼앗고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는 일)을 당해야 했죠.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지조 있는 선비가 벼슬에 오른다 해도 제대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으리라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을사사화 다음 해인 1546년엔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로 삼았는데, 이때 이미 물러날 퇴(退) 자를 써서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비쳤다고 합니다.
서원 건립과 교육에 쏟은 여생
그러나 퇴계의 귀향은 결코 초야에 은둔(세상일을 피해 숨음)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인재들을 모아 교육 사업을 펼치는 일 역시 자신의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퇴계는 풍기(지금의 영주·예천 일부) 군수를 맡고 있던 1549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선비가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던 곳)인 백운동서원을 위해 조정에서 현판과 토지를 내려주도록 청했습니다.
백운동서원은 그보다 6년 전 전임 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것인데, 퇴계의 의도는 임금의 권위를 통해 서원의 교육 전통을 확고히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퇴계의 뜻은 실현돼 백운동서원은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임금이 이름을 지어 새긴 액자를 내림)서원이 됐습니다. '소수'는 '(학문을) 이어서 닦는다'는 뜻입니다.
이 일은 이후 전국에서 서원이 활발하게 생겨나는 계기가 됐죠. 서원 건립 운동의 선두에 나선 인물이 바로 퇴계였습니다. 영천(지금의 영주)의 이산서원, 성주 영봉서원, 대구 연경서원, 고향 예안의 역동서원 건립에 관여했죠. 지금 1000원 지폐를 보면 앞면에 퇴계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데요. 옛 지폐에는 뒷면에 도산서원이 있었어요. 퇴계가 생전에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의 뒤편에,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인 1574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퇴계는 왜 이렇게 서원 교육에 힘을 쏟았던 것일까요? 선비를 기르는 임무가 국가의 사업인 동시에, 선비가 스스로 학문과 덕을 닦아 선비 공동체를 이룰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해석됩니다. 과거 시험 공부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스스로 도의(道義·도덕적 의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는 별세 4개월 전인 1570년 8월 역동서원의 낙성식(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에 참석해 '신분이나 벼슬에 따른 차별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화합을 다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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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7일 서울 경복궁에서 열린 퇴계 이황의 귀향길 재현 행사. 1569년 퇴계 이황이 임금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고 떠난 마지막 귀향길 모습을 재현했어요.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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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임금 명종이 친필로 사액한 ‘소수서원’의 현판.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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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 전경.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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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원의 안쪽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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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구성=안영 기자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