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요한복음(74) /
"153의 기적을 체험한 축복의 사람!"
☞ 말 씀 : 요한복음 21장 1절 - 14절 (신약성경 p.184)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아멘!
요한복음 20장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체험,
부활의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체험, “주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는 신앙고백과,
기쁨과 평안의 능력을 체험하여 부활의 신앙을 가진 부활의 사람들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은 그렇게 부활의 주님을 체험한 제자들이 이 땅에서 부활의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구분하자면 요한복음 20장은 부활 체험장이고, 21장은 부활 사명장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목적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저 정도로 말씀훈련과 기도훈련이 되었으면 좋은 일꾼이 되겠다는,
큰 기대를 걸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꿍 하고 넘어져서 일어서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명색이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시몬 베드로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뜨거운 체험을 하고서도,
꿍하고 넘어지더니 옛날처럼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가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고기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 제자들도 같이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말씀에 보면, 베드로를 따라갔던 제자들은 "...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 - 도합 일곱 명입니다.
원래부터 어부인 야고보와 요한은 물론 어부도 아닌 도마와 나다나엘까지도 따라갔습니다.
한마디로 ‘목적이 분명한 믿음이 전혀 없었고, 목적이 분명한 삶’ 을 살아가지 못한 채,
남들이 하는 대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와 맞는지 안 맞는지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유행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독특한 자기 개성을 살리지를 못한 채 살아갑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독특한 은사와 사명을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7절부터 19절 말씀을 보면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하고 말씀을 합니다.
그 다음 29절, 3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은사는 다 다르며,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 성령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소고기로 만든 불고기, 쇠고기 갈비찜 , 숯불갈비를 계속 먹어보십시오. 질려서 못 먹습니다.
두부도 가끔 먹으면 좋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두부조림 , 두부 찜 , 두부 전, 생두부 등,
두부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해도, 날마다 두부 요리로만으론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각자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고, 자기 사명에 충성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목적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목적이 분명한 삶’ 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뻔뻔한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로 왜 고기 잡으러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말씀에 이어진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을 때에 ”주님!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주님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대답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고기 잡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굳이 생각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볼 면목이 없어서 갈릴리로 떠난 게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실 때,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졸기만 했던 사람입니다.
명색이 예수님 수제자였는데, 남들이 도망칠 때 도망쳤고, 심지어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면목으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까? 주님을 만나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 그러면서 갈릴리 바다로, 옛 생활로 되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입니다. 얼마나 면목이 없습니까?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다 헛되이 쓰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그렇게 많이 주셨는데도,
우리는 이 예배당을 나서는 순간 다 잊어버린 채, 예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직분을 맡기면,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짜 진짜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나는 진짜 자격이 없어요.‘ 하고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혹 이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는 항상 옳고, 자기 믿음이 제일이라고 떠드는 교만한 사람들도 문제지만,
자기는 부족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줍잖은 겸손한 사람들은 더 큰 문제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의 허물과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와서,
"저에게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하면서 주님을 붙드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뻔뻔스럽게 주님 앞에 나아와서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사람이 뻔뻔스러워집니다.
술김에 목사에게 전화 걸고도, 주일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여기 그런 분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양심에 찔림 받지 마십시오. 어떻든 뻔뻔합니다.
길에서 목사에게 인사하다가, 윗주머니에서 담뱃갑이 뚝 떨어졌는데도 교회에 나옵니다.
이 얼마나 뻔뻔스런 사람입니까? 그러나 사실 따지면 우리 모두 다 뻔뻔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제일 뻔뻔한 사람이 목사입니다. 목사가 거룩하게 사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못해요.
목사인 내 속에 똑같은 연약함이 있고, 똑같은 교만이 있고, 똑 같은 죄성이 있습니다.
여러분보다 저는 열 배, 백 배 더 뻔뻔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단에 서서,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생각해도 참 뻔뻔해요.
어떤 때는 예배 바로 전에 제 집 사람하고 말다툼을 하고서도, 강단에 서서 ‘사랑해요,
축복해요.‘ 웃으면서 여러분을 향해 인사합니다. 정말 뻔뻔해요. 어쩜 뻔뻔의 극치입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부족하지만, 모든 죄악과 허물을 덮어주시고,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들어 쓰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면서도 뻔뻔스럽게 계속 설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한 주간 동안 죄 하나도 안 짓고 깨끗하게 살았습니까?
지난 한 주간 내내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다가, 이 주일에 예배드리러 오셨습니까?
그래도 찬송 부를 때 고개 못 드는 사람들, 설교할 때 저와 눈 마주칠까봐 피하는 사람,
그것도 등짝 큰 사람 뒤에 앉아 예배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죄 짓지 않고 살다온 사람처럼 고개 빤히 드는 사람도 생각하면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뻔뻔스럽게 예배당에 나와서 앉아 있고, 저는 더 뻔뻔스럽게 이렇게,
여기서 설교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든 우리가 허물과 죄가 많은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저나 여러분이나 뻔뻔하게 나와 거룩하게,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제일 뻔뻔스러웠겠습니까? 제 어머니에게입니다.
한 예만 들자면, 학교 다닐 때 참고서를 사겠다고 돈을 타서는, 맛있는 것 사먹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저는 엄마한테 또 다시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립니다. 얼마나 뻔뻔합니까?
우리가 어머니한테 그렇게 잘못을 하고도 뻔뻔스럽게 또 다시 돈 달라고 손 벌리는 것은,
제 어머니에게는 은혜가 있고, 용서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알면서도 또 주거든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조금만 잘못해도 뻔뻔스럽게 다시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요?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요. 그에겐 내게 베풀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은, 자기가 비록 불한당같이 잘못 살았고,
매일 주님을 부인하고, 엉터리 같은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품어 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주님께 주일예배, 수요예배에 뻔뻔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하나님 사랑과 용서가 있기에, 그래도 나아오는 뻔뻔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용서가 있음을 믿고, 그래도 이렇게 예배시간만 되면 뻔뻔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을 보시면서, 우리 주님은 속없이 좋아하십니다. 그냥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래도 내가 너를 축복한다.’ 믿습니까?
+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한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는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아멘!
세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믿음’ 입니다.
오늘 본문 7절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단순함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이시라" 말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릴 때, 앞뒤 생각하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던 일 조차도, 그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제자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복잡한 것도 전혀 따지지 않고 뛰어내렸습니다.
오직 "주님이시라" 소리를 듣고 그냥 뛰어들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귀중하게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지 못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계산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이것도 따지고 저것도 따집니다. 이 일만 해결되면 헌신할께요. 나는 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믿지 않아서, 지금은 먹고 살기가 좀 바빠요. 아직 초신자인데요. 뭐, 이유도 참 많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라" 외침에 앞뒤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앞뒤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믿음을 가진 베드로 같은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 요한과 베드로 두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 뛰어 갔습니다. 젊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요한이 먼저 무덤에 도착했지만, 무덤 속에 먼저 들어간 사람은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무덤 안을 슬쩍 보았지만, 뒤따라왔던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그냥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먼저 뛰어가서 그 앞에 죽치고 있는다고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게 아닙니다.
늦게 가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일찍 와서 슬쩍 빠진 사람은 앞뒤 계산할 것 다하는, 계산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봅시다. 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시라!" 는 요한의 외침을 듣고 먼저 바다에 뛰어든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누가 먼저 봤느냐 하는 것보다, 몸을 던져 주님께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는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는 사람은 바로 믿음의 순종이 있고, 믿음의 행동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담되지만, 교회에서 새벽기도 나오라 하면 “아멘!” 하고서 그냥 나오면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머리를 굴려가며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새벽기도회 나가면 죽지 않을까? 몸에 병나지 않을까? 혹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까?'
‘내가 새벽기도회에 나가고도 다음날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마 졸다가 일을 그르칠꺼야.’
이런 잡다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먼저 봤지만 뛰어들지는 못하는 요한과 같은 사람입니다.
믿음이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고, 행동하는 순종이 곧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우리는 교회의 손과 발과 같은 지체일 뿐입니다.
몸의 지체가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생각은 머리가 합니다.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님 혼자 많이 하시라고 하고, 지체인 우리는 그냥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 말로는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머리가 되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고 말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부흥하는 교회, 하나님이 역사하는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머리로부터 나오는 모든 하나님 말씀에 지체인 성도들이 순종하고 행동합니다.
바로 그런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뇌성마비란, 뇌의 이상으로 인해 뇌의 명령과 몸의 행동이 제각각인 병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이 명령 내렸는데, 몸이 그대로 안 따라주면 뇌성마비에 걸린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대로, 몸의 지체인 성도들이 빠르게 움직여주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먼저 보기만 하고, 먼저 말만 하는 요한 같은 성도가 아니라, 우리의 참 머리되신 예수님의,
모든 명령을 듣고, 그 명령대로 순종하는 베드로와 같은 성도가 되어야 참 성도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성도가 바로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믿음’ 을 가진 성도입니다.
네 번째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믿음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믿음’ 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주님을 떠나서 밤새 고기를 잡았는데, 이 모두가 헛수고였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비유를 통해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5)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서도,
자신들이 무언가 이를 수 있으리라는 큰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밤새 그물을,
내렸으나 저들은 아무 열매도 맺지를 못합니다. 그들이 주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열매가 없다면, 그때는 하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주님! 내가 지금 주님의 방법으로 일하고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열심히는 뛰고 있는데도 자신에게 삶의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고,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자신이 지금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서 있는지, 주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 방법으로 주의 일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 방법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한 채,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즉시 돌아와야 합니다.
내 방법으로는 하룻밤이 아니라, 평생을 그물질 한다 해도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고는 아무런 소득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주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큰 차이가 아닙니다. 배의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하는 차이입니다.
세상은 열심히 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승리가 임합니다.
우리는 "일주일 중에 하루면 돈이 얼만데" 하는 계산에서 죽도록 뛰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주일도 없이 하루 삼교대 하면서, 부지런히 일하여 제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경기 침체가 오면서 물건이 안 팔리고, 재고는 쌓이고, 부도가 나서 망하고 맙니다.
참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실패가 됩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아멘! (사 55:8,9) 그러므로 어리석은 인간의 판단을 따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옳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그것이 열매를 거두는 길이요,
주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할 때, 순종함이 많은 물고기를 잡는 축복의 길입니다.
약 40년 전에, 우리가 잘 아는 '모나미' 라는 필기용품 제조업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쟁이 너무 심해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있지요?
우리는 시험을 당하면 어떻게 합니까? 작정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작정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사업하면서 하나님께 범죄한 게 너무 많더랍니다.
첫째, 주일성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개했답니다. "이제부터 주일성수 하겠습니다 "
둘째, 돈을 많이 벌면서도 십일조를 안 했습니다. “이제부터 철저히 십일조 하겠습니다."
셋째, 새벽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 “이제 철저하게 새벽 기도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결심하며 기도한 다음 요한복음 21장 1절 - 14절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는 말씀에 은혜받고,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이제부터 '모나미 153' 이라는 볼펜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이 볼펜이,
모든 사람의 손에, 아니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다 들려지기 원합니다." 아멘!
기도하는 가운데 목표를 크게 잡자해서 "50억 자루 팔리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망해 가는 회사가 볼펜 50억 자루를 파는 게 가능합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하고 내려와서 ‘모나미 153 볼펜’ 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도 이 볼펜을 한 번씩은 써봐서 알지만, 그 볼펜이 보기에 예쁩디까, 투박합니다.
제가 볼 때는 모나미 153 볼펜보다 디자인이 훨씬 멋지고, 예쁜 볼펜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쁜 볼펜보다는 ‘모나미 볼펜 153’은 아직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대로 50억 자루 이상이 팔렸답니다. 경제적 분석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복입니다. 왜 우리가 모나미 153을 씁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니 씁니다. 기도로 만든 볼펜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 지혜를 가지고, 내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늦게 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밥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당장이라도 새벽기도를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실 때, 베드로가 주님 방법대로
순종함으로 체험했던 주님의 능력과 축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체험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목적이 분명한 믿음,
목적이 분명한 삶’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뻔뻔한 믿음’ 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또 하나의 믿음은 ‘전혀 계산하지 않고 뛰어내리는 믿음’ 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는 믿음’ 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일어난 엄청난 기적, 153의 주님의 능력과 축복을,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체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