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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절 네 번째 주일예배 / 3월 30일 주일.
+ 제 목 :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유의 복음입니다."
+ 본 문 : 히브리서 12장 1절 - 2절 (신약 367쪽)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2025년 고난주일은 4월 13일이고, 부활주일은 4월 20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부활주일 전날까지 40일 동안의 사순절기는,
3월 5일부터 시작이 됐습니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순절기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유의 복음입니다!” 라는 설교제목으로 나누겠습니다.
+ 옆에 분들과 인사합시다. / “0 0 0 을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 다함께 선포합시다. /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유의 복음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무엇에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음을 겪게 됩니다.
서로가 부딪히고, 서로가 피해를 입고, 오히려 서로가 부자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회의체를 만들고 거기서 법이 생겨났고, 규칙을 만들어 규제를 합니다.
그러나 그 법이 인간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율법도 그래서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그러나 율법 앞에서 인간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로마서 7장 9절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율법은 내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인간은 이 땅의 자유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오히려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자기 생각대로 자유를 만끽하며, 부푼 꿈을 안고, 자신의 삶을 이루어보리라고,
집을 떠났지만, 오히려 돼지보다 못한 인생으로 추락한 후에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얻으려 할수록 더욱 목을 조여 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중심의 인생관으로 치우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을 잃게 되고, 마침내 자기는 무인도의 홀로 남은 사람과 같이 됩니다.
그것은 결코 참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상실한 자유입니다.
에덴동산으로 가보겠습니다. 뱀으로 등장한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합니다.
너희에게 보다 놀라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해보지 않겠느냐고,
미혹합니다. 결국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의 끈끈한 관계를,
파기해버리고 맙니다. 그 결과 고통과 사망으로 가는 자유의 문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유는 허무와 슬픔과 방황과 고통과 죄악과,
사망에 이르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러한 인간의 내면의 소리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로마서 7장 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저 나름대로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보겠습니다.
휴대폰이 제 기능을 하면,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파가 닿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나, 꽉 막힌 지하실 깊은 곳으로 갔습니다.
그때부터는 휴대폰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합니다. 전파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우리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교통하는 수신 상태가 바르게 될 때에, 곧 성령님의 역사 안에 머물러 있을 때에,
비로소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를 가리켜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회복되어야 할 자유가, 이런 것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 사망권세로부터의 자유 / 욕심으로부터의 자유.
소유욕으로부터의 자유 /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 그런데 사실 이 모든 자유는 다 한 통속입니다.
죄와 욕심과 소유욕 등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입니다. 죄의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 중심의 세계에서 피조물 인간중심의 세계로 변화됨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인간이,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데서,
발생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 가치를 잃고,
모든 존재 가치응 물질주의가 앞서는, 소유적 존재로 변형되어 버리고 맙니다.
더군다나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도록 지어진 인간의 삶이, 서로가 경계의 대상이,
되고 경쟁의 대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두려워하는 비극을 낳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습니다. 이것은 참된 자유를 가져온 복음입니다.
십자가! 십자가는 자유의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 1절, 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아멘!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아멘!
이제 우리는 이 자유를 다시 찾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새로 받은 자유는 우리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심으로써, 죽으심으로써,
자신을 온전히 다 내어주심으로써, 그리고 다 내려놓으심으로써 주신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 주신 그 자유를 지켜야 합니까?
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아멘!
이 말씀에서 보면, 첫째로 욕심을 버리면 종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욕심을 가지면 물질의 종으로 삽니다.
권력에 욕심을 가지면 권력의 종으로 삽니다.
명예에 욕심을 가지면 명예의 종으로 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 것을, 친히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참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탐하지 않는 물건은,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내게 무용지물입니다. 여기 1억 원이나 되는 골동품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흙덩이에 불과하게 보인다면 그것에 자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망은 커지고 세상에 대한 욕심은 사라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고, 그는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욕심 부리다가 망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은혜로 출발했다가 욕심으로,
망한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 왕으로 기름 부으려 할 때에, 사울 왕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무엘상 9:21 /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아멘!
사울 왕은 자기는 가장 작다고, 자기는 가장 미약하다고 하던 그가 아닙니까?
그러나 그가 왕으로 있으면서, 욕심을 부렸잖아요. 사울이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보기에 좋은 전리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등장하자,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자, 다윗을 제거하려고 그의 말년을 다 소비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처럼 욕심으로 살면 종이 되고, 은혜로 살면 왕 같은 사람이 됩니다.
솔로몬왕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하나님께 금식하며 회개 기도한 것을 받으시고,
밧세바를 통해서 다시 주신 아들이 솔로몬 아닙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을 높이셨거늘,
그가 왕위에 올라 나라가 크게 번성하자 교만하여지고, 더욱 세력을 확장하려고,
이방의 공주들을 아내로 삼고, 그들이 섬기던 이방신상을 들여와 욕심을 부리자,
하나님이 또한 그를 버리셨습니다. 그 죄과로 나라가 남북으로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모든 욕심을 벗어버리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 옷은 가벼워서 자유자로서 경주하기에 꼭 맞는 옷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아멘!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둘째로 욕심을 버리면 많은 기회를 얻습니다.
경제학 용어에 ‘기회비용’ 이란 말이 있는데, 무엇인가를 얻으려다가,
생긴 손해를 말합니다. 집 없는 사람이 열심히 돈을 모아 집을 샀습니다.
집 밖에 있는 화장실이 불편해 더 돈을 벌어 집안에 화장실 있는 집을 샀습니다.
딸들이 많아 화장실 하나로는 너무 불편해 화장실이 둘 있는 집을 샀습니다.
어느덧 나이는 60세를 넘어섰습니다. 이 사람은 평생 화장실 바꾸는 일만 했습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허망합니다. 화장실 때문에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집 하나를 얻기 위해, 수많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말았습니다.
친구들과 교제하려면 서로 밥도 사기도 하고, 선물도 주고받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은 화장실이 많은 집 사기 위해서, 이 모든 기회를 포기했습니다.
가족과의 시간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왜요? 집을 사기 위해서입니다.
욕심만 내려놓으면 잊혀 졌던 많은 기회들이 찾아옵니다. 삶이 윤택해집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중에 누가 가장 행복하던가요?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작은 일에도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전서 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아멘!
나무가 모든 것을 벗기 시작했을 때, 그 다음해의 푸르름을 약속할 수 있었습니다.
새가 그 뼛속까지 다 비워 가벼워졌을 때, 비로소 하늘을 날 수가 있습니다.
풍랑을 만난 배가 모든 짐을 바다에 버렸을 때, 닻을 내릴 항구를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도한 자기중심의 욕심을 모두 버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있는 수많은 기회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셋째로, 참 자유자는 사랑으로 종노릇할 기회를 얻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아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참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값진 참 자유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자유까지도 다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창조주의 자리에서 피조물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그 값진 자유의 삶을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한 남자 아이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죄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이때 아이는 재판장에게 말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저는 가엾은 고아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우스갯소리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늘과 땅을 웃기려면 먼저 고아를 웃겨라.” 고아란 의지할 자가 없는 가엾고,
불쌍한 아이입니다. 곧 고아처럼 가엾고 불쌍한 사람을 웃게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디든 밝아지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웃고 사는 것이 복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는 날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날입니까?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
누군가 오늘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미워하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그토록 내일이라는 날을 살고 싶어 했던 이들의 절규하는 소리였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데, 누군가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걷고 있습니다.
비를 맞으며 걷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 곁에서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 살다 가신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가 주님 곁에 서는 그날까지,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며,
섬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며,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은혜로 얻은,
참 자유를 누리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마무리기도 / 기도하겠습니다.